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년이후]구원론, 김광열(강의안)

작성자lsg|작성시간06.11.13|조회수394 목록 댓글 0
 

구원론


2째시간.. 

0902


연구하는 자세

 조직신학을 공부해야할 필요성..


 공부하는 자세 3가지


1. 성경을  성경연구의 최종적인 권위와 기준으로 삼는 자세


우리가 생각할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볼때, 성경이외의 것들을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을 제한시키는 모습들을 발견할 때가 많다. 구원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다른 교리도 그렇지만, 구원론은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이 상당히 많이 영향을 주게되는 교리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이야기할때에도 성령체험이라든가 하는 것이 성령의 가르침을 제한시키거나 왜곡시키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의 경우에, 신학의 인간의 이성의 작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성의 잣대에서 수용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5장에 배드로가 두배에 가득차게 고기를 낚는 모습이 있다. 자유주의자의 해석은 그것이 이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고 했을때에, 고기들이 그물을 내리는 그 자리로, 몰려올 것을 미리 아시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단지 예수님이 그것을 아셨을 뿐이다라는 것이다. 성경의 이적적인 역사를 합리적으로 재해석 하려고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기 보다도 인간의 이성이라는 기준 절대적인 기준 아래에서 재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진 것이 바로 자유주의자들의 자세이며,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코넬리우스 반틸의 신학방법을 잠깐 소개를 하고자 한다.

Cornelius Vantil  의 전제주의 : 성경을 궁극적인 권위로 삼는 신학적으로 체계화 시키고 정리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자세를 생각하면서 신학방법을 정리하면서 그 내용을 보고자 한다.


미국의 개혁주의 변증학자중에 한 사람이다. 전제주의라고 말한다.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든지, 아니면, 인간의 경험이나, 진리에 의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전제되어야지만, 인간의 경험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수 있다는 것이다. 전제주의를 변증학의 영역에서 구축했다라고 할 수 있다. 변증학이라면 구 프린스턴, 비비 워필드, 핫지, 메이천 교수등.. 이들의 변증학자들의 자세는 무엇인가 하면, 조직신학을 할때에는 성경을 근거로해서 조직신학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학의 경우는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변증학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불신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제시하고자 할때, 이렇게 말하면, 불신자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은 성경을 믿으니까, 그렇게 믿지만, 나는 성경을 믿지 않으니까, 성경을 빼고 하자고한다. 그런데,


반틸이 보앗을때, 그것은 일관성 있는 변증학자의 태도가 아니다라고 한다. 변증학의 내용도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그 방법도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알미니안 적인 방법으로 기존의 변증학자들이 변증을 하였다. 자기 선배들의 변증학자들의 방법을 알미나안주의로 비판을 한다. 알미니안 주의라고 하면은 칼빈주의와 대조적인 개념으로서 인간의 전적부패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인의 상태에서 어느정도 선을 행할 수 있다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정도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알미니안 주의이다. 전적부패가 바로 여기에 완전히 반대된느 것이다. 여기에 불신자가 서 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불신자에게 접근한다고 한다면, 신존재증명이 있다.


 우주론적 신 존재증명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것이다. 인과율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있다. 하나의 결과가 비가 내리는 것이라면, 그 원인은 더운공기와 찬공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그 배후에 있는 또다른 대기의 이동이라는 원인의 결과일 뿐이다. 그 원은 또한 원인의 결과이다. 원인의 원인을 추적하면 제일 원인이 나온다. 그 제일원인이 하나님이다. 그것이 우주론적 신존재증명이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고, 믿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 왜 문제가 있는가? 이론적인 논리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중생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전제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방법역시도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변증학과 조직신학은 구분되어야 한다라고 보았다. (이전의 변증학자들)  그러나 반틸은 변증학도 조직신학과 마찬가지로 성경적 방법을 배경으로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변증학과 조직신학은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반틸이 주장하였다. 이것이 전제주의적인 방법이다.


 반틸의 전제주의는 변증학의 영역에서만 중요성을 가진 것이 아니고, 신학 이외의 다른 기독교적인 학문속에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J. E. Adams  개혁주의적 상담학자이다. 반틸의 전제주의를 상담학에 적용하려하였다. 기독교 상담학의 모습들을 보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세속적인 상담학의 방법으로 상담을 한다. 그 몸통에 해당하는 상담학의 원리와 방법도 성경에서 와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신학을 할 때에만 성경이 진리이고, 상담학을 할 때에는 성경이 진리가 아닌것처럼 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학과 마찬가지로, 상담을 할 때에도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상담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지시적인 방법,    지식적인 방법  : 비지시적인 방법이다라고 해서, 문제있는 사람의 내용을 들어준다. 문제의 성격을 들어주고, 그 문제에 대해서 들어주기만 한다. 비지시적인 방법이 성경적으로 문제가 잇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진정으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아담스는 이런 일관성을 잃어버린 상담학에 대해서 성경적인 기준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부부싸움을 하고 온 부부가 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상담한다.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는 죄에서 출발한다. 시기와 다툼, 이런 것은 다 죄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이다. 가정의 열쇠는 예수님에게서 올 수 있다. 상담학의 영역에도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책은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그 문제에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원칙적인 해결책과 원론적인 차원에서의 해답이다.


예배드릴 때에만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세상에서 철학을 할때나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 분의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 학문이 기초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구원론을 공부하면서, 상담학의 영역에까지미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신학의 내용들이 정리되기 위한 최종적인 권위로 성경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그것과 상반된다고 할지라도, 첫 번째 가장 큰 원리는 성경을 신학원리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조직신학의 많은 교리들이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이다. 어떤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무오교리..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무오교리를 무엇을 근거로 해서 고백을 하는가? 성경이 성경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 것을 정리한 것이 성경관이다. 인간론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기독론은 성경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종말론은 성경이 종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정리하는 것이다. 성경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해서 아닌 것 같으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성경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무오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무오교리를 말하기 위해서 다 항목별로 대조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책과 과학의 모든 교리와 대조해보고, 거기에 맞아떨어지면, 성경이 무오하다고 받아들이겠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에 성경무오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을 신학함의 최종적인 권위와 말씀으로 삼는 자세이다.



2. 겸허한 자세, 회개하는 마음

첫 번째 내용을 구체화 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는다. 성경적인 세계관 속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성경적인 세계관 속에서 신학의 내용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성경은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설명을 빼버리고 신학의 내용을 접근하면 틀리수 있는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기독교의 신앙의 내용들을 접근해야 한다. 신학의 내용들을 연구하면서,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고 신학을 하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분석해야 한다. 가장 쉬운 예가 바로 선택교리이다. 선택교리는 불신자들에게 접근하면서, 주의를 요하는 교리이다. 불신자들과 말하면서 선택교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선택교리는 이 가운데 있는 사람들 중에


로마서 9장.. 토기장이의 비유속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너는 토기장이가 아니라, 토기라는 것이다. 어떻게 쓰는 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는 것이다. 말할 위치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그런 질문들이 나타날 수 있다. 피조물로부터 영원부터 창조받으시기에 합당한 존재이다. 그것을 전제하지 못하고 나아갈 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소개하면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이 있다. 출애굽기 20장 32장 금송아지 사건... 3000명 정도가 하루에 죽는다. 33장에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만 경배하고 나만 섬겨야 한다. 이방신들을 만들어도 안된다.


 우리가성경에서 만난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과 존귀를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이런 요구가 합당한 것이다. 선택교리, 질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피조물로 지음받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이런 부분을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조직신학의 내용을 접근함에 있어서 이런 부분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죄인이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신학의 내용들을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공의의 잣대로 우리를 취급한다고 하시면, 우리는 몇배의 고통을 담당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회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그리려 한다. 참된 구도자의 자세란 하나님에 관한 나의 생각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하나님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를 듣기위해서 나오는 것이다. ” --- Calvin..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 있다. 우리구원의 여러 가지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듣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구원의 풍성한 측면들을 칭의, 양자, 성화, 소명, 중생, 이것들을 성경이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듣기위해서 나오는 자세이다.


3. 경배하는 자세

 신학을 공부하다가 보면, 신앙과 신학이 양극화되는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신학교에 문을 두드릴때에는 아골골짝.. 빈들에도.. 이렇게 찬송부르면서 신학하게된다. 헬라어, 히브리어, 1학년 2학년 올라가다보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의 열기는 점점 식어가게 된다. 우리 스스로 경험하게 된다. 이런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서 .. 조직신학은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논의에 그칠 위험이 있다.  이런 문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주의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구원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측면을 터치해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상당히 덜하지만,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많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부족한 경우가 있다.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지 않으면서도 구원론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이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목표를 주의하면서 그분앞에 감사감격하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직신학이 바로 이런 어려운 부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에 관한 부분을 정리한 것이 칭의교리이다. 사변적인 진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태복음 7장 23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지식적으로 안다고 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 야다.. 기노스코와 같은 단어의 의미, 지식적으로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느교회에서 몇 년간 봉사했는지, 다른 교회로 옮겨갔는지, 헌금을 일생동안 한 것이 얼마인지,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의 앎이 없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들의 사역속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그분을 정말로 인격적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역이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양자의 교리를 생각할 때, 거기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들이 도출되어질 때 성공적으로 이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인 공부가 아니라, 심령이 움직이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0916


성령님의 사역.. 성령론의 역사.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고하도록 하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1. 구약에서의 성령님의 사역

2. 예수님의 생애

3.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사역


1. 구약에서의 성령님의 사역

 신약의 오순절 이후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교회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정면에서 부여되지는 않는다. 구약에서는 신약에서만큼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용어상의 차이점도 있다. 성령이라는 단어보다는 하나님의 신  내신, 이런 용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엘선지자의 내용도 창 1:2에도 보면.  spirit of God  my spirit


성령님의 역사를 나누어 생각해보자.

1) 창조사역에서의 성령님의 동역 : 우주만물의 창조사역이 성부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생각하기 쉬운데, 창1:2에는 여호와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셨다라고 나타난다. 성령하나님의 사역이다.

