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1"운동과 연변의 "3.13"운동이후 연변 각지에는 여러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일어났다. 이런 단체들은 무장대오를 건립하는 한편 동시에 자체로 "군사훈련소", "사관양성소" 등 군사학교들을 설립하고 군사인재들을 양성하였으며 또한 민간에 널려있는 렵총과 재래식총들을 거두어들여 자신을 무장하였다. 그리고 일본경찰서와 친일주구들의 집을 습격하여 일부 무기들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급성장하는 반일대오의 무기수요를 만족시킬수가 없었다.
때마침 쏘련 10월혁명을 간섭하려고 씨베리아로 쳐들어왔던 체코군단이 패전하고 돌아가기직전에 자금을 마련하려고 저들의 총을 헐값으로 팔려고 무기상들과 접촉하고있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반일단체들에서는 조선족인민들속에서 의연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생활조건하에서 거액의 의연금을 모은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1919년 9월초, "국민회"산하의 "철혈광복단"성원인 윤준희, 최봉설(혹은 최이붕) 등은 군자금모집을 위해 은행이나 금융기관에서 사업하는 반일단체의 회원들을 찾게 되였고 그 결과 "국민회"의 회원인 전홍섭이 조선은행 회령지행의 사무원으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였다. 윤준희는 즉시 라자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철혈광복단"에 들어온 림국정을 파견하여 전홍섭을 만나게 하고 상급의 지시와 군자금모집상황를 소개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회령에서 룡정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구체적인 운송시간을 알려줄것을 요구하였다. 전홍섭은 새로운 소식이 있는대로 즉시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20일에 "철혈광복단"에서는 전홍섭이 보내온 정보를 받았는데 1월 4-5일경에 회령에서 룡정에 15만원의 거금을 수송하게 된다는것이였다.
이 소식을 접수한 지도부에서는 즉시 세밀한 계획에 들어갔다. 우선 15만원을 탈취하는 행동소조 성원들로는 윤준희, 림국정, 최봉설, 박웅세, 김준, 한상호 등 6명으로 정하였다. 윤준희와 최봉설이 명동에 있는 김계하의 집에 찾아가 거기에서 대기하고있는 박웅세와 김준을 만나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우기로 하였고 림국정, 한상호 등도 통지를 받고 명동으로 달려갔다. 명동향 교동에 있는 김계하의 집에 집결한 이들은 15만원을 중도에서 탈취할 세밀한 행동계획을 짰다. 이리하여 연변을 발칵 뒤집은 전대미문의 대사건은 이들 6명에 의해 거행되게 되였다.
1920년 1월 4일 아침 8시에 이들은 저마다 권총과 철봉을 지니고 명동촌을 떠나 동량지역으로 출발하였다. 때는 한겨울이여서 날씨도 무척 맵짰지만 그보다도 두텁게 깔린 적설로 하여 행동대원의 행군은 무척 어려웠다. 발목까지 빠지는 삼림속의 눈길을 헤치며 동량어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무렵이 되였다. 저녁식사를 간단하게 마친 이들은 즉시 매복지점에 돌입했다. 우선 이들은 행동의 편리를 위해 두개 소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개 소조로 되여 동량버들방천에 매복하였고 최봉설, 림국정, 한상호가 다른 소조로 되여 동량버들방천에서 10리쯤 떨어져있는 선바위골로 올라가 흰옷을 입고 눈덮힌 선바위밑에 매복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수송대가 이곳에 들어서면 그 후위를 살핀후 수송대의 뒤를 따라 내려오다가 윤준희네 소조와 함께 앞뒤에서 일제히 수송대를 습격한후 돈을 탈취하기로 계획하였다.
