[00년이후]평양대부흥운동(리포트)

작성자lsg|작성시간06.05.08|조회수441 목록 댓글 0
 

평양 대부흥운동

- 제 1부 원산부흥운동 -


M. Div. 3/4 이종덕


대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사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물론 이것은 19세기 후반을 주도해 갔던 세계적인 대 부흥운동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처음부터 말씀 연구, 말씀을 깨달은 후에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 그리고 위로부터 내리우신 성령의 임재가 어우러진 걸작품이었다.

이 세가지는 ‘사경회‘라고 하는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아 왔다. ‘사경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채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초기 한국선교사들을 보수(장로교)와 진보(감리교)로 분리해서 보려는 시각이 있으나 적절하지 않다. 적어도 1920년까지는 장, 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개인의 영적각성 운동은 필연적으로 영혼 구령운동(전도)과 사회구원, 선행등과 깊숙한 관련이 있다.

대부흥운동은 민족을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앞에서 구원해 내고 복음화하려는 한국민들의 열정과 부흥을 사모하는 선교사들의 소원이 맛물려 총합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이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1906년 어간에 있었던 원산부흥운동을 그 시점으로 하고 있다.

원산부흥운동은 성경공부와 기도로 특징되는 기도회 기간에 발흥했으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남감리교 의료선교사인 하디 선교사이다.

그는 1901년부터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개척선교사로 3년간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별 무결실하였다. 그는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절호의 선교 기회를 잡았음에도 그 결실이 없음을 인해 낙망하고 심한 패배감에 빠져 있었는데, 1903년 8월에 그 원인을 자신의 ‘교만과 강퍅함, 믿음이 부족‘한 연고라고 처음에는 선교사들 앞에서, 후에 한국민들 앞에서 낱낱이 고백하고 눈물로 참회하고 회개하였다. 이와같은 죄의 고백은 곧 주변에 영향을 미쳤고, 이렇게 발흥한 부흥운동은 “강력한 죄의 회개로 특징지어졌다.“

이 일 후에 하디는 당시 무디와 함께 활동하고 있던 전도자인 프란손이 입국해 가질 전도 집회를 준비하면서 매일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 모임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최종손을 비롯한 사람들이 하나씩 구체적인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당시 그 지역에서 양반 가문으로 널리 알려진 젊은이도 있을만큼 죄를 고백하는 모습은 전에 없는 새로운 영적 분위기를 태동시키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해 10월 프란손이 주관한 연합집회가 끝나고도 하디는 계속 영적 대각성 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이 회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은 계속되었고, “그들이 전에는 종교를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경험으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공통적인 간증이었으며, 고백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하디는 일련의 집회가 끝난 후 전체 교인들을 일곱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에 조사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사경회가 끝난 후에는 권서인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회심의 결과로 생기는 금전들은 용서를 한 후에 그것을 주님께 드리고 그 비용을 권서인 지원금으로 사용하였다.

윤승근이라는 사람은 하디보다 먼저 성령의 체험을 하였고, 하디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의 실패 원인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끈 사람이기도 하다. 하디의 회심으로 시작된 영적 대각성운동은 원산 전역으로 확산되어갔고, 한국민들에게 만이 아니라 함께 사역하던 선교사들에게까지 영적 각성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케 하였다.

이상의 기술에서 하디가 원산부흥운동의 발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과, 원산지역의 교회들이 뚜렷한 영적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 프란손의 입국과 그의 전도활동이 하디로부터 시작된 영적 각성운동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시키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디는 1904년 2월에 자신이 실패하였던 강원도 지경대 교회로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갔다. 그곳에서 12일 간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한 그는 이 민족을 영적으로 깨워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붙잡고 서울과 개성으로 돌아왔다.

개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죄용서를 받고 거룩한 삶을 시작했으며, 몇몇 사람은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당시 불의한 일들로부터 교회의 힘을 이용해 보호받으려는 의도로 교회를 찾았던 사람들까지 회심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하디는 서울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집회를 인도하였고, 가는 곳곳마다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대단히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부흥집회가 점점 확대되면서 간간이 사용되던 부흥회라는 말이 신문(신학월보)에서 특별사설로 다룰 만큼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하디는 그 부흥의 불씨를 평양으로 가져왔다. 평양에서는 그곳 교회뿐 아니라 특히 함께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 공동체에 새로운 영적 갱생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 집회는 평양교회로 하여금 자립(자치/자급)과 자전의 정신을 더욱 강화시켜 한국인 전도자들을 돕기 위한 십일조와 성미 운동이 전개 되었다.

하디는 인천 제물포에서 집회를 인도하였고, 그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님이 이 백성 위에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실 것“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마음에 새기면서 매일 기도회를 가졌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그 결과 부흥 운동이 한국인들 가운데 시작 되었다(75)

하디는 그가 안식년을 지키기 전에 이처럼 여러지역을 돌면서 영적 각성운동의 불을 지폈다.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로 나왔으며, 회심을 체험하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이 일의 주체는 성령이었고, 영적 각성은 한국민의 복음화를 위한 선결 조건임을 선교사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급박하게 진행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다가오는 위기감은 한편으로 한국 민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병립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더욱 간절히 민족을 위해, 개개인의 영적 각성을 위해 기도하였다. 민족복음화만이 이 민족을 살릴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이 구원받은 이들 가운데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디가 안식년으로 휴가를 떠난 이듬해인 1905년 개성의 남감리교회가 부흥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설교에서 특별히 강조된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개인적인 양심 문제“며 “뚜렷한 중생의 교리와 성령의 증거“가 뚜렷하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집회마다 참석하는 이들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이들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영적 각성 움직임은 고도 강화에서도, 원산에서도, 남자들의 집회에서도, 여자들의 집회에서도 어디에나 일어났는데, 그 이전까지는 개인적인 성향을 띠던 영적 각성이 1905년 들어서면서 집단적인 성향을 띠면서 교회갱신으로 이어졌다. 특별히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공부를 통해 세례 지원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위한 특별 집회가 열렸다.

이 부흥운동은 양적인 성장을 가져다주었고, 개개인에게는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자의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또 하디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부흥운동이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과 전도부인을 비롯한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동참하는 하나의 각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한 한국은 급속히 일본의 통치에 잠식되었다. 공직자들의 부패, 열악해진 경제 현실, 사회적 불안정을 이유로 이민을 가는 이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새로운 선교적 과제를 가지고 고민하였다. 정치적인위기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곳은 교회이며, 그래서 교회가 그 해답을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 전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하였다.(98)

민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 앞에서 민족의 재난은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민족복음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현실이 암울하지만 복음이 진작을 가져오는 계기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실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위기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회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모국의 헌신적인 지원과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이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뿐만아니라 이 일을 주도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한국인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방법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학교에서 기독교의 참 진리를 가르치고, 참 애국주의를 고취시킨다면 가능하리라고 확신하였다.

선교사들은 감옥에 갇힌 민족지도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성경과 소책자와, 찬송가를 들려주고 나왔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수 많은 양반들의 회심을 가져왔다. 이승만은 옥중에서도 기독교를 전하는 자가 되었다.

소망이 없어진 한국 민족에게 유일한 소망은 - 강한 에집트, 바벨론을 들어 쓰시고, 약한 이스라엘 노예들을 통해 세상의 주관자로 선포하시는 하나님처럼 - 강한 일본을 들어 쓰시며, 어린 노예와도 같은 한국을 통해 하나님됨을 드러낼 것이라는 긍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기독교인의 숫적 증가만을 놓고 보아도 확인되는 사실이었다.

선교사들은 모국에 이런 소식을 전하면서 "지금 아니면 결코“(now or never)라는 구호를 외치며, 지금 돕지 않으면 한국을 영원히 도울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이 생각은 한국의 젊은이들도 가지고 있었다. 구국기도회며, 교파를 초월한 기도 모임이 생겨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수업을 멈추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여학생들이 생겨났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모든 학생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젊은이들 가운데 전에 없이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축복하셔야만 한다는 기독교 민족주의 사상이 넘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23)

위기에서 한국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장 약속된 길이며, 모든 면에서 볼 때 지금이 그것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라는 판단아래 장감연합공회는 구정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제히 부흥회를 열도록 결의하였다.


장감연합공회는 구정 부흥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각 신문의 글을 통해서, 또 선교사들에게 ‘특별한 노력을 요청‘하는 글을 통해, 집회전 기도회를 통해 일을 추진하였다. 장, 감의 대표격 교회가 서로 강단교회예배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이번 집회의 한가지 특징은 성경을 사회자와 회중이 먼저 봉독하고 따라 읽는 형식으로 말씀을 선 이해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예배 바로 전 15분간의 기도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서 열려진 집회임을 감안하면 대 성공이었다.

서울 지역보다 더 크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곳은 평양과 선천이었다. 양적인 부흥을 가져왔고, 평양 시내에는 주일날 수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는 것을 목격할 만큼 영적 각성은 대 사회적인 개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선천에서는 남녀노소가 먼 길을 마다않고 모여들었고, 전도를 위해 날연보를 작정했다. 숫자뿐 아니라 헌금이 늘어난 것으로도 질적 성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연합 집회는 개성에서도 실시되었고, 원산에서는 영적 각성의 분위기가 꾸준히 나타났고, 부산 대구를 비롯해서 교인들의 고속 성장세는 어느곳에서나 감지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이 바뀌어갔고,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1906년 구정부터 계속되었던 집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영적 각성 운동이 확산되어 갔고, 가을이 되면서 부흥운동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원산, 평양, 서울 세 곳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원산에서는 하운셀이, 평양에서는 하디가, 그 후 열린 서울 사경회에는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위원인 하워드 존스톤이 웨일즈와 인도에서의 성령 강림에 대한  이야기를 증언했다.

그 후 장감 연합공회 제2차 총회가 열려 선교지 분할협정등의 회무를 순조롭게 마쳤다.

하워드 존스톤은 이후 열린 평양 장대현교회의 특별사경회에서 인도와 웨일스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충만을 받은 사실과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음을 증언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길선주가 놀라운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목포에서는 프레스톤의 인도로 유례없었던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부흥회가 열렸다. 이 일은 1900년에 개설되었다가 잠정 폐쇄되었던 목포 선교부가 프레스톤이 부임하면서 다시 선교가 재개되었고, 재개되자마자 그곳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또한 이북에 치우쳐 있던 부흥운동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저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목포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인 11월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도, 황해도 재령 도 사경회에서도, 황해도 진남포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1906년 성탄절 무렵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적으로 일어나자 크리스마스 시즌에 갖던 친목행사를 중단하고, 1907년 1월에 있을 사경회를 준비하는 기도 모임을 정오에 갖기로 결의하고 장, 감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기도회를 하였다.