2)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사역, 예언을 주시는 사역 : 구약의 예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느느 장면을 보게 되면, 여호와의 신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사야, 에레미야. 구약의 성경들이 기록되어질때, 성령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신약의 설명으로 비추어본다면, 벧전 1:26  --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서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에서 성령님의 사역들 가운데에는 임무를 맡기시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셨다. 출31:!~5절. 회막을 지으라는 명령.. 회막을 지을 일군을 세우는 것을 볼수 잇다. 브살렐, 오홀리압.. 두 사람에게 회막을 지을 능력을 동시에 함께 부여하는 것을 볼수 있다. -- 하나님의 신.. 스가랴.. 4:6 성전제건에 성령님이 역사.


3) 행정적인 능력을 부여하심  : 창41:38  - 요셉에게 주신 행정적인 능력에 대해서. 바로왕에 대해서.. 애굽의 난개를 타개하면서 나아가는 모습들. 바로가 요셉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너처럼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

민수기 11장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때, 대안이 나타난다. 70인의 장로를 세운다. 모세에게 임한 신을 70인 장로들에게도 임하게 하신다. 행정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모세에게 주신 여호와의 신이 동일하게 70인의 장로에게도 임하는 것이다.  신명기 34:9절.. 여호수아에게 임했던 지도력을 동일하게 부여해 주신다.


4) 카리스마적인 능력의 부여 : 사사들의 여러 가지 행적들.. 여호와의 신이 그들에게 임해서, 삼손, 옷니엘,,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들에게임해서 행함.


5)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삶속에 임하셧다. 신약만은 아니지만은 구약에도 영적인 삶가운데 임하셧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삶속에 도덕적인 능력과 영적인 삶의 능력을 일으키신 분으로 나온다. 느혜미야 9.. 시편 134편 선한 신으로 성령님을 묘사한다. 진리의 영이지만, 선한 신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함이나 거룩함.을 세워가시는 분이시다.


사 32:15~20  성령님의 사역을 의인을 만들어 내시는 모습. 평화를 만드시는 분.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만드시는 분. 에스겔의 환상// 많은 뼈들이 하나님의 새생명을 부여받고, 살아있는 존재로, 군대로 세움을 받는다. 에스겔의 환상은 신약에서의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예표하는 것이다. 죽어있는 아담의 타락이후에 죽어있는 사람들이 중생의 역사로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 성령의 역사에 의한 묘사이다.


어떤 의미에서 부분적이고, 앞으로 보다 완전한 의미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온전히 성취될 앞으로의 미래적인 사건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최종점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구약의 모든 성령의 사역은 이 한가지 목표점을 향해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성령의 사역을 이사야 61장은 메시야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메시야가 오셔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등등. 메시야의 사역의 출발점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스라엘을 회복케하는 메시야의 사역이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바로 메시야 사역의 완성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속에서 구약의 모든 성령의 역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구약의 모든 성령의 사역이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완전히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2. 예수님이 생애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 성령충만한 삶이었다. 예수님만큼 성령충만한 분은 없으셨다. 사역의 모든 과정과 삶의 마지막까지 성령의 사역을 진행하셨다.

1) 성육신 사건 : 삶을 시작하신 사건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신다. 성령으로 출생하신다. 이땅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증거한 세례요한의 증거를 보면,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공생애를 들여다 보면, 공생에의 시작에서 과정에서, 삶 속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고계신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실때에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했다고 하신다. 요단강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사탄의 시험을 받으러 가셨다. 광야로 시험을 받으러 가실때에 성령에 이끌리어 가셧다고 한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셨다. 성령충만하다고 하면, 사탄의 시험도 없고, 별천지의 세계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는 삶인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환난과 고통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뚤어갈 수 있는 것이  성령충만한 것이다. 무풍지대가 아니라, 태풍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수 잇다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받고 갈릴리로 오신다. 눅4:18절로 보면, 처음으로 읽으신 말씀이  사61:1~3의 말씀이다. 메시야 사역이 바로 성령의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출발되는 사역임을 예수님이 설명하신는 것이다.,


2) 공생애의 사역들 : 모든 이적들과 행적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져졌다. 마15:12절 이하에 보니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니까..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한다. -- 성령의 능력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너희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성령에 의해서 모든 이적들을 주시고, 그의 사역들을 이루어가신다. 눅10:17~21절.. 예수님의 감정조차도 성령안에서 이루어졌다. 기뻐하셨다--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파송하셨다. 기쁨으로 선교보고대회를 하는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셧는데, 그 기쁨이 성령으로 기뻐하사이다. 감정조차도 성령님의 기뻐하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충만한 생애였다.


성령님은 예쑤님의 삶과 사역을 온전히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신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구속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잇는 것이다. 진정한 동여고가 힘으로서 물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


3. 신자의 삶에서의 성령의 사역

 1) 신자의 삶의 시작에서 성령님의 역사 : 다음주부터 구원론의 각론들을 다룬다. 신자의 삶의 출발이 되는 사건이 무엇인가? 중생이라고 한다. 회심이라고도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처음 시작하는 사건.. 중생 혹은 회심이다.  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중생, 인간의 입장에서는 회심의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님의 비밀한 역사가 바로 중생이다. 인간의 인식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강편에서 이바지를 할 수 잇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행위조차도 중생을 야기시킬 수 없다. 성령의 비밀스러운 역사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그 중생의 사건이 주어지면, 그 사건이 인간의 역사속에서는 회심으로 이루어진다. 회심은 믿음과 회개로 이루어진다.


 중생은 물과 성령으로 주어지는 사건이다. 물과 성령에 대해서 중세시대나 초대시대는 물세례를 의미한다. 성령이라느나 것은 내적인 성령하나님의 중생케 하는 역사라 보았는데, 물이라는 것은 깨끗이 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같은 것을 의미한다. 둘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비밀한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회심은 믿음과..회개로 이루어지는데,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님의 역사이다. 회개는 어떤가? 죄를 깨닫게 해준느 역사도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다. 형식적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회개의 역사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다. 신자의 삶의 첫 출발의 사건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다.


2) 신자의 삶의 과정에서의 성령님의 역사 : 

   a. 능력을 입히신다. 요한복음 14:12 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한다. 이보다 큰 것도 한다,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한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보다 더 큰일을 한다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잇는가? 요16:7

 16:7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과 주님이 더 큰일을 하는 것은 무슨관계가 있는가? 오순절날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입혀주셔서 큰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순절날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성령이 충만해서 말씀을 증거하고, 그중에한 사람 베드로는 하루에 3000명 회개시키는 역사를 한다.


 b. 신자들 속에서 내주하시고 역사하신다.  : 신약의 성도들의안에 거하신다. 요14:16~17 14: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안에 영원토록 거하신다. 우리에게 조명해 주신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의 깨어진 형상이 회복되도록 하여 주신다. 외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역이다. 성령님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신다. 우리의 성품의 변화를 일으키신다. 우리안에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c. 성령님의 가르치시는 사역 : 요16:13~14

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방법이 듣는 것을 말씀하신다고 하신다. 누구한테?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림.. 에수님의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신다. 성령님의 가르치시는 사역은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라기 보다, 천국진리를 더 풍부하게 인도하는 사역이다.

요24:6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이 가르치시는 사역은 두가지 차원에서 성취된다. 예수님의제자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성취된다. 처음부터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있는 것은 성령님의 감화감동속에서 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자들의 삶속에서 성령님은 여전히 우리가운데에서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아침에 큐티를 했다.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오늘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가? 나에게 오늘 이순간에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가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유일한 선생님은 성령님이시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배급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속에 나의 영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주어진다.


d. 대언 사역 :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를 대신하여 빌어주신다.


e. 신자의 성화의 삶을 이루시는 성령님의 사역 : 신자들의 성품을 거룩하게,선하게 내적으로 변화시킨다.



0923 

구원의 서정 : 내적질서에 관한 문제. 인과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구원의 내용들을 연구하고 분석하는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관한 논의는 공식적으로는 18세기의 개신교 스콜라신학에서부터 신학적인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부터 구원의 섲어에 관한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이냐 듣고 믿음이냐?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중생이라고 한다면, 중생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인가? 우리의 성화의 삶으로 근거를 해서 중생이 주어졌는가? 성화이후에 중생이 주어졌는가? 아니면, 듣고 믿음이냐? 회심의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회심이후의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갈라디아서 3장 2절의 내용.. 구원의 서정에 관련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적용의 역사를 어떻게 개인의 삶에 적용시킬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과거의 기독교 역사속에서 이것이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세 카톨릭 로마 신학에서 나타난다. 성례주의,, 예전주의 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성례와 밀접한 연관속에서 이야기 된다, 구원의 은총이 제공되는 과정에 있어서, 교회에서 시행하는 7성례와 밀접하게 연된되어 말하고 있다. 구원의 역사가 제도의 틀에 묶여 버린다. 거기에서 구원에 관한 문제가 발생된다.


 칭의의 문제.. 적용되어지는 설명을 보면.. 우리가 칭의라는 것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순간적인 사건이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기 위해서 작년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칭의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의 카톨릭은 칭의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세례가 주어질 때에, 원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원죄의 문제 이후에도 신자는 계속 죄를 짖는다. 그 죄의 문제와 칭의의 문제.. 그 이후의 것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죽기 전까지 계속해야되는 것이다.,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만이 아니라 점점 의로워져 가는 것이다., 점점 칭의는 미완성적 개념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중세의 구원의 개념의 근본적인 문제중의 하나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 것이다. 성화는 예수믿은 후에 계속되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만,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법적인 관계상의 충돌이다. 이것을 혼동한 것이다. 이런점에서 중세신학은 칭의이후에 성화를 이야기한다기보다도 둘을 섞어서 이야기 한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이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칭의는 법적인 관계상의 변화를 말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순간적인 사건이다. 반면 성화는 내적인 성품의 변화로 신자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을 지적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신학의 지평위로 떠오른 것은 18세기 개신교 스콜라 신학이다. orthos salutis  구원의 서정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724년에 최초로 에프, 우디우스라는 사람이 언급했다. 루터파 신학자 야콥 카르코프가 이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개신교 스콜라 신학이라고 함은 종교개혁이후의 시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종교개혁시기는 한마디로 운동의 시기로 볼 수 있다. 17,8세기의 개신교의 스콜라신학의 역사는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주장들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체계화 한시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츠빙글리, 캘빈, 루터.. 신학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이다.


