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 李人稙, 1862~1916
* 1904년 러일전쟁시 일본군의 조선어통역관으로 종군.
1906년 [국민신보] 주필
1907년 [대한신문] 사장.
1911년 경학원 사성.
신소설의 개척자
이인직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우리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신소설의 개척자로서 우리는 아직도 [血의 漏](1906)를 최초의 신소설로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하면 이 작품은 제목부터 일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본어에서는 명사와 명사 사이에 꼭 '의'가 끼어 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식 어법이라면 이 제목은 그냥 '혈루'이거나 '피눈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그 문체도 희한하다.
어제아침 이방 피난 때
昨日朝에 此房에서 避難갈 時에는
한자어에 토를 달았는데 그 방식이 일본식의 후리가나이다. 이 번거로운 일본식 문체는 이미 봉건시대부처 한글정용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우리 소설 문체에 대한 일대 후퇴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작품의 시각이다. 청일전쟁(1894)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청군의 부패를 맹렬히 규탄하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에는 짐짓 눈감고 고난에 빠진 여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함으로써 일본이야말로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을 교묘하게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옥련은 일본에서 다시 조선 청년 구완서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 청년 또한 수상하다. 비스마르크를 흠모하며, 우리 나라를 야만으로 은근히 멸시하는 이 민족허무주의자는 일본과 만주를 합하여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꿈꾸는데, 그 꿈은 만주침략(1931)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06년에, 조선인으로서 이미 1931년의 사태를 예견하고 있는 구완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친일문학 하면 일제 말기만 생각하기 쉽다. 천만의 말씀이다. 친일문학자는 이미 우리 근대문학 초기부터 암약하고 있었으니, 이인직과 최찬식(1881~1951)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완용의 비서로 배국협상을 배후에서 주도했던 이인직과, 일진회 총무원 최영년의 아들로 이인직의 뒤를 이어 1910년대에 대표적 친일문학자로 떠오른 최찬식. 우리는 이인직과 최찬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새로이 고쳐 쓰지 않으면 안된다.
고마츠의 제자에서 이완용의 비서로
이인직은 1892년 음력 7월 27일 경기도 음죽, 오늘날의 이천에서 부 윤기와 모 전주 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이후 백부 은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본은 한산, 명문에 속하지만 그의 직계 집안은 한미해서 아마도 서계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5세에 생부를, 11세에 양모 남원 윤씨를, 18세에 생모를 잇따라 여의어 고아와 진배 없었던 것이다. 일찍이 도애 정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그는 1900년 2월 장년의 나이에 갑자기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같은 해 9월 도쿄정치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7월에 졸업하게 되는데, 그는 이 학교에서 앞으로의 매국활동을 위한 중요한 인연을 맺게 된다. 조중응과 함께 열국의 정치제도와 국제법 강의를 담당한 고마츠의 제자가 된것이다.
고마츠는 1906년 통감부의 외사국장으로 조선에 나와 소위 '합방'의 실무자로 활약한 자이고, 이인직의 둘도 없는 친구 조중응은 매국노였다. 조중응은 유생 때에 이미 일본과 내통한 죄를 지어 오랜 유배생활을 하다가 갑오경장때 관리로 발탁되었으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는 1906년 특사로 귀국하여 일약 법부대신 . 농상공부대신에 올라 매국칠적의 하나로 드디어 '합방' 후 자작의 칭호까지 얻은 자인데, 유학생 이인직과 망명객 조중응이 도쿄정치학교를 매개로 결합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학생과 망명객의 교류는 매우 골치거리여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 2월 유학생 소환령을 내렸다. 물론 이인직은 이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미야코 신문사의 견습생으로 일하는 한편 고국의 아내를 버리고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일본인 아내가 우에노에서 '조선루'라는 한국식 요정을 경영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유학 시적의 이인직은 견습생으로 신문일을 배우면서 망명객 조중응과 함깨 고마츠의 제자가 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에게 귀국 기회는 왔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2월에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제1군 사령부 소속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종군하게 된다. 제1군은 2월 16일 인천에 상륙, 3월 중순에는 평양으로, 4월 하순에는 압록강 우안에 집결하여 5월 1일 강을 건너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5월 11일 봉황성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이인직은 통역에서 해고된다.
이듬해 그는 조중응과 함게 동아청년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단체는 "지식과 사교에 의해 동아인의 단결을 이루고 동아의 전국면에 문명의 보급을 꾀"한다는 취지에서 보듯이 일본의 지배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를 가진 첨병적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본, 조선, 만주를 포함한 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기염을 토한 [혈의 누]의 남주인공 구완서가 바로 이인직의 분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인직은 1906년 2월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됨으로써 국내에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의 발판을 마련하다. 어떤 연줄로 그가 이 신문사에 관계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이 신문의 창간인 송병준과 연관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도 이인직처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 군부의 조종 아래 일진회를 통해 맹렬하게 매국활동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개월 만에 그는 [만세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긴다. 1906년 2월에 손병희의 발의로 창간된 이 신문은 [국민신보]의 대항지였다. 일진회는 원래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가 국내의 이용구를 내세워 벌인 동학의 반정부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이용구가 일본 군부의 조종을 받는 송병준과 야합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06년 망명지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천도교를 창건하고 일진회에 대항하는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만세보]를 창간하였던 것이다.
