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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포경성형무소(麻浦京成刑務所)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2.27|조회수137 목록 댓글 0

마포경성형무소(麻浦京成刑務所)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서울에 세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까지 사용되었던 형무소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인 1908년에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다. 경성감옥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신설되어 경성감옥으로 불리게 되었고, 서대문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했다.

 

마포의 경성감옥은 1923년부터 경성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대전형무소와 함께 무기수나 장기 수형자를 수용하였다.[1] 김일성의 숙부인 김형권이 옥사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일제 패망 후 1946년에 마포형무소로,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신설된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폐지되었다.

 

마포형무소 건물은 이전 후 사라졌고, 그 터에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이 들어서 있다. 1995년에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 마포형무소 자리에 "1912년 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이 설치되었다.

 

참고자료-'형무소 옥사' 김일성 삼촌 김형권은 누구?

1930년 함경도 풍산서 일경 사살…김일성은 "마포형무소 옥사"로 회고

 

"이 곳(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된 선열 400여명 중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다 포함돼 있다. 그 중에는 김일성 주석님의 삼촌되는 분도 포함돼 있으며 또 (김 주석이) 사랑했던 친위군사들도 몇 명 있다."(연합뉴스 15일자 보도)

8·15 민족대축전 참가차 서울을 방문한 김기남 북측 당국 대표단장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참관 이후 한 말이 각 언론에 주요하게 보도됐다. 한 신문은 이를 보도하면서 소제목으로 <서대문형무소선 6·25전쟁 김일성 미화 발언도>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국민일보 16일자). 하지만 본문 내용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미화'라는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의 삼촌 김형권은 언제, 무슨 일로 인해 일제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됐을까. 김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은 삼형제 중 장남으로 형록, 형권 두 동생을 뒀다. 그동안 사실 김 주석 가계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김일성 가계 우상화' 차원으로 치부하곤 했던 게 남한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하지만 일제시기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김형직과 김형권 형제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마치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에 대한 인식 양상과 같다. 

한편 김 주석은 김형권이 서대문형무소가 아닌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하여 마포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회고를 한 바 있어 정확한 사실관계에 대한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동아일보 1930년 9월4일자에 '일경 사살' 보도 

동아일보 1930년 9월4일자는 <풍산에 출현했든 권총범 홍원에서 필경 피착(被捉=체포)>이라는 제목으로 김형권의 활동을 보도했다.

 

 

 

▲ 동아일보 1930년 9월4일자 2면 기사.

 

풍산에 출현했든 권총범 홍원에서 필경 피착
후치령 위에서 살아지었든(사라졌던) 자최(자취)가 홍원까지 나타나자 필경 잡히엇다 / 육군(六郡) 경찰 총동원으로

(1930년) 8월14일 오후 5시10분경 함남 풍산군 파발리에 나타나 그곳 주재소 내중(內中) 순사부장을 사살한 네명의 권총단의 수사는 풍산을 비롯하야 북청, 리원, 단천, 홍원 등 린접 각군의 무장경관 300명이 출동하야 후치령을 중심으로 깁흔 산속을 니잡듯이 수사하얏스나 아즉까지 종적이 묘연하든 바 9월2일 오후 10시40분부터 3일 오전 5시30분까지 사이에 홍원군 주익면 장정리에서 그중 세명이 풍산서원의 손에 체포되엇는데 그들과 맨처음에 충돌되엇든 강대(岡代) 순사는 권총단의 탄환에 머리가 중상하얏다 하며 체포된 범인의 성명은 다음과 갓다고 한다. 최우 박차석 김형권. (숫자만 아라비아 숫자로 바꿈-편집자)

여기 나오는 김형권이 김 주석의 삼촌이다. 김 주석은 말년에 집필한 미완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 사건과 삼촌에 대해서 상세한 기술을 한 바 있다. 동아일보 기사에 나타난 사건 내용과 김일성 주석의 회고는 6하원칙의 뼈대가 일치한다. 

김일성 회고록 "형권 삼촌, 조선혁명군 무장소조로 국내 진입"

김 주석에 따르면, 김형권은 1930년 7월 만주에서 결성된 조선혁명군의 일원이었으며, 한 무장공작 소조를 이끄는 조장으로 국내에 진입했다.

김 주석은 김형권의 활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소조원들은 단천 쪽으로 나가다가 1930년 8월14일 풍산 파발리 부근의 황수언 들쭉밭에서 잠시 지체하였는데 거기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악질경관 '오빠시' 순사부장(본명 마쯔야마)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놈은 1919년부터 풍산지방에 와서 조선사람들의 수족을 얽어맨 악질경관이었다. 그래서 그 고장 사람들은 놈에게 '오빠시'라는 별명을 붙이였다. '오빠시'에 대한 이 고장 인민들의 원성이 대단히 높았다. 소조원들이 주재소 앞을 지나갈 때 '오빠시'는 일행을 주재소로 불러들이였다. 형권 삼촌은 주재소에 들어가자마자 그놈을 단호하게 처단해버린 다음 인민들 앞에 공개적인 반일연설을 하였다. 그날 수십명의 군중이 형권 삼촌의 연설을 들었다. 비전향장기수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전 인민군종기자 리인모도 그때 파발리에서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한다."

김형권 소조는 이후 일제의 추격을 받으면서 계속 활동을 벌이다가 홍원읍에 있는 '독립군 관계자' 최진용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가 경찰에 밀고를 하는 바람에 검거가 됐다는 게 김 주석의 서술이다. 소조원 중 정웅은 체포를 면했으나 그 역시 이후 춘천에서 밀정의 고발로 검거됐다. 김형권은 체포 이후 함흥지방법원에서 15년형을 선고 받고 서울복심법원에 상소했으나 원심이 그대로 확정돼 "10년 이상의 장기형수들만을 주로 가두어두는 서울의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함께 체포된 최우(최효일)은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일제는 애초 1907년에 서대문구 현저동에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으로 불렀으나 수용공간이 부족하자 1912년에 마포구 공덕동에 마포형무소(경성형무소)를 추가로 건축, 기존 경성감옥을 서대문형무소로 고쳐 불렀다. 즉 일제시대 서울에는 형무소가 두 곳 있었다. 서울시 홈페이지의 '서울역사' 란에서도 일제는 무기나 장기수형자의 경우 마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 수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아닌 '마포형무소 옥사' 증언

김 주석은 김형권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사경에 처하자 형무소에서 면회를 와도 좋다는 통지서를 만경대에 보내와 김형록이 서울로 찾아가 '마지막 상봉'을 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김형록은 동생의 처참한 형상을 보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며 간수에게 '동생을 치료받게 하는 대신 내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하소연까지 했다고 한다. 또 동생을 잘 돌봐달라며 빌려간 수중의 돈을 다 털어 간수에게 16원을 맡겼다는 내용도 있다.

이로부터 석달 뒤인 1936년초 김형권은 3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사망통지서를 받았으나 노자가 없어 시신을 찾아오지 못해 당시 마포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하는데, 현재는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김형권에게는 딸이 하나 있어 해방 이후 만경대혁명학원에 다녔는데 전쟁시기 폭격에 희생됐다고 한다.

 

 

 

▲ 북한은 함경남도 풍산군을 량강도 김형권군으로 개명했다.

 

북한은 1990년 8월 김형권이 항일활동을 벌인 량강도 풍산군을 김형권군으로 개칭했다. 풍산개로 유명한 곳이다. 김형권의 동상과 김형권혁명사적관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지난해 '대폭발설'로 관심을 모은 량강도 김형직군은 그에 앞서 1988년 8월 후창군에서 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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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한국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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