 이 중에 이루어졌던 논의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의 서정에 관한 문제이다.


 그 이후로 오늘까지 개신교의 많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많은 이론을 제시하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구원의 서정을 이야기하게 될 때, 몇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구원의 서정의 문제.. 이때 사용되어지는 용어에 관한 문제이다. 거기에서 서정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어지는 용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밖의 사람들도 그렇지만은 안의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용어에 있어서는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생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생과 칼빈의 중생의 개념은 다르다. 칼빈은 신자의삶 전체를 커버하는 것을 중생으로 보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자의 삶의 초기에 주어지는 성령의 역사라고 보지 않고, 신자의 삶 전체에서 진행되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서 중생을 본 것이다. 성경안에  중생이라는 단어가, 팔렌 게네시야라는 용어는 두 번 나온다. 중생.. 두개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힘든 것이다. 중생의 개념이 다양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중생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제시하는 부분은 디도서 3:5이다. 물로 씻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 이다. 깨끗하게 씻어주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렇게 말한다. 신약성경의 본문은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다. 중생을 생각할 때 다시한번 보겠지만..  “ 만물을 새롭게 하는 역사” 고후 5:17로 보고 있 다.   뉴크리에이션 .. 포괄적인 개념 마태복음 19:28에서 말하고 있다. 두가지를 조화시키는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중생이라는 조직신학의 개념이 어떤 하나의 획일적인 개념으로만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유동성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구원의 서정에서 나타나는 용어의 의미차이뿐만 아니라, 배열순서에 있어서도 다양성이 존재한다.

 중생과 유효적 소명의 관계.. 현실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유효적으로 부른 사람에 대해서 중생이 나타난다. 벌코프 같은 경우에는 중생이 선행한다고 정의한다. 잔머리교수는 유효적 소명이 선행한다고 한다. 다른 예를 들어본다고 한다면, 카이퍼는 칭의에 관해서 이야기할때, 영원전부터의 칭의를 말한다. 그러나 다른 신학자들은 주관적인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구속사역의 주관적인 적용인데, 창세전에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영적인 축복들에 대해서 개혁신학자들 안에서도 다양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3. 신학자들 사이에 성경안에서도 구원의 순서가 똑같은 순서로만 나열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칭의다음에 성화가 나타난다. 고전6:11에는 성화이후에 칭의가 언급된다. 이 본문이 사도바울이 기록할 때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염두했는지는 판단해볼 사안이지만. 정통적으로 이해되는 구원의 순서는 아니다라는 점이다.


4. 마지막으로 구원의 서정의 배열순서를 말할때, 우리가 말하는 초점이 무엇인가? 구원의 서정의 문제를 이야기할때, 시간상의 순서를 염두해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논리적인 순서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구원의 순서를 이야기할때, 중생 칭의 양자와같은 사건들을 한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과정이 아니라,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자와 칭의를 말할때, 칭의다음에 양자를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시간상의 차이보다도 논리적인 순서의 차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염두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을 말할때에 다양성과 나름대로의 융통성을 가지고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점을 넘어서서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  무용론을 접할 수 있다.


※ 구원의 서정의 논의의 필요성

1.  복음선포의 긴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  구원의 서정의 논의들을 논의할 필요가 잇는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사실은 복음전도를 한다는 행위속에서 우리가의식하든 않든 간에, 우리의 의식속에는 어떤 나름대로의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 우리속에 있는 구원의 서정에 관한 전제들이전도의 행위속에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두개가 상충된느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이 두가지가 서로 보완적인 개념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알미니안 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과, 칼빈주의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비성경적 태도를 가진다 하더라도, ---   올바른 복음전도의 개념들을 가지고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인 사역이다. 구원의 서정에 관한 올바른 접근이 필요하다.


2. 우리의 복음전도 사역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의 문제에도 도움을 줄 수있다.

 나의 객관적인 구속사역을 주관적으로 적용하게 될 때, 올바른 이해를 하게 되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잇다. 왜곡된 견해를 가지게 된다면, 쓸데 없는 것이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칭의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을때에, 마지막까지 고해성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전까지 신앙의 하나님의 칭의에 대한 확신을 확인할 수 없다. 소위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우릐의 신앙생활에도 균형적인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


3.  고전 14:34  성령하나님은 질서의 영이다. 주권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뜻대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신다. 그러나 그 말이 아무렇게나 이루어 가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의 과정들을 이루어가실때에, 일반적인 원리들을 올바로 찾아서 이해하게 될 때에, 올바르게 반영할 수있고, 더 큰 유익을 가져다 줄 수있다.



※ 구원의 순서

 잔 머리 교수의 구속론 :  “Redemption Accomplished & Applied” 성취된 구속, 적용된 구속

 1부와 2부로 되어있다. 1부는 기독론이다. 성취된 구속이다. 인류의 역사속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성취된 구속을 말한다. 2부는 구원론이다. 적용된 구속이다. -- 기독론과 구원론의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책이다.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말씀한다.

-- 좀더 고전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의 책은 -- 윌리암 펄킨스.. “황금사슬” -- golden tree  좀더 크게 4개의 단계로 설명한다.  1. 유효적 소명. 2. 칭의, 3. 성화. 4. 영화


잔 머리 : 최근의 글을 보면은 자세하게 성경을 근거로 설명을 한다.

 기본적인 구원의 서정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1.. 영화에서 구원의 서정이 시작할 수 없다.

2. 중생이 성화보다 앞선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 성화는 중생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변화되어야지만  진정한 성화를 이룩 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3:3, 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보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보고 듣는 것을 믿음의 행위 회개의행위라고 한다면은, 우리는 중생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생이 먼저 와야 되고, 그 이후에 회심의 반응이 기대되는 것이다.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짖지 아니하나니

 중생을 의미한다. 어머니 모태에서 나는 것. 자연적 출생..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중생을 경험한 자..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성화의 삶이다. 중생 다음에 성화임을 알 수 잇다.

요일 3:19 양자가 되는 권세를주셨다.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회심의 사건이다. 회심이후에 양자를 말할 수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 앞에 나간 후에야 축복을 말 할 수 있다.


 기본적이고 대표적 틀.  롬8:28~36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정 소명 칭의 영화라는 네가지 뼈대를 이야기 한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은 칭의와 믿음과의 관계가 있다.

롬 3:26, 27.. 갈3:26 -- 믿는 자를 의롭다 칭하신다. 믿음이라는 것은 회심이다. 회심후에 칭의를 부어주신다.


정리해보자. 예정-소명-회심(믿음 회개)-칭의-양자-영화


 중생이 빠져있다. 중생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라도 내게 나올 수 없다. -- 이런 말씀 성령의 중생의 durt가 없이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중생이 먼저 와야 중생을 근거로 믿음으로 주님앞에 나갈 수 잇다. 예정소명. 중생. 그리고 믿음이온다.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 인간편에서는 먼저 출발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을 터치해주셔야 그것을 기초로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다.


 요3:3  거듭나야 한다. 중생 이후에 신앙 회심이 옴을 알 수 잇따. 중생과 유효적 소명과의 관계.. 현실적으로는 거의 하나의 사건과 같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했을때, 하나님이 유효적으로부르신 그 사건의 하나인 것이다. 중생된 자를 부르신다고 하기 보다도, 하나님이 유효적으로 부르실 때에 중생할 수 있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이라는 회심안의 요소를 말할 수 잇다. 둘은 쌍둥이와 같다. 함께 가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회개할 수 없다. 참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다. 진실된 진정한 믿음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것이다. 두개가 합쳐서 회심인 것이다. 양자와 칭의의 관계가 있다.


 칭의라는 것은 하난미과의 법적인 관계상의 변화이다. 양자라는 것은 법적인 것을 넘어서서 신분상의 변화이다. 칭의보다 높은 단계에 양자이다.


 마지막으로 성화가 남아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신자의 과정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양자다음에 영화전에 이루어지낟.


 예정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양자 성화 영화  -- 하나를 더 말하면, 성도의 견인이 있다. 중생 이후에부터 마지막 영화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끝까지 이끌어 주심이다. 구원의 서정에 관한 신학자들의 문제제기가 있다.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이 주어진다. 개인적으로 교제의 내용을 참조하라.



0930

강의안에 나와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살펴보겠다.


성령의 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주님과 연합케하는 사역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성령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 구원론에 있어서 구원의 여러 가지 축복들에 있어서 전제가되고,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도 보면, 구원을 이야기하는 구원의 출발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보기도 한다. 28p에 인용을 하였다.


 성부가 불쌍하고 곤궁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부워주신 은혜들을 어떻게 받는가? 그분의 고난당하신 모든 것과 인류를 위해 하신 일들은...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그분과 한몸이 될 때까지는..  기독교강요 3권1장1절


 여러 가지 축복들을 이야기하지만은 그것이 나의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연합이 선행되지 않고는 그 축복은 나의 것이 되지 않고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를 이야기할때에 구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성령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개개인들에게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구원론의 각론을 말하기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하고 각론으로 들어가겠다.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볼 수있다. 연합을 말하는 몇가지들..


