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919.2.8 사복경찰이 서성대는 동경 YMCA....결의문 채택도 끝났다. 장내는 절규 속에 감격의 통곡이 계속되었다....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2.23조회수6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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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의 기억투쟁!
1919년 청년 '최팔용'을 통해 만나는 2.8독립선언!
독립운동가 塘南 최팔용 선생 [1891. 7. 13~19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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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수개월 동안 머무르는 동안 조국이 일본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빼앗기게 되었다는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통분하여 즉시 귀국, 고향에 돌아와 강의록으로 영어와 수학 등을 독학하며 실력을 쌓았다. 그 후 상경하여 오성중학교(五星中學校)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선생의 원만한 성품과 대인관계는 일본유학생 사이에서 지도적인 인물로 인정되어 존경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국내 문제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제의 민족차별은 이들 젊은 학도들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항일의식의 정도와 수단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모두가 한결같이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마음은 일치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일본 한인유학생 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인 유학생학우회는 회원상호간 지(智), 덕(德), 체(體)의 발달 및 학술연구와 의사소통을 기할 목적으로 1912년 10월 27일 동경에 체류하는 한국인 유학생 전부를 회원으로 조직되었는데 학생이 조직한 단체로서는 가장 유력한 단체였다.
이 회는 대한흥학회의 후신인 조선유학생친목회의 뒤를 이어 안재홍, 최한기, 서경묵 등의 주창으로 조직되었다. 본 회는 특지회원의 의연금에 의해서 유지 되었는데, 주요간부는 회장에 신익희, 총무에 윤현진, 평의원에 백남훈 등으로 문필과 웅변이 특출한 인물들이었다.
학우회의 운영은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데 목표를 두었는데, 모든 동경유학생은 이 학우회에 가입하도록 의무가 지어져 있었고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국적(國敵)」 또는 「일본의 견(犬)」이라고 매도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한홍학회 이래의 배일사상이 학우회에로 계승되어 정기총회나 졸업생 환송회, 웅변회, 망년회, 신입생 환영회 등 회합이 있을 때마다 배일사상이 고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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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한인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한 이후 『학지광』에 나타난 그의 글을 보면, 「성공의 요소(要素)와 실행」(12호, 1917년 4월 19일), 「사람과 생명(生命)」(13호, 1917년 7월 19일), 「우리 사회의 난파(亂波)」(17호, 1917년 1월 3일) 등이 있다. 선생은 학우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결과 1918년 2월 10일 정기총회에서 『학지광』의 편집국장과 평의원(平議員)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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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은 1918년 4월 13일 동경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개최된 조도전대학 동창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선생은 조도전대학을 대표하여 참가하면서, 은근히 조국독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선생의 우국심정(憂國心情)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것은 이 해 여름 『학지광』의 편집위원이던 최승만에게 직접 자신의 의도를 제의하면서 나타났다. 즉 선생은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안한 것이다. 선생은 이 제안과 함께 곧 비밀리 동지규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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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8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보와 국제정세의 새로운 변화가 예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1918년 12월 1일 영국인이 일본 신호(神戶)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인 ≪Japan Advertisers≫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 대표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3인이 독립을 갈망하는 겨레의 염원과 일제의 허위적 선전으로 용인할 수 없는 침략적 행위를 알리고 한민족의 참뜻을 호소하기 위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케 되었다'는 기사를 청산학원(靑山學院) 영문학부에 재학하던 윤창석으로부터 전해들었다.
둘째로 같은 달 15일자 동경 ≪조일신문(朝日新聞)≫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한국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30만원의 거액을 모집하였다"라는 보도가 있자 유학생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휩싸였다.