질문들)

1. 동학교도의 기독교인 박해의 정도?(26 쪽)

2. 섭리로만 설명되는 것인가?(77 쪽)

3. 진정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가?(86 쪽)

제6장 평양 대부흥운동의 발흥(205)


1907년 한국 교회에는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 이후 가장 강력한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고통당하던 시대, “옛 기초들이 흔들렸고, 옛 질서들이 사라지고 있었”던 그때, 교회는 시련을 통과하면서도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고 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그 영향이 사회 전반에 미치기 시작했다.


1. 평양부흥운동의 발단(207)

평양부흥운동의 발단은 1907년 1월2일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사경회(the winter Bible Training class for men)였다.

평양사경회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는 기도와 간구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경회는 “평안남도도 사경회”였기 때문에 사경회 중에서도 비중 있는 집회였고 이 사경회를 인도하는 주강사도 이미 하디 집회를 통해 은혜를 경험한 이길함 선교사였다.

사경회는 관례에 따라 성경공부와 기도에 주력하였으며, 오후에는 평양 각지로 흩어져 전도하고, 매일 저녁 특별 전도 집회가 열렸다. 장소문제로 남․녀․학생 분리해서 집회를열었고 1월6일부터1) 시작되었다. 1월6일 주일 저녁 집회가 끝날 무렵에 처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저녁집회에는 모인 이들 모두를 통회와 회개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공개적인 죄의 고백이 있었다.

1월 12일 토요일 저녁 집회는 한 주간의 집회 중에서 가장 은혜로운 집회가 되었다.

방위량 선교사의 설교후에는 적지 않는 사람들이 죄에 대해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했다.


2. 평양의 오순절, 그 첫째날(214)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였다. 비록 그곳에는 너무도 많은 기도 소리가 있었지만 전혀 혼란은 없었다. 거기에는 하나의 통제된 완벽한 조화가 있을 뿐이었다. 모인 회중이 옆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전심을 다해 드리는 이와 같은 통성기도는 평양대부흥운동을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들이 볼 때 통성기도는 기도에 간절히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너무도 효과적인 기도 방식이었다.

너무도 분명한 한 가지 사실, 즉 그 현장에 있던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증언하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고 회개하는 회개기도가 모인 무리들 가운데 끝없이 회오리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모임은 기도와 고백과 눈물로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철저한 회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염원, 이 민족의 장래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민족적 신앙애가 한데 어우러진 간절한 기도였다. 저녁 여덟 시부터 이튿날 다섯 시까지 계속되었다.

선교사들은 “피차 죄를 고백”했고 한국 교회는 “일본인을 미워하는 생각을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를 자복했던 것이다.  방위량 선교사가 훗날 증언한 대로 철저한 회개와 그 후에 찾아오는 죄용서의 기쁨은 평양대부흥운동의 특징이었다.

성령의 역사에는 모종의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여기에 모인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죄를 공중앞에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감동에 따른 통성기도였다.

다른 일각에서는 부흥운동을 지배하는 감정적인 요소 때문에 그 결과가 부정적이지 않을까 적지 않게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조지 래드(G.T.Ladd)는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도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이 한국인들의 “비정상적 심리적 성품”에서 나온 것으로 혹평했다. 그러나 통성기도와 부흥운동을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군중심리 현상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정확한 판단이 아니다. “부흥운동의 결과 삶이 변화되고 그러한 변화가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부흥운동에 대한 섣부른 전면적인 비판을 삼가도록 만들었다.”

의심할 바 없이 평양대부흥운동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복음화시키시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3. 평양의 오순절, 그 둘째날(228)

모든 외국인들은 그 다음날 정오 한자리에 모여 한편으로는 전날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감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지막 집회인 그날 저녁 화요집회에는 어제보다 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화요일 저녁 집회는 전날의 전도 집회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은사받은 한국인 설교자” 길선주장로의 설교가 있은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거의 600여 명의 사람들만 예배실에 남았다. 길선주가 회개와 고백을 촉구하자 “시내산의 섬광”이 그들 위에 임했으며, 성령의 역사는 전날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만 더 강하게 나타났다.

장로들과 선교사, 교회의 지도자들의 고백은 마치 기름에 불을 던지듯이 그곳의 집회를 회개의 도가니로 만들어 주었다. 그(김장로)가 고꾸라지자 온 청충 가운데 갑자기 회개의 울음 바다가 되어 너나 할 것 없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울고 또 우는 것이었다. “이 영감의 순간에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에 모인 군중들에게 세례 요한처럼 그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하였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길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죄악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회의 장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무시무시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은 옳고 진실되고 거룩하다는 감명을 주었다” 평양부흥운동은 그야말로 내면에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드러내는 영적 각성운동이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은 옛 생활에서 돌아서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했고 그들 중에 몇은 수년 동안이나 그렇게 했다.“


제7장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는 성령의 불길(241)


성령의 역사가 사경회가 끝난 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장대현교회에서, 여자 고등성경학교에서, 장대현교회 남자학교에서, 여자 보통학교에서, 그리고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연일 매 순간 계속되었던 것이다.


월요일의 놀라운 저녁 집회 때 그 현장을 주도했던 그레함 리 선교사가 장대현교회 수요예배를 인도하였다는 사실 또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재했던 장소가 바로 장대현교회였다는 사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다는 사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 참석해 그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회개 역사를 목도한 장대현 교회 주 장로가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고대하는 장대현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했다는 이 모든 사실이 사경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계속되게 만들어 주는 데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 놀라운 부흥을 가져다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백대로 참된 각성운동은 사람들의 인위적인 작품이 아니라 주권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249)


여학교와 여성들에게 임한 오순절 역사(250)

평양시내에 분산되어 따로 모임을 가지고 있던 여자 성도들의 모임에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성령의 역사가 여자 성도들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1월 17일 목요일 저녁부터 1월 19일 토요일 저녁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여자들을 위해 그 오순절 역사의 현장, 장대현교회에서 집회를 갖기로 했던 것이다. 1월 17일 목요일 저녁과 18일 금요일 저녁 집회에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나 회개운동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19일 토요일 저녁 성령의 권능이 놀랍게 임재해 여인들이 죄를 통회하고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 남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죄악에 대한 탄식과 통회와 비탄에 젖은 울부짖는 역사가 재연되었다.

너무도 판에 박힌 것 같은 통회와 자복과 눈물과 회개의 역사는 평양 대각성운동의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유일한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마치 정치적인 좌절로 인한 카타르시스적 현상이라고 치부해 버릴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오랜 이교 전통 아래 있었던 한국에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드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 회개의 역사 앞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도, 피부색의 희고 검음도, 지식의 높고 낮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경회 이후 장대현교회 첫 주일 오전예배(252)

사경회 이후 장대현교회 첫 주일 오전예배시 길선주 장로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악을 통회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비결인 것을 생생하게 동료 한국인들에게 온몸으로 보여 주는 퍼포먼스를 설교로 하였다.

“통회 후에는 기쁨, 대단한 기쁨,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지금까지 누구도 꿈꾸지 못한 기쁨, 그것을 체험한 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따랐다.” 장대현교회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거의 연일 계속되었다.


2. 2월의 장로교 남녀 사경회(255)

그후 구정(2월 13일) 첫 두 주간 동안 장로교회 남녀 사경회가 열렸다. 어느 때의 사경회와 마찬가지고 이번에도 진행 일정은 거의 유사했다. 성령의 역사가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선교사들은 처음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 둘씩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기 시작했다. 모인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그들은 새로운 기쁨, 새로운 힘, 장래의 생에 대한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돌아갔다.


3. 평양 시내 감리교내의 성령의 불길(260)

장감을 초월한 성령의 역사는 평양에서 모인 일련의 사경회와 지도자들을 위한 모임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나,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역동적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했던 것처럼, 능력을 입은 이들을 통해 각자의 고향에서 성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감리교의 경우 선교사들과는 달리 평양 감리교 한인 지도자들은 그것을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생각2)하였지만, 그 후 계속된 교회내의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을 목도하면서 그 태도가 달라졌다. 평양의 놀라운 영적 각성은 인간의 성품과 삶을 변화시켜 주었고, 그들의 가치관을 세상적인 데에서 더 높은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었으며, 따라서 교회가 과거보다 더 복음 전도에 진력하기 시작하였다.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자 나타난 이후 1907년 2월 10일, 곧 주일에 성령께서 평양 남산현교회에 임했다. 리은승 목사는 신학월보에 보고하면서 그날이야말로 “맛당이 평양교회긔 머리에 긔록”만큼 중요한 날이“라면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회개와 통회 후에 그들 모두는 그 이전에 가졌던 용서의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격과 환희를 체험했다.

이 가운데 감리교 사역자들을 위한 신학회 수업이 진행되었고,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가 평양 전역과 장로교로부터 감리교로 교파를 초월하여 놀랍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시도들과 박해가 교회 전체나 가정과 사회에서도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해가 있으면 있을수록 복음에 대한 열정은 더욱더 강해졌고, 성령에 대한 갈망은 더욱더 높아만 갔다.


4. 미션 스쿨에서의 성령의 역사(271)

미션 스쿨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학생들과 그들을 가르치던 선교사들에게서 함께 나타났다. 부흥운동이 저변 확대되면서 중보기도는 부흥 집회의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첫째, 주간 기도회가 실제적인 기도회로 변했다. 둘째, 거의 모든 학생들이 충실하게 아침과 저녁 개인 경건회를 계속해서 갖고 있으며, 전체 학생 3분의2이상이 학교의 기도실을 찾는다. 셋째, 대규모의 학생들이 십자가의 열정으로 불타는 전도사가 되어 시내와 인근의 시골 교회들에 부흥의 불길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몇몇 학생들은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부흥의 불길을 전하였다.

경건생활과 기도와 전도로 집약되는 변화 중에서도 전도는 부흥운동이 가져다준 가장 두드러진 변화였다. 평양에서의 부흥운동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희망 없는 지역”으로 알려진 평양시를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찬 소망의 도시로 바꾸어 주었다.


제8장 전국으로 확산되는 성령의 불길(289)


“부흥운동은 1월부터 6월까지 계속되었고, 평양 시내 교회를 새롭게 만든 후 시골과 멀리 남부까지, 그래서 한반도 전역의 모든 선교부(mission station)들이 부흥운동의 영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확산되었다”  확산의 수단은 첫째는 평양에서 열린 일련의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이 자기 고향 교회에 돌아가 부흥운동을 확산시킨 경우, 둘째는 평양 등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난 소식엘 자극을 받아 자신들이 맡고 있는 지역에서도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는 것을 통해 일어난 경우, 셋째는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부흥 집회를 인도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된 경우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평양에서)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현현하시고 교회의 권능,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 주셨다. 리(Lee)는 선천으로, 헌트는 대구로, 소안론(Swallen) 은 광주로, 길 장로는 의주와 서울로 달려갔다. 성령의 임재는 교회에서 교회로, 한 선교부에서 다른 선교부로 확산되어 마침내 온 나라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현현을 목격하였다.


