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 朴錫胤, ?~?
· 1931년 밀정조직 민생단 조직.
1937년 만주국 국무원 직속 외무국 조사처장
1940년 간도협조회 산하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 총무
만주 항일투쟁 파괴조직 민생단의 수괴
박석윤만큼 일제의 충실한 주구가 되어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으나, 원적(原籍)이 경성부
종로 6정목(丁目)이라는 기록({현대사자료} 29권, 630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친일거두 최남선*의 여동생
최설경(崔雪卿)의 남편, 즉 최남선의 매부였다.
일찍이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의 참모 아베(阿部充家)에게 포섭된 그는 3|1
운동 직후부터 부일배가 되어 민족운동가 김준연(金俊淵)의 전향공작을
벌였지만, 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박석윤은 조선총독부의 도움으로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한때 휘문|중앙고보
교원으로 있다가, 그는 총독부의 재외연구원 직책을 떠맡아 수당
300엔(圓)씩을 지급받으면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하였다. 귀국해서는
{시대일보} 정치부장을 거쳐 1930년 2월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총독부의
어용신문 {매일신보}의 부사장이 되었고 총독부의 정책을 지지|선전하며
식민주의 언론을 이끌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 각지에서는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등 조선인 독립군 부대와 중국인의 항일의용군이 각지에서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두 항일세력간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구체화되었다. 이에 당시 {매일신보} 부사장으로 있던
박석윤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적극 뒷받침하고 한|중 양민족을 이간시키며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0월경부터 조선총독부 및 간도
일본영사관 당국의 후원과 조종을 받고 밀정조직인 민생단(民生團)을
조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먼저 동민회(同民會) 계열의 친일주구배
조병상(曹秉相) 및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金東漢), 김택현(金澤鉉),
이경재(李庚在), 이인선(李仁善), 최윤주(崔允周) 등과 협의하여 민생단의
조직준비를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천도교 지도자 이인구(李麟求) 및 전성호(全盛鎬) 등 친일
민족개량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을 규합한 그는 일본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榮)을 단장으로 하는 민생단을 1932년 2월 5일 간도
룽진(龍井)에서 마침내 발족시켰다. 이 단체는 겉으로는 @생존권
확보(생활안정)와 독특한 문화건설, 자유로운 천지의 개척(낙토의 건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한|중 양민족을 이간하여 중국공산당 조직 및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고 독립군 등 무장세력을 탄압하려는 반공|친일의
간첩(밀정) 조직이었다.
민생단은 우여곡절 끝에 그해 7월에 곧 해체되었지만 이들 주구배들의
특수공작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이른바 박두남(朴斗南) 체포사건을 계기로
조선인 혁명운동가와 중국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이를
고비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동만특위(東滿特委) 등 한|중 양민족
연합의 항일무장투쟁 세력 내부에서는 조선인 대원을 거의 일제의 밀정으로
단죄하는 잘못된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35년까지
간도지역에서만 200여 명(일설에는 500여 명), 기타 지역까지 합하면 500여
명의 조선인 운동가들이 무고하게 민생단원으로 몰려 희생되는 참변이
벌어졌다. 이러한 이간공작을 추진한 박석윤 등의 반민족적 행위는 하늘에
사무치고도 남을 것이다.
결국 @간도 자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만주의 한|중
항일운동세력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고 두 민족간의 연대는 와해될
위기에 빠졌다. 중국공산당 계열의 운동세력이 주도한 항일무장투쟁은 물론,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 계열 세력이 주도한 독립운동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만주국의 외교관으로 영전
박석윤은 민생단의 후신으로 조선인을 주체로 하여 결성된
@간도협조회#(間島協助會)에도 참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간도협조회는 일제의
반혁명운동 공작의 일환으로 조직된 강력 밀정조직이었다. 1935년 12월 당시
간도협조회는 회원 7197명을 거느리면서 간도 일대의 각지에 스파이 조직을
펼쳐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932년 7월 25일 성립한 @만주제국협화회#(滿洲帝國協和會) 산하
@신경협화소년단#(新京協和少年團)의 고문을 맡아 나이어린 소년들을
세뇌공작하는 데도 앞장 섰다. 협화회는 식민지 @조선#의 국민총력연맹과
유사한 성격의 외곽 어용단체인데 1940년 6월말 현재 일본인 14만 9000여 명,
만주인(중국인) 141만 8000여 명, 조선인 8만 2000여 명, 몽고인 1만여 명,
러시아인 3600여 명, 기타 7400여 명, 합계 167만여 명의 회원을 이끌고
있었다.
