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과목]신약성서 배경사를 요약하고 느낀점 쓰기(참조용)

작성자lsg|작성시간06.05.28|조회수1,078 목록 댓글 0

 ※학기중에 제출하게 되는 신약서론 과목,  주교재 중 택1 도서

           과목명 : 신약서론

              담당교수 : 정훈택


 

            과제명 : 신약성서 배경사를 요약하고

                        느낀점 쓰기

            제출자 :

            학   번 :

            학년반 :

            제출일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과목: 신약성서 배경사

        Ⅰ 신약성서 배경사를 읽고

  에두아르트 로제(Ediard Lohse)의 「신약성서 배경사」, 박찬건이 옮긴 완역본을 읽고 필자는 느낀점(관점)을 요약 서술해 보려고 한다.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신약성서 배경사는 엄밀히 말해서 신구약 성서의 중간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저자는 “여기서 말하는 신약성서 배경사는 신약성서 시대를 전후한 주변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은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후 1-2세기의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주가 될 것이며, 따라서 필자는 이 범위 안에서 이 책의 핵심(특히 성서와 관련 있는) 내용들을 책의 기술(記述) 순서대로 먼저 ‘필자의 관점’으로 요약해 본 후 그 내용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서 ‘필자의 관점’을 서술해 보고자 한다.


1.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신약성서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역사(정치사)는 구약성경 ‘왕하25장, 대하36장,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시대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멸망한 후 바벨론 유배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물론 여기서 다루고자 한 시대보다 훨씬 오래 전 사건이기는 하지만 신약시대 예수님의 족보에 중요한 사건의 한 단락(마1:17)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하고 넘어갈 가치는 있다고 보여진다.

  예수님 탄생전 유대교는 헬라파가 주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로기 시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표시로 안식일 계명과 할례 계명을 준수하였으며 그 민족의 독자성을 지키려 노력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오랜 이국 땅에서의 생활과 우월한 세력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유대인 후예들은 점차 그들의 전통은 물론 언어조차 버리고 희랍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언어와 더불어 헬라주의 문명이 유대땅에 정착하였고 유대인들은 점차 희랍 풍습에 동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경건주의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정치 세력에 야합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산해드린 공회의 지지를 받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헬라파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신약성서 배경의 주도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107년 이렇게 헬라주의화된 도시에서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 무리들 가운데 바리새인의 공동사회가 생겨났으며 헬라주의화된 유대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얀네우스왕비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지혜로운 통치로 그들을 화합시켰다. 그후 혼란스러운 권력투쟁 속에서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장악했고, 기원전 57년에는 시리아에 있던 로마의 식민지 총독 가비니우스(Gavinius)는 식민지역의 분할통치로 유대지역은 예루살렘과 가자라(Gazara)와 여리고 구역으로, 갈릴리는 세포리스(Sepphoris)구역으로,

베뢰아는 아만투스(Amanthus)구역으로 정해 통치했다. 그후 시저(Caesar)가 폼페이우스와 전쟁에서 승리하자 당시 대제사장인 히르칸과 안티파테르는 재빨리 시저편에 서서 지금까지 누려 오던 예루살렘 제의(祭儀) 공동체의 권리와 대제사장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고 세습적인 로마 시민권을 보장 받는 등 강력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안티파테르는 자기의 두 아들인 피나엘(Phasael)에게는 유대를, 헤로데(Herises)에게는 갈릴리 통치를 위임하여 그의 세력에 참여시켰다. 기원전 44년 시저가 암살 당하는 등 불확실하게 급변하는 상황속에서 헤로데(헤롯)는 자신의 지위를 노리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는데 이는 베들레헴의 유아 학살 사건(마2:16)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헤로데는 희랍인과 유대인을 동등하게 취급하면서 양쪽의 높은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으며 이때 디아스포라(이방에 흩어져있는 유대인) 에게도 유대교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으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부류는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리고 헤로데 말년에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태어났으며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칼리굴라-크라우디우스로 권력이 이양되던 시절,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세례요한의 처형, 예수님의 십자가 사형판결 등 직 간접적으로 관장한 역사적 사건의 인물로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기원전 70년 유월절 기간동안 더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때의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이 우시면서 예언(눅19:41-44)하셨던 것이다. 당시 혁명당원들은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성전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고 예루살렘 성은 처참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유대교는 가시적인  중심점이 상실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숭배는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계속 될 수 었으며 그때의 예배 의식이 단편 적으로나마 전승되었다.