이인직은 이 신문에 [혈의 누]를 연재함으로써 일약 문명을 얻고 이를 발판으로 양향력을 증대시켰다. 더구나 이 시기에 도쿄정치학교 시절의 인연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나, 그의 은사 고마츠는 통감부 외사국장으로 부임하고 친구 조중응도 통감부 촉탁으로 귀국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이인직은 이완용의 후원을 얻어 [만세보]를 인수하여 1907년 7월 [대한신문]을 창간한 후 사장 자리에 앉는다.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역할을 한 이 신문을 총해 그는 본격적인 암약에 들어가게 되니, 친구 조중응은 이때 법부대신이었다. 당시 정계는 친일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이완용파와 일진회가 격렬한 항쟁을 계속했는데, 이인직은 전자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연극시찰이니 종교적 목적이니 하는 명목으로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실제로 그는 천리교 신자였다. 일본 여자와 재혼한 이인직은 종교마저 일본 신도의 일파인 천리교에 귀의했으니 참으로 철저한 자다. 그러나 이런 명분보다도 이완용의 밀사로서 일본 정객들과 매국의 막후공작을 위해서 일본 나들이에 나섰던 것이다.
1910년 8월 초순, 이완용은 '합방'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고 있던 일진회에 대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심복 이인직을 고마츠에게 보내 결정적인 비밀접촉에 들어간다. 고마츠는 1910년 무더운 여름밤 이인직의 돌연한 방문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이인직-인용자)는 양미간에 찬 빛을 띠우며 우선 근본문제부터 말하기 시작하였다.
"일진회가 합방론을 제창하고또한 일본;에서는 병합설이 대단하여졌다는 사정 등을 합쳐보면, 오늘날 무엇인가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저희들은 깨달았기 때문에, 최근 저는 이수상(이완용-인용자)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근고해 보았습니다. 2천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만 일본인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이 두 길밖에 따로 수상의 취할 길은 없습니다. 어느 쪽 길로 나가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수상은 잠깐 침음하다가 서서히 말씀하시기를, 5적 또는 7적이라고 불릴 정도의 현내각이 와해된다면 현내각 이상의 친일파 내각이 새로 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통심할 일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인직의 말을 듣고서 이것은 참 좋은 문제를 가져온 것이라고 내심 기뻐하였다. 나는 유달리 하하 웃으면서 손수 맥주를 따라서 그에게 권하고 나도 마셨다. 넓은 응접실에는 단 둘뿐 다른 누구도 있지 않았다.[소공록, 조선병합지이면]
이를 기틀로 협상은 급진전,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이완용파의 주도 아래 멸망하였던 것이다.
장례도 일본식으로
이와 같은 혁혁한 공으로 이인직은 1911년 경학원 사성이 되었는데, 연봉이 900원이었다. 이완용이 2000원, 조중응이 1600원이었던 데 비하면 낮지만 꽤 높은 금액이 아닐 수 없다. 경학원은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신적 권위인 성균관을 격하하여 설치한 기관으로, 전국의 유림을 선무하는 공작을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삼았던 것이다.
이인직은 이미 1909년경 대동학회에 은밀히 관여한 바 있다. 이 회는 원래 1907년에 '유교를 유지코자 하는 대목적' 아래 조직되었는데, 유교를 빙자한 배국 단체였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나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죄문을 보내고, 의병을 '철부지의 불장난'으로 매도하고, '우리 나라의 위기를 평안으로 전환시킬 유일한 길은 오직 일본과 결합하는 한 가지 일'임을 천명하면서 전국에 22개의 지회를 두어 유림의 친일화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대동학회는 1909년 공자교회롤 전환하였는데, 이인직은 간부로 참여하여 지방보직 건설에 몰두한 바 있었다.
아마도 이 같은 경력이 그를 경학원 사성으로 발탁되게 하였을 것인데, 그의 정력적 친일활동은 맹렬하기 짝이 없다. 전국을 순회하며 유림을 선무하는 한편, 1913년에는 [경학원잡지]을 창간하여 유림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더욱 조직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활동 가운데 결정은 다이소의 즉위 대례식에 헌송문을 지어 바친 일이다.
이처럼 견마지로를 다하던 그도 1916년 11월 21일 신경통으로 총독부 의원에 입원, 나흘 만에 허무하게 이승를 하직하게 되는데, 총독부는 죽기 하루전 그의 연봉을 1000원으로 특별인상한다. 당시 신문은 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인직 씨의 장의
천리교식의 장의
경학원 사성 이인직 씨의 장의는 본월 28일에 고양군 용강면 아현화장장에서 거행하였는데, ㅈㅇ의의 제반의식은 동씨의 평일 신앙하던 바 천리교식으로 행하였는데, 당일 참회한 회원은 경학원 부제락 박제빈남 이하 경학원 직원 일동고 천리고 신도 다수와 이완용백, 조중응자, 유성준 제씨와 총독부의 다수한 관리가 호종하였음, 씨으 평일 공로를 위로하기 위하야 당국에서는 상여금이라는 명목으로 450원의 금액을 하부하였고, 대제학 자작 김운식 씨는 부제학 자작 이용직 쌔를 대리로 명하여 일반직원을 대동하고 제권을 행하였더라.(매일신보. 1916. 12. 2)
*** 최원식(인하대 교수 . 국문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친일파99인'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