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통전(하), “선지서” 부분]을 읽고
(강대훈 자료)
Ⅰ. 책을 읽으며 Ⅱ. 내용 요약 및 정리 Ⅲ. 평가: 책을 읽고나서
Ⅰ. 책을 읽으며
김정우 교수는 「구약통전(하)」의 ‘선지서’ 부분을 ‘성경신학’의 주제(1,2,3,4,7,8,9,10강), 선지서 해석사와 해석학적 입장(5,6장)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서나 선지서 관련 서적에 대한 서평을 싣고 있다. 본 글에서는 신학생의 입장에서, 한계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은 할 것이나, 될 수 있는 대로 ‘수용하기 위하여’ 저자의 책을 평가할 것이다.
Ⅱ. 내용 요약 및 정리
제1강 고대 근동 아시아의 세계관에서 본 점술과 주술
“고대 근동 아시아의 세계관에서 본 점술과 주술”에서 김정우 교수는 이방세계의 세계관이 성경 예언과 예언자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서 먼저 고대 근동 아시아의 주술적 세계관을 다룬다. 성경의 예언을 간단하게 언급한 다음, 이방의 주술적 세계관과 성경 예언과의 관계를 오늘 한국의 세계관에 적용해 본다.
점술과 주술이 가장 발달했던 고대 근동 아시아의 세계에서는 점술과 주술이 세계관, 신화, 현실 정치와 맞물려 있었다.(p.643) 원래, 한 사회에서 점술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첫째, 영계에 초자연적인 힘과 세력이 실존하며 인생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영매자들의 활동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거나 허용해야 한다. 셋째, 영매자들은 질병과 파산과 정신적인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p.642) 이러한 경향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세계관이었다. 그들은 인생의 모든 일들이 독자적으로 떨어져 존재 하지 않고 영계와 현세를 포함한 이 세상 전체와 철저히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거대한 인과 관계로 이어져 있으며 운명론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p.644) 한 예로, 바벨론의 창조 신화에 보면, 바벨론의 주신인 에아와 마르둑은 주술의 천재로 나타나고 있다.(p.645)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점술과 주술에 대한 내용은 고대 근동 아시아의 신화와 점술의 배경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은 성경 예언과 예언자의 성격을 바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p.646)
저자는 고대 근동아시아의 주술과 관계된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오늘 한국사회의 이슈로 넘어온다. 그 이슈는 ‘단군상 건립’과 관련된 것이다. 전국 초중고에 3천 6백 개의 단군 동상 건립을 추진하려 했던 [한국문화운동연합](한문연)과 기독교는 ‘역사적 단군’과 ‘종교적 단군’을 중심으로 심각한 대결을 벌인 적이 있다.(p.649)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신화와 주술적 세계관은 성경의 세계관과 대립되기에,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을 공교육 장소로 끌어온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공공의 복지와 공동 선을 위해서 건립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내와 사랑으로 설득해야 할 것이다. ‘단군상’은 단순한 ‘역사적인 교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종교적 상징물’이기에 기독교인들은 공교육 현장의 단군상 건립을 반대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목을 자르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현행 법으로 신화, 주술적 세계관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p.651)
제2강 예언 분별의 프리즘
“예언 분별의 프리즘”에서 저자는 예언을 분별할 수 있는 삼각형의 프리즘을 소개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있어서 심각한 혼란을 느끼고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성경이 개인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자판기처럼 답을 주는 책도 아니고 점치는 책도 아니기 때문에, 교인들은 다른 데서 구체적이고 쉬운 답을 찾으려 한다. 이들은 예언자(점쟁이)를 찾거나 직관이나 꿈 등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은 문제로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이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어 주는 본문은 신명기 18장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서 부딪칠 여러 영적인 혼란에 대해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주님의 말씀 대신에 가나안 토착 점쟁이들과 주술에 빠질 것을 경고한다.(p.654)
이방의 점술이나 주술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성경의 예언과 다르다: ‘계시의 방법'(영성)을 보면, 주술은 일시적인 평안과 번영을 달콤하게 약속한다.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심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술을 독점하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에 더욱 큰 어둠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여 화를 자초한다.(p.657) ‘계시 전달자의 인격과 윤리’(신 18:15-18; 민 12:1-8; 신 34:10-12)에서 구별된다. 주님은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신다.(p.674) 계시 전달자의 ‘인격’과 ‘윤리’는 그 계시가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계시전달자의 내용’(신학)을 보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요 신적 권위로 말하는 자이므로, 그들 예언의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문제는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된다.(p.674) 반면, 거짓 선지자는 ‘방자히 말할 것이다.’(18:22).