  기원후 132-135년에 유대교는 로마의 멍에에서 벗어나려 하드리안(Hadrian)황제때 봉기했으나 당시 가장 존경받던 율법 학자인 랍비 아키바(Aqiba)의 체포, 처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키바를 성경에 약속된 별(민24:17)의 아들로 여기며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으나 아키바의 처형으로 그러한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키비의 순교적 죽음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공동체를 율법 중심으로 모이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은 배경속에서 유대교도들은 언제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실현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차츰 죽은자의 부활과 종말적인 사건과 관련된 묵시문학적인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묵시문학에 의하면 반드시 메시야가 나타나야만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일으키실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그들의 묵시 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 세상은 지나가고 저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와 그의 계획은 비밀의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이 쿰란 공동체 문학에서 발견되어지기도 하였다.

  당시에 대표적인 공동체들을 살펴보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엣세네파등이 있었는데 그중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외식하는 자들로 예수님께 책망을 당하기도 했었던 파들이다. 이들 공동체의 삶은 쿰란 동굴에서 발견물을 근거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발견된 기록들이 오늘날 성서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요한복음과 요한의 서신들 속에는 쿰란 텍스트의 많은 진술들과 접촉한 뚜렷한 흔적들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전승에 힘입어 성서 해석과 율법의 대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예수님당시 힐렐과 샴마이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후에는 랍비 가말리엘과 아키바가 유명했다.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시대에는 정통 유대인들보다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이 훨씬 많았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바벨론 포로사건 이후의 특수한 역사적인 상황의 산물이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팔레스다인의 유대인보다는 헬라 정신에 훨씬 개방되어 있었다. 이들중 선발된 70인이 성경을 공동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팔레스다인과 디아스포라에서의 유대인중에는 로마 황제에 의하여 주어진 특권을 누리며 사는 특권층이 있었으나 대부분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들은 유월절 축제 기간에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회당에서 랍비들의 ‘토라‘ 낭송과 해석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뜻과 계명이 담긴 율법을 들으므로 그들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래서 타국에서 고단한 삶을 위로 받을 수 있었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하나님과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의 희망을 잃지 않은 수 있었다.

2. 신약성서의 헬라주의적-로마적 배경

  기원후 14년 아우구스투스가 76세로 죽고 그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통치를 계승하였다 그의 통치하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세례요한이 팔레스타인에 등장하였고 나사렛 예수가 그 땅에서 활동하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하여 총독에게 넘겨져 십자가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된 후 3일만에 부활한 역사적인 사건이 성경 4복음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기독교인들은 잘 알고 있다.

  티베리우스에 이어 25세에 등극한 칼리굴라는 폭정으로 물러갔고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추대되어 정직한 통치를 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크라우디우스는 기원후 54년에 그의 부인 아그립피나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아들 네로황제가 죽은 후 로마는 혼란기를 맞이한다.