1.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3)의 등장(294)

길선주 장로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길선주는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의 한 독실한 유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7세부터 16세까지 엄격한 한학교육을 받은 길선주는 관직과 상업을 전전하다가 도교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로 회심한 후 기독교에 전심으로 헌신하였다.

다양한 종교적 편력과 놀랄만한 집착력을 가진 길선주는 급기야 시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좌절과 실망가운데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한의학 공부에 몰입하여 한약방을 평양에 개원하게 되었다.

김종섭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는 아내가 읽어주는 천로역정을 들으면서 회심을 경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친구들을 전도하였다.

28세 되던 1897년에 이길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평양 동서문교회의 영수가 되어 결국 1902년 한약방을 포기하고 주의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07년 최초 7명의 평양신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다.

1907년 9월 한국에 최초로 조직된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0월말에는 장대현 교회목사로 장립받았다. 그 후 장로교회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선교사 중심의 교회를 한국인 중심의 교회로 전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 평양 시내를 넘어 전국 교회로 확산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길선주의 역할이 컸다. 하디 선교사가 평양부흥운동의 발화자였다면, 그 부흥운동을 하나의 운동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포문을 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길선주였다. 길선주는 가능한 전국 어디에나 가서 말씀을 선포했다.


2. 길선주의 서울 부흥회(302)

서울 집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역사가 나타난 이후 바로 이어 열렸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부흥운도을 사모하는 영적 분의기가 한충 고조되어 있었다. 부흥운동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이장직이나 서울 지역의 일부 감리교 목사들조차도 그가 이너도하는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은 후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길선주가 인도하는 일련의 서울 전도 집회에서 1,200명이나 결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길선주의 서울 집회가 얼마나 놀라운 집회였는가를 말해 준다. 서울에서의 대부흥운동은 서울 시내 교회는 물론 서울 주변의 교회들에게도 적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서울보다 평양근교의 지역인 선천, 해주, 영변, 재령등에서도 영적대각성 운동이 일어났고((308) 각지역마다 기대 이상으로 교회가 급속하게 조직되었고, 남녀 초등학교가 학생들로 넘쳐 났으며 신학생들도 늘어났다.


4. 대구에서의 성령의 역사(315)

평양의 소식을 들은 대구의 선교사들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자신들의 겨울 남자 사경회에서도 “평양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l 열망하면서 “매일 기도회로 모였다.” 그렇게 매일 열심히 기도회로 모였는데도 사경회 중반이 지나도 특별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자 선교사들은 “특별 기도회”를 계속 가지면서 사경회가 마치기 전까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 아침에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인습적인 방식이 성령의 임재를 촉구하기보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는 교훈을 얻고 그와 같은 노력을 포기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겼을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심령에 나타난 은혜로운 역사, 죄로부터의 교회의 정결, 새로운 영적권능의 현시는 지난 1년 동안 대구 지역을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1907년 한 해 동안 “선교지는 영적으로나 수적으로 모두 놀랍게 성장했다.


5. 개성,강화,제물포에서의 성령의 역사(321)

3, 4월 들어 성령의 역사는 대도시를 넘어 시골 구석구석에까지 확산되어가기 시작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동참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선교지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과 막 태동하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비전과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마치 고린도교회처럼 분쟁이 끊이지 않아 선교사들에게는 참으로 골치 아픈 교회로 치부되었던 공주교회에도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임하였다.(327) 성령의 역사로 인한 통회의 현장에서의 죄의 고백이 결코 오늘날 말하는 가십거리로 변질 되지 않고 서로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바로잡아 주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통해 성령께서 어떤 형태의 죄악들과도 끊도록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하고 목도했던 것이다. 그것이 당시 한국인이라면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치러야 할 신앙인의 대가였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섬겨오던 조상숭배를 끊어야 하고, 정상적인 결혼 관계가 아닌 모든 관계들을 완전히 청산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전통 문화와 기독교와의 갈등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였다.(335)

춘천 지역 북감리교 선교 구역은 러일전쟁의 발발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이곳에서 더욱 부흥의 열기가 달아올랐던 지역이다. 전쟁의 발발은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팽배시켜 주었으나 선교사들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기 때문에 이들은 선교사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190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전국 곳곳에 일었던 대 부흥운동의 열기는 이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도는 약했어도 그 후 1908년에 들어서면서도 부흥운동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1907년 후반과 1908년에 들어서면서 특정인들이 아닌 평범한 교회 지도자들, 곧 조사나 장로들이 인도하는 가운데서도 성령의 임재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한국인들에 의한 성령의 역사는 부흥운동 기간 동안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부흥운동에서 이제는 한국인들이 참여하고 인도하는 부흥운동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부흥의 불길은 곧 한반도를 넘어 이웃 나라 중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8. 중국으로 번져 나간 성령의 불길(340)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은혜의 역사를 친히 목격하기 위해 만주에서 내려왔던 2명의 중국교회 지도자는 길선주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고 만주로 돌아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곧 만주로 확산되어 가 그곳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평양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회개와 영적각성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만주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특별히 중국내지 선교회의 여러 지부나 선교회 협력 단체들로 확대되어 소위 대중 부흥운동으로 여겨지는 놀라운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게일의 말처럼 그 부흥운동의 현장에는 장로교의 예배 모범도 감리교 교리문답도 없었고, 또 그것이 부흥운동의 요인으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모든 부흥운동“은 ”지속적인 기도“후에 나타났으며, ”시간과 장소의 필요“에 의존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였다.


제9장 대부흥운동과 자전, 자립(346)


부흥운동을 통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한국 교회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도열이었다. 부흥운동은 기성신자들의 영적 변화와 영적 각성을 낳았고, 그들의 영적 각성은 다시 자전과 자립으로 이어졌다.


1. 선교사들의 구령에 대한 열정(347)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순회전도를 모든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이해했고, 이것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원리에도 명문화되었다. 이들은 직접 선교는 물론 의료, 교육, 문서 선교 등 모든 선교활동에서 복음전파를 지향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907년 가을 선교사들은 한국인 남성과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주제로 놓고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때 가장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인 한국 남성의 복음화와 여성의 계몽이었다. 한국 남자들에게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성령충만이고, 여성들에게도 역시 같은 요청이 절실하다고 결론지었다.

선교사들은 이 일을 위해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였고, 그들의 건강이나 가족을 돌보지도 못한채 진력을 다해 사역하였다. 언더우드, 무어, 전킨 등 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선교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2. 한국인의 전도열 : 자전 실천(366)

부흥운동과 사경회는 처음부터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부흥화와 사경회는 참석한 기성신자들에게는 영적 재충전의 기회였고, 주변의 믿지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처럼 부흥운동과 복음 전도는 항상 나란히 병행되었다. 각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 마지막 날에 참석자들은 주변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시간을 드리겠다는 전도 서약, 날연보를 작정하였다.

처음부터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몫이며 자신들은 단지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과 이 일에 있어서 협력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자전의 노력은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부터 수용되었다. 사경회 기간 뿐 아니라 사경회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실천에 옮겼다.

부흥운동을 전후해서 한국교회에 복음 전도열이 강하게 나타나자 선교사들 가운데는 복음 전도에 더욱 진력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복음을 접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국인들이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형제와 친구와 이웃이었다. 가부장 제도권의 사회 속에서 가장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모든 다른 가족들이 가장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많았다.


3. 처음부터 실천한 자립(381)

한국교회 부흥의 특기할 점은 주일성수에 대한 부분이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은 마땅히 - 반드시 - 지켜야 할 중요한 신앙의 도리라고 가르쳤다.

한국 선교 초기부터 모든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4)을 엄격히 고수했으며,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완전히 자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따라 청지기 정신에 기초한 믿는자들의 헌신은 네비우스의 자립, 자치, 자전의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시행되었고,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지도자들은 어떠한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전과 자립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계속 접촉하기 위해 조사가 필요하지만 복음 전도와 전도사들의 사례, 새로운 선교지의 복음 전파 사역, 교회의 신축, 증축에 소요되는 비용 등은 한국 교회에 그 책임을 맡겼다. 또 이 자립정신은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와 새문안 교회에서부터 실천에 옮겨졌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성장원인을 분석한 여러 편의 글에서는, 청일전쟁, 전통종교들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이 한국 교회의 성장에 기여했지만, 성장의 근본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라고 말하였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단순히 네비우스의 3자 원칙이 아니라 이 원리를 가능케한 원동력, 곧 네비우스 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철저한 성경공부 곧 성경강조정책에 있다고 간파했다.(393)


질문들)

1. 네비우스 선교 방법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 - 일부의 개념과 방법론을 차용한 것

2. 네비우스 방법에 의한 교회부흥이 아니라 이미 자립, 자전, 자치의 원칙 아래 기초를 다져가던 교회의 모습

3. 선교사들이 사역할 수 없었던 시기에서부터 복음전도와, 교회설립 등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었음.

제10장 대부흥운동과 교회성장


감리교선교사 존 무어는 1907년 8월, 올해야말로 한국 교회사에서 길이 기억될 “1차 대부흥의 해”라고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감탄은 한국에서 부흥운동 기간 동안 사역하고 있던 선교사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었다.


1. 대부흥운동과 놀라운 교세의 성장(p. 401)


확실히 대각성운동은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을 제공하며, 기독교의 힘을 통해서만 그들이 그들 앞에 열려 있는 새로운 기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인간성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한국 북감리교의 경우 1888년부터 불과 20년만에 교세가 무려 1,000배나 급성장 지난 3년간을 고려할 때 평균 증가율이 매년 33%였으며, 장․감 모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평양 지역의 교회 성장(p. 404)

장대현교회는 두 개의 지교회를 설립하여 상당한 교인들을 분산시켰으면서도 남녀가 동시에 예배를 드리기에는 공간이 부족해 오전과 오후로 별도로 모여 예배를 드려야 했다.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평양 시내 모든 교회들이 적어도 전년 대비 평균 30% 이상이 성장했다.