참된 예언으로 간주되어 인기를 끈 「바이블 코드」(The Bible Code)는 참 예언인가 거짓 예언인가? “옛적 모세는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나 예언을 할 때, 그 예언의 ‘방법’과 예언자의 사람됨’과 예언의 내용으로, 예언의 진정성을 시험해 보라고 말했다(신 18:918).”(676) 저자는 ‘예언 분별의 삼각형’이라는 프리즘을 제시하면서 평가하도록 돕는다. 이 삼각형은 상변에 ‘방법’, 좌변에 ‘사람됨’, 우변에 ‘내용’으로 구성된다.(p.676) 이 프리즘에 따르면 「바이블 코드」의 관심은 성경이 말하는 윤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윤리를 결여한 예언은 참된 예언이 될 수 없다. 성도의 삶을 제시하지도 않는다.(p.679) 사본을 유일한 ‘원본’으로 오해하고 있다.(p.680)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의 ‘장르’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므로 성경 전체를 암호화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p.681) 성경의 예언은 미래 사건에 대한 예언이기보다 주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을 ‘대언한 것’이다.(p.681)
제3강 선지자와 선지자의 대결
“선지자와 선지자의 대결”은 제2장의 내용과 연결된다. 누가 참 선지자이며 누가 거짓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인가? “이방 선지자들은 주술적 영성으로 현실 정치에 부합하는 윤리적 선택을 하며 기복적인 신학을 갖고 있는 반면에, 주님의 선지자들은 인격적 영성으로 신정 정치적인 윤리를 추구하며 신명기적인 언약신학을 믿고 있었다.”(p.683) 이방 선지자들은 ‘주술-현실-기복’을, 참 선지자들은 ‘인격’-‘신정’-‘언약’을 예언의 프리즘으로 사용한다. 김정우 교수는 선지자와 선지자가 대결했을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인격성’이라고 본다.(p.683)
구체적인 예들을 보자. 하나님의 사람과 벧엘 선지자의 대결(왕상 13장)을 보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은 상호 배타적인 신탁을 말한다. 두 선지자 중에서 누가 참 말을 하는지, 분별하기 어렵다. 유다의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계시에 목숨을 걸고 순종하려고 한다. 비록 그는 거짓에 넘어가 불순종을 하지만, 그가 한 예언은 진실이었음이 증명된다. 저자는 본문에서 누가 참 선지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구체적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하지는 않는 아쉬움을 남긴다.(p.687)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대결’(왕상 22장)에서 ‘백성들의 기대를 거스르며 홀로 서는 것’이 참 선지자의 특정으로 나타난다. 백성의 소리(vox populi)와 거짓 선지자의 소리(vox pseudoprophetae)는 많은 경우에 거의 동일하다. 거짓 선지자는 현실 정치(왕을 위한 신학)와 백성의 소리 또는 소원(vox populi, 대중 신학)을 제시하면서,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왕의 칭찬을 들으려 한다.(p.69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결’(렘 23,28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적이 없다(14:14; 23:36,18,22,30). 여기에서도 신명기 18장에 있는 선지자 직의 규례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p.703) 예레미야는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만을 전하고 있다. 그는 백성의 소리와 왕과 선지자들의 소리를 거스르며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전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오직 백성들에게 ‘평안’만 전하고 재앙과 경고는 전하지 않는다.(p.704)
‘에스겔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결 (겔 13:1-23)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은 자이다(4절). 이 여우 같은 선지자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에서 예언 이란 개인적인 경험이나 사업이 아니었다. 선지자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백성들을 책망하며 돌이켜야 하는 사명을 받은 자였다.(p.705) 거짓 선지자는 평안을 외치고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다(p.706)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게 전하는 선지자는 인격과 예언자의 삶이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교정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입에 발린 평화를 전하기 보다 언약의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강조한다.
