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鄭春洙, 창씨명 禾谷春洙, 1875∼1951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4년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그대 일생을 내 집에서 길렀노라
어찌타 벗을 잘못 만나 외도에 눈이 떠서
원수의 신주(神酒)에 그대 넋을 녹이길래
'아스소 그 술은 못 마실 술이라오'
이렇게 눈물로 몇 번이나 충고했던고?
외도에 팔린 정신 신주(神酒)에 넋을 잃어
미칠 듯 날뛰던 그대 꼴을 보았노라
몽치 들어 죄 없는 가족을 내어쫓고
아까울손 선조 유산 눅거리로 팔아다가
요부(妖夫)의 무릎 앞에 바치지 않았는가
……
신주(神酒)에 취튼 마음 구주(舊酒)에 팔렸는가
어찌타 술을 배워 신세를 망치는고?
사람이란 절개 갖어 값이 나나니
젊어서 잘못 배운 술 늙어서 끊은들 어떠리
({대한감리회보}, 1949. 12. 25)
이 산문시는 정춘수가 일제 말기에 부일협력을 하다가 해방 후 천주교로
'개종'하여 신의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을 풍자하여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러한 비판을 받는가.
3·1 독립선언식의 지각자
정춘수도 처음부터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는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적어도 그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는 3·1 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감리교
목사로서 원산 남촌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는데, 3·1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19년 2월 16일경 서울에 갔다가 박희도*, 오화영(吳華英) 등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장을 맡기고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원산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이가순, 곽명리 등을 포섭하여 서울과 연락하며 운동 준비를 하였다.
그는 독립선언 일자가 3월 1일로 잡힌 것을 알고 그 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그는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된 것을 알고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서명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하여 3월 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는
이 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된 후 1922년부터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등을 전임하다가,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의 본부 간사로 선임되기도 하였고, 1934년부터는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감리교 총리원 이사에 피선되어 교회 행정에
깊이 간여하였다.
그는 이 무렵 신흥우가 조직한 흥업구락부와 적극신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8년 5월경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박멸·전향시킬 목적으로
검거에 착수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류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업구락부는 이미 1935년 이후 내분으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고, 검거 후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의하여 1938년
9월 3일 관계자 전원의 이름으로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모두 풀려나 부일협력 활동에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는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다가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여 종래의 포회(抱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당함에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
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謹)히 헌납하고자 한다"로 끝맺고 있다({매일신보}, 1938. 9.
4).
교회종까지 갖다 바친 감리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춘수가 부일협력을 하게 된 것은 반드시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독교계 친일협력 조직의
간부로 참여하고 있었다. 즉, 그는 1938년 5월 8일 일제의 사주로
전도보국·황도실천을 위해 창립된 '경성기독교연합회'에 일본인 목사
아키츠키(秋月致)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 메소디스트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친일행각이 본격화된 것은 1939년 9월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권장악을 위하여 일제의 지시에
충실히 '순응'하여 1940년 10월 그가 주재하는 총리원 이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과 함께 감리교 '혁신안'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아(我)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고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新案)을 솔선 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 1940. 10. 4)
이 혁신안은 민주주의·자유주의의 배격, 일본 정신의 함양, 일본
메소디스트교회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규정하고,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한편, 1941년 3월에는 국민총력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의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감리교 3부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른
새교단규칙을 마련하여 교단을 재조직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교역자와 신도 대표 50여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와
21일에는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회를 열어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1942년 2월 13일에는 정춘수 통리자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철문, 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춘수의 전횡은 감리교 내부에서도 반발을 일으켜 1942년 10월에
열린 총회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하자, 그는 일본 경찰의 지원을
받아 총회해산을 공고하였다. 이런 와중에 잠시 변홍규가 통리자가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1943년 10월에 열린 교단 총회에서 정춘수가
통리에 다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비호 아래 교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려는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결의를 통과시켜
실천하였다({기독교신문}, 1944. 4. 1). 그리고 이것도 부족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라 그 해 5월부터는 예배설교시 구약성서와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4복음서만 사용하도록 하며 예배집회 시간도 단축하여 주 1회만 집회를 갖고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각 교회에 통고하였다.
정통리가 이끄는 감리교단 본부는 1944년 9월 서울의 상동교회 예배당에
이른바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을 모아 일본
정신과 문화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한강으로 끌고 가 신도(神道)의
재계의식인 미소기하라이(계발)를 행하게 하고, 남산의 조선신궁까지 머리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뛰어가 신사에 참배하게 하였다.