성장은 양적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영적 지식, 자존, 그리고 주도적인 기독교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수년 동안의 진보를 이룩하였다. “평양은 기독교 사역의 위대한 센터가 되었다”

서울 지역의 교회성장(p. 406)

서울에서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매주 새신자가 등록하는 등 밀려드는 군중들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함을 토로하는 보고가 각 선교부마다 접수되었다. 강화 지역의 한 교회에서는 전통적인 한옥 스타일로 새로 지은 교회 건물이 모자라 주일예배를 위해 주변 건물을 잠시 빌려 사용할 정도였다. 교회마다 뜨거운 복음의 열정, 복음에 대한 흡인력은 대단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있기 전에 한국 교회에 뿌리내린 “2천 개의 복음주의 교회들”과 이 나라에 생겨난 “십만 명”의 독실한 신앙인들의 숫자는 부흥운동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급신장하게 되었다.

주요 도시에서의 성장(p. 407)

부흥운동의 열기는 어디서나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뜨거웠다. 교회성장과 더불어 전도열도 놀랍게 증가해 은혜를 접한 이들이 더 많은 시간을 전도하는 일에 사용하겠다고 서약하면서 작정된 날연보가 1907년 3월 클락 선교구에서는 한 사람이 평균 17일을 서약했다.

당시 한국 개신교 선교지를 대변하는 KMF1907년 10월호는 한 해 동안의 각성운동으로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한국에 대형 교회가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편으로는 영적 각성을 통해 개인의 변혁과 사회적 변혁을 태동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속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함으로 교회가 급성장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하운셀은 단지 24년의 선교사역의 결실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13만 명을 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휴가를 가질 여유도 없을 만큼 부흥이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박해 속에서의 교회 성장(p. 412)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회는 예배를 방해하거나 기물을 부수는 일,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든든하게 지어져 가고 있었다. 군산의 몇몇 지역에서는 소위 자위단(Self Defense Society) 가입을 거부하는 문제로 일본 정부는 교회에 대해 곱지 않은 눈총을 보냈고, 직간접적으로 박해를 가해 왔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군산 지역 교회들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폭발적인 교세 증가(p. 414)

거의 모든 선교지마다 부흥운동을 전후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영입되면서 세례 지원자와 학습 지원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교회마다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적한 실정이었다. 교세의 증가로 선교사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보다는 이들을 양육하고 이들에게 학습과 세례식을 거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들만큼 모든 사역의 현장이 급신장하자 선교사들은 한국인 목회자들에게 그 일을 맡기기를 원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가 아직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라 평신도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2. 대부흥운동과 각 선교회의 성장(p. 417)


가장 급성장한 남감리교

부흥운동 기간 동안 가장 놀라운 신장률을 기록한 것은 남감리교이다.

북감리교의 성장(p. 419)

남감리교에 이어 놀라운 신장을 기록한 선교회는 북감리교 선교회였다. 1906년과 1907년 7월 사이에 학습교인을 기준으로 하면 배가 성장한 것이고, 초신자들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3배 이상이 성장해 세례교인, 학습교인, 초신자까지 종합하면 지난해 18,107명에서 39,613명으로 배 이상이 증가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이 부흥운동의 결과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한국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복음의 양적, 질적 성장을 더욱 진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해리스는 보았다. 시대적인 불안, 복음에 대한 사모함으로 민중들이 주님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가운데 복음의 씨앗들이 뿌려져 그와 같은 놀라운 결실이 맺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복음의 진작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이 아닐 수 없었다. 부흥운동은 한국인들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여 주었다.

전체적으로 부흥운동 후 선교사들이 43%가 보강되었고, 초등학교도 115개에서 606개로 증가하였으며, 주일학교 학생수가 17,894명에서 87,117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독노회의 조직, 목사 안수, 선교사 파송(p. 426)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장로교 공의회는 1907년 9월 17일에 한국 최초의 독노회를 결성했다. 최초의 독노회 조직을 통해서 비로소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에 의한 민족 교회의 틀을 다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첫 독노회에서 선교회가 조직되어 안수받은 일곱명 가운데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시베리아 한국인 선교 사역을 위해 최관홀을, 도쿄 한국인 학생들을 위해 한석진을, 또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의 한국인 교포 선교 사역을 위해 방화정을 파송하기로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 그 틀을 견고히 다지게 되었다.


3. 미션 스쿨 및 의료 사역의 증대(p. 429)


부흥운동은 단순히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미션 스쿨과 병원의 설립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학업에 대한 열망과 미션 스쿨의 증가

학교 설립이 폭발적으로 급증한 것은 대부흥운동을 통해 당시 복음을 접한 이들이 계몽되기 시작하면서 학업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럽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점 더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 부족과 교사 수급 부족이 선교회에 당면한 현안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실업학교의 설립 또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시대적 요청이었다. 케이블이 맡고 있는 선교구의 여러 곳에서 한국인들이 무려 1,400명이나 서명하여 실업학교를 설립해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던 것도 그와 같은 움직임을 반영한다. 부흥운동을 지나면서 불과 7년 만에 초등학교가 무려 10배나 증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 분야의 놀라운 급성장을 가리켜 백낙준 박사는 “교육 문예부흥”(the educational renaissance)이라고 불렀다.

초등학교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갈등도 노출되었다5). 학교를 정치 도구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재령 선교부의 각 지역 교육위원회 위원은 목사가 임명하거나 목사의 동의를 받아 임명할 것, 교사는 반드시 목사나 조사가 임명할 것, 학교는 매일 기도회를 가질 것, 그리고 공식적인 교과 과정을 준수할 것 등 교회가 통제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간구하였다. 일본 당국자들은 초등학교를 군사훈련장으로 만드는 움직임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p. 435)

사립학교의 육성은 처음부터 교단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 모두가 중생을 체험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교파의식은 부흥운동이 점점 더 저변 확대되면서, 교파를 초월하여 민족복음화와 국민 계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 앞에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부흥운동은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에 대한 흥미를 갖도록 만들어 주었다. 부흥운동 이후 이와 같은 학구열이 놀랍게 일어나자 선교회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을 위해 세계 주일학교 협의회(World's Sunday School Association)한국 지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의료 사역의 증대(p. 438)

한국 선교 사역에서 처음부터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의료 사역은 부흥운동 기간 동안에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의료사역이 단순히 의료 봉사 차원이 아니라 의료 선교의 분명한 목적이 이 나라의 복음화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1908년 7월 세브란스 의전이 첫 일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 선교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인 감시정변을 계기로 광혜원이 설립되었고 이것이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으로 활용되었으며, 한국 선교의 발전을 위한 산실이 되어 왔던 것이다.


4. 급속한 성장과 자원의 결여(p. 441)


미국교회의 지원(p. 442)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미국 교회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부흥운동 이후 한국에 대한 지원은 이전보다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한국에 대한 지원이 계속 있었지만 그것은 부흥운동으로 놀랍게 확산되는 선교 현장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급성장에 따른 남감리교의 선교 방향 수정(p. 446)

남감리교 선교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세 가지 방향으로 대책을 모색했다. 첫째는 북감리교와의 협력을 강화한 것이었다.  둘째는 모교회로부터의 지원이었다. 세 번째 방향은 급속한 성장에 보조를 맞출 수 없었던 남감리교 선교회는 의도적으로 세례를 시행하는 속도와 학습교인으로 등록하는 속도를 늦추어 좀더 질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로 합의 보았다.

또한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부흥회 인도 등을 일임했고 이와 같은 선교 정책은 한국인들의 리더십을 강화시켜 선교의 내실을 기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남감리교가 그 후 타 선교회에 비해 성장이 눈에 띄게 둔화되고 영적으로도 급속히 냉각되는 요인이 되었다.


5. 한국 교회 부흥운동과 성장의 몇 가지 특징(p. 448)


첫째는 1907년 이후의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이 그 이전과 비교할 때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가장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룩한 교단은 감리교 선교회 특히 남감리교 선교회였다. 셋째는 대부흥운동과 교회 성장과의 관계이다. 특정지역, 특히 부흥운동이 두드러진 지역에서의 교회 성장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부흥운동과 교회 성장은 모종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넷째는 부흥운동이 교회의 교세의 성장뿐만 아니라 사역의 확장과 다양성 그리고 사역의 확장을 불가피하게 초래해 단순히 교회 성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성장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제 11장 대부흥운동과 사회개혁


1. 대부흥운동과 영적 각성(p. 452)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비로소 분명한 죄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참된 영적 각성을 그리스도인들의 심령 심형에 심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에게 한국인들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부흥운동을 통해서야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었고, 자연히 이와 같은 의식의 변화가 삶의 변화로 이어져 그들을 믿지 않는 세상의 여타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어 주었다.

철저한 회개, 한층 깊어진 죄의식(p. 456)

영적 각성운동을 통해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도둑질한 물건이나 돈들을 되돌려 주었고,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범했던 잘못된 죄악들을 토로하였다.

부흥운동이 일어난 곳마다에서 이와 같은 회개와 영적 각성운동이 이어졌다. 그것은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부흥운동은 영적 갱생을 통해 한국 교회를 새롭게 정화시켰고, 죄의식을 더 강화시켰으며 윤리적인 면에서도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평양대부흥운동은 개인의 각성뿐만 아니라 내면의 정화가 외면의 정화로 개인의 각성이 사회개혁으로 이어져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기독교 문화 변혁이 한국인의 의식과 삶 속에 놀랍게 움트기 시작했다.


2. 배움에 대한 갈망(p. 463)


부흥운동은 진리에 대한 사모함을 낳았다. 그것은 배움에 대한 열망은 부흥운동이 이 민족에게 가져다준 가장 놀라운 선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배움에 대한 굶주림이라고 표현할 만큼 간절했다. 선교사들은 젊은이들을 바로 교육시키는 것이 이 민족의 복음화를 앞당기는 일이며 이 나라에 성숙한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키는 첩경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복음을 통해 이 민족을 영적인 잠에서 깨울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해 이 민족을 계몽해야 한다는 분명한 의지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볼 때 자녀 교육은 이 민족을 향한 시대적인 사명이었다. 당시 교육의 기회가 남성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개신교 선교 초기부터 한국 교회는 남녀 모두에게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3. 철저한 성경적 기독교 신앙의 구현(p. 469)


1907년의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한글성경이었다. 한글성경은 복음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 복음이 신분과 성과 나이를 넘어 한국인들에게 깊숙이 전파되게끔 하였다.

성경 연구는 단순히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의 삶 속에서 실천에 옮겨야 할 대상이었다. 이들에게는 신앙과 삶이 별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다행히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이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아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 씨 뿌리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등 수많은 예화들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익은 이야기들이었다.

처음부터 강조된 금연 금주(p. 472)

처음부터 한국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나야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실천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금연 금주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 모두 처음부터 입교인들은 물론 입교 전의 교우들 모두에게 철저하게 금연을 요구했다.