이 협화회는 건국정신의 현양(顯揚), 민족협화(協和)의 실현, 국민생활 향상,
선덕달정(宣德達情)의 철저, 국민동원 완성 등 5항목으로 $건국이상의 실현과
도의(道義) 세계의 창건을 기한다&는 것을 허울좋게 강령으로 내걸고 있었다.
특히 협화회는 @조직확대 공작 및 사회공작, 선무공작과 기타 특수사업# 등을
주요 사업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각종 특무공작을 벌여
일제의 만주 점령과 지배를 획책하는 단체였다.
이와 같이 민생단과 간도협조회, 협화회 등 주구단체를 통해 만주와 인연을
맺은 박석윤은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된 뒤 다시 일제 당국의 추천과 보증을
받아 만주국의 고위 외무관료가 되었다. 그는 그 해 9월 국제연맹 일본대표의
수행원이 되어 해외출국을 위해 매일신보사를 물러나고 1934년 12월에는
만주국 외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7년 7월에는 만주국 국무원 직속 외무국
조사처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 그는 각종 국제회의에 만주국 대표의 고급
수행원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제의 앞잡이로서 활동하였다.
1939년 2월에 그는 만주국과 수교한 폴란드의 바르샤바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당시 만주국의 외교사절 가운데 주일대사, 주독공사,
주이탈리아공사 다음 가는 중요한 직위였다. 이로 보아 그의 부일(附日)은
대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제치하에서 일제의 @신임#을
받아 외교관으로 활동한 조선인은 박석윤과 장철수(張澈壽) 두 사람뿐이었다.
영사로 재직중이던 1939년 9월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 양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사태를 현장에서 목격하기도 한 그였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문제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만주국에서 크게 출세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충실한 일제의 주구로서
그들의 만주통치에 공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박석윤이 만주국
관료가 되기 전인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한
이승만(李承晩)의 동정을 낱낱이 정탐하여 국제연맹 일본국 사무국장 대리
이토(伊藤述史)를 통해 당시 일본 외상 우치다(內田康哉)에게 보고한
복명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의 직책은 일본 외무성
촉탁(囑託), 즉 일제의 밀정이었던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관동군의 토벌|선무공작을 측면 지원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만주로 돌아온 박석윤은 만주국에서 외무관리로
복무하면서 1940년 10월 30일 조직된 간도협조회 산하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 총무로 다시 활동하였다. 신징(新京:지금의 長春)에
본부를 둔 이 주구단체는 일본 관동군의 반공공작, 선무공작 등을 지원한
간첩단체로서 항일운동가를 상대로 @귀순공작#을 벌이곤 하였다. 일제
관동군의 토벌 및 선무공작을 측면 지원한 이 단체의 주된 역할은 조선민족의
독립군 및 중국공산당 계열의 항일무장투쟁세력에 대한 투항권유였다.
이 공작에는 이범익(李範益:間島省長), 유홍순(劉鴻洵), 최남선이 고문으로
참가하였고, 박석윤 외에 김응두(金應斗), 윤상필(尹商弼)이 총무로,
김교형(金矯衡), 김동호(金東昊), 기네코(金子昌三郞), 김중삼(金仲三),
박준병(朴準秉), 서범석(徐範錫), 이성재(李性在), 최창현(崔昌鉉)이
상무위원으로 동참하였다. 박석윤이 총무로 앞장섰던 이 단체는 관동군 및
조선주둔 일본군인 @조선군#의 만주 동남지구 특별공작, 즉 압록강 건너편
퉁화(通化), 지안(輯安), 린장(臨江)현 등지의 독립군과 항일빨치산에 대한
@소탕작전#에 앞서 다음과 같은 투항권고 삐라를 뿌리고 @선무공작#을 벌이는
반민족적 행동을 벌였다.
