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 세 가지
이것은 저의 개인 생각입니다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 세 가지는
첫 번째, 세종이 만들고 성종이 완성한 조선의 노비제도 종천법(從賤法)이고,
두 번째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며, 세 번째는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입니다.
1.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 중 첫 번째는, 조선 백성의 40%~50%를 노비로 전락하게 만들었던 조선의 노비제도 종천법(從賤法)입니다.
조선의 노비제도 종천법(從賤法)에 관하여서는 2018년 11월 18일 제192회 창녕 화왕산 산행시에 자세하게 말씀드린바 있으며, 군성산우회 홈페이지에 “조선의 노비제도”라는 제목으로 관련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 중 두 번째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입니다.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895년 8월 20일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에,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합니다. 이 아관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습니다.
아관파천 당시의 국제정세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는 영국의 러시아 봉쇄정책이 큰 흐름이었습니다. 따라서 고종의 아관파천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역행하는 사건으로 국제사회에 큰 이슈로 부상하게 됩니다. 결국 조선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고, 국제사회에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용인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맙니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국제정세에 어두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1839~1842년 아편전쟁 이후에 중국은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하였던, 공친왕 혁흔과 이홍장(李鴻章) 등이 주도하였던 양무운동(洋務運動)과 중국의 전통과 서구의 선진문명을 화합하여 받아들이고자 하였던, 양계초(梁啓超) 등이 주도하였던 변법자강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또한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에 부국강병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움직임은 조선의 위정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서구 열강들의 움직임, 국제정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3.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 중 세 번째는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입니다.
3-1.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해 혼춘(琿春), 왕청(汪淸), 연길(延吉), 화룡(和龍) 등의 두만강 북부의 만주지역(간도)과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갑니다.
그 중에서도 봉오동 전투(鳳梧洞 戰鬪)와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3-2. 봉오동전투(鳳梧洞 戰鬪)는 1920년 6월 6일~ 6월 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등의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의 연합부대가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병력은 한국인 독립군은 1,200여명이었고, 일본군은 500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상해임시정부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명, 중상 200명,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대한독립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3-3. 청산리전투(靑山里 戰鬪)는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 등이 지휘하는 1,600여명의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1,400여명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하는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일대에서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입니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人馬)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고 합니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또한 100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청산리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습니다.
3-4. 간도참변 :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투입하여 독립군 섬멸작전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중이나 중·소 국경 지대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계획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게 됩니다. 특히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한 것을 계기로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합니다. 이 사건을 간도참변이라 부릅니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습니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들은 현재까지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피해를 합하면 피해를 당한 조선인은 적어도 수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은 러시아령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합니다.
3-5.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 소련령 스보보드니시>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단행하면서 간도참변을 일으킵니다. 이에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피하여 러시아령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령 자유시에 집결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赤軍)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白軍)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백군(白軍)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백군(白軍)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합니다. 일본은 백군(白軍)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부대를 소탕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에 독립군은 자연스럽게 적군(赤軍)에 가담하게 되었고,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에서 러시아 적군(赤軍)과 한인 독립군은 일본군과 백군(白軍)을 전멸시키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합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赤軍)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이들과 행동을 같이하여 자유시로 이동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간도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해 온 4,000여 명의 독립군 부대들이 러시아 영토인 스보보드니(자유시)로 집결하게 됩니다. 이들의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러시아의 적군(赤軍)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러시아령 내에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지도부 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지도부는 러시아령의 대한국민의회를 지지를 받고 있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고려혁명군)과 상해 임시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해파 고려공산당(대한의용군)의 두 세력으로 나뉘어 군권을 놓고 심각하게 대립하였는데,
1921년 6월 28일 고려혁명군은 러시아의 적군(赤軍)과 함께 대한의용군 주둔지를 포위하고 대규모 공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입니다.