대제사장.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죄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던 대제사장.. 지성소로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 행위를 하였다. 그 대제사장이 행했던 일들은 온 백성들을 대표로 한 일이었다. 그가 행한 일은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것과 마찬가지로 간주되었다.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연합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그런식으로 간주된 것이다. 구약에서 다른 예를 본다면, 이사야서에 나오는 53장 4,6  절의 고난당하는 종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자기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고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고난당하는 종은 그가 대신해서 고난당한느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의 관계속에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 이 말씀들.. 바울이 말하는바.. 내가 이 비밀을 교회에 관한 비밀이다. 라고 말을 한다. 주님께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처럼..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교훈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몸으로 연합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있는 것이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이 가르침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25:31  양과 염소의 비유.. 염소쪽으로 간 무리들, 양하고 평가를 받는다. 내가 언제 이땅에서 예수님께 홀대를 하였는가? 지극히 작은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결국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이해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절 이하에서 나타난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없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연합을 말씀하신다.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연합의 관계가 확실할때에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확실한 연합이 견실히 이루어지는데에 연합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열매를 촉구할 수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연합된 자가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확실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가 그것이 유지되도록 도와주면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니까, 억지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우리에게 영적 비유를 가르친다. 열매를 촉구하기 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를 확고히 함으로 거기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의 여러 가지 축복들이 잇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확실하면 맺히는 열매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해서... 양자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이다. 성화.. 율법주의가 등장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 구원론에 있어서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틀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보면 대제사장적인 중보기도가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은 훨씬 더 체계적으로 신학적인 깊이를 가지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를 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그의 회심사건에서 발견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 거기에서 밝은 빛을 하늘에서 받게 될 때에 뉘시오니이까? 머라고 하시는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은 성도들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교회와 주님과의 연합의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의 헌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많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내용을 추적할 수 있다. 먼저 휘테를 라는 위하여라는 글이 있다. 로마서 오장 6절 8절..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신 일들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신 일이다라고할수 있는 것은 연합에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신일들이다. 그 외에도 바울이 애용하는 내용들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순 크리스토 롬 6:4~8  갈:2:10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것을... 등등등.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사역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천년전의 사건만이 아니고,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들도 오늘날 그것이 나의 그것으로 경험되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천년전의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오늘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활의 사건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표현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을 설명하는 중요한 표현이라고 볼 수있다.  그와 비슷하게 많이 사용된 표현이  엔 크리스도.. 그리스도안에 주안에, 그 안에 이런 표현들을 볼 수있다.  


 그릐스도안에라는 표현도 164회가나온다고 한다. 바울서신의 많은 내용속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들이 그 중심생각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의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해석에 대해서 칼빈이 반박한 글이 있다. 고전1:5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일 모든 구변과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다.l. 이런 말이 있다. in him 이라는말을 by him으로 말한다.. 에라스무스의 주석이다. 그런 해석에 대해서 칼빈은 반박한다. in him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풍족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을 그대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되었다는 말들.. 비껴갈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나타난다.


 바울서신에서 나타나는 신학의 중요한 모습으로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구라고 말할 수있다. 고전 15: 21~22  아담과 그리스도.. 아담안에서 몯느 사람이 죽었다. 행위언약의 행정을 말한다고 볼 수있다. 아담의 행정.. 아담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안에 모든 사람들이 놓이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 은혜언약의 행정이다. 앞부분에서 아담이 행위언약의 모든 것이 되어서, --  예수그리스도는 은혜언약의 머리로서, 대표로서 세움을 입어서 사역을 하셨다. 대표가 행한 일의 결과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배경의 원리가 대표의 원리인 것이다. 아담과 그리스도.. 신학의 원리가 아주 깊이잇는 뼈대로 등장하는 것이다. 배경의 원리가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인 것이다. 언약의 대표자로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일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된느 것이다.


 롬5:11 이하의  내용: 언약적 대표.. 아담과 그리스도..


 성경의 설명들을 정리해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타난다.


1. 하나는 우리가 그안에 있다.   2. 그가 우리안에 있다. 요한복음 6:56..  요일4:13

 그래서 이 두가지의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하는 일일 뿐이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합의 성격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성격이 어떠한가?  잔머리교수.. 시간의 관점에서 세가지로 나눈다. 창세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심  영원전의 연합으로 말한다.


 2. 성육신하신 사건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2000년전에 성육신 사건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3. 신자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실존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시간적으로 세단계로 나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연합의 성격을 말할때, 7가지로 설명할 수있다.영원한 연합이다. 엡1:3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출발은 창세전의 택정하신 사실에서 출발한다. 창세전에 택하셨다고 하실때, 그리스도안에서 택하셨다고 말하신다. 그리스도안에서의 택정함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실때에, 그분의 사역을 전제하시지 않고 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배제하고서는 택할 수 없다.

 영원속에서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성격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 롬8 


2. 언약적 연합이다. 앞부분에서 설명햇다. 고전15:21~22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은 은혜언약의 행정속에서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의 머리이고 대표이시고, 우리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의 성격으로 결속된느 것이다. 동창의 차원.. 동호회의차원이 아닌, 언약적 결속가운데에서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3. 육체적 연합..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가 2번에서 언약적 연합을 말할때, 언약의 대표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오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언약적 대표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같은 신분이 되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것은 그 대표의 자격이 인정되는 것이다. 히5:1  대제사장의 자격.. 사람가운데에서 취해야 한다. 사람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함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너희 속에 계실것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설명..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오순절날을 가리킨다. 성령이 임하셔서, 예쑤님이 제자들안에 있다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깯다게 된느 것이다. 그들안에 거하시는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의 연합..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강의안의 6번째


6.전포괄적 연합이다.  구속사역의 모든 과정들을 지나가시는데, 그 모든 순간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모든 구속사역의 요소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들에게 공유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 포괄적이다.   롬6:1 말씀...

 

 은혜를 크게 하려고 죄를 더 많이 짓겠는가? 2절의 내용을 보라.  바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그럴수 없다고 한다. 2절 하반절에 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안에 살겠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나의사건이 되는 것이다. 죽음의 사건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죄를 지을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밑에 보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참여한다. 살리심을 받았다.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 신자들은 죽음에 참여한 자일 뿐만 아니라, 부활에도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이다. 부활의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예수님만의 재림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화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죽음이 되는 것이다. 죽음과의 연합,, 죽음과의 연합.. 구속함과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전 포괄적 연합이다.종말론적 연합이다. 바울신학에서 나타난느 신약시대의 성격은 종말론적인 성격이다. already but yet.. 이미 주어져있다. 그러나 아직...


 이 연합의 중요성이 있다. 생략을 하고, 교재를 통해서 보충하라.


10월 7일


소명  필기 안함.. ^^  재준이꺼 볼 것

  유효적 소명 : 하나님의 선하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다음에 중생으로 넘어간다.

 중생 :

 중세카톨릭의 개념 : 세례의 의식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개혁자들은 세례의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초대교회로부터 중세 카톨릭 교회와  등등이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카톨릭교회.. 물과 성령으로라고 했을때, 물을 세례의식으로 연결시킴, 중생을 가져다 주는 통로로 생각을 하였다. 물이라는 것은 씻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죄악의 성품이 씻겨지는 것이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죄악된 것을 씻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이다. 말하는 상징일 뿐이다. 성례의식을 필수적인 통로로 만드는 예전주의적 해석은 성경적이 아니다라고 보아야 한다. 중세의 예전주의적 입장을 잘 설명해주는 문구 가운데,


 “Ex opere operato” = from the work performed  그 시행된 행위로부터.. 성례에 참여하는 성례행위.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고 보고 있다. 극단적인 사례로 신부님이 대중목욕탕에서 목욕하다가, 물이 튀었을때, 중생의 --- 역사가 일어났다. 중생이 주어지는 핵심적인 요건이 무엇인가? 시행되는 행위로부터 주어진다. 이것이 극단적인 예이지만, 예전주의를 설명해주는 문구라 할 수 있다.


 2. 알미니안 주의의 중생의 의미 :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우리가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인간이 믿음을 가지고 나왔을때, 나오는 것이다. 오히려 중생의 역사가 주어진 역사안에서 나타나는 것이 반응이다. 믿음을 가지고 나올 수 없다.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중생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을때,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려고 하는 믿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때에 중생의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을 강조하는 모습들..


 구개혁주의 : 중생이라는 것은 신자의 삶 전첼르 카바하는 것. 오늘날의 의미 :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역사의 첫 번째 사건일 뿐이다. 인간에게 주어질때에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중생이다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중생의 의미를 조금더 살펴보자.

 신약성경의 두가지 말씀 : 전통적으로 많이 인용되는 말씀  딛3:5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중생이라는 것은 씻기는 사건이다. 더럽고 부패된 사건이다.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건이다. 옛사람의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사건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하시는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디도서의 개념은 중생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마19:28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세상이 새롭게 되어 :“ 중생.. 팔렝.. 만물이 우주적인 변화의 사건에 신자가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창조 구원의 역사. 태초에 진행된 첫 창조의 역사. 오늘날 진행된느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리스도안에 연합되어질때에, 창조의 재창조의 역사가 진행되어진다. 그리스도안에서 진행되는 전 우주적으로 새롭게 진행되는 종말적, 재창조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고전15장의 말씀에 의하면, 첫열매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우주적 재창조의 역사의 첫 번째 프로젝트이다. 두 번째 열매, 새번째, 네 번째 열매를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그리스도가 시작하는 우주적 재창조의 역사에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종말적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안에서 진행되는 종말론적인 우주적 역사에 동참하는것이다.


 성경에 보면 중생의 의미를 재시하는 두가지 이미지를 보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개념. 고전5:17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은 중생의 변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죄인들에게는 새생명이 주어지고, 새롭게 창조되어져가는 , 새로운 창조물로 ---  두 번째 성경의 개념은 부활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엡2:1~5.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중생됨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되어지는 사건. 새생명의 존재로 연합되어지는, 새생명에 동참하는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3번째 내용을 보면, 중생의 필요성이 나타난다.

아담과의 상태를 보면서.. 아담의 타락이후에 인간은 육적존재가 되어버렸다. 영적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육적 존재인 인간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중생이 필요하다. 요한복음 3:5~6,,,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필요하다.


