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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꺼지지 않는 영혼 - 남파 박찬익 선생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2.30|조회수50 목록 댓글 0

박찬익  朴贊翊 1884(고종 21) ∼1949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로 주내면에서 朴鳳緖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호는 南坡, 이명은 朴昌益이다.

 

1904년 상경하여 상공학교 동기생인 朴造元의 추천으로 보안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안'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1907년 초에는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박호원과 서부지방을 순례하면서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야학을 조직하였다.  그뒤 1908년 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만주 龍井으로 망명하였다.

 

연길에서 墾民(간민)敎育會를 조직,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徐一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重光團을 조직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吉林에 서 金敎獻 ·金東三 ·趙素昻 ·李東率 등 38인의 동지와 함께 「戊午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임시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의 손문이 廣東에 中國護法政府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데 기여하였으며, 1922년 2윌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헌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6년 9월 31일 침체되어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尹世復 · 鄭一雨 등과 歸一黨을 조직하였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1930년 10월 중국 국민당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인 趙素昻(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32년 5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임시정부를 焄興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년 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 玉觀彬(옥관빈)과 상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던 柳寅發 등을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과 결별하였다가 1938년 7월 李始榮 ·李東寧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게 되었다.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으로 옮 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 ·중 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년 5월에는 金九 ·洪震 ·柳東說 ·趙素昴 ·李靑天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 ·15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駐華代表團長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기여하였다. 1946년 2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중국 국공내전 상황에서 한인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 당국에 제출 승인받아 東北行營 長延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월북을 만류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귀국하였으며, 1948년 말에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김구의 은퇴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1949년 3월 9일 창신동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3 년 11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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