선교 초기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에 다음과 같은 “절제 및 사회개혁” 원칙 - 주일 성수, 금주, 금연, 결혼, 노름 및 마작금지, 그리고 노예와 인신 매매 금지 - 을 제시하고 이를 반드시 지킬 것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190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개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절제운동도 사회개혁운동과 연계성을 가지고 추진되었다.


4. 여성의 지위 향상(p. 477)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 한국 여성은 혁명의 시대를 맞았다. 기독교 신앙은 한국 교회에 남녀 평등 사상을 저변 확대시켜 여성 교육의 필요성과 정상적인 결혼관을 강화시켜 주었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교육의 기회와 복음의 기회를 제공했고, 한국 여성들도 자신들에게 그와 같은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기를 열망했다.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사모하는 분위기는 부흥운동을 지나면서 더욱 증대되었다.

여인들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동등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며, 교회에서의 그들의 역할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기독교 정신은 전통적인 동양사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종의 혁명이었다. 남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기독교 정신이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한층 더 높여 주었다.


5. 우상숭배에서의 해방(p. 482)


부흥운동이 가져다준 사회변혁 가운데 더 두드러진 현상은 우상숭배에서의 해방이었다.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종교 사상은 한편으로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도 또 다른 면으로는 복음 전파의 장해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복음 전래 초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이교 사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중 삼중의 장애를 넘는 것을 의미하였고, 또 이로 인한 심각한 손실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 교인들은 이와 같은 장애물을 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특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각성운동이 단지 개인만의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변혁의 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특성 때문이었다. 한 개인이 신앙으로 바로 서게 될 때 그가 변화되고, 또 그를 통해 가족과 이웃이 변화되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변혁되었다. 이 같은 변화의 역사는 복음이 닿는 곳마다 나타났다. 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영적 및 도덕적, 지적 욕구 모두를 충족시켜 주었다.


6. 기독교에 대한 비기독교인의 시각 변화(p. 490)


기독교 신앙이 닿는 곳마다 이와 같은 변화 역사가 나타났다. 각성운동을 거치면서 불신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정치 지도자들의 시각 역시 과거와는 분명히 달랐다. 비록 드문 현상이긴 하였지만 교회의 사역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물론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군수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반 기독교 단체들, 그 지역의 천주교인들과 일진회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더욱 핍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7.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p. 494)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참으로 자신들의 과거의 선입관을 완전히 수정한 사람들은 바로 선교사 자신들이었다. 부흥운동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놀라운 영적 각성과 민족 각성을 경험하면서 한국인들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전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되었다.” 부흥운동은 한국인들과 한국인들을, 남자와 여자를, 지도자와 평신도를, 한국인들과 서양인들을 하나로 묶어 준 역할을 했다.

놀라운 교세의 신장과 한국을 뒤흔드는 사회적 변혁은 정치적인 압박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 결과 이 나라에 다시 민족에 대한 새로운 자긍심을 심어 주어 이 민족에 대한 뚜렷한 소망을 기독교 안에서 찾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점점 더 성장함에 따라 한국 사회 전체에 미치는 기독교의 영향력도 점점 더 증가하기 시작했다.


제12장 복음주의 연합운동


부흥운동이 가져다준 가장 두드러진 선물 가운데 한 가지는 복음주의 연합 운동이었다. 실제로 교단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교파간의 협력도 그때만큼 무르익었던 적은 없었다.


1. 교파간의 연합운동(p. 504)


1903년 이후 남북감리교의 관계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다. 부흥운동이 이들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묶어 주는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장로교는 이미 1893년 장로교 공의회를 조직하여 공동의 협력을 통해 한국 교회의 복음화에 매진해오고 있었다.


2. 장감연합공회 조직(p. 507)


1905년 9월 15일 6개 선교회 150여 명의 선교사들이 모여 장감연합공회를 조직하였다. 부흥운동은 교단과 교단간의 협력을 촉진시킨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파간의 협력을 가속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1902년 장감은 한국에 세워질 미래의 교회의 명칭을 공통 명칭으로 만들 수 없는지를 협의하기 위해 하나의 위원회를 임명하고 1904년에 마침내 합의점에 도달해 “대한예수교회”라는 이름을 채택하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회 전체가 힘을 모아 한국에서의 교육 사업을 연합으로 추진하자는 안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1905년 9월 15일에는 장감6개 선교회를 대표하는 150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감연합공회가 결성되었다. 장감은 1905년 10월 4일 1년 동안 학교 사업을 연합으로 실행하는 안에 서명했다. 1893년의 장로교 공의회에 이어 1905년에 장감이 연합공의회를 조직한 것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연합의 목표, 하나의 민족교회(p. 510)


장감연합공회가 지향할 목적은 분명했다. 연합공회는 평양과 서울에서 교육 사업을 연합으로 실시하는 것은 물론 서울의 의료 사역, 문서 선교, 찬송가, 정기 간행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연합이 추진되었다.

전체 선교사들 가운데 95%가 민족 단일교회의 설립을 찬성하고 나섰다. 연합에 대한 열망은 1905-1906년 사이에 최고 수위에 달했다. 본국 선교 본부에서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하나의 민족교회 설립이 낙관적이었다.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의 의지는 대단했다.

그러나 본국의 선교부는 견해를 달리했다. 본국 선교부가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자는 안에 반대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신학적인 이유에서였다. 둘째는 교단적인 입장 때문에서였다. 세 번째 이유는 칼빈주의 체계에 기초한 장로교와 알미니안주의에 기초한 감리교가 어떻게 하나의 독립적인 교단을 한국에 설립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상당수의 한국 교인들도 장감이 하나의 단일 교회를 설립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부흥운동이 가장 정점에 달하던 1907년, 따라서 연합에 대한 기대가 가장 무르익어야 할 그때 장감은 각각 독자 노선을 걷기로 결정한 것이다.


4. 연합운동의 결실들(p. 517)


연합 활동 중에서도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역시 선교지 분할 협정이다.

1909년 이르러 드디어 6개 선교회사이에 완전한 선교지 l분할 협정이 체결되었다.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경상북도는 북장로교가,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의 중부권은 북감리교가 주로 맡았고, 개성과 이천을 비롯한 서울 동부지역과 강원도 대부분은 남감리교가, 전라도는 남장로교가, 경상남도는 호주 선교회가, 그리고 함경도는 캐나다 선교회가 맡았다.

장감연합공회가 연합으로 선교를 하려는 노력은 기성의 연합 활동인 성서 번역, 문서 선교, 의료 선교등 여러 영역에서 계속되었으나 특히 미션 스쿨, 주일하교, 그리고 YMCA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장감 선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미션 스쿨을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주일학교 연합운동(p. 521)

1908년 봄, 세계 주일학교 협회 한국지부가 결성되었다. 한국 지부는 교파를 초월해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참여하는 초교파 단체로 구성되었다.

YMCA 연합운동(P. 522)

필라델피아의 와나메이커의 기부금으로 건립된 YMCA건물 준공 기념식6)에는 교파를 초월한 수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처음부터 YMCA는 한국의 복음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개신교가 함께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YMCA는 이 나라의 복음화를 의해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문서 분야에 대단한 기여를 하였다. YMCA는 문서 활동뿐만 아니라 강연과 교육과 심지어 전도 집회를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모든 연합운동이 꼭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장감이 서울에서 중학교를 통합하여 공동으로 운영하는 일은 2년 이상을 지속할 수 없었고, 선교지 분할 협정 또한 곳곳에서 반발이 있거나 차라리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감이 교파를 초월하여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한국 교계에 적지 않은 교훈을 안겨 준다.


제 13 장 평양대부흥운동, 그 성격과 평가


부흥의 현장을 목도한 이들 가운데 한국 교회의 급신장과 놀라운 부흥운동의 확산에 대해 순수 종교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기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기독교로 돌아오는 것을 시대적 정황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부흥운동을 종교적인 현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당시 일제의 압박 속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도피적이고 피안적인 경향이 부흥운동을 촉발하고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인 국민 보호 기능을 상실하자 이 시대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교회야말로 가장 훌륭히 그 역할을 제공할 수 있는 단체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가 어용단체인 일진회나 자위단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국권의 상실로 인한 정치적인 위기 속에서 그 소망을 교회에서 찾으려고 하는 움직임은 1907년 고종이 강제퇴위 당한 뒤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이 부흥운동의 일차적인 요인이라거나 혹은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순수하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교회를 찾은 이들 가운데는 정착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관점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부흥운동을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것은 당시 일선에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선교사들의 견해와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영적인 움직임은 먼저 신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부흥의 요인을 정치적인 요인에서 찾는 것보다는 좀더 신앙적인 원리, 복음을 전해 받은 한국인들이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한국인 스스로의 구령의 열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은 오래전부터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통해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을 사용하여 왔고, 사경회와 주일 성경학교를 통해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었으며, 때로는 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만이 이 시대, 이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부흥운동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이며, 복음에 대한 놀라운 반응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부흥운동을 단순히 정치적인 현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말씀과 성령의 사경회 운동에서 그 역사적 기원과 과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질문들)

1. 교회의 비정치화를 역설적 섭리사로 이해 할 수 있는가?(서정민,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 - 민족운동과의 관련을 중심으로」(이만열외 7인,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1992, pp. 233~83)

2. 독로회 설립 후 자치권이 이양되지 않은 이유?(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 272.)

3. 하나의 민족교회 설립에 파송 선교사 95%가 찬성하였다는 기록의 근거는?(p. 511)

4. 본국 선교부에 기울인 노력의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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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A. 서적

▷ 서정민,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 - 민족운동과의 관련을 중심으로」,이만열외 7인,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서울:종로서적, 1992, pp. 233~83.

▷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p. 249~75.

▷ 이만열 외, 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 서울:기독교문사, 1989, 1990.