 아담의 타락이후ㅡ 인간은 영적으로 장님의 상태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비밀들을 깨달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한 일들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전적인 무능력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자연인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도 안생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뜻을 순종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의 역사가 주어지면,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변화의 조건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10월 14일

중생자의 마음을 새롭게 조명해 준다. heart의 의미보다, mind 지성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생하게 되면 중생자의 지적인 능력의 회복이 이루어진다.

noetic effect of Sin   아담의 타락이후에 부패한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 지적인 기능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가운데에는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 타락이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영적인 시야가 닫혀버린다.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깨어진 모습에 대한 성경의 설명중, 롬 1.. 18  하나님을 찾는자도, 깨닫는 자도 없다. 지적인 영역에서 불구가 되어진 것을 말한다. 불신자에게 아무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해도 깨닫지를 못한다. 중생이란 바로 이런 영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건이다. 죄의 영향을 없애준느 것이 중생인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시각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중생되어져서 우리의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지적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게 될 때에는 영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중생자의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완전한 구별은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무디어진 양심에 대한 언급들이 상당한 부분에서나타난다. 중생은 무엇인가?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5절을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물은 씻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딛3:5절과 연관할 수 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중생의 역사라는 것은 성령이 신자의 양심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고 정결케 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양심, 완곡한 양심들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것이다. 중생하기 전에도 양심이 남아있기 때문에 잘못된 일을 할때에 양심의 찔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당히 반응이 느리고, 습관화되면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도 못하게 된다.그러나 중생하게 되면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하면 바로 가슴아파하는 양심을 회복하게 되는 사건이 바로 중생인 것이다.


3. 의지의 해방이다.

 노예의지가 되었다. 타락이후에.. 그러나 중생은 바로 노예의지를 바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롬3:11  절반의 내용은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다는 설명이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려하는 결실의 상태가 없는 것이다. 결심의 상태가 없다. 의지적 결심의 상태가 없다. 불구가 된 것이다. 중생은 바로 의지의 불구가 된 상태로부터 의지를 해방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결정할 수 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4. 중생자의 감정과 욕망도 새롭게 해방된다.

 중생자가 여러 가지 변화를 겪지만 그중 하나는 감정적 차원의 변화이다. 새로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세상적인 일들, 세상적 욕망으로 사람들이 살지만, 중생한 이후에는 새로운 욕구의 방향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영혼깊숙이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믿음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보면, 보람과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찬양할 때 예배할 때 우리가운데 기쁨이 가득차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가져야하는 감정과 욕구들. 원래의 기능이 회복되어져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새로운 방향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이다. 새로운 창조의 역사이다. 신자의 저변에서 일어나는



 외적인 관계상의변화도 생각할 수 있다.

1. 죄와의 관계속에서의 변화 

 요한1서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중생자는 범죄치 않는다. 위로부터 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 범죄치 아니한다. 그다음에 이유가 나타난다. 악한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 중생자가 범죄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악한자로부터 하나님께 난자들을 지키신다는 것이.죄의 통치를 벗어난 것이다. 사탄이 그의 세력을 좌지우지한다. 자기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죄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의 통치아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악한자가 만지지 못한다. 그러나 중생한 이후에 죄의 도전도 없다, 사탄의 유혹, 시험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물리칠 수 있는 위치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죄가 더 이상 그것들을 도전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그런 위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의의 통치아래로 변화한 것이다. 과거의 죄와의 관계에서 이젠느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이런 의미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원칙적으로 죄와의 관계가 끊어진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2.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변화

 요일4장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중생한 자는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몸을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되면, 그 형제와 사랑의 관계로 지체의 관계로 연결되게 된다. 더 이상 끊어질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로 맺어지게 된다. 사랑의 튼튼한 끈으로 연결되게 된다.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3. 세상과의 관계상의 변화

 요한1서 5장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한나의 백서잉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세상을 극복하고 이기게 된다.


4. 예수님과의 관계의 변화.. 주님의 자녀가 됨. 주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됨.


중생역사와 말씀과의 관계

 중생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강조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역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안에서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약1:18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 기독교도 신비주의이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고 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서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그것이 신비적이만,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것이다. 중생의 역사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14장 16장.. 성령님이 와서 역사하시는데,   내것을 가지고와서 너희에게 알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중생의 역사가 주어진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는 회심의 역사이다.

회심안에는 믿음과 회개가 따라온다.


기본적으로 살펴볼때, 우리는 회개라는 의미를 단순히 죄를 깨닫는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와는 구별해야 한다. 가롯유다의 경우와 베드로의 경우.. 가룟유다도 자기가 한 일에대해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유다의 경우는 죄를 깨닫는데에서 끝나버린다. 닭이 운다음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거기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 끝나버린다. 베드로는 거기에서 돌아온다. 주님께로 나아아오는 부분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신앙과 함께 가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회개는 믿음과 함께 가는 것이다. 두개의 단어가 뜻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았을때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참 믿음은 회개할 수 밖에 없고, 모든 것은 믿는자만이 하는 것이다. 한 사건의 양면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영역에서 믿음과 회개의 선후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하나이다. 불가분의 관계이다. 칼빈의 경우도 회개는 믿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회개가 나오는 것이다. 정말로 올바른 --

 회개와 믿음중에 어느것이 먼저냐 하는 것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그 둘은 같은 근원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중생의 역사가 주어지면 그 가운데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두사람의 신학자는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쉐드.. 루이스 벌코프.. 믿음이 먼저온다. 쉐드.. 벌코프 회개가 우선한다. 이렇게 설명한다. 두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쉐드의경우는 믿음이 회개보다 선행한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그렇게말하는 것이다. 중생 역사에 있어서 믿음은 수단이고 회개는 목표다라고 한다. 중생은 회개를 향해서 지향하는 사건이다. 그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가능한 것이다.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데 회개는 가능하지 않다.

 셋째로 회개가 먼저와야 한다면, 이세상에 어떤 사람도 예수님께로 먼저갈 수 없다. 회개가 먼저일 수 없다. 믿음이 먼저와야한다. 그러한 회개를 하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은 율법주의적 회개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진정한 회개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음적 회개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참된 회개의 눈물이 흘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의미에서 전통적이라 할 수 있다.


 벌코프의 회개의 의미///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로서 회개를 의미한다. 결코 로마카톨릭적 의미의 회개는 아니다. 인격주의적 구원관을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16:8~  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령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한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일차적으로 성취된 사건은 바로 오순절 사건이다. 사도행전  2: 37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한다. 설교를 들은 사람의 반응이 “어찌할꼬?”이다. 죄에 대한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다. 그다음에 38절에 가보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37,,, 의 말씀은 회개는 아니다. 정상적 의미의 회개가 아니다. 이것을 벌코프는 회개라고 해석한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가 먼저온다는 것이다. 믿음으로반응하기 전에 먼저 주어진다.

 벌콮의 의미는 쉐드의 의미와는 다름을 이해해야한다.


데니 :  회개와 신앙은 쌍둥이와 같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한 사람이다. 신학의내용을 들여다보는데, 심리학적 원리들을 가지고 기독교신학의 내용에 적용을 한다. 회심의 사건에 있어서도 그것을 심리적 표현을 하는데에 있어서, 그 사람의 심리적 상태속에 죄의 부분이 강하게 부곽되면 회개가 먼저 나타난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 믿음의 반응이 먼저오게 된다. 회심자의 회심경험에서 그 속에서 의식이 어느부분이 강렬하게 나타나느냐의 문제에서 나타난느 것이다.


 정리 :  1. 회개의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순서의 문제가 나타난다.

   쉐드는 포괄적 의미의 회개를 말함. 벌콮은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회개를 말함.

 결론 : 신앙과 회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덴니의 설명과 같이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서 그 순서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같은 하나의 근원, 중생이라는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두개의 열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경적 어휘들 : 구약에 나타난 믿음이라는 단어.. 아만..    신약 : 피스튜오.. 아만이라는 구약의 단어는 확고히하다는 의미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히필로 나타날 때 믿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믿음을 말한다.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언약적 약속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약에 보면, 언약적 약속에 구체적인 표현이 예수그리스도임을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믿다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3. 믿음의 3요소

 지적인 요소, 마음으로 동의, 실천하는 헌신의삶의 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믿음은 그 믿음의 내용이 있다. 확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언약으ㅢ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믿음의 내용을 빼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없다. 절대자의 믿음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것이다. 믿음의 내용을 듣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으로 확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납득하고 확신하는 것.. 그래서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안된다. 이해하고 확신한 내용을 우리의 삶가운데에서 실천하는 헌신의 부분.. 행동으로 실천되는 믿음을 말해야 한다. 믿음의 삼요소는 세가지를 가지고 있다.


4. 믿음의 본질

 1.하나님의 주권성 :  믿음의 근원은 예수님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믿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의신앙생활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2. 믿음의 근원이 그리스도일 뿐만이 아니라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둘다 하나님의 은혜성이다.


  3. 인간편에서의 인격적인 참여의 부분이 있다. 이 선물은 우리가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다니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속에서 참여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은혜적 선물이지만, 우리편에서의 참여의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고난과 믿음을 서로 연결해서 설명한다. 고난을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고난이라는 것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선물은 아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믿음은 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느낀점을 쓰도록 하라.. 21일이 마감이다.



10월 21일

 회개에 대해서 강의안에 나와있는대로..

회개.. 성경의 용법. 회개라는 단어가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나함, 수브.. 메타멜로마이ㅏ.. 메타노에오. 에피스트페포.     나함이라는 단어는 심리적으로 애통하는 후회감을 가지는 상태이다. 수브라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두가지가 다른 의미를 가지낟. 나함의 사용은 누가복음 18:23에 보면, 부자관원이 영생에 대해서 질문할때, 예수님이 내 모든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부자관원이 어떻게 했는가? 근심하며 돌아갔다. 말씀에 도전해서 애통한 마음을 가지기는 했으나, 말씀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는 안타까워할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부부닝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슈브를 말할 수 있다. 슈브가 쓰인 사례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본포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슈브라는 단어가 씅니다. 실재적인 회개는 의식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나, 금식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외적인 행위만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까지 의미한다. 참회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약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거기에서 죄부분에 대한하나님의 계획과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께로 돌아오는 것까지를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참 회개는 참 믿음을 가진자들에게서 인정되는 것이.


1. 자신의 죄악됨을 내어버리는 것이다. 죄의 문제를 씻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라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나아질 수 없다. 두려움 때문에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은총의 빛을 바라볼때에 나아갈 수 있다.