제4강 선지자의 소명과 사명
저자는 “선지자들의 소명 설화에 있어서 양식비평은 중요하다. 성경 본문 중 여럿 군데를 살펴 보자. 노만 헤이블은 다음의 여섯 가지 구조를 제시한다.”(712)면서 헤이블이 말한 ‘만남-서언-사명-거부-재확신-표적’ 패턴을 소개한다. 이 패턴에 따라 모세(출 3:1-12), 기드온(삿 6:11-17), ‘예레미야’(렘 1:4-19), ‘이사야’(사 6장), ‘에스겔’(겔 1:1-3:27)의 소명과 사명을 설명한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소명 프리즘’(신현-반응-사명)을 소개한다.(p.712)
‘이사야의 소명과 사명’(이사야 6:1-13)을 보면,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받고 ‘마음이 강퍅한 백성들’에게 한평생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웃시야가 죽었을 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시기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신다. 이사야는 선지자들 중에서 “거룩성”을 가장 많이 외친다(26회). 그는 주님을 “이스라엘/야곱의 거룩한 자”로 부른다. 몇 구절(호 11:9; 합 1:12; 3:3)을 제외하고 포로 전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거룩한 자’로 지칭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주님의 거룩성을 심각하게 다룬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찬양하지 않는다. 두려워한다. 공포를 느낀다(창 32:31; 출 3:6; 삿 6:22; 13:22). 이사야는 자신의 한계가 아니라 “부정”을 깨닫는다.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강퍅한 백성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백성들의 귀를 ‘둔하게 하고’ 귀를 ‘막히게 하는’ 역할이 이사야에게 주어졌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이교적 행위에 물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은 ‘심판’이다. 그러나 심판을 심판으로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가 심판 메시지를 전할수록 그들은 더욱 부패해진다. 이 메시지는 마태복음 13:13-17에서 예수께서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라면서 말씀하신 내용과 비슷하다. 이런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소명을 주신다.(p.730-752)
제5강 선지서 해석사
저자는 “선지서 해석사”를 자료비평에서부터 설명한다. ‘자료비평’: 19세기 역사비평학자들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신앙 배후에 있는 참된 창조적 소수요 윤리적인 유일신론의 기수로 여기게 되었다.”(p.756) 역사 비평학에서 예언서 연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버나드 둠(B. Duhm)은 “제사장의 율법이 선지자들의 말씀보다 후대에 나온 것으로 믿었다. 선지자들은 의식적인 행위를 비평하고 거부하며, 반주술화된 종교를 도덕적인 이상주의와 대치시켰다고 보았다.”(p.756) 그래서 미가서 6:1-8을 ‘예언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보았다.(p.756) 그는 히브리 운율에서 벗어난 것을 2차적인 첨가로 보고 선지자의 ‘진정한’ 말씀과 ‘후대의’ 것을 구별하려고 했다.(p.757)
‘양식 비평과 전승사적 연구’: 궁켈이 볼 때, 선지자들은 1차적으로 설교자였다. 초기 선지자들의 선포는 거칠고 밀교적이며 짧았다. 후대로 가면서 문학적으로 다듬어지며 방대해졌다. 그는 양식 비평을 통해 ‘원래의’ 선지자들이 한 말을 찾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문서화되었는지 그 ‘전승의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p.758)
‘제의적 접근’: 모빙켈은 궁켈의 양식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양식들의 ‘삶의 정황’이 세속 사회가 아니라 ‘제의적 배경’을 가진다고 보았다.(p.758) 그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선지자의 초기 말씀을 이후의 사건들과 필요에 따라 보충하고 발전시켰다고 보고 ‘구전 전승 기간’이 있다고 했다. ‘책’은 후대에 형성되었지만 그 내용의 일부는 아주 초기에 기록되었으므로, ‘진정한’ 자료와 ‘비전정한’ 자료를 구분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여기게 되었다.(p.759)
‘편집비평’: 예언서에서 보다 커다란 문서 단위들이 구조를 이룬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편집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들은 편집자들이 선지자들의 말을 보전한 사람들과 그 목적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고 이들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예컨대, 예레미야의 설교 전승이 신명기적 운동권에 의해 얼마나 존중되었는지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침멀리에 의하면, 에스겔서는 그의 제자들이 그의 설교를 보존하며 해석하여 살아 있는 해석의 전승을 전해 준 것으로 보았다.(p.762)
