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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민회(新民會)의 활동

작성자어등산나무꾼|작성시간15.12.14|조회수243 목록 댓글 0
신민회(新民會) ◇ ◇ ◇
< 신용하 >
 개요
 참고문헌
신민회는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개화자강파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4월 서울에서 창립한 전국규모의 비밀결사이다. 신민회의 창립의 처음 구상과 발기는 안창호(安昌浩)에 의해 제의되었다. 안창호 등 미주 공립협회(共立協會) 회원들은 1906년말∼1907년초의 연휴기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남쪽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안창호의 발의에 의해 ‘대한신민회’를 결성하기를 합의하고, 안창호가 《대한신민회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장정》을 초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단체의 국권회복의 목적에 비추어 이 단체를 미국에서 결성하는 것보다 본국에서 결성해야 한다고 합의하고, 안창호를 공립협회의 대표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여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에게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양기탁은 이에 적극 찬성하면서도 이를 공개단체로 결성하자고 제안하여 이 단체를 비밀결사로 창립하려는 안창호와 의견이 달라서 창립이 약간 지연되었다.

양기탁과 안창호 등은 ①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애국세력, ②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애국세력, ③ 서북지방과 서울의 애국적 신흥시민세력, ④ 무관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애국세력, ⑤ 미주 공립협회의 애국세력을 규합하여,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煇)·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회영(李會榮)·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이강(李剛)·이상재(李商在)·신채호(申采浩)·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鐘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1907년 4월 초에 서울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신민회의 회원은 1910년 약 800명에 달하였다.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과 이념은 첫째,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건설하고 그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정 수립을 민족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둘째, 신민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력양성’을 달성하려고 했으며, 셋째, 이를 위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새롭게 교육하여 신국민(新國民)·신민(新民)을 만들려고 하였다. 넷째, 신민회는 이 ‘신민’은 반드시 한국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하며, 다섯째, 이 ‘자신’은 사회·국가·국민의 모든 부분에서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신사상·신교육·신제창·신배양·신윤리·신학술·신모범·신개혁을 주창하였다.

신민회는 이러한 목적과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사업으로서, ① 신문·잡지 및 서적을 간행하여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 각 곳에 애국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국민의 애국정신을 각성시킬 것, ③ 우수한 학교들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④ 각 곳의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할 것, ⑤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방침을 지도할 것, ⑥ 신민회 회원의 합자로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⑦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기회가 올 때의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⑧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등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신민회의 조직은 비밀결사로 이루어졌다. 신민회를 공개합법단체로 조직하지 않고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는, ①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 ② 일제의 법령에 의해 해산 당하지 않기 위한 것, ③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의 핵심단체를 조직해 두려는 것, ④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한 것, ⑤ 수구파·위정척사파로부터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한 것 등이었다.

신민회의 조직체계는 중앙에 회장·부회장(명예직)·총감독·의사원·재무원·집행원·감찰원을 두었다. 이것은 최고지도부로서 총감독이 사실상 신민회 전체를 총괄하며, 의사원은 입법기관으로서 각도별로 그 의원을 선정하였다. 재무원은 재정담당 총책임자였고, 집행원은 신입회원의 자격 검사와 조직을 담당하는 총책임자였다. 감찰원은 회원의 기강을 감찰하는 직책이었다. 도에는 도총감을 두고 각도별 회원을 지휘하도록 했으며, 의결기관으로 평의원을 두었다. 군에는 군감을 두고, 역시 평의원을 두었다. 군감 밑에는 반(班)을 편성했는데,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20명마다 부반장을 두었으며, 5명마다 반장을 두었는데, 5명단위의 ‘반’조직이 신민회의 기본단위조직이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이면서도 중앙에서 군에 이르기까지 의결기관을 둔 것이 조직의 큰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민회의 조직은 종선으로만 이어지게 해서 당사자 2인 이상은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고, 횡선으로는 누가 회원인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신민회 회원의 입회는 매우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회원은 애국사상이 확고하고 주권회복운동에 생명을 바칠 결의를 한 인사에 한하여 엄선하며, 강철같은 조직을 유지하였다. 당시 800명의 신민회 회원에는 당시 독립회복에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한 저명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의 거의 모두가 가입해 있었다.