3. 자비를 깨닫고, 의로움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까지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까지를 말한다.


신약에서 말하는 단어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오고 마음을 고쳐먹고 나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참회개를 말한다. 회개라는 것이 감정적 후회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만으로 성경이 말하는 모든의미를 포괄할 수는 없다. 은총의빛을 바라고 나아가는 데까지 생각해야만 한다.


2번째로 회개의 필요성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성품을 감안할 때, 그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부패한 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은 성품의 번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이땅의 성품, 죄악된 성품들이 변화되고 번혁되어야 하는 것이. 그런 번혁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차원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의 역사를 하나님이 주도하시지만, 성령의 역사에 호응하며 보조를 맞추어, 옛사람의 습관을 버리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믿을때에 돌이키고,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이켜야 하는, 우리의 발을 이땅에서 하나님의 곳으로 옮겨야 하는 지속적인 성화의 차원에서의 회개를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도 회개의필요성을 말한다.회개라는 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 마틴 루터-- 전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옛사람의 태도에서 고쳐먹어야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말하기를 신자의 생애는 회개로서 특징지워진다고 말한다. 크리스챤 라이프,,is characterized by 회개..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회개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갈때까지 옛사람의 성품을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수요나, 금요기도회 때, 눈물 흘리며 회개기도를 하시는 권사님들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한다. 초심자, 살인. 도적질, 간음.. 말씀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경건하게 나아갈 수록 우리의 깊은죄를 보게 된다. 흔히 말하는 대로 밝은 태양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록 자신의 흠집을 더욱 잘 보게된다. 자신의 흠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은 멀리있을때에다. 자신이 더욱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로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더욱더 깨끗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삶이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본질적 차원의 작업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완전주의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다. 칼빈도 성자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회개하고 통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두 번째 성령의 획기적인 역사가 있기 전에는 ... 부등켜 안고 회개해야 한다. 자신의 적은 죄악된 부분까지도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이다. 성화될 수록 , 경건해질수록 담대해야 한다. 겸허해져야 하는 것이다. 선을 쌓고 자신의 수련을 하고, 덕을 싸으면 싸을 수록 세상것은 교만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숙할 수록 더욱 매달리게 된다. 신뢰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대한 부분이다.


 회개의 내용이다.  그것은 뒤로 넘기겠다.


4. 회개의 도구

 회개의 수단. 무엇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회개의 도구이다. 회개를 회심의 한 부분이라고 볼때, 회개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이다. 회심의 과정이다.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의 선포와 말씀의 내용.. 우리의 마음을 회개시키신다. 말씀이 무엇을 가르키는가? 회개케 하는 말씀..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것만을 가르킨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것만으로 진정한 회개가 주어질 수 없다.

 율법이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게 한다기 보다, 낙심하게 한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롬3:19~20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할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불가능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나함이라든지, 메타멜로마이의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까지를 의미한다고 볼때,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잡힐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율법자체가 우리를 일으킬 힘을 가지지는 못한 것이다. 우리의 모든 입을 막은 뒤에 그리스도의 절망적인 부분을 일으키게 한다. 주님에게로 나아가 복음의 능력에 붙잡힐때에 회개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진정한 회개가 가능해진다.


회개의 3요소 :  전인격적인 사건이다. 전인격적인 사건은 지적인 정적인 의지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지적인 요소, 정적인 요소, 의지적인 요소가 있다.

 지적인 요소 : 부패한 자신의 모습,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인정하는 것이다.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지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다.

 정적인 요소 : 애통하며, 슬퍼하는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다윗의 모습과 같이 시51편.. 통회하는 심령으로 침상을 적신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회개할 때 감정적인 측면이 나타나게 된다. 감정을 억누르는 측면. 전인격적인 변화라 할때, 이런 측면을 너무 일부러 부곽시킬 필요는 없다.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  의지적인 요소.. 지적으로 깨닫고 감정적으로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실행해 옮기는 의지적 요소가 있다. 탕자의 모습과 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행동할 수 있다.


 회개의 내용.., 회개의 결과..

 1. 죄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한다. 후회하는 감정. 죄로부터 떠나려는 결단과 결심을 하게 된다. 죄에 지배받지 않고 죄를 대적하고 다스리는 새로운 시각과 태도를 가지게 된다.

 2. 자신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가진다. 자신을 죄인으로만 생각한 과거와 달리,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새로운 태도를 가진다. 용서받은 죄인임으로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에 매진하게 된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소극적 신앙태도를 버리게 된다.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이 주셨는데에도 계속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기의 죄짓는 부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은 벗어던져야 한다.

3. 하나님게 대한 새로운 이해.. 자비로우신 은혜로우신 분임을 깯다게 돈다.



칭의의 영역

 다양한 오류와, 주장들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야 한다. 칭의교리는 근본적인 항목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의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할때에 다른 종교들은 다양한 형태가있지만, 궁극적으로 자력종교라 할 수 있다. 자기가 어떻게 선을 쌓고, 고행을 하고, 실적을 쌓아서 신에게 이르려 하는 인간쪽에서 신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은혜로 인간에게 내려오는 종교이다. 인간의 실적이 고려되지 않는다.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은혜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교리가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런 가르침이 로마카톨릭에 의해서 퇴색되었다고 생각했다. 믿음으로 은혜로를 말하지만, 이런 부분이 약했다. 오직 믿음으로,  믿음 + 행위.. 고해성사.. 개신교에서 이해하는 이런 칭의교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결과로 은혜를 받는것이다.


 칭의교리를 이야기할 때, 의를 말하는데, 의의 의미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의 의가 아니다. 우리의 주관적 차원의 의가 아니라, 법정적 의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속에서 이야기된느 법정적 선언의 의이다. 그 말은 우리가 콜트에서 법정에서의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에게 칭의함을 받았을 때에, 법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주관적인 변화는 없는 것이다. 심겨진 변화.. 내부적 변화가 필요하다. 내부적 성품의 변화는 칭의 이후의 성화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어서는 안되나,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도덕적 변활르 일으킨 후에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를 뒤섞어놓은 로마카톨릭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정적 의미의 선언인 것이다. 내부적 차원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이다.

 정죄 받음의 상대적 개념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의 관점이 아니고, 어떤 사람으로 선언되느냐의 관점에서 칭의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 받은 사람들이다.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합병.. 그리스도와 연합했다고 할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된다. 우리는 죄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우리를 바라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내부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칭의가 이를 이루는 것이다.


죄인이 의의 용서를 말하나, 그러나 거기에서의 의는 종말론적 의를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때의 의가 선언된 것이다. 종말론적인 의.. 그 의가 지금 이미 확보된 것이다. 예수님의 의를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받는 것이다. 우리가 심판대 앞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의.. 얼마큼 성공하는 것인가? 복음적 신자의 의... 최종적 결론.. 로마카톨릭도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금 의롭다 함을 받은 의는 종말론적인 의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의 종류와 동일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이다. 심판대 앞에서 내어놓을 의는 바로 예수님의 의밖에 없다. 인간의 의를 근거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의의 근거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11월 4일

 

 칭의에 대하여..  지난 두주간동안 이야기 했다. 칭의는 원래 오래걸리는 것이 아니다. 오늘 끝낸다.


 강의안에 4번에 칭의의 수단에 대해서 나온다.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메,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음. 합 2:4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근본적인 칭의의 원천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구속사역이다. 그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단이 바로 믿음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도구적 수단이라고 한다. instrument 라고 한다. 믿음의 성격을 할 때에, 비공로적 수단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지만, 우리의 어떠한 믿음의 성숙의 정도라든지, 믿음의 공덕등을 근거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고, 하나의 통로적 차원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의지하는 믿음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공로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이다.


 5번째, 영원으로부터의 칭의이다. justification from eternity

 하나님의 은혜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리이다. 17세기 칼빈주의의 특징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성, 은혜성을 강조하기 위한, 극단적 칼빈주의자의 가르침 속의 한가지이다. 영원에서의 칭의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이야기 되는 칭의, 오늘날 우리 신자의 삶에서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칭의 3가지를 말할 수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것을 말한다. 이것을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있다. 믿음의 행위보다 더 선행하는 우월하는 강조하기 위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푸시는 칭의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다. 상태나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성, 주권성을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칭의교리의 여러 가지 오해가운데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또다른 하나님의 속성들과의 균형속에서 이것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거룩하심, 공의와 같은 것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다른쪽을 보지 못하면, 또다른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11장 4절에,, 선택자는 성령님께서 정하실때에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들에게 적용하기 까지는 칭의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을찌라도,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에게 적용하기까지는 칭의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 구원론의 관점에서 말해지는 부분인 것이다. 영원에서의 문제점들을 몇가지 말할 수 있다.

문제점들

 1. 이 영원으로부터의 칭의교리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성경속에 없다. 영원에서의 작정은 말할 수 있다.  작정의 차원에서는 말할 수있으나, 칭의라는 것은 실제로 , 영원전에 시행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2. 성겨에 가르치심들을 찾아본다면, 롬3, 4장에서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을 말할 수있다. 롬4:25에 나오는 바울의 칭의에 관한 말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심.. 칭의의 축복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안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축복이다. 롬4:25 말씀을 보면은 칭의의 축복은 영원속에서 주어진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시공간의 역사속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다. 영원속에서의 하나님의 작정으로서 말할 수잇다.

3. 바울의 설명가운데, 롬3:26을 볼 수있다.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앞에 믿음으로 나온자들, 믿음을 통해서 칭의의 축복이 주어진다. 칭의를 받는자의 믿음의 행위와 분리될 수없다. 영원전에 주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전제하고 있고, 그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전제로해서 주어지는 축복임을 말하고 잇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의 칭의교리의 문제점들을 생각할 수있다.


이것이 함축하는 잠제적인 위험들을 3가지 더 지적할 수있다.

 1. 성경안에서 제시된느 두가지의 강조점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은혜가 있다.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주권적 하나님의 역사이고 은혜이다. 그것과 함께  성경은 믿음으로 반응해야한다는 명령을 하고 잇다.  믿음의 수단성에 대한 강조가 또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성만을 강조하다가, 믿음의 수단성을 약화시키는 결과가 나타난다.


