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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정진(寄正鎭)- 추계추씨의 가승을 극찬한 인물

작성자어등산나무꾼|작성시간15.04.23|조회수712 목록 댓글 0

노사 기정진 선생은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성리학의 6대가로 지칭되는 분입니다.

특히 이분은 한말의 대 유학자로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한번도 부임하지 아니하신 징사로  조선 중엽의 남명선생과 같이  벼슬에 나가지 않아 더욱 유명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 서찰은 인흥서원을 창건하신 추세문공이 우리 추씨 가승을 모아 두차례나 노사선생을 방문하여 문사에 대하여 여러 자문을 구한 듯합니다.

내용을 보면 추씨가승에 대하여 극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사와 같은 원로의 대학자가 우리 추씨가승을 그렇게 극찬하였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합니다.

간찰 사진과 더불어 서울 대종회의 추석구님께서 한글번역한 내용을 올립니다.

서찰(書札)의 일자가 <戊辰初秋湖南 奇正鎭><庚午初冬湖南病夫幸州奇正鎭>이라하여 각각 1868년과 1870년으로 생각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성리학을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 노사 기정진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 1798~1879)은

희대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主潮)이던 성리학은

높은 이론의 관념성 때문에 실천과 실행이 어려웠던 이유로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말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몇몇 높은 수준의 성리학자들 때문에

성리학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망국의 무렵에 나라사랑의 뜨거운 의병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런 운동의 사상과 철학을 제공한 대표적 성리학자가

바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사리에 있는 ‘고산서원’.

노사 기정진은 78세때 이곳으로 이사와 4년간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세 도를 전한 뒤 세상을 떴다. /사진작가 황헌만


더구나 노사 기정진은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최고수준의 주리론(主理論)에 근거하여

행위와 실천이 없는 관념적인 이론은 진리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이 밝혀내고 찾아낸 진리는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그 참뜻이 있다고 믿고,

82년의 평생 동안 가장 겸허하고, 가장 순수한 학자로서의 자세와 처신을 잃지 않았다.

마음과 몸으로 벼슬살이를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일생을 바쳐,

참으로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터득해낸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조선유학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저서에서 몇백명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중에서

그래도 학자다운 학문을 이룩한 학자로 여섯 분을 꼽았는데,

퇴계·율곡·화담을 이은 학자로 녹문 임성주와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을 거명하였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와 화서 및 한주를 들면서

그분들의 업적으로 성리학의 역할이 그런대로 마무리되었다는 주장을 폈었다.

대체로 옳은 판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서는 경기도 출신이고, 노사는 전라도 출신이며 한주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화서는 노사보다 6년 연상이고 노사는 한주보다 20년 연상이지만,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의 비슷한 시기가 세 학자들의 생존 기간이었다.

서로의 정보교환이나 연락도 없었으면서도, 주리(主理)라는 큰 틀의 이론에 뜻을 같이 하였고,

위정척사의 논리에도 큰 차이 없이 망해가던 나라에

우국(憂國)과 애국(愛國)의 불꽃을 피우게 하였던 점도 큰 차이가 없었으니,

바로 그 시대를 이끌던 진운(進運)에 세 학자들이 앞장선 셈이었다.

- 노사의 탄생 -

노사 기정진은 정조 22년(1798)

지금의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일명 조동(槽洞: 구수동)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해 6월 3일 해가 질 무렵이었다. 본디는 아버지 기재우(奇在祐)가 장성군 하남에 거주했으나

임시로 살아가던 구수동에서 태어났으니,

탄생지야 순창군이지만 선대 때부터 살아가던 장성을 고향으로 여길 수 있다.

 

어린 시절에도 고향인 장성의 하남을 찾은 적이 많았고,

친족들이 대부분 하남에 있었기에 왕래가 잦았다.

더구나 18세에 양친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되자,

바로 고향인 하남으로 돌아와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일생을 보냈으니

그곳이 고향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남은 지금의 지명으로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阿谷里)인데,

그때는 아치실, 즉 아곡(鵝谷)으로 불렀다.

그 아치실은 기씨 이전에 박씨의 마을인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아치실 기씨’라는 호칭이 나도록 떵떵거리며 살던 기씨의 명촌이었다.

지금은 노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거의 폐허가 된 마을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선비의 생활에 넉넉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 노사는
아치실에서도 오래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그곳과 멀지 않은 맥동(麥洞), 매곡(梅谷), 탁곡(卓谷), 여의동(如意洞) 등지를 전전하면서

장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에도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사인 관불암(觀佛菴), 남암(南菴), 백양사 등의 절에서

골똘히 독서하면서 학문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 면암 최익현과 매천 황현이 찾았던 하사리 -

노사가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저술활동과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하사리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長山里)다.