김×성 등 반국가자에게 경고문
황량한 산야를 정처없이 배회하며 풍찬노숙하는 제군! 밀림의 원시경에서
현대문화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불행한 맹신(盲信) 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초개같이 도(睹)하고 있는 가엾은 제군! 제군의 저주된 운명을 깨끗이
청산하여야 될 최후의 날이 왔다! 생(生)하느냐! 사(死)하느냐! 150만
백의동포의 총의를 합하여 구성된 본위원회는 금동(今冬)에 전개될
경군(警軍:경찰과 군----인용자)의 최종적인 대섬멸전의 준엄한 현실 앞에
직면한 제군들에게 마지막으로 반성 귀순할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이에
궐기한 것이다.<>
일본제국은<>동양적인 이상사회의 신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백인의 괴뢰가
되어 저항하는 장제스(蔣介石) 정권을 서촉(西蜀)에까지 구축하여 그
위무(威武)를 세계에 선양하고 있다.<>조선내에 있어서는 2300만의 동포는
일본제국의 위광하에서 과거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념을 최후의 1인까지
완전히 청산하여 일본제국의 신민된 광영하에서 격세의 감이 있는 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하여 제군과 같은 시대착오의 이단자가 만주의 밀림에서
현실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사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상식으로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알 만큼 되어 있는 것이다.<>
오호!! 밀림에서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어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서 유례 없는 불완전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여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여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 건설의 성업(聖業)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여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三千里}, 1941. 1)
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박석윤이 앞장선 친일 주구단체의
활동은 재만 조선인을 분열시킴으로써 그들의 반일의식을 말살하고
항일무장투쟁의 존립기반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간교한 박석윤은 1940년대 중반 일제의 패망이 시간문제인 것을 간파하고
서둘러 귀국하여 서울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당국이 여운형(呂運亨)에게 행정권을 넘겨줄 뜻을 비쳤을 때 여운형을
대리하여 당국과 절충하기도 하는 놀라운 변신을 보여 주었다. 요컨대 그는
절대권력자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 장세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동아일보}.
梶村秀樹|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二十九卷, みすず書房, 1972.
~김×성 등 반국가자에게 경고문^, {三千里}, 1941. 1.
滿洲國 軍事顧問部, {國內治安對策の硏究}, 1937.
휘문70년사 편찬위원회, {휘문70년사}, 휘문중고교, 1976.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 朴錫胤, ?~?
· 1931년 밀정조직 민생단 조직.
1937년 만주국 국무원 직속 외무국 조사처장
1940년 간도협조회 산하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 총무
만주 항일투쟁 파괴조직 민생단의 수괴
박석윤만큼 일제의 충실한 주구가 되어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으나, 원적(原籍)이 경성부
종로 6정목(丁目)이라는 기록({현대사자료} 29권, 630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친일거두 최남선*의 여동생
최설경(崔雪卿)의 남편, 즉 최남선의 매부였다.
일찍이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의 참모 아베(阿部充家)에게 포섭된 그는 3|1
운동 직후부터 부일배가 되어 민족운동가 김준연(金俊淵)의 전향공작을
벌였지만, 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박석윤은 조선총독부의 도움으로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한때 휘문|중앙고보
교원으로 있다가, 그는 총독부의 재외연구원 직책을 떠맡아 수당
300엔(圓)씩을 지급받으면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하였다. 귀국해서는
{시대일보} 정치부장을 거쳐 1930년 2월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총독부의
어용신문 {매일신보}의 부사장이 되었고 총독부의 정책을 지지|선전하며
식민주의 언론을 이끌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 각지에서는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등 조선인 독립군 부대와 중국인의 항일의용군이 각지에서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두 항일세력간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구체화되었다. 이에 당시 {매일신보} 부사장으로 있던
박석윤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적극 뒷받침하고 한|중 양민족을 이간시키며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0월경부터 조선총독부 및 간도
일본영사관 당국의 후원과 조종을 받고 밀정조직인 민생단(民生團)을
조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먼저 동민회(同民會) 계열의 친일주구배
조병상(曹秉相) 및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金東漢), 김택현(金澤鉉),
이경재(李庚在), 이인선(李仁善), 최윤주(崔允周) 등과 협의하여 민생단의
조직준비를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천도교 지도자 이인구(李麟求) 및 전성호(全盛鎬) 등 친일
민족개량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을 규합한 그는 일본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榮)을 단장으로 하는 민생단을 1932년 2월 5일 간도
룽진(龍井)에서 마침내 발족시켰다. 이 단체는 겉으로는 @생존권
확보(생활안정)와 독특한 문화건설, 자유로운 천지의 개척(낙토의 건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한|중 양민족을 이간하여 중국공산당 조직 및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고 독립군 등 무장세력을 탄압하려는 반공|친일의
간첩(밀정) 조직이었다.