2.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은혜성을 분명히 제시하는데, 믿음의 수단성을 제시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성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원에서의 칭의 교리의 약점이다. 하나님의 은혜성이라는 것은 영원으로부터의 칭의교리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없다. 믿음의 성격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성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공로적 믿음이 아니라, 비공로적 믿음이다. 수단으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때, 그것이 공로나 신앙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정의할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수단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비공로적 수단임을 말하기 때문에 믿음의 수단성을 아무리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무너뜨릴 위험성은 없는 것이다. 믿음의 수단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잘못된 오해이다.


3. 칭의라는 것은 단순한 선언 이상의 변화를 가리킨다. 칭의는 단순히 창세전에 하나님이 선포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화르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사건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하고 있다. 칭의는 연합속에서 주어지는 축복이다.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우주적 재창조의 역사.. 변화의 한 측면으로서 한 aspect로서 칭의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공허한 픽션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칭의는 --  예수님의 구속사역,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 신자의 연합사건.. 실제적인 변화에 기초한 예기되는 영적인 축복이다. 영원속에서의 사건으로 말할 수없다.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신자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건속에서 주어지는 것이 칭의이다.


칭의와 선행과의 관계

 칭의교리를 말할때, 믿음에 대한 강조가 나타난다. 오직 믿음이다. 믿음을 강조하면,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칭의교리에 대해서 말하고있다. 믿음에 대한 강조가 나탄나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율법이라든지, 선행이라든지, 행위의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성과 상충된 것으로만 오해하기가 쉽다. 믿음의 원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말할 수잇는 것이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은 선행이나 신자의 행위나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립된느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삶속에서 빠뜨릴 수 없는 반드시 나타나야할 요소가 된느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칭의와 선행과의 관계에 대해서 반드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선행을 구원의 삶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한다고 해서, 선행이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이라는 것은 칭의를 받은 사람에게서 필수불가결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강조점과 바울서신의 가르침과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야고보서 2:24을 보면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 2:24


 상충되는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문맥을 보면, 바울신학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창15장의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언약이 맺어지는 장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속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를 설명한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22장에서 보니까, 순종의 행위로 확정됨을 보게 된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행함으로서 확증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있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만이 아니다라고 할때에, 믿음만이라고 하는 것이 가르키는 것은 죽음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죽은 믿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행위가 수반되는 참 믿음.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참 믿음.. 야고보가 대비시키는 것은 믿음과 행함을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짓믿음과 참 믿음을 대비하고 잇는 것이다. 참 믿음은 행함으로 묘사하고 거짓믿음은 믿음만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라고 할때에 그 믿음은 사도바울은 참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갈 5:6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같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창15에서 하나님앞에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위가 첨가된 믿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참 믿음임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의롭다 칭하신다.  그 믿음은 동일한 믿음이다. 죽은믿음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주어지는 믿음이다. 우리는 인간차원에서 봤을때, 행위의 확증으로서 봐야지만 인간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칭의와 믿음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내용.

 우리가 야고보가 말한, 믿음과 행위 이런 부분에 대해서생각할때, 성경이 믿음을 이야기할때, 믿음은 진공속에서 주어진느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문맥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진공속에서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믿음의 소유자의 현실의 상황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가 믿음을 가졌다고 했을때,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가졌다고 하는것이다. 구원론을 말할때,  구원의 서정을 말할때에 직선적인 접근방식을 가짐으로 --- 그것을 말할때에 구원의 서정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바라보아야됨을 말한 적이 있다.

어떻게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는가? 믿음의 은총, 칭의의 축복이 어떻게 행위와 연결되는가? 어떻게 성화와 연결되는가? 전통적으로 연결시킬때, 칭의와 믿음을 추상적인 개별적인 개념으로 생각할때, 연결시키는 어려움이 발생한다.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연결시킬때, 그것이 자연스럽게 접촉점을 발견하게 된다. 믿음이라는 것이 진공속에서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진공속에서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이다. 칭의는 자연스럽게 성화와 연결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그리스도와 연합된속에서 자연스럽게 성화로 나아가게 된다. 진공속에서 주어진 개념으로 생각하지말고, 내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칭의만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반드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칭의는 단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화와의 불가분의 관계속에 있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  칭의와 성화 이 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성화를 생각할 때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11월 11일


양자됨의 의미


하나의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 우리가 그 세가지를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할지라도, 그 대상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칭의와 중생과 양자를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칭의를 생각하게 되면, 칭의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재판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중생을 생각할 때에는 새생명의 창조자로 우리를 만나고 계신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양자라고 했을 때에는 우리의 영적 아버지.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관심하시고 돌아보시고, 관계하시는 영적 아버지로서 만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칭의와 양자와 중생은 분리될 수 잇는 사건은 아니지만, 구분할 수 잇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양자... 중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내적 존재의 변화를 말한다. 양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내적 존재의 변화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기보다도 우리의 내적 신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구원의 서정 앞부분에서 말할 때 했듯이, 칭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법적인 관계상의 회복을 말한다. 양자라는 것은 법적인 이상의 하나님과의 가족의 관계, 더 친밀한 관계의 삶을 허락하신 축복으로 생각할 수잇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롭다라고 선언해주시는 것.. 그것 역시 큰 축복이다. 그러나 칭의의 축복보다 양자의 축복이라는 것은 훨씬 더 가까운 교제의 길로 들어갈 수 잇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큰 축복이다. 그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kf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확신이라는 부분

 확신에 대해서는 생략을 하겠다. 성화가 필요한 것 같다.


 성화의 주제로 넘어간다.

 성화   : 그리스도를 배제하고는 말할 수 없다. 크리스챤이 말하는 성화는 도덕적 삶, 윤리적 삶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삶이 성경이 말하고 있다. 성화와 그리스도라는 방향으로 성화를 말하게 된다. 강의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화”라고 말하게 된다.

 첫째, 성화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화이다. 고전 1:30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개혁신학에서 성화론을 강조할 때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성화를 말한다.


1.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성화이다.   히12:2  2:10 예수그리스도 구원의 주, 믿음의 주.. 여기의 주라는 단어는 아르케고스라는 단어가 쓰인다. pioneer 나 author 의 의미를 지닌다.  αρχηγος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잘아는 선두 등산인을 잘 골라야 우승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성화의 삶가운데 잇다. 선두 등산인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들을 다 이루셨다. 칭의의 근거에 대해서 읽었듯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십계명의 모든 내용들, 모든 성경말씀들의 요구들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 앞에 성화의 삶을 사셨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삶을 살수 잇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분을 우리의 모범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in his steps ” 그분을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성화의 선두자가 되신다. 그런 의미를 바라볼 수 있다.


2. 예수님이 우리의 성화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성화의 모범이실 뿐만 아니라 원천이 되신다.  요17:19  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의 성화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사셨다. 오늘 우리의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져가는가? 그분과의 교제속에서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져 간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은혜언약의 대표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모든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그 중에 하나가 성화이다. 예수님 안에 우리의 성화가 예약되어 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하여서야 성도의 성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참여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주어질 수 잇다.

 잘못 오해하기 쉬운 것은 개신교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가르침에서 중세 카톨릭의 오류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 구별하는 방식이 칭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편의 일이고, 성화는 인간의 편의 일이라고 말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도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화라는 것도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그리스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성화

웨스트민서터13장 1절 : 성령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성화된다. 신자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고 있다. 사역의 효력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 수단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속에서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성화된다는 것이다. 도적적인 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성화의 개념이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의 가르침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믿음과 선행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나타난다.


 로마서 6장 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 말의 맨 앞부분의 서두가 그런즉으로 나온다. 5장에서 나온 것을 기초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질문의 전제는 은혜의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잇다. 은혜의 원리가 5장에서 선포된다. 하나님의 은총의 원리안에서 제공되는 칭의의 축복이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로를 이루지 못했을 지라도 의롭게 된다는 은혜의 원리를 말한다. 은혜의 원리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은혜의 원리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우리가 죄를 계속 짓게 되면은 그 많은 죄를 그 은혜가 크게 제공된다. 아주 괴변이다. 성화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우리가 은혜의 원리가운데에서 칭의의 축복을 받았는데, 그러면 성화의 삶의 필요성이 확립되기 힘들지 않겠는가?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답변한다. 6:2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는 삶이 불가능하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는가? 다음에 3절에서부터 말하는 내용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이런 설명을 계속하게 된다. 죄에 거하는 삶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니까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은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의 관계, 복음의 진리가운데로 인도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이다.


 우리도 책에 기록했다. 다음과 같이 5가지

1.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다,

 그것이 첫 번째 바울의 논점이다. 5장의 관점이다. 한사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2. 우리가 죄사함 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한다.

 그분과 우리의 연합이기 때문에 그가 대표하는 것이 모든 백성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칭의함을 받은 것이다. 진공속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받은 것임..

3. 우리와 연합한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

4. 우리가 죄에 대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므로,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6장의 논리)  이 세상의 영향력 아래 존재하지 않음이다. 죄의 지배하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죽음의 권세 안에 이르셨다가, 죄의 지배아래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을때,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죄의 지배아래 있는 존재가 우리는 아니다. 죄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5.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이므로 죄에서 거하는 삶을 계속할 수 없다.

성화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초로한 설명이다. 칭의의 배경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진공속에서 주어진 칭의의 축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축복이다. 죄에 대하여 죽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이다. 우리는 죄에 거하는 삶을 더 이상 거할 수 없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성화에 끼친 영향

  1.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을 가져왔다.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 주어진 성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다.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생각해보라. 완전주의자들.. 그들의 오해.. 이 로마서 6장 죄에 대한 완전한 해방의 의미로 생각한다. 어떤 영적인 갈등이나 싸움이 없는 전격적으로 옮겨진 것으로 생각한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제2의 성화로 생각한다. 제2의 성령의 획기적인 변화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이분법으로 설명.. 웨슬리의 완전성화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을 말하는데, 앞으로 발생할 사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건으로 바울은 말하고 있다. 2절 말씀 : 그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죽을 우리가, 이렇게 미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말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3절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이미 세례받은 자이고, 장사된 자들이다. 중생한 자들에게 주어진 사건으로 설명된다. 중생후에 경험되어질 두 번째 또다른 역사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성령의 축복중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생시 주어진 죄에 대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완전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내용이 다르다.