65세 이후 20년이 넘도록 정착하면서 높은 학문과 사상으로 무장한 사상가 노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77세 때인 노경에야 노령산(蘆嶺山) 아래의 하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사(蘆沙)라는 자호로 부르고 ‘노사설(蘆沙說)’을 지어 저간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대곡 김석귀, 일신재 정의림, 노백헌 정재규를 비롯하여

손자인 송사 기우만은 그들의 학문이 바로 하사리 노사의 문하에서 익어갔었다.

 

당대의 의기남아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탄핵하다 반대파에 밀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해배하던 1875년 4월

노사를 찾아뵙던 곳도 하사리이다.

 

또 15세의 어린 학동(學童)이던 뒷날의 유명한 지사(志士) 시인이던 매천 황현(黃玹)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노사를 찾아와 학문을 물었던 곳도 바로 하사리였다.

70이 넘은 노학자를 황현이 찾은 때는 1869년의 어느 날이니,

그때 노사는 신동이던 어린 황현을 보고 경계의 시 세편을 지어주었다.

보배로운 소년이 행전도 안 치고 찾아오니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거니
연잎 위의 물방울 구슬 자세히 보라 (贈黃玹三首)

천재적인 시인 매천의 모습을 보고 재주만 믿고 경솔할까 걱정되어 경계의 시를 주었다.

그래서 매천도 그의 유명한 ‘매천야록’의 맨 끝 부분에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면서

“15세에 노사선생을 찾아가 뵈었더니 기특한 소년이라고 칭찬해주었다”라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하사리는 지금 흔적이 없다.

- 중암 김평묵과 영재 이건창이 찾았던 고산리 -

이유야 알 수 없으나, 78세의 노인 노사는

그해 겨울에 오늘의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와

마지막으로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게 도를 전한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사는 1875년 겨울에 이사와 1879년 12월 29일 생을 마치던 날까지

4년이 넘도록 ‘담대헌(澹對軒)’이라는 강학소를 짓고 거기에서 거처하면서

학술서적을 저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치실이나 하사리는 노사의 흔적도 전해주지 못하지만,

이곳 ‘담대헌’의 건물은 덩실하게 솟아있고, ‘고산서원’이 우람하게 서 있어서,

노사의 유적지는 이곳에 이르러야만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고산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는 담대헌, 마루에 올라 앉아 있노라면

툭터진 남쪽으로 아스라이 광주의 무등산이 보이고, 무등산 자락의 장망봉도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곳에는 노사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노년기의 작품인 ‘담대헌기’에는 그의 간절한 부모님 생각이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곳 담대헌에도 명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병자수호조약(1876)을 결사반대했던 최익현은

흑산도로 귀양갔다가 1879년 3월 해배되어 귀경하던 때에

병중에 신음하던 노사를 담대헌으로 찾아뵈었다.

도를 듣지 못하고 얼굴만 뵙고 떠나던 면암은 시를 지었다.

도학(道學)이 남쪽 고을에 있어 성망이 무거운데
공자처럼 사모한 사람 누구이던가
두 번째 찾아왔으나 도 못 듣고 얼굴만 뵈오니
50 되도록 배움 없는 사람 후생이 부끄럽네 (‘拜蘆沙奇丈’)

노사에게 도를 얻어듣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면암의 시는

노사의 학덕이 어느 정도로 높았나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노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담대헌은 적막하지 않았다.

노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소선생(少先生)인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

담대헌의 주인이 되어 학자들을 맞이하였다.

 

1884년 12월 척사위정운동을 주도하다 전남 무안의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돌아가던

당대의 학자 중암 김평묵이 노사의 유촉을 찾아 담대헌을 방문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노사의 학문이 스승의 학문과 같은 내용이라며 극구 찬양하던 김평묵은

송사 기우만과 몇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자 숭모의 정을 금치 못했다.

뒷날 노사의 주저(主著) ‘외필(猥筆)’이라는 글에 찬양의 발(跋)을 담았던 사람도 김평묵이었다.

그 뒤 1895년,

전남 보성으로 귀양갔다가 해배되어 돌아가던 희대의 문장가 영재 이건창(1852~1898)은

노사 학문의 보금자리인 담대헌을 찾았다.

송사 기우만과 함께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던 영재는

노사의 깊은 학문에 탄복하면서 아낌없는 찬양의 시를 지었다.