행동을 앞둔 이들은 만주의 호된 추위를 참아가며 침착하게 일제의 수송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수송대는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짤막한 겨울해는 서산에 지고 무인지경인 동량어구엔 점차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행동소조의 대원들은 날이 저물어도 일제의 수송대가 나타나지 않자 저으기 조급해났다. 정보에 차실이 있는것이 아닌가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단은 돌아갔다가 이튿날 다시 오자는 대원도 있었다. 의논이 분분한 속에서 시간은 흘러 어느덧 밤 8시가 다가왔다. 그제야 일제의 수송대는 선바위골에 들어섰다. 거금을 실은 말이 앞서고 우편물을 실은 말이 뒤따르고있었다. 일행으로는 조선은행 회령지행 서기 김용억, 은행원 하루구치, 호위순사 나카모토, 박순사, 우편원 1명, 동행한 상인 진길풍 등 6명이였다. 김용억, 나카모토, 진길풍이 말을 타고 앞장에 섰고 그 뒤에 돈을 실은 말과 우편물을 실은 말이 차례로 따랐으며 맨 나중에 박순사, 하루구치, 우편원이 뒤따르고있었다. 최봉설소조는 일제수송대의 뒤에 후위가 따르지 않고 또한 수송대에는 전홍섭도 동행하지 않았다는것을 확인하고 인차 수송대의 뒤를 가만히 따랐다. 일제의 수송대가 동량버들방천에 들어섰다.
《땅! 땅! 땅!》하는 권총소리가 차가운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요란하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와 함께 버들방천에 은페하고있던 윤준희소조와 뒤를 따르던 최봉설소조가 일제히 일제수송대를 향해 사격하였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와 그를 동행하던 진길풍이 총탄에 맞아 말우에서 떨어졌다. 말에서 떨어진 일본순사가 최후발악을 하려 했으나 인차 박웅세와 김준의 철봉에 맞아 죽었다. 기타 수송대일행은 와들와들 떨면서 제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자마자 이들은 이미 혼비백산했던것이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하지만 총소리에 놀란 말들이 계속 앞으로 달렸다. 윤준희는 말을 잡아타라고 소리치면서 말뒤를 쫓아가 말잔등에 훌쩍 뛰여올라탔다. 최봉설도 말을 잡아타고 뒤쫓아왔다. 이들은 놀란 말을 진정시키면서 15리나 달려 팔포강 산중턱에 이르러서야 말을 멈춰세웠다. 이윽고 한상호도 달려왔다. 셋은 말에 실은 돈마대를 풀었다. 그속에는 10원짜리 지페 5만원, 5원짜리 지페 10만원이 들어있었다.
《성공이다!》 이들은 저도 몰래 환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지체할수 없었다. 일제의 추격대가 올수도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셋은 인차 돈을 세마대로 나누어 메고 와룡동을 향해 떠났다. 동시에 박웅세, 김준 등은 적들의 시선을 흐리기 위해 습격지점에서 우편물을 실은 말을 몰고 윤준희일행이 떠난 반대방향으로 한참 달려서 산속에 깊이 들어간후 말을 나무에다 매여놓고는 윤준희네를 쫓아갔다.
윤준희일행은 삼봉동을 넘고 부르하통하를 건너 5일 새벽 3시경에야 비로소 와룡동에 자리잡고 있는 최봉설의 집에 들어섰다. 이들은 최봉설의 집에서 온종일 자고나서 저녁 8시가 되자 최봉설의 동생 최명욱이 모는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김하석이 있는 의란구로 출발하였다. 이란구에 도착한 이들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윤준희, 최봉설, 한상호, 림국정 등 4명이 1월 10일 탈취해온 거금을 지니고 무기를 구입하러 머나먼 울라지보스또크로 떠났다.
한편 룡정으로 수송되던 15만원 거금이 피습, 탈취당한 소식을 접한 룡정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도적"을 사출해내고 돈을 되찾기 위해 수백명의 경찰들을 평강일대에 파견하여 마음대로 조선족백성들을 검거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악에 바친 일제는 100여명의 경찰을 명동에 파견하여 수많은 무고한 조선족백성들을 체포하고 학살하였다.
1월 10일 일제는 1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와룡동을 수색하다가 겨우 도난사건의 선색을 잡아쥐게 되였고 최봉설의 종적을 찾아 사처에 수색망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때 최봉설은 이미 울라지보스또크로 가는 길을 재촉하고있었다.