이러한 유학생들의 태도와 국내외 한국인의 동향을 눈치챈 일제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문제가 제기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 대응책으로 윤덕영, 이완용 등 매국노들을 앞세워 경술국치와 총독정치를 구가(謳歌) 찬양하는 허위문서에 서명 날인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극소수의 친일관료와 매국 귀족들의 서명을 받아 두었다가 강화회의에서 한국문제가 대두된다면 이 문서를 그들의 반증자료로 제출하는 동시에 한국인 대부분이 일제 통치를 환영하여 그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자결은 필요없다고 주장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3인 대표들이 1919년 1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후 미국정부에 프랑스행 여권발급을 신청하였으나, 당시 미국측의 태도는 냉담하였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내세워 우리 대표에게 끝내 여권을 내주지 않아 파리강화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젊은 학도들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서 세계문화에 기여하기를 열망한다는 거족적인 운동을 동경유학생들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유학생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가면서 운동의 방책을 상의하던 끝에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학우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며, 여기서 민족자결문제에 대한 열변을 시도하여 관심과 자극을 환기시키고 그 추세를 보아 앞으로의 전망을 내다보는 시금석으로 삼으려 하였다.
1918년 12월 28일 명치회관(明治會館)에서 있은 학우회 주최의 유학생망년회에서는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한국독립론을 주제로 의견을 교환하여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이어서 12월 30일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동서연합웅변대회 석상에서도 독립문제가 거론되어 기세를 크게 올렸다.
이듬해인 1월 6일에는 학우회 주최로 동경 신전구소석천(神田區小石川)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가 개최되어 이종근, 윤창석, 김상덕 등은 번갈아 일어나서 '세계사조에 따라 또한 민족자결 대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독립을 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숭고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우리 젊은 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였다. 흥분과 긴장에 싸인 장시간의 강연은 끝났으나 학생들은 독립운동 전개와 방법을 숙의하느라고 자리를 떠날줄 몰랐다.
이 때 김도연은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제반사항을 일임할 수 있는 대표를 선출하자고 제의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송계백, 이종근, 김도연, 전영택, 윤창석, 김상덕 등 10명의 실행위원이 선출되었다. 대표위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밀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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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 그리고 결의문을 국문, 영문, 일문으로 작성하여 자필로 서명하고 일본 조야(朝野)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비밀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발족시키기로 하고 구체적인 추진계획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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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동경에서는 보기 드물게 눈이 많이 내렸다. 오전 10시경에 대표들과 활동력 있는 학생들은 이미 마련된 독립운동 문서들을 각국 대(공)사, 귀.중 양원의 의원, 조선총독부와 동경 및 각지 신문사, 잡지사, 그리고 저명인사, 학자 등에게 우송하였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경 경시청에서는 이미 눈치를 채
오전부터 사복과 정복의 경찰이 주위를 서성대고 있었다.
동경유학생들은 학우회 총회를 이날 오후 2시에 YMCA에서 열겠다는 통지를 받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경 경시청에서는 이미 눈치를 채 오전부터 사복과 정복의 경찰이 주위를 서성대고 있었다.
동경 신전구 소석천정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라는 명목으로 동경유학생의 거의 모두를 망라한 6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매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미리 짜여진 순서대로 학우회 회장 백남규가 재회를 선언하자마자 선생이 긴급동의를 청하면서 재빨리 단상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급히 선언하였으며 만장은 박수로 환성을 울렸다.
이어 독립선언문을 정숙하면서도 비장한 음성으로 낭독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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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은 역사적으로 단일민족이며 문화민족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국가주권이 외교적이고 형식적인 관계 이외로는 근본적으로 침해당한 일이 없다는 것을 천명함.
2. 일본은 군국주의의 무력으로 한국침략을 단계적으로 감행하였으며, 한국과 일본이 노일전쟁시에 체결한 국제관계를 배신한 일본을 사기범이라고 규정함.
3. 일제는 기만과 폭력으로 민족의사에 반하는 병탄을 감행했으므로 한민족(韓民族)은 세계의 정의 앞에서 우리의 독립을 요구할수 있는 권리를 주장함.
4. 영.미 양국은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병탄되는 것을 승인했으므로 이 기회에 구악(舊惡)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천명함.