‘납량사의’ 읽으며 마음 기울인 지 오래더니
담대헌에 오르자 사모의 정 새롭도다
사방을 둘러 싼 고산(高山)은 공경의 뜻 더 일고
성긴 대밭에서는 가난이 흐르는구나
정밀한 마음으로 얻어낸 도는 옛 사람을 능가하고
박학(樸學)으로 가문 이은 손자가 있네
탄식하노라 오늘의 만남 어이 쉽게 얻으리
돌아가서는 당연히 이야기 진진하리라.
(노사선생 고택을 지나며 손자 송사와 함께)

예나 이제나 가난한 노사의 집안,

가난이 흐른다는 대밭만 지금도 성긴 모습으로 대바람 소리만 내고 있었다.

한말의 거유이자 의기의 사나이들인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영재 이건창 등이

찬양해마지 않던 노사의 학문.

그들의 찬양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게 ‘고산서원’의 우람한 모습이 호남학을 상징해주고 있다.

 

 

최초의 척사위정 주장  . . . 국시로 세우다

          

노사 기정진은 성리학사에서도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여

가장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의 제창자이자, 견고한 일원론으로 유리론의 체계를 세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학문영역을 개척한 학자였다.

노사 기정진의 묘소와 묘전비.

“하늘이 우리의 도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를 모아 진실로 대성하셨네”라는 비문은 제자 정재규가 썼다./ 사진작가 황헌만


 

- 노사학파의 형성 -

노사의 학문과 그 제자들을 노사학파라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사 자신의 학문이 매우 독특한 데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걸출한 학자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노사학문을 고수하고 전파하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때문이다.

 

‘고산서원’에는 노사를 주벽(主壁)으로 모신 신실(神室)인 고산사(高山祠)가 있고,

강당으로 담대헌이 있고, 동쪽으로 동재(東齋)인 집의재(集義齋)가 있고,

서쪽으로 서재(西齋)인 거경재(居敬齋)가 있다.

담대헌과 거경재 사이에는 노사문집의 목판본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담대헌 남쪽에는 우람한 3간의 정문이 있으며 정문 밖 동편에는 서원의 관리사가 볼품있게 서 있다.

신실인 고산사에 배향(配享)된 제자 학자들의 면면이 바로 노사학파의 거장들이다.

우선 노문3자인 대곡 김석귀, 노백헌 정재규, 일신재 정의림 수제자 세 분에,

손자인 송사 기우만까지 네 분의 학자가 모셔져 있고,

또 다른 네 분의 학자들이 연달아 자리하고 있다.

월고 조성가, 석전 이최선, 신호 김녹휴, 동오 조의곤이 그들인데 모두가 당당한 학자들이었다.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대학단이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배향된 8명은 그 중에서도 대표자였다.

- <납량사의>와 <외필> -

노사 선생의 묘소 곁에 최근에 세운

척사위정탑.

노사 학문의 정수(精粹)는 누가 뭐라 해도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다.

 

그런 성리학의 대표적 저술은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다.

 

46세의 왕성한 장년기의 저작인 <납량사의>는 그 당시 논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주장이다.

이기(理氣)를 이원론(二元論)으로 잘못 해석하여 인(人)과 물(物)의 성에 대한 이동(異同)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유리론, 즉 이(理) 하나일 뿐이라는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인 노사는 인물성동이론의 어떤 것도 반대하면서 자기대로의 유리론을 주장하였다.

죽음을 몇 달 앞둔 81세의 말년에 저작한 <외필>은 주기론(主氣論)을 철저히 배격하느라 율곡 이이의 학설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이기론으로, 뒤에 큰 파란을 일으킨 논문인데, 기(氣)란 이(理)의 대칭일 수 없는, 이(理)의 예속물이라고 설명하여 새로운 이기론을 세운 학술이론이었다.

 

치밀했던 노사는 46세 때의 저술인 <납량사의>를 77세 때에 다시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을 보강하였고,

81세 때의 <외필>은 죽음이 임박한 때에 저술하여 당대의 석학들인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그들도 의심 없이 독실하게 믿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던 글이었다.

80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학문이론을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참으로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던 모습이었다.

- 병인양요에 올린 상소 -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깊숙이 연구해낸 성리학의 높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긴 학자가 기정진이었다.

 

69세이던 병인년에는 병인양요라는 전대미문의 난리가 일어났던 해다.

서양의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면서 세상이 요동칠 때,

그런 소식을 들은 노사는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병환에 이를 지경이 되자,

견딜 수 없는 애국심에서 곧장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름 하여 ‘병인소(丙寅疏)’라는 참신한 내용의 상소였다.