윤준희일행은 15일에 로씨야 모구위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1주일간 기다린후 배를 타고 23일에 울라지보스또크에 상륙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한 일행은 조선족부락인 신한촌에 사는 조선인반일비밀공작자인 채성하의 집에 들어가 은신하였다. 이들은 최의수란 중개자를 내세워 일본돈을 루블로 바꾸는 한편 무기상들과 련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들이 갖고간 돈으로 총을 3만여자루 살수 있었는데 이 총이면 연변에 있는 반일단체는 물론 울라지보스또크지역에 있는 500여명의 조선인 반일투사들도 완전무장을 시킬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윤준희네가 체코군단과 로씨아백파군 무기간상배들과의 무기구입교섭에 중매군으로 내세운자가 엄인섭이였는데 이 자는 울라지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 숨어들어온 일제의 주구이며 조선인특무였던것이다. 이 민족의 반역자는 즉시 이 일을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제헌병대에게 밀고하였다. 일제헌병대는 엄인섭의 밀고를 받자 즉시 일본정부에 보고하였다. 일본정부는 헌병대의 보고를 받고 윤준희일행과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조선인반일투사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군함을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하였다.
1월도 다가는 31일밤 신한촌은 바야흐로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대검거가 분초를 다투며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이런줄도 모르고 윤준희일행은 밤늦도록 려관집에서 무기교섭을 위한 연회를 차리고 즐겁게 보내다가 그자리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자정이 넘어 새벽이 다가올즈음 불시에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댔다. 윤준희일행은 잠에서 소스라쳐 깨여났다. 일이 잘못되였음을 직감하였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주숙하고있는 려관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있었다.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은 벌떡 일어나 뒤문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앞뒤문이 벌컥 열리면서 수십명의 헌병대가 총창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꼼짝할 사이도 없이 셋은 체포되였다. 이때 뒤고방문곁에 있던 최봉설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열리면서 시퍼런 총창이 엇비껴들어왔다. 순간 최봉설은 일본군경이 손쓸사이도 없이 날렵하게 두 총창을 콱 잡아당겨 두 일본군경을 맞부딧쳐놓고 쏜살같이 담장을 뛰여넘어 앞으로 달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최봉설이 도망치자 일본군경들은 일제히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어 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냥 앞으로 달리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또 왼쪽 발뒤축에 총상을 입었다. 몇번이고 눈앞이 캄캄하여 쓰러질듯 했지만 넘어만 지면 끝장이라는 일념으로 계속 앞만 바라보고 달렸다. 한참 뛰여가다 보니 총소리도 멎고 앞에는 울라지보스또크의 부두가 나타났다. 길에 잘못 들어선것을 알고 인차 서쪽 산기슭으로 방향을 돌려 비밀공작자인 채성하의 집으로 찾아갔다.
윤준희 등이 체포된후 엄인섭의 밀고에 의해 울라지보수또크에서 있던 500여명의 조선인반일투사들은 몽땅 체포되였으며 이들은 2월초에 일본군함에 실려 일본의 시모노세끼, 조선의 부산, 경성, 원산 등지를 경과하여 청진감옥에 피감되였다. 얼마후 일제는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을 서울서대문감옥으로 압송하였으며 거기에서 이른바 "15만원 도난사건"에 대한 "공개"재판을 하였다. 재판석상에서 윤준희를 비롯한 반일투사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행동의 정의성, 정당성과 무죄를 호소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에 대한 죄행을 공개적으로 규탄하였다. 하지만 혈안이 된 일제는 이들의 정의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었고 또한 이들을 그대로 살려둘수 없었다. 1921년 8월 25일에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은 서울감옥에서 살해되였다. 그때 윤준희는 30세, 한상호는 23세, 림국정은 27세였다.
신한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봉설은 그후 계속 반일무장투쟁을 견지하였으며 《적기단》단장직무를 맡은후 단원들을 거느리고 쏘련과 연변에서 무장투쟁을 활발하게 벌렸으며 또한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