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 [심종협](친일매국노) 1882~?
조선총독부 관리
2대 - [심형구](친일매국노)1908~1962 + [김자경]1917~1999(성악가,홍난파의 권유로 이화여고 음악선생 재직,
별거중인 심형구와 혼인,김자경오페라단 창단 단장·이사장,
피플투피플 한국본부 부총재)대한민국 예술원상(1974),
은관문화훈장(1974), 중앙일보 문화대상(1976),
국민훈장 석류장(1983), 올해의 음악가상(1984),
황도학회 발기인,조선미술가협회이사,단광회,친일미술인모임,
3대 - [심용식]
[심영혜] 여 1943~
[심홍] 1945~독일부시 한국지사 전무
[심현식] 1954~김자경오페라단이사
심종협
(沈鍾協, 1882년 음력 9월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본관은 청송이며 출신지는 경기도 죽산군이다. 심종협의 집안은 현재의 용인시인 죽산군 근이면의 지주 가문으로,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다.
한학을 공부하여 1905년에 조선 덕종의 묘인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고, 1906년에는 탁지부 주사를 지내는 등 대한제국 말기에 관리로 일했다. 1907년에는 9품인 탁지부 서기랑에 올랐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여 총독부 군서기로 이동하게 되었다. 경기도 양천군과 죽산군, 가평군, 양주군 서기를 차례로 지내던 중 고등관 8등의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광주군 군수로 발령받았다. 1923년에 광주군수를 마지막으로 퇴관할 때 종7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서양화가 심형구는 심종협의 아들이다.[1] 심형구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다가 형의 지원으로 화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 명단의 문화/예술 부문에는 아들 심형구도 들어 있다
심형구
1908. 6. 4 경기 용인~ 1962. 8. 6. 서양화가.
1929년 미술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때 김인승을 만나 평생 교우관계를 맺게 되었다. 1936년 재학중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노어부 老漁夫〉를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고, 이듬해 16회 선전에 〈해변〉·〈부인상〉을 출품하여 조선총독부상을 받았다. 그후 해방되기 전까지 선전에 계속 특선되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8년 도쿄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5년간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1939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40년 선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일본이 전시체제를 구축해가던 무렵에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의 한국인 추천작가는 이인성·김인승·심형구뿐이었는데, 이에 걸맞게 태평양전쟁에 복무하는 군인을 그린 〈흥아(興亞)를 지키다〉를 1940년 19회 선전에 출품하는 등 친일적인 행각도 벌였다. 1941년 성악가 김자경과 결혼, 1945~50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서울시 문화위원을 지냈다. 1949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49~58년 미국 일리노이 주 애들피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귀국 후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관전(官展)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했다. 1963년 신문회관에서 '심형구 유작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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