 

그해 7월의 일인데, 이른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설파한 국내 최초의 상소였다.

같은 때에 화서 이항로도 비슷한 내용의 척사위정의 상소를 올리는데 그때는 9월의 일이었으니

노사보다는 2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논의가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和議)를 이루자며 전쟁을 피하자던 주장이 대세를 이루던 때에,

노사는 결사반대하고 전쟁을 위한 군비강화책을 열거하고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폈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는 벼슬이 올라 공조참판이라는 고관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천하에 노사 기정진의 이름을 알린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사의 최후 -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많이 배운 적도 없으나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을 알았으며,

7세에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이라는 시는 온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가 되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1세에 지었다는 ‘춘추정기(春秋亭記)’라는 글은

노성의 학자도 짓기 어려울 만큼의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

 

15세에 일어난 평안도의 홍경래난에 대하여 예언했던 이야기도

그만큼 사리판단에 밝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명분이 없는 민란은 승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난이 평정된다고 노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학자로서의 학문이 대체로 이룩된 20대 후반인 29세에는 최초로 서울 나들이를 떠났다.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대산 김매순(臺山 金邁淳)을 찾아 보았고

충청도로 내려오면서는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를 찾았다.

당시에 가장 큰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유다.

 

마침내 34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한다.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같은 높은 수준의 학자가 시관(試官)이던 때문에

그래도 노사가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진사과에 합격하자 그는 끝내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중단했으나,

노사에게는 그때부터 벼슬길이 열렸다.

 

35세 때부터 나라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45세에 내린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에 겨우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그의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내린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현감이라는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고

산림(山林)의 벼슬인 장령(掌令)이나 집의(執義)는 물론

69세 때의 동부승지나 호조참의 등도 모두 거절하였고 재신(宰臣)의 지위인 공조참판이 내려졌고,

79세에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어도 모두를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생애를 바치고 말았다.

노사의 생애에 말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골의 노학자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승지·참의·참판의 벼슬이 내려져도 전혀 응하지 않고,

77세에는 그의 대표적 논문인 ‘납량사의’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81세에는 ‘외필’이라는 독특한 유리론의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79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병이 나도록 우국충정을 이기지 못했으나

면암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며

부끄러움을 이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79세 때의 시조가 전해진다.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으며,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곳 없건마는 흥 다하면 갈까 하노라”라는 시조 한 수는

그의 마지막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웠나를 반증해주고 있다.

 

학문의 높은 수준에, 아무런 미련 없이 아름답게 생을 마치겠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81세, 죽기 1년 전에야 생애의 대작인 대표적 논문을 저작한 그의 삶이 너무나 멋지지 않는가.

- 노사의 묘소와 척사위정탑 -

노사의 학문과 사상을 이으며 학문이 강해지던 곳이 ‘고산서원’이라면,

노사의 가장 뚜렷한 유적지는 그의 묘소다.

당시의 행정구역은 영광군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행정구역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의 황산(凰山)마을이다.

 

몇 년 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바쳐 세운 ‘노사선생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학자이자 의병대장으로 생전에 가장 노사를 숭앙했던 면암 최익현이 지은 글에

근래의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쓴 글씨다.

 

14세에 결혼하여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합장으로 계시는 부인은

울산김씨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이다.

노사의 제자 중에 영남의 학자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노백헌 정재규가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이 우리의 도(道)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正氣)를 모아 진실로 대성(大成)하셨네”(天相斯道 正氣之會 展也大成)라는 찬사로

정재규는 선생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찬양하였다.

 