5. 총독정치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를 강압하고 있다고 지적하여 민주정치, 민주국가에의 열망을 나타냄.
6. 종전으로 국제연맹이 생기면 군국주의와 강국의 횡포가 없어질 것이라고 밝히고, 국제사회에서 불의의 침략행위를 거부하여 세계평화에 대한 의지를 굳게함.
7. 일본이 학생들의 요구에 불응한다면 영원히 혈전을 전개한다는 민족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 항쟁의 의지를 천명함.
8. 독립을 이룩한 후 국시로서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적 선진국의 법을 수하여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이래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수호한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유한 줄 신하노라.' 라고 밝혀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결의함.
9. 일본과 세계에 대하여 한민족의 민족자결을 천명하였음.
선언서의 선포가 끝나고 김도연이 뛰어 올라가 아래와 같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귀절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결의문>
1. 본단은 한일합방은 우리 민족의 자유 의사로써 된 것이 아닐 뿐아니라,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여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원인이 되는 이유에 의하여 독립을 주장한다.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대하여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그 결의로써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주기를 요구한다.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도 적용할 것을 청구하며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 대(공)사에 대하여 본단의 의사를 각기 정부에 전달할 것을 의뢰하며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판견할 것이다.
4. 이 모든 요구가 거절될 시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포하며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결의문 채택도 끝났다.
장내는 노호와 절규 속에 감격의 통곡이 계속되었다.
이상과 같이 결의문 채택도 끝났다. 장내는 노호와 절규 속에 감격의 통곡이 계속되었다. 이어 시가행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경찰은 해산을 요구하고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흥분하여 고함을 지르며 저항함으로서 일본경찰과 격투가 벌어졌다. 치고 차는 난투극으로 장내는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당시 경시청에서 고등계 형사로 일제의 앞잡이였던 선우 갑(鮮于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자는 평소 한국 학생의 동향을 탐지하여 얻은 정보를 토대로 '이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 하고 현장 제보를 하며 반역행위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애국학생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 하였다.
일제 강점에 짓눌린 민족을 위하여 일어선 애국학생들은 머리로, 주먹으로 아니면 책상, 걸상으로 육탄항쟁을 전개하였으나 대항할 그 이상의 힘이 없어지자 하나 둘씩 일본경찰에 묶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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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경찰서에서 수일동안 고문과 취조를 받고 일부는 풀려났으나 선생을 비롯하여 대표위원들은 정식재판에 회부되었다.
2월 10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저들은 내란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였으나 양식있는 일본인 변호사 포시진치(布施辰治) 등이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와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되느냐?', '민족자결의 사조가 팽창함에 비추어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다' 라고 변론하여 내란죄의 적용은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출판법 제26조가 적용되어 2월 15일 1십 판결에서 비교적 가벼운 금고 1년이 선고되었으나 이에 불복 공소하여 3월 21일 공소심에서 금고 9월을 받고 또 다시 상고하는 등 법정투쟁을 하였으나 6월 26일 기각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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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강국임을 자랑하며 세계 5대 강국의 하나로 자처하던 일본의 수도, 그들이 신성 불가침이라고 자존자대(自尊自大)하는 소위 천황이 있는 동경에서 우리 강산을 짓밟고 유구 신성한 민족을 노예시하는 침략 일제에게 대항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옛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 이르러 일본이 귀화를 강요하며 위협하였을 당시 그가 단호하게, '계림(鷄林)의 견마(犬馬)가 될지언정 맹세코 너희들의 신민(臣民)은 되지 않겠다.' 고 한 민족혼이 연면한 민족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와 침략자의 아성인 적의 수도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항일의 깃발을 높히 들도록 하였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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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한 선생은 건강이 몹시 쇠약해져 일단 고향에 돌아가 잠시 정양하다가 가족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이사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일경의 엄중한 감시와 미행을 당하면서도 극비밀리에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재기의 기회를 엿보던중 1922년 9월 14일 열망하던 독립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향년 32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