민생단은 우여곡절 끝에 그해 7월에 곧 해체되었지만 이들 주구배들의
특수공작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이른바 박두남(朴斗南) 체포사건을 계기로
조선인 혁명운동가와 중국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이를
고비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동만특위(東滿特委) 등 한|중 양민족
연합의 항일무장투쟁 세력 내부에서는 조선인 대원을 거의 일제의 밀정으로
단죄하는 잘못된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35년까지
간도지역에서만 200여 명(일설에는 500여 명), 기타 지역까지 합하면 500여
명의 조선인 운동가들이 무고하게 민생단원으로 몰려 희생되는 참변이
벌어졌다. 이러한 이간공작을 추진한 박석윤 등의 반민족적 행위는 하늘에
사무치고도 남을 것이다.
결국 @간도 자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만주의 한|중
항일운동세력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고 두 민족간의 연대는 와해될
위기에 빠졌다. 중국공산당 계열의 운동세력이 주도한 항일무장투쟁은 물론,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 계열 세력이 주도한 독립운동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만주국의 외교관으로 영전
박석윤은 민생단의 후신으로 조선인을 주체로 하여 결성된
@간도협조회#(間島協助會)에도 참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간도협조회는 일제의
반혁명운동 공작의 일환으로 조직된 강력 밀정조직이었다. 1935년 12월 당시
간도협조회는 회원 7197명을 거느리면서 간도 일대의 각지에 스파이 조직을
펼쳐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932년 7월 25일 성립한 @만주제국협화회#(滿洲帝國協和會) 산하
@신경협화소년단#(新京協和少年團)의 고문을 맡아 나이어린 소년들을
세뇌공작하는 데도 앞장 섰다. 협화회는 식민지 @조선#의 국민총력연맹과
유사한 성격의 외곽 어용단체인데 1940년 6월말 현재 일본인 14만 9000여 명,
만주인(중국인) 141만 8000여 명, 조선인 8만 2000여 명, 몽고인 1만여 명,
러시아인 3600여 명, 기타 7400여 명, 합계 167만여 명의 회원을 이끌고
있었다.
이 협화회는 건국정신의 현양(顯揚), 민족협화(協和)의 실현, 국민생활 향상,
선덕달정(宣德達情)의 철저, 국민동원 완성 등 5항목으로 $건국이상의 실현과
도의(道義) 세계의 창건을 기한다&는 것을 허울좋게 강령으로 내걸고 있었다.
특히 협화회는 @조직확대 공작 및 사회공작, 선무공작과 기타 특수사업# 등을
주요 사업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각종 특무공작을 벌여
일제의 만주 점령과 지배를 획책하는 단체였다.
이와 같이 민생단과 간도협조회, 협화회 등 주구단체를 통해 만주와 인연을
맺은 박석윤은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된 뒤 다시 일제 당국의 추천과 보증을
받아 만주국의 고위 외무관료가 되었다. 그는 그 해 9월 국제연맹 일본대표의
수행원이 되어 해외출국을 위해 매일신보사를 물러나고 1934년 12월에는
만주국 외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7년 7월에는 만주국 국무원 직속 외무국
조사처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 그는 각종 국제회의에 만주국 대표의 고급
수행원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제의 앞잡이로서 활동하였다.
1939년 2월에 그는 만주국과 수교한 폴란드의 바르샤바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당시 만주국의 외교사절 가운데 주일대사, 주독공사,
주이탈리아공사 다음 가는 중요한 직위였다. 이로 보아 그의 부일(附日)은
대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제치하에서 일제의 @신임#을
받아 외교관으로 활동한 조선인은 박석윤과 장철수(張澈壽) 두 사람뿐이었다.