B. 인터넷 문서

▷ 강성철, 한국 초기 선교와 미국 교회와의 관계,

     http://cwmpcts.org/main/cwm-resources/study/articles/graduate-student/graduate%20student-001/Mission_Field_Study/04.htm

▷ 김종익, 1907년 대부흥 운동,

     http://cwmpcts.org/main/cwm-resources/study/articles/graduate-student/graduate%20student-001/Mission_Field_Study/1907.htm

▷ 김태석, 민족의 수난(중3국사),

   http://my.netian.com/~wally02/h36-1.html

▷ 박명수, 성결운동과 한국교회의 초기 대부흥,

   http://kehchrc.kehc.org/mspark/korea/kor_003.htm

▷ 박명수, 「한국교회사 연구의 새로운 고전」 - 서평 : 박용규, 평양 대 부흥운동, 서울:생명의 말씀사, 2000

   http://kehchrc.kehc.org/mspark/comments/com_001.htm

▷ 박명수, 한말 민족주의자들의 종교 이해-<대한매일신보>(1904~1910)의 논설을 중심으로,

   http://user.chollian.net/~ikch0102/nm502.htm

▷ 손윤탁, 한국교회와 네비어스 선교정책,

     http://cwmpcts.org/main/cwm-resources/study/articles/graduate-student/graduate%20student-001/Mission_Field_Study/nevius.htm

▷ 차종순, 한국 초기 신앙인들의 신앙유형에 관한 고찰,

   http://www.cscha.or.kr/a/KCH001.htm

▷ 최성일, 「한국개신교와 삼자 원칙」, 한신대 논문집, 제12호, 1995.

   http://www.hanshin.ac.kr/~press/explanation/h.disser/h.disser12/19.htm

▷ 한규무, 게일(James S. Gale)의 한국 인식과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 1898~1910년을 중심으로,

   http://user.chollian.net/~ikch0102/nm4-12.htm

제 14 장  민족복음화운동과 백만인 구령운동


대부흥운동과 그로 인한 놀라운 교회의 성장은 일본의 을사보호조약으로 어두웠던 이 민족에 민족복음화에 대한 소망을 강하게 불어넣어 주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들은 이 나라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다졌던 것이다.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은 정치적 힘을 키우는 것도, 경제적 힘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이 민족 전체가 복음화되는 길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1907년 7월 24일 일본과 맺은 조약 결과 황제는 권좌에서 강제적으로 폐위되고 말았다. 대부흥운동이 한국을 강타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이 민족은 가장 처절한 민족적 치욕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적 울분이 극에 달했고 신,불신자 간에 목숨으로 항거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부 신자들은 민족적 울분을 일제에 자결이나 무력적 항거로 맞섰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의병이나 고위직에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1. 민족복음화로 이어진 구령의 열정


한국인들의 전도열은 웨슬리의 회심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복음 전도열과 비견되곤 하였다. 한 선교사는 “한국이야말로 추수를 눈앞에 둔 황금 물결이 출렁이는 뜰“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한국의 복음화는 이제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은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준비된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역에 노력을 집중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당시 ‘민족’과 ‘기독교’와 ‘복음화’는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자 이 나라에서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세 단어였다.

민족의 가장 비천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어떤 절대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의 복음화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한반도의 복음화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차지하는 지형학적 위치상의 중요성과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 커지고 있었다.


2. 백만인 구령운동의 발흥


민족복음화에 대한 열정이 하나의 운동으로 조직화되어 나타난 것이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발흥했던 백만인 구령운동이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대부흥운동과 맞먹는 또 하나의 “커다란 복음 전도운동”이었고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였다.

1910년은 친일세력인 일진회의 청원으로 8월22일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해이다. 이런 민족적 고난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라면 기독교야말로 이 민족의 참된 소망이라는 확신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는 한편으로는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시들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흥운동으로 인한 복음의 씨앗들이 충실하게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양면적인 바람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개성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기도

백만인 구령운동은 1909년 7월 12일,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는 남감리교 개성 선교부의 몇 명의 선교사 - 갬블, 리드, 스톡스 - 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염원하는 기도모임을 함께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기도회 4일째 되던 날 오후 3시에 믿음으로 그들 중 한사람이 그리스도가 손을 쭉 펴시고 한국을 축복하시는 환상을 보았다. 며칠 후 개성의 세 교회를 대표하는 한국인 지도자 가운데 10명이 한 산으로 올라갔고, 반면 5명의 개성의 남감리교 소속 선교사들은 다른 산으로 올라갔다.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15명이 민족복음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뒤에 올라간 20명의 한국인 조사들을 합쳐 45명의 사람들이 은혜를 충만히 받고 “열정과 능력이 충만한 제자들같이 자신들의 구역으로 돌아갔다”

교인들의 증가측면에서 남감리교의 경우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도할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룩해 온 것에 비하면 대단히 미약한 성장을 경험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지금이야말로 선교의 위기를 맞고 있는 때라고 진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남감리교 연회의 일차적인 초점은 남감리교의 영적 갱생이었다. ① 영적 지식의 결여, ②적극적인 구령의 열정의 결여, ③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을 이번 연회를 통해 찾기를 기대 효율적인 복음화를 위해 20만 명의 영혼을 금년에 달성하자는 것을 결의하고 모국의 선교 본부와 본국 해외 여선교회에 전도사역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의하였다.

남감리교 연례모임 20만 명 구령운동이 장감연합공회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져 “금년에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7) 슬로건을 택하게 된 것이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불씨: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

길선주 목사는 그 교회의 장로 가운데 한 사람과 함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두 달 동안 새벽 4시에 모여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 교회에 새벽기도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09년부터였다. 새벽 기도회를 통해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09년에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가 시작한 새벽기도는 급속히 한국 교회에 확대되었다.

장감연합공회의 결정과 백만인 구령운동

1909년 10월 장감연합공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백만인 구령운동을 1910년 공식적인 장감연합공회 캠페인으로 채택하였고, 3월 20일 주일을 한때 백만인 구령운동을 위한 기도의 날로 지킬 것을 요청한다. 1910년 10월9일까지 세례교인과 학습교인이 한 달에 한 명씩 한 해 동안 전도해 ‘백만 명을 구령‘하기로 하는 공의회 분과위원장 리드의 제안8)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장감연합공회에서는 백만인 구령운동의 실행을 위해 게일을 의장에 앉히고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국 선교를 대변하는 이들이 위원회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운동의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장감연합공회가 백만인 구령운동을 결정하던 그 해는 한국 개신교 선교 25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였다.

외국 부흥사의 입국

백만인 구령운동을 자연스럽게 더욱 촉진시킨 또 한 가지 사건은 일단의 해외 부흥사의 입국이었다. 1910년 후반 유명한 외국 부흥사들의 입국과 그들이 인도하는 집회는 장감을 초월하여 선교사들은 물론 한국 교회에 민족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더욱 견고하게 심어 주었다.

장감연합공회의 결정 이후 백만인 구령운동은 전국교회와 선교회에 의해 활발히 추진되었다. 1909년 10월 백만인 구령운동의 주제가 “백만인을 예수에게로”가 작사되었고 백만인 구령운동이 진행되는 곳마다 울려 퍼졌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세 가지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첫째, 대중 전도 집회 들째, “날연보” 셋째, 복음서와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일

백만인 구령운동의 이면에는 그 동안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연합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장감은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교파의 기득권이나 이권을 넘어서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제 15 장 백만인 구령운동의 진행


한일합방의 고난의 시대, 선교사들은 선교사들대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와 같은 시대적인 정황 속에서 자신들의 나갈 길을 진중하게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가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속에 백만인 구령운동이 시작되었다.


1. 1909년 초 백만인 구령운동


남감리교 사역자 사경회

1909년 12월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남감리교 사역자 사경회가 열렸다.

날연보와 권찰제도

권찰제도는 평양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권찰제도의 착상은 평양의 마펫 박사가 와나메이커의 유명한 필라델피아 주일학교에서 얻은 것으로 교회의 모든 교인을 10명 단위로 나눈 후 권찰이 각 그룹을 관장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권찰제도는 초신자들을 교회로 접붙이는 좋은 보호 장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의 매개체”가 되었다. 권찰제도는 백만인 구령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 그 이후에도 한국 교회에 소중하게 정착되어 한국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날연보 제도9)였다. 남감리교 사역자 사경회가 열리기전 선교사 저딘은 백만인 구령운동의 효과적인 계획을 개관해 주었다.

첫째, 사경회의 메시지와 정신을 가능한 빨리 전달, 둘째, 지역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날연보 서약을 받을 것, 셋째, 복음서의 수를 사전에 조사할 것, 넷째, 그리스도인이 하나도 없는 몇 개의 마을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실시할 것.

“날연보(day-offering)”에 서명했던 이들은 자비10)로 자신들이 서명한 날 수만큼 가가호호를 방문하거나 각 마을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다.


2. 전국으로 확산되는 백만인운동


백만인 구령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구령의 열정에 근거한 간절한 기도, 그 구체적인 결실을 위해 복음서를 나누어주고, 주일에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초청을 하는 일은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나면서 장감을 초월해 한국의 모든 교회의 일반적인 특징들이었다.


3. 저변 확대되는 백만인 구령운동 - 1910년 봄


일련의 부흥운동으로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한국 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목회자들을 육성하는 신학 교육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현장 경험을 살린 장감의 신학 교육

1910년 3월 15일에 남감리교와 북감리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신학회에 받은 수업은, 조직신학, 실천신학, 성경 교회사, 창세기, 열왕기서, 누가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그리고 야고보서 과목들이 강의되었다.

교수진들은 한국의 목회자들이 단순히 신학적인 지식만 소유한 자들이 아니라 복음 전도를 실천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수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4시에서 5시사이에 서울 시내 전역으로 흩어져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무화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실천적인 신학 교육은 장로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신학교에서 그 해 전반기 강의를 맡은 사람들은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었고, 또 실제로 부흥운동의 저변 확대에 중요한 공헌을 했던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가진 전도자들이었다. 이들의 가르침은 현장감이 있었고, 가르치는 과목 역시 상당히 실천적이었다.

신학교는 한국 교회에 필요한 목회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헌신할 수 있는 실천적인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성경은 교육과정의 핵심이었다. 장감 모두 성경이 영감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철저하게 기초하고 있었다. 모든 신학 교육의 가장 중요한 근간은 성경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데 있었다. 이것은 신학 교육을 책임 맡은이들이 모두 부흥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선에서 부흥운동의 저변 확대를 위해 발벗고 뛰었던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도 집회와 새 신자의 영입

사경회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사경회는 단순히 말씀 공부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나 오후 집회를 통해 영적인 재충전을 받는 기회였다.  실제로 백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신자들이 교회에 영입되었고, 세례 지원자 수가 확실히 늘어났음이 보고되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주변 다른 나라 선교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4. 열기를 더하는 백만인 구령운동 - 1910년 여름


YMCA 학생 사경회

지도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대거 강사로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1회 학생 집회를 한국의 전통 종교를 대변하는 불교의 한 사찰에서 가졌다. 학교에서 엄격히 선별된 가장 뛰어난 46명의 학생들이 모여 매시간 진지한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들 모두가 민족의 장래를 진지하게 염려하는 이 나라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민족애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장래에 개입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역동적으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겸손한 민족애,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의 사경회에는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민족애와 민족복음화만이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확신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백만인 구령운동

선교사들의 사역가운데 백만인 구령운동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1910년에 가진 일련의 부흥회와 사경회의 저녁 집회는 이전의 부흥운동의 집회와 성격을 달리했다. 이전의 부흥 집회가 기성 신자의 영적 각성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백만인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전도 집회는 새 신자 전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백만인 구령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100,000일을 전도했고, 수백만의 전도지와 70만 권의 낱권 복음서를 분배했으며, 한국의 거의 모든 마을을 방문했다. 한국 셩교셔회가 1910년 1월부터 12월까지 출판한 것은 전도지 210,000개, 34,000권의 서적, 3,180,000장의 백만인 구령운동 전도지였다.”