당시 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八木信雄)의 회고록인 {일본과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도(神道)의 의식인 '미소기'를 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어느 날 야기와 친근한 박준영(朴駿榮, 본명 喜多毅:그는 한국인으로 드물게
일본의 신궁황학관 출신이었다)이 야기를 찾아와 "나와 친근한 기독교 간부들
사이에 최근 기독교 탄압의 소문이 화제가 되어 매우 걱정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상의한 결과 목사들에게 신도(神道)의 계행사(계行事:미소기 행사, 즉
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를 시켜서 기독교도 또한 참다운
일본인이 되게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하여 탄압을 면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합의를 보았다.……그래서 직접 그 기독교 간부들을 상면하여 그
의중을 타진한 후 가능한 한 비호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준영의 소개로 '기독교 감리파의 정춘수와 이동욱 씨를 상면한 결과' 그의
말과 틀림없었고 그 후 기독교계 목사들이 계행사를 할 때 야기가 초청을
받아 참석하여 인사말을 한 적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국 정춘수 등이 자진하여 기독교계에서 신도의식인 '미소기'를 하겠다고
나왔다는 것이다. 정춘수의 이와 같은 일제당국과의 관계는 해방 후 감리교
재건파측에서 나온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에도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조선 전 기독교를 신도화(神道化)시켜 일제의 주구를 만들기 위해 1943년에
이르러 당시의 보안과장 야기(八木信雄), 정학회(正學會)의
기다(喜田毅:朴駿榮),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長崎祐三) 등의 절대한 원호와
사주를 받아 '일본기독교조선혁신교단'을 조직했었다. 그러나 전선유지신도와
교역자들의 결사적인 반대투쟁으로 혁신교단이 탄생 후 1개월에 유산되어
버리고 말자 그들은 다시 경찰당국의 힘을 빌어 감리교회의 영도권을 잡고
배신·배족의 죄행(罪行)을 대담무쌍히 감행하여 온 것이다.
이어서 그들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가운데 "정춘수 이하 간부들은
동포의 황민화를 위한 기독교의 변질을 전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에게
서약하였고 기독교 요인 모해에 관한 최고 비밀 상담역이 되어 있었다(1946년
5월 6일 남조선형무소 목사 회의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근무하던 나가사키의
고백)"고 하며 증인까지 밝히고 있다.
마경일 목사도 그의 회고록(1984)에서 일제 말기 정춘수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의 횡포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경찰은 '총진회'(總進會)라는 것을 만들어 정춘수 감독을 회장으로, 장로교의
정인과 목사를 부회장으로 앉혔다. 그것은 결국 경찰의 앞잡이 역할이었다.
'총진회'란 결국 당시 크리스찬들의 성분이며 사상 등을 조사하여 그들을
선량한(?) 황국신민으로 전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하나, 실은
교회와 신도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존재였다고 함이 타당하다. 이를테면 그
기관은 일본 경찰과 밀착된 일종의 '비밀 경찰'의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춘수는 이와 같은 교계 안에서의 부일협력뿐만이 아니라, 1941년 초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의 1인으로 참여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단체의 평의원을 맡았으며, 1944년 말경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를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천주교로 '개종'의 변
해방 후 감리교계는 교회의 재건 방향을 둘러싸고 부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분열을 가져왔다. 재건파는 주로 정춘수가 통리자로 있을 때 교계에서
소외되거나 징계를 당했던 사람들로 교계 내의 부일세력의 숙청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47년 2월 3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와 함께 정춘수를 비롯한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를
발표하였다.
1940년부터 왜적의 경찰과 군부를 업고 우리 교회를 마음대로 농락질하던
이른바 혁명파 배신교역자들은 감리교회의 재건을 거절하고 방해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작당하여 가지고 이른바 남부대회를 빙자하다가 나중에는
부흥파니 무엇이니 하면서 교파 하나를 따로 만들어 놓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죄상가죄(罪上加罪)하였다.……
우리 교회가 천직을 감당하여 인류에게 행복을 끼치며 건국 도상에 우리 조선
민족에게 큰 공헌이 있으려면 교회 안에 그와 같이 불순하고 부정한 자들을
그냥 두고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교회 재건을 주장할 때에 친일적이요 배신적인 그들의 숙청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정춘수는 해방 후 감리교 내부에서도 친일파의
거두로 지목되어 비판의 표적이 되었으며, 더욱이 1949년 초에는 이러한 친일
전력 때문에 국회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안팎으로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되자,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직을 사임하고 또 한 번 변신을 하였다. 1949년
10월 어느 날 서울 명동성당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11월 22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든 교회를 일조 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 오던 숙청을 하려 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 1949.
12. 25)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척'하였고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서
진정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고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 올라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족손(族孫)
정인환의 집에 머물다가 1951년 10월 27일 피난지에서 79세로 생을
마감했다.({천주교회보}, 1952. 12. 23).
■김승태(한국기독교연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대한감리회보}, 1949.
{매일신보}.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 1947.
마경일, {마경일 목사 회고록--길은 멀어도 은총 속에}, 전망사, 1984.
{기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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