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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만민공동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2.10|조회수76 목록 댓글 0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120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1898310,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열강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했던 만민공동회를 함께 알아볼까요?


[] 일만 [] 백성 , [] 함께 , [] 무리 [] 모일


만민공동회 (출처: 독립기념관)


1896년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이권을 침탈하기 시작했고, 그 양상은 1897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로 더욱 노골적으로 변모했습니다. 러시아는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 파견, 부산 영도(절영도)의 조차(租借, 일정 기간 지배하는 일) 등의 요구를 해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 자주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독립협회는 많은 국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권침탈 반대 의지를 표명하고, 국민들 스스로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1898년 서울 만민공동회에서 사회 개혁을 외치는 이상재 선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독립문 기공식이 열리던 1896년의 풍경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1898310, 종로사거리 백목전 앞에는 약 1만여 명이 운집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했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대규모의 시위로 결국 러시아는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이권침탈 요구들을 철회하였습니다


독립협회 고문 서재필 선생(), 부회장 이상재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한편, 만민공동회는 노동자, 상인, 학생 등 신분의 제한 없이 참여하여 발언할 수 있는 대중적 집회였기에 더욱 더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일본의 석탄고기지 회수운동, 서재필 재류 운동, 국민의 생명, 재산의 자유권 수호운동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한 주제들로 이어져 나갔고, 189810월에는 민중들과 정부 대신들이 함께 하는 관민공동회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 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 백정 박성훈의 관민공동회 연설문 중 -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만민공동회 집회 터 (출처: 독립기념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집회인 만민공동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나라를 위한 자주독립의 방안을 논의하며 단결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110년 전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던 3, 나라를 위해 신분과 계급을 넘어 모두가 힘을 모았던 만민공동회의 정신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

 

 

* 참고 사이트
국사펀찬위원회 https://goo.gl/V8TsKq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goo.gl/1qfJzA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https://goo.gl/XbfAzD



출처: http://mpva.tistory.com/4999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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