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종교개혁 분파의 공통점과 차이점
강대훈
(2003년 봄)
Ⅰ. 시작하며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첫째 동기는,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분석하고 바른 방향을 설정할 통찰력을 얻기 위함인 것 같다. 이를 위해서 객관적인 시각을 요청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시각이란 역사를 분석하는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붙이는 명분인 것 같다. 역사 기술과 분석의 ‘객관적’과 ‘주관성’ 중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역사가로부터 “되는 대로의 주관성이 아니라 역사에 걸맞는 객관성에 정확히 적응시킨 주관성”을 추구하면 될 것이다. 이 주관성에는, 리쾨르의 말을 빌리자면, 나쁜 주관성과 좋은 주관성이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사와 관련하여 나쁜 주관성이란 ‘His Story’를 ‘My Story’로 이용하는 것이며, 좋은 혹은 수준 높은 주관성이란 우리를 ‘반성’(reflection)에까지 이르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사를 단순히 인식하는 수준을 넘어서 철학적인 반성의 주관성을 기대하면서 종교개혁사를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게 된다. 본 시험답안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종교개혁적 발견’을 좋은 주관성으로 삼고 전개하려고 한다. 그 발견이란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ratia로 대변되는데, 이런 요소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우리를 기독교적 ‘반성’으로 이끄는 주관성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발견을 기초로 다른 이름의 ‘개혁’ 세력과 다른 개신교 종교개혁의 공통점, 그리고 개신교 종교개혁 내부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한다.
Ⅱ. Protestant Reformation의 특징과 일치점
1. 전종교개혁(Pre-Reformation)과의 비교에서
전종교개혁의 인물들로는 존 위클리프이나 후스 등과, 기독교 인문주의들과 신경건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음 운동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자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신경건’과 ‘에라스무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 보고 종교개혁자들이 이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 생각을 가졌는가를 보려고 한다.
14-15세기의 전환 속에서 흑사병으로 죽음의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갈망한다. 수도회에 있었던 이런 갈망이 수도회 밖으로 확산되면서 ‘신경건’(devotio moderna)이라는 흐름을 형성했고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정점을 이룬다. 신경건운동의 공동생활형제단(1423년)이 생긴 이후 80년 뒤에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운동”(1501년)이 기독교인문주의자들에게 의해 시작되었다. 두 흐름은 카톨릭 신학과 비교할 때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인에게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요, 수단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수단인데 이것이 역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은 종교개혁 사상과 연결되는 것인데, 왜 그들은 종교개혁의 밑거름 역할만 했는가? 서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종교개혁적 발견, 특히 sola gratia와 sola fide에서 그 원인을 찾으면서 개혁자들의 공통점을 정리해 보자:
① 에라스무스는 ‘의지’(자연)의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중세 철학의 ‘자연’을 함께 취했다. 그러나 루터는 전적으로 sola gratia를 강조하여 ‘노예의지’를 주장했다. ②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한 츠빙글리는 1519년에서 1520년 사이에, 에라스무스의 펠라기우스적인 사상을 발견하고 그와 결별한다. ③ 프랑스 인문주의자였던 자크 르페브르는 「바울서신주석」에서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의롭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 범죄는 칭의의 은혜를 잃게 한다는 중세적 교리를 함께 강조했고 개혁자들의 그의 사상과 결별했다.
이와 같이 인문주의자들은 ‘sola gratia’를 발견했으나 중세의 ‘자연’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이들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에라스무스에게서, 츠빙글리는 기독교 인문주의에서, 칼뱅은 르페브로의 길에서 결별했다.
2. Radical Reformation과의 비교에서
‘급진’이라고 해도 폭력 사용 여부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되기 때문에 ‘급진’(Radical)이란 용어의 한계가 있다.
① 폭력적 급진: 토마스 뮌처로 대표
뮌처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내적인 빛’으로 예언자적 소명을 강조했다. 내적인 빛에 대한 가르침은 ‘sola scriptura’를 외친 종교개혁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경관이었다. 그리고 택함받은 성도들은 성인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그들의 분리주의적인 교회관은 ‘칭의’(sola gratia) 교리를 가르친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한 사상이다. sola scriptura와 sola gratia 사상을 공유한 종교개혁자들은 뮌처를 그들의 가족에 넣지 않았다.
② 비폭력 급진: 스위스 형제단으로 대표
스위스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재세례파는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한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그들은 sola scriptura을 철저하게 따르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순종했다. 그들은 sola fide를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권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예컨대, 재세례파 운동의 주요 설립자 콘라드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그를 따랐으나 츠빙글리가 국교회방식을 취하자 그와 결별했다.
스위스 형제단의 경우, 종교개혁자들의 허리에서 나왔고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sola scriptura/fide를 철저하게 따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개혁 과정에서 정부와 권력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재세례파를 거부했다. 개혁자들은 정부나 권력이 선한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재세례파는 sola fide를 따랐기 때문에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를 한다는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재세례파 중에서 휴브마이어는 범죄한 인간이 회복된 후에 영과 혼은 회복되어 자유의지로써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의지를 강조한 휴브마이어의 생각은 개혁자들의 sola gratia와는 달라서, 개혁자들은 그를 개혁 노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3. Catholic Reformation과의 비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sola scriptura/fide/gratia가 카톨릭에서 구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결별했다. 그후 트랜트 회의(1546-7년)에서 내놓은 카톨릭의 답변 역시 sola scriptura/fide/gratia가 아니었기에, 개혁자들은 카톨릭과 함께 할 수 없었다.
① sola scriptura: 개혁자들의 sola scriptura에 대해서 트랜트 종교회의는 오직 성경만은 아니라 ‘성경과 전통(승)’이라고 응답했다(The holy scripture and the tradition). 카톨릭은 교회에서 결정한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Sola’ Scriptura를 거부했다.
