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년이후]장로교회의 역사, 리포트용 엣세이

작성자lsg|작성시간07.04.04|조회수170 목록 댓글 0
역사에 나타난 장로교운동(강대훈 자료) 

                                       시작하며

  장로교회의 역사를 성경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미국의 장로교회 역사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교회의 정신을 세 가지 주제로 살펴 볼 것이다. 역사적 장로교회가 보여준 “자치성”, “분열과 연합”, “개혁의 이념”을 간단하게 고찰하면서 “개인적 평가”를 간략하게 하고 결론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1. 자치성와 평등성 배양

  1.1.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장로교회의 “자치와 평등” 사상

  ⑴ 성경의 기초: 구약의 장로들은 민의를 대표하는 자치 기구의 대의원 역할을 했고 백성들은 이 장로회를 통해서 “자치성을 배양”했다. 신약교회의 경우, 사도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교회의 “자치기구인 장로회”에서 장로의 자격을 부여했다.

  ⑵ 칼빈과 종교개혁 사상: 칼빈은 제네바에 다시 왔을 때 부써(M. Bucer)와 카피토(Capito)에게서 영향을 받아 개혁의 성공을 위해 장로제도를 제안한다. 그는 “제네바 교회의 교회 서식서”에 따라, 교회 안에서 생긴 문제에 대해 교회가 권징권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교회 자율사상을 배양”해 나갔다. 개 교회 회중들은 목사 청빙과 교회 예산 사용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지게 되었다.

 ⑶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와 장로교 정치: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회의 자치성”을 위해 “제1치리서”를 작성하여 당회, 노회, 대회, 총회를 설립했다. 낙스는 메리 여왕의 왕권신수설을 우상숭배라고 비판하면서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율성”을 위해 카톨릭 제도를 반대했다.

  ⑷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언약도 운동: 제임스 6세의 아들 찰스 1세가 “One King, One Church”를 외치며 감독교회를 세우려고 “성 자일래스” 교회에서 성공회식 예배를 집전한다((1637. 6. 23). 이에 지주들, 귀족들과, 목사들이 “Grey Friar” 교회에서 “국가언약”(The National Covenant)를 맺어 시민불복종 사상을 선언한다(1638. 2. 28). 러더포드는 [Lex Rex]에서 찰스1세의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통치자가 백성과의 계약을 깰 때는 백성도 통치자에 대한 의무를 행치 않아도 된다고 했다. 언약도들(Covenanters)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머리는 누구인가?”를 제시하며 정부군에 대항하여 이긴다. 네덜란드에서 온 찰스 2세가 약속을 어기고 장로교회를 거부하자 언약도들은 순교를 하면서까지 교회의 자치를 지켜나갔다.

  ⑸ 잉글랜드 장로교회 운동: 헨리 8세가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자 개혁자들은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다. 피의 여왕 메리 때에 “카트라이트”는 교회 순결을 위한 “교회의 권징”과 각 교회의 “평등한 주권”을 강조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는 교회의 자치권을 강조하는 장로교 체제를 선호하지 않았다.

  ⑹ 18세기 장로교회의 재형성과 19세기 장로교회의 대분열: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 앤 여왕의 관용정책으로 국가가 “목사청빙”에 관여하자 회중과 목사들은 회중의 뜻에 반하는 목사를 거부하는 법안을 1734년 총회에서 통과시킨다. 19세기에도 언약도 후예들은 “어떤 목사도 회중의 뜻에 반하여 취임할 수 없다.”고 했다. 대법원이 “교회의 거부법”보다 “국가의 입법권”을 지지하자(1838), 장로교회는 “교회의 영적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국가교회에서 독립(1842. 11. 17),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창설했다.

  1.2. 평가: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⑴ 자치성: 장로교회는 “성경의 원리”와 “종교개혁적 발견”에 기초하여, 외부에 대해 교회의 “자치성”을 지키려고 했다. 왕들은 교회를 통치하기 위해 교황제나 감독제의 부활을 시도했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권징권”을 행사했으며 교회 자율권을 지켜나갔다. 잉글랜드의 Cartwright(1535-1603)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 “목사는 임명되지 않고 교인들에 의해서 피택되어야…”면서 교회의 자치성을 강조했다.

  ⑵ 평등성: 장로교회는 내부에서는 직분자들, 직분자와 교회, 교회와 교회 사이의 계급구조를 인정하지 않고 “평등성”을 강조했다. Cartwright와 Travers는 장로정치가 전제하는 “교회의 평등성”은 성경적이라고 했다. 청교도운동의 지도자 William Ames(1576-1633)는 각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교직자의 위계질서는 없으며 모든 교직자는 평등하다”고 강조했다.


                                       2. 분리와 연합: “순결과 관용 사이에서”

  2.1. 교회사에 나타난 장로교회의 분열

  ⑴ 17세기 언약도 운동: 개혁신앙을 지켜 장로정치의 뿌리를 내린 언약도들은 “신앙의 순결”을 위해 헌신했다. 제임스 7세가 “종교의 자유”로 카톨릭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신앙의 순결”을 위해 타협을 거부했다.

  ⑵ 18,19세기 스코틀랜드의 온건주와 교회분열: 윌리암 3세가 스코틀랜드에 종교적 관용책을 펴고, 온건주의자 카스테어스는 “관용”으로 교회연합을 추구했다. 18세기 후반의 온건주의자들은 설교현장에서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의 표준을 따르지도, 죄, 은혜, 구원에 대해 설교하지도 않아 교회는 생명을 잃어갔다. 19세기에는 그들이 “계몽주의”에 따라 가르치자 “하나님의 말씀” 선포 사상을 따르는 언약도 후예들은 온건주의자들과 결별한다. “목사청빙” 권한 문제로 국가교회로부터 결별한다(1842. 11. 17). 기존교회에서의 분열은 말씀이 제대로 선언되고 그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았다.