제16장 백만인 구령운동의 재편과 영향


1910년 8월 22일 치욕적인 한일 합방조약이 체결된 뒤 “대한” 대신 “조선”을 사용해야 했고, 영어 명칭도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코리아(Korea)대신 조선(Chosen)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사역하거나 한국을 방문한 외부 인사들은 하나같이 지금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만큼 이 민족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 없으며, 이것을 대신할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1. 새롭게 재편된 백만인 구령운동


1910년 가을, 한일합방의 쓰라린 고통을 제일먼저 피부로 접한 서울 지역의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민족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다지는 일이었다. 그들은 언더우드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도집회개최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 결과 전국적인 전도 집회로 확대되었다.

총동원 서울 전도 집회

전도집회는 10월 2일부터 10월 30일까지 한 달 동안 서울의 모든 교회들에서 개최한 후 전국의 각 선교부에서 전도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서울 전도 집회의 한 사례, 남대문교회

남대문교회에서는 전도 집회가 시작되기 전 한 주간 동안 심야 기도회가 임시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텐트에서 열렸다. 각 교회마다 전도 지역이 할당되었고, 또 세부 분할되어 서울전역이 전도 대상지가 되었다.

서울지역 전도집회는 성공적이었는데 이와 같은 전도 집회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인 사역자들의 열심 때문이었다. 구상은 처음에 선교사들이 했지만 집회를 인도하고 실제로 전도를 실천한 사람들은 한국인들이었다.

총동원 지방 전도 집회

서울 전도 집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이어 각 선교부별로 지방 전도 집회가 열렸다. 1910년말에 들어서면서 기독교는 이제 하나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2. 백만인 구령운동의 영향


자전, 자치, 자립하는 교회

백만인 구령운동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진행되는 동안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눈에 띄게 부상하였다. 민족복음화운동의 실질적인 축이 한국인들에게로 이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서부인은 한국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1910년 에든버러 대회에서 윤치호가 말한 것처럼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국인들의 손에 들려주자마자” 그들이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립, 자전정신이 대부흥운동 기간을 통과하면서 한국 교회에 더 견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선교운동

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선교운동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선교의 움직임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강했다. 평양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생 선교회를 조직해 복음이 닿지 않은 곳에 자체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일은 실제로 추진되었다.

실제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선교사역은 1905년 장로교 공의회차원에서 또, 1907년 9월 17일 창립된 첫 독노회에서는 그 해 목사로 안수 받은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을 선교사로 보냄으로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틀을 다지겠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기풍은 제주도로 파송받은 지 불과 3년 만인 1911년 9월, 제 5회 독노회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에 다섯 개의 예배 처소와 160명의 교우, 17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는 학교 하나를 설립했다. 이기풍의 파송은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 복음의 빚진 자의 본래의 사명을 다하였다.


3. 백만인 구령운동의 평가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처음부터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한 개개인의 영적 각성에서 출발한 부흥운동이었다면, 백만인 구령운동은 처음부터 목표 지향적이었다.몇몇 선교사들의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된 전도 목표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수치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높아졌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되면서 그 성격이 처음 의도와는 달라졌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이미 복음을 받은 이들을 민족복음화운동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부흥운동이 전적으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말았다. 이 운동으로 인한 수적인 증가는 평양 등 일부 예외적인 지역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지역에서 투자와 협력과 노력에 비해 미흡한 것11)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장로교단, 남북 감리교단 공히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러나, 비록 채 10분의 1도 안되는 결과이지만,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수많은 신자들이 참여하였고, 교회의 연합사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초유의 문서선교 자료들이 뿌려진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씨앗처럼 뿌려진 그 전도지와 나누어준 성경을 읽고 결국 교회로 돌아오게 될 잠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기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이 개인의 영적 각성을 특징으로 하였다면, 백만인 구령운동은 개인 전도열로 특징될 수 있다.

또, 백만인 구령운동이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범개신교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전 기독교가 민족과 지역과 교파를 초월하여 같은 목표를 놓고 힘을 모은 최초의 범개신교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한일합방으로 인한 민족적 어둠을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시켜 기울어 가는 국운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도록 민족의 힘을 결집시켜 주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에 새로운 소망의 빛을 던져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교회에 의미있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만인 구령운동은 한국 교회와 교인들에게 자성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한국 교회가 아직 백만명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가 주신 땅을 경작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1909년과 1910년에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던 백만인구령운동이 1911년에 들어서는 하나의 역사적 운동으로서는 막을 내렸다.


맺는 말


원산부흥운동부터 백만인 구령운동까지 진행되는 부흥운동의 성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의 부흥운동은 단순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영적 각성운동이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영적각성운동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반면 백만인 구령운동은 일종의 전도 캠페인의 성격이 더 강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12)

둘째, 당시의 정치적인 암흑기를 극복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다지게 만들어 주는 종교적인 사건이었다.13)

셋째,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1890년에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한 사경회 운동과 밀접히 연계되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중심의 선교정책과 말씀 연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수적인 신앙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총체적인 개인 구원과 민족 구원이라는 염원을 추구하는 동기를 마련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대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요인이라는 주장14)에 대해서는 일부 그런 부분을 인정할 수 있으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불타는 구령의 열정에서 부흥운동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질문들)

1. 게일의 한국 정치( 및 국제정치)에 대한 인식은?(한규무, 게일(James S. Gale)의 한국 인식과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 1898~1910년을 중심으로, http://user.chollian.net/~ikch0102/nm4-12.htm)

2. 한국식 전도 방법의 진정한 모델로서의 축호 전도?

3. 실제 통계와의 차이점이 생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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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A. 서적

▷ 서정민,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 - 민족운동과의 관련을 중심으로」,이만열외 7인,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서울:종로서적, 1992, pp. 233~83.

▷ 이만열 외, 한국기독교의 역사  I, 서울:기독교문사, 1991. pp. 268~282.

B. 인터넷 문서

▷ 국민일보, 29. "신자 늘리기"합심 전국서 10만일 헌신 - 1909년 백만명 구령운동

     http://www.kukminilbo.co.kr/missiontoday/c_history/root/roottxt29.html

▷ 김대인, 숨겨진 한국교회사 - 3. 백만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

     http://kimdi.net/한국교회사/부흥의%20비결/9백만명.htm

▷ 최무열, 통전적 선교 모델로서의 한국 초기 선교-사회복지와 복음전도와의 일체성 확립 -

     http://cwmpcts.org/main/cwm-resources/study/mission-theology/02mission-theology/mychoi001.htm

▷ 한규무, 게일(James S. Gale)의 한국 인식과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 1898~1910년을 중심으로,

     http://user.chollian.net/~ikch0102/nm4-12.htm

C. 기타 자료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사회부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록-제1권, 서울;총회교육부, 1980.

   - 노회회록서문, 노회 개회 예배 본문, 백만인 구령운동 관련 회의 자료

구주 강생 일천구백팔년

대한 예수교장로회 노회 회록


☞ 대한국 에수교 장로회 노회 회록 서문

신령하고 크도다 이 아름다운 노회여 교회 머리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사도와 문도를 택정하여 세우사 천국의 복음을 천하에 전하여 만민의 영혼을 구원케 하셨으니 주 예수에게 직분을 받은 사도와 문도들이 주께서 승천하실 때에 특별히 명령하심을 삼가 지켜 예루살렘다락에 일제히 모여 모임을 같이 하고 기도를 힘써 하나님의 허락하신 성신의 권능을 충만히 받은 후에 능히 각국 방언을 말하고 모든 이적을 베풀며 천하각국에 헤어져 복음을 전할세 회개하고 주를 믿는 자에게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문도를 삼으며 믿는 형제 중에 사람을 택하여 장로와 목사를 세워 교회를 치리케 하였으니 옛적에 안디옥에서 총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과 바나바와 믿는 두어 형제가 예루살렘 본 교회에 여러 목사와 장로들과 한가지로 모여 교회의 마땅히 지킬 규모를 의논하여 작정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노회의 시작이라

만유의 주재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과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넓으신 은혜와 보혜사 성신의 크신 권능을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우리 대한 인민들이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사신과 우상을 섬기매 장차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더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인민을 돌아보사 미국 남 장로교회와 북 장로교회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장로교회와 카나다 장로교회의주를 믿는 모든 형제, 자매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 네 곳 교회 총회로 선교사를 택정하여 이곳에 보내시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선교사들이 갑신년에 이곳으로 나와 도를 전한지 이십삼년 동안에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자가 근지 십여만이라. 곳곳이 장로를 장립하며 교회를 설립하여 영, 미 양국 선교사들과 한국 각처 장로들이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나 그러나 아직 한국 목사를 장립치 못하므로 노회를 이루지 못하고 그 회 이름을 장로공의회라 칭하고 저간에 십오차를 모이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부히 주심으로 수년 전에 남 장로교회와 북 장로교회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장로교회와 카나다 장로교회 이 네 곳 총회에서 특별히 대한국 장로회 노회를 세우기로 허락한 고로 장로공의회 회장 마포삼열 목사께서 네 곳 총회의 권을 얻어 한국교회의 노회되는 취지를 설명하시되 이 노회는 교회의 머리도시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십자가를 튼튼히 의지하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세상사람 앞에 영화로운 빛이 되며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노회를 이루어야 하겠다 하시고 주강생 일천구백칠년 구월 십칠일 오전에 한국 노회를 설립한 후에 대한의 신학교 졸업학사 일곱 사람을 목사로 장립하고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 노회라 하셨으니 이는 실로 대한국 독립노회로다. 할렐루야 찬송으로 성부, 성자, 성신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세.