  기원후 1세기경에 로마는 헬라적이고 로마적인 합성문화가 발전하고 있었다. 이때 쓰여진 무수한 서신들이 파피루스에 기록되었고 우편 제도가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로마는 지방자치권을 부여하였고 과세를 부과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생산과 경제는 대부분 노예들이 담당했었다. 이 노예들은 전쟁포들이며 귀족들의 전리품으로 매매되는 등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노예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스토아 철학파들이 주장했으나 노예제도를 폐지하지는 못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엄격한 가부장제를 갖고 있었으며 학문과 교육과 의학도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로마의 황제는 신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불가침의 고귀한 것이라는 사상이 알렉산더 대왕때 생겨났다. 칼리굴라는 면류관을 쓴 자기 모습을 동전에 그려 넣었으며 네로는 자신을 아폴로 묘사했다. 황제 숭배는 주로 정치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었으나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계속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었으며 콘스탄틴 황제 밑에서 시저가 그리스도인에게 굴복하기까지 교회는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했다.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자연 속에서 역사하는 힘과 능력을 형체화 한 것들이었다. 이들의 신은 인간에 예속되어 있으며 단지 죽지 않는다는 점과 큰 힘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인간과 구별된다. 물론 이들에게 정중한 예배의식을 거행하지만 신의 뜻은 도시와 국가가 확고한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일 뿐 기독교에서 말하는 율법이나 규례가 없으며 죽음이나 구원이 없으며 영생은 더더욱 없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재해나 전염병 등으로 깊은 염려와 삶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희랍의 신들은 죽음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밀의 신들은 고통이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Ⅱ. 이 책이 이 시대 어떤 교훈을 주는가?

  우리가 잘 알 듯이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서원 기도와 하나님의 특별한 응답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사무엘은 어린시절부터 철저한 신앙과 교육으로 양육된 위대한 사사요 선지자였다. 그런데 성경 사무엘상 8장 1-3절에 보면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아버지 사무엘의 훌륭한 정신과 신앙을 계승하지 못하고 타락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필자는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다. 즉,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과 제도라도 한 세기는 고사하고 한 세대를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없다. 본책(신약성서 배경사)에서 언급한 학파중에 우리의 귀에 익숙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의 삶을 엄격히 규제하고 선조들로부터 전수받은 유전을 지키려 애쓰며아왔다. 그러나 초창기 선조들의 훌륭한 전통과 유전은 후대로 가면서 여러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번질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는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있었고, 자신의 사고(思考)와 생활방식을 기준으로 볼 때,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사역이나 관점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지를 따라다니면서 논쟁을 걸었으며 그때마다 외식(外飾)과 사람의 유전(遺傳)만 중요시 한 그들을 예수님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교육과 전통 등으로 인격이 형성되고 습관이 굳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전통과 지식과 삶의 방식이 절대 옳으며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있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는 교단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각기 자신들이 옳으며 상대방을 인정하기를 싫어한다.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오신다면 이러한 세대들에게 뭐라 말씀하실까 두렵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자유주의는 세속화되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고, 지나친 보수주의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사람의 이상과 철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오늘의 절대 진리였던 것이 시대가 바뀌면 얼마든지 오류로 판명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다.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시저에게 살해당하자 당시 대제사장 히르칸과 안티파테르는 재빨리 시류에 편승하여 자신의 위치를 보존한 모습을, 일제 강점기 때 한국들 중 친일적인 행위로 자신의 부귀를 지켰던 사람들과 비교해 본다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오직 진리이시며 믿을 수 있는 분은 예수그리스도뿐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친 치우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였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선조들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손들은 또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기원후 132-135년 하드리안(Hadrian) 황제 때에 유대교는 로마의 멍에에서 벗어나려 봉기했을 때, 당시 가장 존경받던 율법학자 였으며 폭동의 지도자였던 랍비 아키바(Aqiba)를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에 약속된 별(민24:17)의 아들로 여기며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을 정도였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목격자가 70여만 명이었는데 실제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자는 500명(고전15:6근거)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가? 그것은 즉, 믿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세대밖에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간 각각에게 주어진 세대를 성실히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만일 역사 기록자들이 자기 세대에 일어난 사실들을 정확히 기록하여 남겼더라면 다음의 수많은 후세들이  좀더 올바르고 정확한 진실들을 공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쿰란 동굴에 기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 보존하려고 애쓴 당시 사람들의 업적은 형언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신학자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정확히 기록하고 보존할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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