 우주적 죄의 세력의 무너짐을 의미한다. 죄의 세력에 대해서 어던 인격적인 인격화된 의미로 비유적으로 설명하면서 아담의 타락이후로 인류에게는 죄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죄의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들ㅇ게 통치하는 왕으로 군림했다. 이런식으로 설명.. 사망이 왕노릇한다. 롬5:21   죄의 세력을 통치하는 왕.. 죄의 종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이런 표현이 나온다. 아담의 타락이후로 모든 인간들에게는 죄가 다스리는 죄의 통치안에 존재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죄의 통치가 무너진 그런 결과를 나타내게 되었다.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의 결과,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롬6장의 전반부의 내용을 결론지으면서 12~14에서 성화의 삶을 권면한다.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 14절에서 그 근거를 말한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기 때문이다.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이 가능한 것은 죄가 너희를 더 이상 주관치 못하기 때문이다. 죄의 노예가 됨.. 죄가 이끄는 데로 살 수 밖에 없다.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이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죄가 인간을 다스릴 수 없다.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사실의 의미는 죄의 통치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죄가 우리를 다스리는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열어준 것이다.

잔 머리 교수의 결정적 성화의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머리 교수의 결정적 성화.. 점진적 성화는 말하지 않았다. 머리 교수는 점진적 성화만으로 다 말할 수 없다. 결정적 성화도 있다. 죄의 통치가 끊어졌다는 사실, 의의 통치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결정적 성화는 점진적 성화를 가능케 하는 , 점진적 성화의 동기가 되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11월 25일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생에서 영화로 나아가는 단계는 굴곡이 있는 단계이다.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마지막 날까지 이루실줄을--- 확신하노라.. 예수님의 일이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신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교리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포기하고 다른 교리는 받겠다는 것이 안된다. 견인교리와의 맞물린 교리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쇀ϨϨ͒ɘꘘ̈́Ϩ͒ɘꘘ̈́Ϩ͒ɘꘘ̈́Ϩ͒ɘꘘ̈́Ϩ͒ɘꘘ̈́새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중생사역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완성을 영화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중생에서부터 영화로 나아가는 과정이 직선적 그래프를 그릴수 있는 사람은없다.

                                                        영화의 단계..


                      중생의 단계...



중생에서 영화로 나아가는 단계는 굴곡이 있는 단계이다.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마지막 날까지 이루실줄을--- 확신하노라.. 예수님의 일이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신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교리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포기하고 다른 교리는 받겠다는 것이 안된다. 견인교리와의 맞물린 교리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칭의교리를 생각해볼수 있다. 칭의교리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종말론적 의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가 종말론적인 의라는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다. 현재에도 우리에게 유용하지만, 마지막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도 충족한 근거가 된다는 면에서 종말론적 의라고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땅에 살때에 예수님을 처음믿고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선언받는다. 오직 예수님의 의에 기초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날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최종적으로 심판의 선언을 내리시는데, 그때에는 지금과는 다른 근거로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때에도 그리스도의 의만을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 신자의 의가 함께 고려되어서 최종결론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도 역시 예수님의 의, 예수님이 성취하신 의만을 근거로 성취되는 것이다.그것이 종말론적 의이다. 이 의의 개념은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서는 믿은 후에 생활을 함께 고려한다고 하면,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될지를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칭의에서의 의가 종말론적인 의임을 확인해주는 것은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둘째로 선택교리를 말할 수 있다. 인간편의 근거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뜻속에서 택함을 입은 것이다.인간의 조건에 의해서 영향받지않은 선택이다. 모든일을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역사를 따라서.. 예정속에 선택받은 사실은 우리가 택함을 받은 -- 이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그것을 이루시는 것이다. 어떤 상황도 인정될 수 없다.

 예수님의 중보사역의 효과의 항속성..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행하신 사역의 두가지.. 헌재사역.. 대언사역..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우리를 위해서 대신 답변해주시는 사역.. 항속적 사역이다.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구약의 레위 제사장 직분을 비교하면서(히) 갈리고, 갈리지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항상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갈리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항상 간구하시는 사역.. 성도의 견인의 사실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변치않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죄의 문제를 계속해서 간구하시는 것이다. 신자의 견인교리를 함축한다.

 성령의 사역.. 성령님의 보혜사의 사역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너희속에 영원토록 계시겠다고 하신다.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중생된 존재안에 영원토록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성령님이 떠나시는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함께 계셔서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책임지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와 끝까지 함게 계시기 때문에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필요는 있다. 떠나시지 않으니까, 피곤한 것은 우리이다. 우리는 사실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할려면, 빨리 포기하고 옳은 길을 가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말을 잘 들으면 순풍의 돛을 달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말 안들으면, --- 요나처럼 고생실컷하다가 영화의 단계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이 하나ㅁ의 백성들의 안에, 영원토록 내줏하신다고 하면은 그것은 바로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성령론과 맞물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 롬8:31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잇는 것이 없다.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이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견인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견인교리와 관련된 기독교의 기본교리들을 비교할 수 있다.

 

 이렇게 교리저그로 설명한다고 하더로도, 실제 생활에서 그렇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같이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지금은 떠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목사중에서 떠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 교리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교리적으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견인교리의 반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성경안에도 신자들이 타락하는 사실을 말하는 듯한 부분이 있다. 성령을 맞보고 배도한 자들.. 이런부분에 대해서 말할 수 이쓴 것은 조직신학적 발견된 객관적 교리 진술과 목회상황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일들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조직신학적 객관적 교리 진술이라는 것은 성도의 견인교리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객관적 교리진술로 말할 수 있지만, 목회적 상황에서 언급되어지는 표현들은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새신자가 교회에 왔다. 세상의 일들을 끊지는 못했지만, 교회에 왔다. 이 사람이 은혜를 받았지만, 또 내려갈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더 깊숙이 빠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너 한번 예수 믿었으니까, 다른 대로 갈 필요가 없다. 방종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당신이런 식으로 계속 살면 지옥에 갈수 있다. 신앙에 박찰르 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선택받은 자라면 지옥에 갈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므로 권면의 차원을 가질 수 잇는 것이다. 이론적가능성은 있다. 이런 상태에 머무르면 지옥에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불가능하다. 성령님이 가만 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목회적 상황에서 그런 언급을 했다고해서 그것이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임은 아님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두 번째로 타락한 이들은 사실상 명목상이 신자였을 수 잇다. 한국교회 성도가 1200만 , 1000만 800만 이다. 일너 이야기를 하는데, 명목상의 신자를 제외하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속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교인이라고 해서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명목상의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잇을 수 있다. 다른 목적으로 온 교인들이 미국의 이민교회내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떠난 것을 가지고 성도의 견인교리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북한에서 옛날에 남한에서.. 공산당이 지배하려는 시점에서 젊은 청년이 새로 등록을 했다. 봉사도 하고. 성가대도 시키고. 교사도 시키고. 안수집사도 되고. 그사람이 공산당이었다.  어떤 사람이 진짜고, 가짜인지.. 알 기 위해서, 사실은 교회안에도 건성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성도의 견인교리를 부인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로 영적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도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학기초에 보앗던 거짓선지자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신다. 이적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신앙인들에 대해서 그것을 가지고 참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인간의 이해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니까 참 신자를 아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의 정도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누가 진심으로 영접한 자인지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 차원에서 성도의 견인교리를 말함에 있어서 이해정도의 한계성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견인의 교리를 말한다고 하지만, 견인의 사실과 타락의 사실사이에 긴장관계를 신자의 차원에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최종적인 단계까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긴장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견인교리를 말한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뒷짐지고 낮잠자는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신자의 현실적인 삶엣는 긴장관계가 계속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차원의 견인의 교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정체적 신앙으로 나태한 신앙으로 떨어지게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최종적 종착역.. 신자의 삶 속에는 늘 긴장관계가 있다. 우리의 현실적 삶속에는 죄와의 긴장관계가 확실한 미래가 없는 불안한 긴장관계는 아니다. 최종적인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지만, 현실적으로 싸워야 하는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최종적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영화의 부분..

 간단히.. : 1.영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신자에게 적용되어지는 구원의 최종 완성단계이다.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시점이 영화이다. 일반적으로 잘못생각하는 것은 죽을때에 영화로 들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차원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육신도 포함하는 전인적인 차원의 구원이다. 우리의 육신까지 변화되는 시점은 재림의 시점이다. 재림하실때에 우리의 육신까지 변화되어지는 -- 그 상태이다. 몸의 구속은 예수님의 구속은 영혼의 구속을 포함하는 육신의 구속도 포함하는 것이다., 죽음의 시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시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2. 이 영화는 전우주적 성격을 지닌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신자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과 하늘과 땅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전우주적 차원에서 주어진다.

 

3. 선택된 백성 모두에게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국지적인 것이 아닌 우주적인것이기에.. 모든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학기말 고사..

 과제물.. 동일한 점수임. 60점.. 학기말 고사에 의해서 점수 결정.

 단답형.., 수필식 문제. 단답형 문제.. 간단하게 단어를 넣는것. 사지선다형. 정의하는 문제도 있음. 신학자들의 이름이라든지, 구원론을 공부하면서 제시된 개념들 단어들을 이해를 하고 있을 것. 개념에 대한 정의도 쓸 수 있다. 단답형 8문제 5점. 수필식 문제 2문제.. 2문제중 하나를 골라서 답하면 됨. 자신있는 문제를 골라서 답하면 됨. 강의한 내용중에 주제를 정해서 주제를 설명해서 요약하면 됨. 예를 들어서 말하면, “교리연구의 필요성은 무엇인가?”이렇게 하면됨. 이것은 절대 문제가 안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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