② Sola Fide: 카톨릭은 ‘오직 믿음으로만’ 아니라, 인간의 ‘내재적 의’가 하나님의 은총과 결합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개혁자들은 ‘전가된 의’를 수동적으로 수납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sola fide와 sola scriptura의 이념 아래, 개혁자들은 성례를 둘로 축소했으나, 카톨릭은 자신들의 전통인 7성례를 ‘의’에 이르는 수단으로 못박았다. 고해성사와 혼례에 있어서도 두 쪽의 입장은 맞서게 된다.
Ⅲ. Protestant Reformation 내부의 상호 차이점
글 서두와 다른 노선과의 비교에서 살펴본 개혁자들의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ratia은 Protestant Reformation의 공통된 입장이다. 그러나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발견이나 성찬 등에 있어서 세부적으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sola scriptura
①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삶을 위한 규범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구별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생각하여 ‘sola gratia/fide’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했다. 그러다 보니 ‘야고보서/요한계시록/히브리서’는 덜 중요하게 여겼다.
② 반면 칼뱅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보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칼뱅이 그리스도의 삼 중직을 강조한 것도 성경을 ‘sola fide’ 중심으로 해석한 루터와 달리 신구약을 모두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sola scriptura를 개혁파 신학자들이 더 강조한 경향은 기독교강요 첫 부분을 ‘sola scriptura’에서 출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2. sola gratia/fide
공로주의가 상식으로 통하는 중세의 상황에서 루터의 ‘칭의’ 교리의 발견은 위대한 것이었고 종교개혁자들이 공유하는 사상이었다. 루터는 공로주의에 빠진 ‘역사적 상황에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반면, 칼뱅은 루터의 칭의 교리를 그대로 받으면서도, ‘은혜’ 교리를 더 발전적으로 이해했다. 루터가 구원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면, 칼뱅은 은혜와 칭의를 있게 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칼뱅은 ‘예정’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영광(gloria)’에 관심을 가졌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면 칼뱅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자체에 관심을 가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과 ‘영광’을 강조했다. 그리고 루터는 칭의 교리에 집중한 반면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대시켜 드리는 수단인 성화를 칭의의 목적으로 생각했다.
3. 성례
트렌트 회의에서는 화체설을 다시 확인한 반면 루터는 그리스도 몸의 편재성을 믿어 ‘공재설’(Consubstance)을 주장했다.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요소들(떡과 포도주) 속에, 요소들 밑에, 요소들과 함께 계시는 임재를 말했다.
츠빙글리는 실체가 없고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기념일 뿐이라고 했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를 부인하면서도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실재적인(영적인) 임재를 강조했다. 루터교회는 신령주의적 전통을 존중한 데 반해 개혁교회 측은 보다 합리적인 사고와 이해를 존중하였으므로 보다 개방적이었다.
영국국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크래머는 화체설에 등을 돌리고 교황주의와 비국교주의 사이의 중도에 선 「공동기도서」라는 예배 의식을 만들었다(1549). 「제2공동기도서」는 대륙의 개신교적 색채를 보이되 성찬에 있어 츠빙글리의 상징주의의 일면을 보인다. 매리 여왕 때 유럽으로 피신한 잉글랜드의 신자들을 루터교회 측보다는 개혁교회 측에서 환영하였으므로 그들이 개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4. 사회구조 변혁과 관련한 입장에서
① 루터의 종교개혁의 특징은 그의 자유 개념에서 비롯되어 “초월적 온건 개혁”이었다. 루터의 자유는 개인적이요 내적인 변화와 관련되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 내적 조직이나 체제보다 인간의 근본적인 삶에 관심을 가졌던 것을 따랐다. 카톨릭에서 볼 때는 급진적이었으나 종교개혁의 세계에서는 온건적이었다. 루터는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면 자유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사/농민들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② 츠빙글리/칼뱅의 개혁적 특징은 “내재적 온건 개혁”이었다. 칼뱅은 루터의 자유를 공유하면서도 개신교 공동체의 대안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정의에 관심을 가졌다.
③ 재세례파를 포함시켜 본다면, 그들은 내재적 급진 혁명의 뮌처와 달리 “초월적 급진혁명”을 시도했다. 그들의 초월성과 급진성은 시민권 포기/세상에의 불참여/절대평화주의로 나타났다.
④ 영국국교회는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두고, 카톨릭과 개혁자들의 중간 형태에 섰고, 국가 교회를 지향했다.
Ⅳ. 맺으며: 종합적 평가
우리는 서두에서 리쾨르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를 ‘반성’(reflection)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좋은 혹은 수준 높은 주관성”을 얻기 위해 역사를 분석한다고 했다. 분명히,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ratia는 기독교적 ‘반성’으로 이끄는 좋은 주관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으로 공통점과 상이성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이 과연 자기 반성을 이끌 수 있을까. 어떤 입장에서 종교개혁의 역사를 관찰하느냐에 따라 자기 반성과는 반대로 자기 만족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제도’라는 틀 속에서 주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할 때 자칫 교조주의적으로 다른 형태의 개혁 흐름에 대해서 쉽고 간단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sola scriptura/fide를 철저히 따르기 위해서 급진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재세례파에게서 얻는 교훈은, 그들의 진실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에 대해 ‘객관적’인 관찰을 하기도 전에, ‘주관적’인 접근으로 쉽게 분석할 때, 이 주관성은 우리를 자기 반성으로 이끌 ‘수준 높은 주관성’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제도라는 틀 안에 있기에 ‘다른’ 모습에 대해 거리낌 없이 분석하는 입장에 서기보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분석당하고 반성하며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