‘사회학적 접근’: 학자들은 예언과 제의 사이의 분리가 절대적이지 않으며, 선지자들이 제의를 자유롭게 비판한 것은 그들의 예언이 종교적 제도권 밖에 있었던 제3의 세력을 대표하고 있다고 본다. 윌슨(R. Wilson) 같은 학자는 선지자들의 심리적 측면을 관찰하여 선지자들의 사회적 위치와 권위에 관심을 가졌다. 윌슨의 주된 관심은 지상의 권세와 천상의 권세 사이의 중재자로서 선지자들의 역할과, 이에 대한 사회적 수용과 거부 사이의 강렬한 긴장에 있었다.(p.763)
‘편집 과정 비평’: “역사 비평학자들은 현재의 선지서를 자료와 양식과 전승사를 가진 것으로 여겨 왔으므로, 이제 학자들은 자연스럽게 편집 과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p.764) 스위니는 “비록 이사야서가 대략 400년 동안이나 편집의 과정을 거쳐 왔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의 본문은 최종 편집을 통해 구성된 단일 문예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예 구조는 다양한 주제들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p.765)고 강조했다. 그래서 스위지는 ‘1장과 66장 사이의 일치된 어휘양식’이나 ‘새 출애굽 주제’, ‘정의’와 ‘의’ 등의 주제는 이사야서의 문예적 통일성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스위니가 주장하는 문예적 통일성은 “최종 편집자의 창조적 능력”을 가정하기 때문에, 신문학 비평에서 말하는 문예적 통일성과는 구별된다.(p.766)
제6강 이사야서 읽기: 창인가, 거울인가?
“이사야서 읽기: 창인가, 거울인가?”는 ‘에드가 콘라드’(Edgar W. Conrad's)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콘라드는 “학자들은 이 책이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발전했는지 이해하는 데 집착하였으며,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서 전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p.767)면서 이사야서에 대한 독자 중심적 접근법에 대해 논증하고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로 읽기 위한 제안을 한다.
콘라드는 역사비평학자들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독서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본문을 통해 말하고 있음을 무시하면서도 “본문이 스스로 말하게 하자”를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본문을 과거를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하지만, ‘깨끗한 창문’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비평적 독서는 거울처럼, 독자로서의 역사비평 학자들의 관점을 반영해 주는 것이었다.”(p.768)고 비판한다. “이리하여 이사야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세 권의 책으로 읽혀지게 되었다.”(p.768) 결국 역사비평까지도 독자 의존적인 해석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피쉬의 말처럼 ‘해석적인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y)가 있어서 “본문의 해석이란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다.”(p.769)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해석이란 본문 속에 파묻힌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가정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피쉬가 볼 때 실제적으로 이 과정은 정반대로 일어난다. 즉, 독자가 본문에 가져오는 해석적 전략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p.769) “대부분의 성서비평가들은 그들이 학생이었을 때 이사야는 세 명이며, 이 책은 세 개의 분리된 책으로 읽어야 한다고 배운 것이다.”(p.770) 편집에 있어서도, 불협화음 때문에 ‘편집’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편집비평이 통일성을 확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그 존재 이유 자체를 제거해 버리게 된다.”(p.771)
역사비평학의 이러한 오류 때문에, 콘라드는 ‘이사야서의 독서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는 세 명의 이사야서 저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본문 자체가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신비평(New Criticism)과 이어서 구조주의(Structurlism)가 등장한 후에는 본문의 기원을 둘러싼 문제들을 떠나서 본문 자체가 연구 대상이 되었다. 가장 최근에 와서 본문의 의미는 독서 과정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점점 폭 넓게 이해되고 있다.”(p.772) 이 독서법은 “독자로 하여금 본문을 말하게 한다”(readers make texts speak)는 점을 강조한다. 독자에게 넘어온 것은 본문이며, 그 본문이 우리 연구의 대상이다.(p.773) 콘라드는 66권을 전체로 읽었던 고대교회처럼 이사야도 한 권으로 이해하려고 한다.(p.773)