고산서원에는 노사의 학문이 살아서 강해진다면 묘소에는 노사의 혼이 잠겨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척사위정의 논리를 주창한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묘소 곁에 척사위정탑이 장엄하게 세워져 후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은 지나는 행인들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해주고 있다.
- 2007년 12월 7일, 12월 14일 경향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한말 호남 사림의 지주, 기정진奇正鎭(1798~1879)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행주幸州로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기재우奇在祐이고 모친은 안동권씨이며 1815년(순조 15) 장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계속 살았다. 그의 가계는 5대조인 기정하奇挺夏의 동생 기정익奇挺翼이 송시열에게 수학하는 등 서인․노론․이이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중간에 공백이 있어 단정지어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0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성리학 연구를 시작하여 이미 10대 중․후반에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뚜렷한 스승이 없이 조용한 방이나 산사에서 깊은 사색과 명상을 통해 자신의 사상체계를 세워 나갔다. 다음의 글은 당시 그가 어떻게 학문에 정진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듣건대 스승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한 사람을 낳을 때에 각각 하나의 엄한 스승을 보내어 마음 속에 앉아 있게 한다. 사람들의 병통은 의심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이니 의심하여 구한다면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진짜 나의 스승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성립된 자신의 학설을 40대에 들어와 비로소 저술로 내놓기 시작하였다. 46세 때 지은 「납량사의納凉私議」는 당시까지 지속되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을 비판하면서 이일분수理一分殊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며 48세 때 지은 「우기偶記」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문제를 다룬 것이며 「정자설定字說」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있는 정자定字에 대한 해설을 한 것이다. 이어 56세 때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이통설理通說」을 저술하였으며, 77세 때는 「납량사의」의 몇 구절을 수정하고 81세 때 그의 이기론理氣論의 핵심을 이루는 「외필猥筆」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저술의 연대순을 따라 그의 사상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기정진의 사상 체계는 호락논쟁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일분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어 심성론에 대한 논의가 좀더 구체화된 뒤 생애 후반에 이를 뒷받침하는 이기론적 토대가 완성되는 과정을 밟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정진의 이기론의 특징은 리理의 절대화이다. 그에게 있어 기는 리와 상대가 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리 안의 일[理中事]’이며 리가 움직일 때의 손과 발일 뿐이라며 이의 존귀함이 상대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또한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고 기의 능동성을 부정함으로써 서경덕의 기자이機自爾이나 이이의 비유사지非有使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 주장을 비판하였다.

성리학에서 리를 강조하는 경향은 주로 이황학파에서 보이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이이학파와 이황학파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났으며 그 강도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는데 대표적인 학파로 기정진학파를 비롯하여 이항로학파와 이진상학파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이전의 성리학설과 다른, 리를 절대화하는 학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이들이 모두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향촌에서 학문에만 전념했던 재지학자들로 기존의 학파나 학설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처지에 있었다는 점과 당시까지 전개되고 있던 호락논쟁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든지 대응을 해야 했던 사정, 그리고 봉건적 질서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대내외적 위기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하의 큰 변고가 셋 있으니 부인이 남편의 자리를 빼앗는 것[妻奪夫位]과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것[臣奪君位], 그리고 오랑캐가 중화의 자리를 빼앗는 것[夷奪華位]이다. 만약 기가 리의 자리를 빼앗는다면[氣奪理] 저 세 가지 변고는 다음의 일일 것이다.


이 글을 보면 기정진이 왜 그렇게 리를 절대화하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리절대론자들은 절대 선 세계로의 회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어떤 힘으로도 그 시대를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신념에서 가변적인 기보다는 불변적인 리에 절대적인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절대 선의 세계는 자신들이 기반하고 있는 봉건적인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였다. 따라서 이들이 누구보다도 강력한 위정척사론자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는데 이는 위정척사운동의 기치를 처음으로 내건 상소였다. 여기서 그는 국방력의 강화와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외국과의 교역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스승의 위정척사론을 계승하여 문인들 역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거나 직접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하였는데 기우만․기삼연․고광순․정재규․정의림․이승학․박원영․김익중․오준선․노응현․기재․기동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앞서 리를 강조하는 경향은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하였다. 위정척사운동도 무장투쟁의 형식을 띤다는 면에서는 이런 측면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경제정책에서도 나타난다. 기정진은 1862년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국가에서 해결 방법의 하나로 삼정三政의 개혁에 대해 구언求言을 하자 과감한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대부의 부패상과 향리들의 부정을 신랄히 비판하고 삼정 문란의 폐해를 일일이 지적하면서 정약용의 ꡔ목민심서ꡕ에서 제시한 바를 이용하여 제반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군포는 폐지하며 환곡은 면제하고 대신 상평을 재건하며, 서원의 유생이 양민에게 끼치는 해독을 없애고 사치하는 풍토를 없애며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향거鄕擧와 이선里選을 거친 다음 시험에 의하여 선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개혁책 중 전면적인 개혁론에 속하는 편으로 기정진은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며 양민養民 위주의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기정진의 사회경제개혁책은 문인들에게도 이어져 이최선․기양연․나도규 등이 삼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기정진의 사상은 당시 조선사상계의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사상의 출발이 당시 조선사상계의 큰 논쟁거리였던 호락논쟁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였으며 이어 조선사회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속에서 리의 절대화를 추구함으로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했던 데서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에서의 리의 절대화 경향은 그가 강력한 위정척사론자가 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정진은 위정척사론과 전면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고영진, 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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