  ⑶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연합, 재분열:  ①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은 근대화 과정이 가져 온 영적 침체를 극복하도록 했는데, 학문을 강조한 구파는 부흥기간 동안에 있었던 신파의 “현란한 기교”을 비판했다. 신파는 구파 목사들이 “신앙적으로 죽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했고, 구파가 1741년에 신파 목사들을 제명하면서 교회는 분열되고 만다. ② 19세기 초에 놀라운 “선교 활동”이 일어나면서, 스코트-아일랜드 계통의 보수적인 목사들은, “연합계획”(선교지에서의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연합)에 따라 “내지 선교”가 효과를 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회중교회 목사들이 칼빈주의 정통신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고 비판했다. 이 갈등으로 1837년 장로교 총회는 “구학파”와 “신학파”로 분열하게 된다. ③ “노예제도폐지”에 대한 입장 차이로 장로교회는 “남북으로” 분열한다. “신학파”의 총회가 반노예적 입장을 선언하였지만, 1857년에 “렉싱톤 노회”가 노예보유를 인정하자 이 노회를 중심으로 남부교회가 분리된다. “구학파”의 경우, 1861년 총회에서 교회 연합을 위해 노예제 폐지를 결정했으나 이를 반대한 남부 교회가 분열해 나간다(1657). ④ 남북 전쟁 이후 남부에서 구학파와 신학파는 재연합을 하게 된다(1864년). 북부에서도 1871년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재연합을 이루어 PCUSA를 결성한다. 연합은 되었지만 1920-1930년대 사이에 있었던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에서 프린스톤이 신학적으로 좌경화되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PCA가 설립된다.


  2.2. 평가: “신앙의 순결을 위한 분열은 삶의 거룩으로 나타나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은, 온건주의자들에 대해서 교회의 자치성, 자율성, 개혁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불관용”과 “분리”를 선택했다. 20세기 미국 장로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에서 결별을 선언한 것처럼 교회의 교회의 순결과 생명을 위한 분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분리를 선택했을 때, 교회 순결을 위한 열정은 반드시 순결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언약도들이 크롬웰 지지를 두고 갈등과 불관용을 보이자 백성들이 장로회정치 자체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경우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생기는 불관용은 장로교정신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스코틀랜드가 장로회주의를 신뢰하게 된 계기는 언약도들의 순교와 고난받는 성도들의 삶이었다. “신실하고 정직한 성도들의 삶”이 문서보다 연합하게 하는 힘이 강하다. 미국 장로교회가 “노예문제”가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하고도, 기득권과 자기 이익, 즉 정치적인 입장 차이 때문에 분열을 선택한 예는 과연 “순결한 신앙”을 위한 종교개혁적 분열이었는가를 반성하게 한다.


                           3. 장로교회의 이념과 논쟁의 이슈: “개혁주의 전통”

  3.1. 시대의 도전과 장로교회의 응전

  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낙스는 장로교 개혁의 제1원리를 “오직 성경”으로 보았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성경 제일주의에 기초한 교회 개혁, 성결을 위한 권징 사용, 바른 말씀 선포의 회복을 목적으로 삼았다. 장로회주의의 완성자 멜빌은 “제2치리서”(1581)에서 성경에 없는 감독직을 반대하면서 목사가 말씀을 신실하게 가르치도록 권면했다. 온건주의자들에 반대한 장로교회는 종교개혁 사상을 지키기 위해 결별을 선택했다.

  ⑵ 미국 장로교회: 19세기 미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 흐름 앞에서 개혁전통을 지키려는 쪽과 시대의 사상과 타협하는 쪽으로 나뉜다. 슐라이어마허(1768-1834)와 리츨(1822-89)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과 교회의 권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을 부정했다. 고등비평은 전통적 영감론과 권위를 거부했다. 진화론은 성경적 창조론을 거부하고 기독교를 사회발전 과정에서 생긴 산물로 여겼다. 찰스 브릭스를 중심으로 한 19세기 미국 장로교회 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하나님 주권사상”과 “선택교리”를 수정하려고 했다. 북장로교는 1906년, 컴버랜드 장로교와 연합하면서 “3장 영원한 작정”을 수정했다. 결국, 메이천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신학, 교회와 결별한다.

  3.2. 평가: “종교개혁 전통을 장로교회의 이념으로 삼아야”

  장로교회는 1) 성경과 종교개혁 정신에 기초하여 출발하고 2) 개혁 정신을 기준으로 교회 방향을 선택하고 3) 자유주의 사상에 맞서 “교회의 순결”을 지키려고 했다. 영국과 미국의 반복된 분열과 연합의 실패는, 언약도의 주장처럼 “교회 통일”은 “종교개혁 사상”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적 통합은 재분열로 나가는 길이 되므로, “개혁주의 전통”이 연합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맺으며: “오늘의 장로교회에 적용하며”

  1) 세속의 힘으로부터의 “자치성” 뿐만 아니라, 개 교회 안에서의 “평등성”이 다시 배양될 것을, 오늘의 장로교회는 요구를 받고 있다.
  2) 칼빈과 낙스가 “삶/교회의 순결”을 위한 “권징수행”이 교회의 고유한 업무라고 여겼던 것처럼, 장로교회는 “삶으로 증거된 장로교회”가 될 것을 요청받고 있다.
  3) 성경과 종교개혁 이념에 충실하기 위해 애쓴 언약도들이나 청교도들, 미국의 개혁자들의 삶에서 장로교회는 “종교개혁의 이념”에 충실한지 점검해 보고, 생명과 순결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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