‘독자’에 있어서 콘라드는 ‘내포된 혹은 암호화된 독자’를 강조한다. 독자반응 비평가들은 ‘실제적인 독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 외에도, ‘내포된 혹은 암호화된 독자’(implied or encoded reader)에 대해 말하고 있다.(p.774) 그러면 ‘내포된 독자’는 누구인가? 그는 “나는 내포된 청중에 대한 지표로서 이 책에 가끔 갑자기 등장하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주목하게 되었다(42:24).”면서 ‘공평’과 ‘정의’가 사라진 공동체에서 ‘남은 자들’이 내포된 독자라고 본다.(p.777) 과거 이사야의 환상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경험하고 있는 책의 ‘내포된 독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과거의 메시지가 미래의 구출과 구원 약속을 담고 현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란 ‘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에서도, 포로생활이 ‘암시된 독자들’(청중들)에게 전해진 책의 메시지에 대한 표적과 상징으로 주어지고 있다(8:16; 20:3) 라고 볼 수 있다.(p.777) 이사야서의 원 독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현대의 실제적인 독자들인 우리들은 우리의 실제 세계를 통해 이 책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다. 따라서 이사야서는 과거를 보는 단순한 창이 아니라, 거울처럼 우리가 본문과 함께 현실 세계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반영해 줄 것이다.(p.778) 본문을 창으로서가 아니라 거울로 보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며 편협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될 때 해석이 남용되고 무책임한 적용이 만들어질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콘라드는 “본문을 거울로 보는 것은 우리 입맛대로 본문을 사용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문과 교류하는 것이지 그것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을 거울로 볼 때, 우리는 독특한 우리의 관점을 형성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유익한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으며, 본문과 독자들의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p.778)고 강조한다.
제7강 선지자의 역할
저자는 “선지자의 역할”에서 다양한 역할에 대해 논증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전령’이다. 그는 구원을 선포하고 성전 법정을 주장한다.(p.800) 선지자는 ‘중보자’다. 선지자는 ‘엑스터시(황홀경)에 들어간 사람’이다. 황홀경에 대해서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황홀경 묘사 여부에 따라서 선지자의 연대를 측정하는 ‘종교진화론적’ 입장은 잘못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이 없었다고 보는 보수주의적 견해도 문제를 갖는다. 실제로 사울, 이사야, 에스겔도 대단히 이상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고, 당시 사람들은 사울의 모습에서도 ‘선지자의 황홀경’을 인정했기 때문이다.(p.807) 선지자는 ‘사회개혁자’였다. 선지자는 도덕적인 간절함 을 가지고 도덕적인 이상주의를 주창한 자였다.(p.812) 선지자는 어디에 거했는가? 선지자는 성전에도 거했다. 선지자는 왕궁에서도 활동했다. 선지자들은 신정 정치의 옹호하면서 이를 따르는 왕을 축복하고 그렇지 않은 왕을 정죄했다.(p.819) 그들은 왕에게 ‘전쟁’에 대해서 조언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p.819) 이와같이, 저자는 선지자의 역할을 포괄적 입장에서 접근한다.
제8강 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
저자는 ‘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에서 신약적 구약 읽기를 시도하는데, ‘정경적 해석법’에 따라 계승, 발전시킨다. 선지자의 메시아 예언은 선지서에 다양하게 언급된다. ‘호세아의 메시아 예언’(호 3:4-5), ‘요엘의 메시아 예언’(욜 2:23), ‘아모스의 메시아 예언’(암 9:11-15), ‘미가의 메시아 예언’(미 2:12-13; 5:1-4),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사 4:2; 7:1-16; 9:1-7; 11:1-16; 28:16; 30:20,26), ‘예레미야의 메시야 예언’(렘 23:5,6; 33:14-26), ‘에스겔의 메시아 예언’,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7:13-14; 9:24-27), ‘학개의 메시아 예언’,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말라기의 메시아 예언’에 대해 자세히 살핀다.