영사로 재직중이던 1939년 9월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 양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사태를 현장에서 목격하기도 한 그였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문제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만주국에서 크게 출세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충실한 일제의 주구로서
그들의 만주통치에 공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박석윤이 만주국
관료가 되기 전인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한
이승만(李承晩)의 동정을 낱낱이 정탐하여 국제연맹 일본국 사무국장 대리
이토(伊藤述史)를 통해 당시 일본 외상 우치다(內田康哉)에게 보고한
복명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의 직책은 일본 외무성
촉탁(囑託), 즉 일제의 밀정이었던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관동군의 토벌|선무공작을 측면 지원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만주로 돌아온 박석윤은 만주국에서 외무관리로
복무하면서 1940년 10월 30일 조직된 간도협조회 산하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 총무로 다시 활동하였다. 신징(新京:지금의 長春)에
본부를 둔 이 주구단체는 일본 관동군의 반공공작, 선무공작 등을 지원한
간첩단체로서 항일운동가를 상대로 @귀순공작#을 벌이곤 하였다. 일제
관동군의 토벌 및 선무공작을 측면 지원한 이 단체의 주된 역할은 조선민족의
독립군 및 중국공산당 계열의 항일무장투쟁세력에 대한 투항권유였다.
이 공작에는 이범익(李範益:間島省長), 유홍순(劉鴻洵), 최남선이 고문으로
참가하였고, 박석윤 외에 김응두(金應斗), 윤상필(尹商弼)이 총무로,
김교형(金矯衡), 김동호(金東昊), 기네코(金子昌三郞), 김중삼(金仲三),
박준병(朴準秉), 서범석(徐範錫), 이성재(李性在), 최창현(崔昌鉉)이
상무위원으로 동참하였다. 박석윤이 총무로 앞장섰던 이 단체는 관동군 및
조선주둔 일본군인 @조선군#의 만주 동남지구 특별공작, 즉 압록강 건너편
퉁화(通化), 지안(輯安), 린장(臨江)현 등지의 독립군과 항일빨치산에 대한
@소탕작전#에 앞서 다음과 같은 투항권고 삐라를 뿌리고 @선무공작#을 벌이는
반민족적 행동을 벌였다.
김×성 등 반국가자에게 경고문
황량한 산야를 정처없이 배회하며 풍찬노숙하는 제군! 밀림의 원시경에서
현대문화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불행한 맹신(盲信) 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초개같이 도(睹)하고 있는 가엾은 제군! 제군의 저주된 운명을 깨끗이
청산하여야 될 최후의 날이 왔다! 생(生)하느냐! 사(死)하느냐! 150만
백의동포의 총의를 합하여 구성된 본위원회는 금동(今冬)에 전개될
경군(警軍:경찰과 군----인용자)의 최종적인 대섬멸전의 준엄한 현실 앞에
직면한 제군들에게 마지막으로 반성 귀순할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이에
궐기한 것이다.<>
일본제국은<>동양적인 이상사회의 신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백인의 괴뢰가
되어 저항하는 장제스(蔣介石) 정권을 서촉(西蜀)에까지 구축하여 그
위무(威武)를 세계에 선양하고 있다.<>조선내에 있어서는 2300만의 동포는
일본제국의 위광하에서 과거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념을 최후의 1인까지
완전히 청산하여 일본제국의 신민된 광영하에서 격세의 감이 있는 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하여 제군과 같은 시대착오의 이단자가 만주의 밀림에서
현실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사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상식으로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알 만큼 되어 있는 것이다.<>
오호!! 밀림에서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어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서 유례 없는 불완전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여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여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 건설의 성업(聖業)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여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三千里}, 1941. 1)
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박석윤이 앞장선 친일 주구단체의
활동은 재만 조선인을 분열시킴으로써 그들의 반일의식을 말살하고
항일무장투쟁의 존립기반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간교한 박석윤은 1940년대 중반 일제의 패망이 시간문제인 것을 간파하고
서둘러 귀국하여 서울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당국이 여운형(呂運亨)에게 행정권을 넘겨줄 뜻을 비쳤을 때 여운형을
대리하여 당국과 절충하기도 하는 놀라운 변신을 보여 주었다. 요컨대 그는
절대권력자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 장세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동아일보}.
梶村秀樹|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二十九卷, みすず書房, 1972.
~김×성 등 반국가자에게 경고문^, {三千里}, 1941. 1.
滿洲國 軍事顧問部, {國內治安對策の硏究}, 1937.
휘문70년사 편찬위원회, {휘문70년사}, 휘문중고교,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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