자유시 참변의 피해상황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대한의용군 2,000여 명 가운데 200여명이 사망하고, 800여명이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나머지는 자유시를 탈출하여 북만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당시 김좌진,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는데, 자유시 참변 이후 흩어진 독립군을 모아 부대를 재편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만, 결국은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독립군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대규모 무장세력은 더 이상 이 땅에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1920년대 초반에 자유시 참변으로 대일항전을 위한 대규모 무장세력이 사라지게 되니 이후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사실상 무장투쟁이 사라진 상황에서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 부대가 함경남도 혜산진 부근의 작은 마을인 보천보를 점령해 경찰 주재소와 행정 관청을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돌아가던 중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여 일경 7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합니다.
사실 이 전투는 그 규모나 전과가 미미하여 차라리 ‘소동’이라 할 정도였습니다만, 무장투쟁이 사라진 상황에서, 유격대의 국내 침입이란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중과 독립운동 진영의 패배주의를 단숨에 털어버리는 심리적 효과는 대단히 컸습니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하며 속보를 전하여 소위 “김일성 신화”를 낳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4. 국권의 상실 및 해방 당시의 상황 & 패전국 일본에 대한 대한민국의 승전국 지위
국가가 망하는 경우라도 품위 있게 망하고, 국권을 되찾을 때도 품위 있게 해방이 되었다면 비록 식민 지배를 당하였던 아픈 역사라도 금새 치유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대한민국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는 우리 민족은 다양한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였고, 뜻있는 인사들이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하여 조병세(趙秉世), 송병찬(宋秉瓚), 홍만식(洪萬植), 이상설(李相卨), 이한응(李漢應), 이상철(李相哲), 전봉학(全奉學), 윤두병(尹斗炳), 송병선(宋秉璿), 이건석(李建奭) 등의 지사들이 그들입니다.
한편으로는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나선 이들도 있었습니다. 충청도에서는 민종식(閔宗植)이, 전라도에서는 최익현(崔益鉉)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강원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 항일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 망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안중근(安重根)은 1909년 12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 침략의 원흉 이등방문을 총살,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망하던 날에는 총 들고 일본에 대항한 사람 한 사람 없었고, 치욕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데라우치는 그날 저녁이 되자 크게 웃어 조선 백성을 조롱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패망하던 날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하였던 1941년도 일본군은 총 450만명 이었고, 패망 직전의 일본군은 총 720만명 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해방 당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의 수는 682명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해방 당시에 장개석의 중국국민당 정부 소속으로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 300여명이 있었고,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정부 산하에도 조선인 군인이 약 3만명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들은 장개석과 모택동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대였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령으로 움직이는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 682명을 가지고 720만명의 일본군을 대항한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1952년 4월 28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 및 전후 처리를 위하여 미국, 영국을 비롯한 전승국 49개국과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타이완과 남사할린 등의 점령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반환하도록 하면서도 독도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 향후 영토 분쟁의 소지를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일본으로부터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49개국 승전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합니다. 영국의 결사적인 반대 때문입니다.
영국의 반대 이유는 참으로 엉뚱합니다.
“콰이강의 다리”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1943년, 태국의 정글 속에 자리 잡은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 송치되어 온 영국 육군의 니컬슨 대령, 포로수용소 소장인 사이토 대령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입니다만, 영국군 공병대 소속 포로들은 콰이강의 급류에 일본군용의 교량을 설계하고 완성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에 나오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영국군 포로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자신들을 고문하고 학대하였던 일본군 전쟁범죄 혐의자를 고발하는데, 전쟁범죄 혐의자들은 대개 하급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 하급병사들 중에는 한국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수많은 영국군 포로들의 증언은 최고 악질 범죄자로 한국인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전범재판 결과 상당수의 한국인 병사들은 유죄를 언도받아 사형 또는 유죄를 언도받고 감옥살이를 합니다.
영국 정부는 이런 사실을 들어 한국을 전승국이 아니라 일본과 같은 패전국의 지위에 놓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의 중재로, 한국은 패전국 명단에는 올라가지 않음을 다행으로 알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에 승전국의 명단에 대한민국의 이름을 올렸다면 1965년에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은 마땅히 그 명칭이 “한일배상금협정”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 세 가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