여기서 저자는 ‘엘리야와 엘리사 기사를 중심으로’ 보면서 ‘신약적 구약 해석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왈키와 하젤의 ‘정경적 해석’에 대한 기본 이해를 발판으로 삼아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약적 독서를 시도”(p.847)한다. 마태의 관점에서 ‘신약의 엘리야 및 엘리사 해석’을 시도한다. 마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생애를 세례 요한과 예수의 생애에 대한 문학적 모델로 사용한다. 그는 요한을 ‘엘리야가 오리라’는 말라기 예언의 성취로 보고(말 4:5), 엘리사를 예수와 연결시킨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장차 올 엘리야’라고 명백히 말했다(마 11:34; 17:32). 구체적으로,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직접 후계자를 임명한다. 그리하여 마태는 엘리야와 요한, 엘리사와 예수를 서로 잇는다.(pp.846-849)
제9강 예언서의 종말론
저자는 ‘예언서의 종말론’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선지서를 해석하는 방법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세대주의는 문자적 해석을 한다고 강조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성경의 역사나 설화 부분에서 심한 영해를 시도하며 그 교훈적 가치를 찾고 있다.”(p.855)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적 해석이 명료한 역사서와 설화에서는 영해를 시도하고 문자적 해석이 어려운 예언서와 묵시록에서는 절대적인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p.856)
그러나 세대주의가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예언의 상징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성경의 예언은 1차적으로 예언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일깨우기 위해 준 것이다. 이 예언 중 많은 부분들이 중복되어 성취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도 그 자체의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아하스 시대에 이미 하나님께서 징조로 보여 준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에서는 ‘예표적 의미’를 부정한다. 결국,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p.859)
세대주의 해석을 결과적으로 ‘장르 이해의 결여’를 보여주며, 이는 ‘단어 이해에 급급’한 모습을 나타낸다. 세대주의자들이나 언약신학자들 몯, ‘문자적-문법적’ 의미를 추구하지만 세대주의는 한 단어에서, 언약 신학자들은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예언이라는 독특한 장르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p.868)
제10강 선지자와 성령: 이사야서의 성령론을 중심으로
저자는 본 장에서 ‘이사야서에 나타난 성령’을 살펴봄으로써, 선지자의 성령 신학적 기여를 고찰하고자 한다. 최근 성경 신학의 동향에 따라 성경의 한 권을 중심으로 성령론을 분석한다.(p.880)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다. 천지 창조에 있어서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성령(사 40:12-14)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백성들에게 장차 제2의 출애굽을 하리라는 ‘회복의 선포’(1-11절)를 하신다. 선지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솜씨를 노래하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되심을 증거하면서, 그 맥락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p.882) 이 성령께서는 동물 왕국을 다스리시고 계신다(사 34:16-19).(p.888)
성령은 ‘구원의 영’으로서, 백성들의 반역에 대해 근심하신다(사 63:7-14). 이 표현은 성신의 인격성을 드러내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은 성령의 인자하신 인도하심에 대한 반역이었다.(p.891) 성령은 구원을 선포하시지만 ‘심판’을 내리신다(4:4).(p.892) 새 시대에 성령의 구원은 포괄적이다(사 32:15-20). 주의 영이 회복된 나라의 모든 영역에 새 생명을 부으셔서 ‘공의와 정의와 평화와 안전’이 넘치는 낙원 사회를 이루신다(32:17-18).(p.896)
성령은 ‘예언의 영’이시다(30:3; 49:21). 그리고 메시아 위에 임하신다. 장차 올 이상적인 왕은 성령의 내주를 누리는 자이며, 성령으로 충만한 은사를 가진 자로 나타난다(42:1; 59:21; 61:3).(p.900)
이와 같이, 이사야서에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탁월한 성령론이 나타난다. 이사야서의 성령론은 전통적인 성령론의 중심 주제들을 이어 가는데, 천지 창조와 출애굽과 신정 통치와 메시아와 예언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새로움이 있다. 출애굽 모티프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성령론에는 탁월함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사야서에는 ‘인격’으로서의 성령이 뚜렷하게 언급된다. 하나님의 백성과 땅과 우주를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시고 나아가 메시아에게 ‘전인격적인 신’으로 임하신다. 성령을 인격으로 이해하는 이사야서의 관점은 구약의 성령론에서 가장 새로운 기여라고 할 수 있다.(p.905)