☞ 총회 개회 예배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사회부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록-제1권,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회록」,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0. 1907년 9월 17일 상오 9시에 평양 장대재 예배당에서 작년 공의회 회장 배유진 목사가 사도행전 1장 8절에 우리주 예수께서 마지막 분부하신대로 증인이라고 강도한 후에...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사회부편, 같은 책,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제2회회록」. 1908년 9월 6일 하오 2시에 황성 연동예배당에 모였는데 회장 마삼열씨가 기도함으로 개회하다. 회장 마삼열씨가 히브리 12장에 주를 뵈옵는 것이 제일 귀중한 뜻으로 강도한 뒤...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사회부편, 같은 책,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제3회회록」. 1909년 9월 3일 상오9시에 평양신학교에서 회장 게일씨가 빌립 2장 1~17절가지 하나님의 사랑을 강도한 후에...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사회부편, 같은 책,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제4회회록」. 1910년 9월18일 하오 2시, 선천군 염수동예배당에서 증경회장 게일씨가 이기풍씨의 기도함으로 개회하다. 회장이 고후 11장 16~33절 고난에 복종하여야 하겠다는 문제로 강도한 후에 부회장 이기풍씨의 인도로 성찬예식...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사회부편, 같은 책,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제5회회록」. 1911년 9월17일 상오 9시에 경상북도 대구 남문안예배당에서 배유지씨가 사사기 17장6절 이스라엘 백성이 왕이 없음으로 임의대로 행하였다는 문제를 가지고 노회 예비 강도로 同로 하오 2시에 회장 게일씨가 길선주씨의 요한 16장 6절에 성신의 하실 일 이은 강도와 윤명식씨의 기도로 개회하다.


☞ 백만인 구령운동 관련 결의(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제4회회록)

▷ 5쪽, 길선주씨가 금년에 백만명 문제로 먼저 의논하기를 동의하여 可로 결정하다. 부위렴씨가 백만명 문제에 대하여 별 위원을 택하되 각 대리회에서 일인씩으로 8인을 택하기로 동의하여 可로 결정하다.

▷ 15쪽, 백만명 위원회의 보고함이 여좌하니

  (1) 각 교회가 일주일간 새벽기도회 할일 일자는 10월 24일부터

  (2) 사무원이 부족하므로 3사람을 더 택하되 양덕백, 박치록, 방위량 세사람을 택하였사오며

  (3) 한국 목사나 외국 목사를 사무국에서 택하여 부흥대로 쓰기로 허락할 때 그 지회와 그 목사의 허락을 받으면 노회에서 허락함을 청원이오며

  (4) 재정은 외국 선교사들은 외국돈으로 쓰기를 허락하고 한국 부흥대의 월급은 한국돈으로 쓰기로 작정할 일

회장이 네 개항목을 일일이 물으시매 회중이 채용하기로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

▷ 백만명 위원 : 리여한, 우종서, 김기원, 길선주, 부위렴, 변요한, 로세영, 김창보

평양대부흥운동(The Great Revivalism in Korea:Its History, Character, and Impact 1901-1910)

(박용규, 서울:생명의 말씀사, 2000)


읽기를 시작하면서

정말 귀중한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나는 자료의 수집, 정리 등에 관심이 많다. 그런 측면에서, 이처럼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이해, 재구성하기 등의 작업을 진행한 것에 대해 먼저 저자인 박용규 교수에게 경의를 표한다.


학부 1학년 때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사회 참여”15)에 관한 소논문을 쓰면서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 - 특히 한국 초기기독교 - 의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은 나의 중요한 관심이기도 하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초기 기독교의 전래 때부터 이미 한글로 된 성경을 가지고 이 땅에 발을 디뎌 놓았던 독특한 선교적 상황과, 시련의 한가운데서 조국의 앞길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그저 끌려가고 있는 민족의 위기 속에서, 민중의 한을 유쾌히 풀어버리는 신명나는 한바탕의 큰 놀이마당이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떨림 같은 것이 책을 손에든 순간에 느꼈던 감정이었다.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애초에 이 책을 꼼꼼하게 읽기로 작정하였다.

섣부른 의견 개진이 전체를 왜곡되게 볼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저 이 책에서 짚어나가는 대로만 따라가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저자의 편집의도가 지나치게 섭리사관 위주였고, 단순히 한쪽 - 서양 특히 미국 쪽 - 의 자료에만 의존한 편협한 시각으로 일관되어있어 읽어갈수록 수없이 많은 질문들과, 때론 반감마저 치밀어 올라왔다.16)

그래서 다른 자료들과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읽게 되었다. 그 덕분으로 나는 한국교회사와 관련한 여러 자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에서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여 종합적인 자료들을 비교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읽기를 마치면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날의 족적을 더듬어 정확히 이 땅에 기독교가 서 있었던 자리를 매기고, 새로운 천년에 나아가야 할 지표를 다시금 곧추 세워야할 절대절명의 순간, 그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실 절정의 때’에 온 몸으로 마주 서있다.


이러한 중요한 시점에서 역사가는 더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사가는, 비판적 시각으로 지난 일들을 돌아보고 사료들을 평가하고 재해석해서 독자로 하여금 거대한 역사의 물결이라는 구조를 알 수 있도록 큰 얼개를 엮어내야 한다17)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가치관이 상실되고 가정이 해체되고 이웃의 아픔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이전의 시대에 다하지 못한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부추기고 북돋워주어야 한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박용규교수의 책은 서구기독교, 특히 미국기독교의 사대적 신학 행태의 연을 끊어버리지 못한, 또 다른 하나의 왜곡되고 편협한 이 시대의 근본주의 보수 신학에 입각한 성령운동 해석의 단초, 아전인수격 성령이해의 한 단편을 제공한 자료모음집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이 아쉬움은 못내 하나의 결정(結晶)으로 남아, 가까운 시간 안에 국내외 모든 자료를 총망라해서 자신의 사관(史觀)마저도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그저 도구로 쓰여져 모으고 정리되어진 옥고(玉稿)가 있기를 기대하는 씨앗이 되었다.


1)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서울:생명의말씀사, 2000. p. 207, 각주 13. 1월2일에 사경회가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2) 앞의 책, p. 263. 처음에 감리교 목회자들 거의 모두는 이런 신비스럽고 놀라운 현시를 악령이 야기시킨다고 하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3) http://drama-hairstyle.co.kr/tvsdevelopers/tvsNara/Bible%20Study/44/4405.htm

   1907년은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싹이 나고 성장해서 첫 번째로 열매를 거두는 해였다. 평양신학교가 개교한 지 처음으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송인서, 길선주, 이기풍), 이들은 모두가 한국교회와 민족을 이끌어 준 하나님의 종이요, 지도자들이 되었다. 길선주 목사는 목사안수를 받던 그 해에 장대현교회를 맡아서 일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설교 도중에 어떤 죽어가는 친구의 유산을 정리하면서 100원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것에 대한 잘못을 전교인들 앞에 고백하고, 자신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간과 같은 더러운 죄인이라고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사랑하는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라고 크게 외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이에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성령충만함의 은혜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불길은 점차 전국에 확산되어 갔으며, 한국교회 발전에 봉화를 올리게 되었다. 1927년 그는 장대현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후, 본교회를 사임하고 전국으로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복음을 듣고 결신한 사람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였고, 교사, 장로 목사가 된 수만도 800명이 넘는다.

   그는 일생동안 구약성경을 30회, 신약성경은 100회 이상 읽었으며, 특히 요한계시록은 10,000회 이상이나 읽어서 거의 모두 외우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1927년 장대현교회를 사임한 후, 복음을 이곳저곳에 전하는 가운데 여성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최초로 여전도회를 조직하여 각 가정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1920년에는 노동 전도대회를 조직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의 저서에는 해타론(신앙과 나라의 발전을 해치는 게으름 추방론), 말세론, 내세론(그리스도의 재림과 사후세계)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당시 외부세력에 의해 민족의 주체성을 잃어 가는 잘못된 사회를 개혁하고 민족을 구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35년 11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평서노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지기까지 10,000회 이상을 설교하였고, 60여 개 이상의 교회를 세웠으며, 3,0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푸는 등 한국과 한국교회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4) http://www.hanshin.ac.kr/~press/explanation/h.disser/h.disser12/19.htm 『韓國改新敎와 三自原則』, 최성일교수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1) 자전(自傳:Self-propagation) :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모든 개인과 집단(소수 그리스도교인의 모임)은 휘묻이법에 의해 사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한다.

   2) 자치(自治:Self-government) : 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3) 자급(自給:Self-support) :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받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될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5) 1907년 군대 해산의 영향으로 젊은 군인들이 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발생한 문제들


6)  1908년 12월 1일


7)  국민일보, 29. "신자 늘리기"합심 전국서 10만일 헌신-1909년 백만명 구령운동

    http://www.kukminilbo.co.kr/missiontoday/c_history/root/roottxt29.html

   이 표어가 채택되었을 당시 교인의 총 수는 장, 감을 합해서 불과 ‘8천 명’에 이른 정도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당시 교인 수를 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당시 선교사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 신도 수를 20만명 정도로 추정했으나 실제 학습교인을 포함한 인원은 8천명 수준. 재한선교사가 모두 2백명에 불과하던 때였다. 「1년만에 1백배 성장」은 현실적으로 무모하기까지 했다.


8) 이만열 외, 한국기독교의 역사  I, 서울:기독교문사, 1991. p. 277. 각주 35 재인용.


9) 국민일보, 같은 곳, 날연보는 이후에도 사경회 등 특별집회 때는 꼭 등장했고 아프리카교회에서도 이것을 모방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학지남」1권 2호)


10) 국민일보, 같은 곳, 전도에 나선 일반교인의 대부분은 자기 생계유지에도 급급한 서민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1) 이만열외, 같은 책, p. 277. 각주 49 재인용. 대구의 경우 1천명의 회중을 모아 5백명의 개종 결신자를 얻기도 하였으나 이후 완전한 교인으로 변화된 결실은 50명에 불과하였다.


12) 최무열, 통전적 선교 모델로서의 한국 초기 선교-사회복지와 복음전도와의 일체성 확립 -

http://cwmpcts.org/main/cwm-resources/study/mission-theology/02mission-theology/mychoi001.htm

한국 초기 선교의 특징은 강력한 영적 운동을 중심으로한 복음전파에 있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중심으로 백만인 구령운동, 성경공부, 성경을 중심으로한 문맹퇴치 운동 등 영적 운동은 보수와 진보의 세력을 막론하고 한국 사회 전체를 개선 계몽하여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3) 국민일보, 같은 곳, 이 운동이 교인들의 전도열을 진작시켜 미래교회의 터전을 준비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어드는 『이 운동에 관심이 쏠림으로써 한일합방의 시련기에 국내 평화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견해도 또한 밝히고 있다. 백만명 구령운동의 실패 원인과 관련, 이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14) 이만열외, 같은 책, p. 276. 각주 29 재인용. 비판적 입장에서 쓴 글들.


15) http://user.chollian.net/~ummaumji/html/96104.html 이 자료는 여러 참고자료를 짜깁기한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16) 물론 이 반감도 나의 사관(史觀)에 의한 것이라는 모순을 담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17)  물론 이 얼개를 자신의 것으로 해석할 책임은 독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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