Ⅲ. 평가: 책을 읽고나서
첫째, 성경신학적 접근: “의의와 한계”
저자는 본서의 저작 방식에 대해서 “본서의 통일성을 전제하여 주제적인 관점에서…보고자 한다.”(p.881)라면서, ‘주제적인 관점’으로 전개해 나간다. 이런 관점으로 ‘선지자의 정체성’, ‘선지서(선지자)와 복음서(그리스도)’, ‘선지서의 종말론’과 ‘성령론’에 대해 intertextuality 접근을 시도했다.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적 주제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자료와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의의는 있지만 각 책의 구조와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이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의 전제처럼 ‘주제별’ 접근을 했으나 이는 「구약통전(하)」의 ‘역사서’, ‘시가서’ 부분과 비교해 보아도 Biblical Studies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사야서 신학, 예레미야서 신학, 에스겔서의 신학, 호세아서의 신학 등, 성경신학적 접근의 전(前) 단계가 없어 ‘통전’의 의미와는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 선지자는 누구인가: “선지자의 인격, 하나님의 속성”과 연결시켜 접근
저자는 1,2,3,4장에서는 ‘참 예언’, ‘참 선지자’, ‘참 선지자의 소명과 사명’에 대해서 비슷한 시각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참’은 반드시 ‘인격’이나 ‘윤리’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윤리를 결여한 예언은 참된 예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p.680) ‘주술-현실-기복’을 예언의 프리즘으로 사용하는 이방 선지자와 달리 참 선지자들은 ‘인격’-‘신정’-‘언약’을 사용하는 데서도 선지자와 인격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683) 예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선지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결국에는 순종한다. ‘백성의 소리’ 보다 ‘여호와의 소리’를 먼저 듣는다. 특히 이사야는 부르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매우 강조하며 ‘심판’의 메시지를 순종하여 전한다.(p.751) 결국 선지자의 인격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성’이라는 속성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선지자의 소명과 사명을 현 시대 속으로 끌고 와서 대화하게 한다. ‘단군상 건립’은 주술적 세계관과 거룩한 여호와 신앙과의 충돌을 말해주므로 반드시 반대하되 기독교인의 인격성을 요청하고 있다. ‘바이블코드’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을 암호한 저자들의 ‘인격성’이 증명되지 않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
셋째, 정경적 해석 방법: “신약적 구약읽기의 한 시도” 및 “세대주의적 성경해석 비판”
김정우 교수는 차일즈와 왈키가 강조한 ‘정경적 해석’(cannonical approach)를 ‘신약적 구약읽기의 한 시도’로 제시하고 ‘엘리야 엘리사’를 예로 제시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엘리야-엘리야 모티프는 ‘선지서’라기 보다는 ‘선지자’에 대한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정경적 접근 방법이라는 것은 정경의 범위가 확대되어 갈수록 본문의 의도가 더욱 깊어지고 명료해진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마치 구속이 점진적인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처럼, 정경 속에 있는 옛 본문은 점점 성장해 가는 정경 문헌의 일부가 되어 가면서 상호 연관된 점진적 의미의 인식을 거쳐 가게 되었다.”(p.461)는 입장에서 이 시도를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 본문의 고유한 의미는 훼손되어서는 안 되며…구약과 신약의 서로 다른 독자적인 의미를 계시의 유기적 조화와 통일성 속에서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구약의 발판을 딛고 신약으로 넘어가도록 해야 한다”라는 왈키의 입장을 따른다.(p.455) 이러한 입장에서 “제8강 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 “제9강 예언서의 종말론”, “제10강 선지자와 성령”을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보면, 선지서에 다양하게 언급되는 메시아 사상을 ‘정경적 해석법’에 따라 신약적 구약 읽기를 계승, 발전시킨다. 저자는 ‘엘리야와 엘리사 기사를 중심으로’ 보면서 ‘신약적 구약 해석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면서 “왈키와 하젤의 ‘정경적 해석’에 대한 기본 이해를 발판으로 삼아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약적 독서를 시도”(p.847)한 것이라고 밝힌다. 저자는 마태의 관점에서 구약을 읽으면서 ‘신약의 엘리야 및 엘리사 해석’을 시도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지나치게 분리시키거나 일치시키는 양극단을 피하고 있다. 이런 방법은 종교 사학파와 역사 비평학의 문서설과 양식 비평과 편집 비평, 전승사 등의 방법론들이 구약을 원래의 정황 속에서 읽으려는 좋은 시도를 하지만, 구약을 신약의 빛 속에서 읽는 것을 정당한 방법론으로 생각하지 않고 두 정경 사이의 거리를 심화시켜 버린 문제에 대한 한 읽기라고 하겠다. 한편 신약의 기독론적 빛으로 구약의 모든 부분을 비추어 구약과 신약의 의미를 동일하게 만드는 구약읽기를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정경적 해석 방법에서,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이 ‘예표적 의미’를 부정하여 결국에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문제를 지적한다.(p.859)
넷째, 건전한 선지서 읽기: “장르 이해가 필수적”
저자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분별하는 프리즘을 제시하면서, 참된 예언으로 간주되어 인기를 끈 「바이블 코드」(The Bible Code)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의 ‘장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 있다고 비판한다. 장르를 모르기에 성경 전체를 암호화했다는 것이다.(p.681)
“예언서의 종말론”에서 제기된 세대주의 종말론의 문제점은 결국 해석의 문제점에서 도출된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적 해석이 명료한 역사서와 설화에서는 영해를 시도하고 문자적 해석이 어려운 예언서와 묵시록에서는 절대적인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p.856) 이러한 세대주의 해석은 결과적으로 ‘장르 이해의 결여’를 보여준다. 장르 이해가 없다보니 ‘단어 이해에 급급’하게 된다. ‘문자적-문법적’ 해석을 한다고 하지만 예언이라는 독특한 장르 속에서 그 의미를 찾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법적 해석’이 아니며 당연히 해석학적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p.868)
다섯째, 해석학적 화해: “내포된 독자의 유기적 공동체”
저자는 제6강에서 ‘에드가 콘라드’(Edgar W. Conrad's)의 “이사야서 읽기: 창인가, 거울인가?”라는 글을 번역하여 싣고 있다. 이미 저자는 자신의 해석법을 설명하면서, “역사 속에 존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통된 지식과 믿음으로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p.465)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면에서 콘라드의 ‘내포된 혹은 암호화된 독자’(p.774)와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콘라드가 말한 ‘내포된 독자’는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우리’, 곧 ‘남은 자들’은 포로생활에서 구원받은 ‘암시된 독자들’(청중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독자는 현대의 실제적인 독자들인 우리들에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를 한 권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유기체를 지닌 ‘독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서는 과거를 보는 단순한 창이 아니라, 거울처럼 우리가 본문과 함께 현실 세계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반영해 줄 것이다.”(p.778) 독자는 본문을 제멋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본문과 교류하는 것이기에, 역사 속의 다른 독자들과 유익한 점을 교류하고 심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존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권으로 읽은 이사야가 오늘의 독자들에게 넘어 왔고, 현대의 독자들은 넘어 온 본문을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p.773) 콘라드가 66권을 전체로 읽었던 고대교회처럼 이사야도 한 권으로 이해하려고 한다고 한 부분은(773) 저자가 “역사 속에 존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통된 지식과 믿음으로 하나의 유기체”를 이룬다는 부분과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본문을 말하게 한다”라는 점에서 해석학적 화해가 가능해진다. 과거나 현재나 이사야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전해듣기 위해 애쓴 해석학적 공동체 사이에 해석학적 화해가 일어난다면, 내포된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이 ‘자기 중심성’을 극복할 것이다. 이러한 화해가 독단과 편협성을 극복하게 하고 우리의 해석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