신민회의 활동은 여러 부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첫째, 교육구국운동은 신민회가 국권회복을 위한 인격양성의 방법으로서 가장 정력을 많이 투입한 운동이 신교육구국운동이었다. 이 부문에서 신민회는 ① 국민들에게 사립학교의 설립과 신교육실시의 계몽 고취, ② 민중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들의 국권회복 노선에의 교육방침의 지도 ③ 중학교급 학교의 설립에 의한 고급인재 양성 등을 실행하였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직접 설립한 중학교급 우수한 학교는 ① 정주의 오산(五山)학교와 신안(新安)학교, ② 평양의 대성(大成)학교 ③ 강화 등지의 보창(普昌)학교들, ④ 의주의 양실(養實)학교, ⑤ 납청정의 가명(嘉明)학교, ⑥ 안주의 협성안흥(協成安興)학교, ⑦ 선천의 신흥(新興)학교, ⑧ 곽산의 흥양(興襄)학교, ⑨ 영흥의 명륜(明倫)학교, ⑩ 경성의 경성(鏡城)학교, ⑪ 안악의 양산(楊山)학교와 안악군 사범강습소, ⑫ 서울의 협성(協成)학교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신민회는 이 밖에도 다수의 소학교급 학교들을 설립했는바, 이 시기에 간부 이동휘 1인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개교나 되었다고 하니, 그 열의와 성과를 알 수 있다. 한국민중들이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자발적으로 설립한 사립학교 수가 무려 3,000여개교에 달했는데, 그 배경에는 신민회의 열정적인 교육구국운동과 교육방침의 지도가 있었다.

둘째, 계몽강연·학회운동은 신민회의 활동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활발하게 전개된 것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신민회의 취약점의 하나인 재정부족의 제약을 비교적 적게 받고 주요회원들이 모두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특히 신민회회원들은 무수한 강연회를 열었는바, 그들이 계몽강연을 통하여 고취한 것은 ① 애국주의 ② 국권회복 ③ 민권사상 ④ 신사상·신지식·신산업의 계몽 ⑤ 구습타파 ⑥ 학교설립 고취 ⑦ 자발적 의무교육 실시 ⑧ 학회활동 고취 ⑨ 민족단결 ⑩ 실력양성 호소 등이었다.

셋째, 잡지·서적 출판운동으로 신민회는 기관지로서 신문을 새로 창간하지 아니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활용하였다. 신민회는 창립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이 신민회의 총감독이 되고 신민회본부가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설치되었을 뿐 아니라, 논설위원과 사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되었으므로 《대한매일신보》는 쉽게 신민회 기관지로 전환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또한 청소년들의 애국교육을 위해 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신민회가 1909년 9월 청년학우회를 창립하자 그 기관지가 되어 활동하다가 신민회가 해체될 때 폐간당하였다. 또한 신민회는 박은식(朴殷植)·유근(柳瑾) 등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최남선(崔南善)이 총무가 되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조직해서 한국의 귀중한 고전들을 많이 간행하였다.

넷째, 민족산업진흥운동으로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침략을 군사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했으며, 민족산업의 진흥이 신교육과 마찬가지로 실력양성의 길임을 특히 강조하여 이 부문의 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우선 ‘본보기’ 공장과 회사를 설립하여 실업가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의 영업방침을 지도함으로써 민족산업자본의 발흥을 촉진하였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실업체의 사례로는 평양자기제조 주식회사, 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 조선실업회사, 안악의 소방직공장·연초공장,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신민회의 민족산업진흥운동은 민족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대독점자본의 압력을 받고, 그에 대항해야 했으므로 교육구국운동과 같은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다섯째, 청년운동으로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에서의 청년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1909년 8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중앙총회 외에 지방별로 한성연회(漢城聯會)·평양연회·의주연회·안주연회 등이 조직되어 활발한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곽산·선천·용천·진남포 등지에서 지방연회 조직을 하다가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을 맞게 되었다.

여섯째,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설운동으로 신민회는 국내에서 실력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서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국내에서도 그동안 양성한 실력으로 일거에 봉기하여 내외호응해서 실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설문제를 처음 검토한 것은 1907년 8월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하였고, 또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며 큰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연기되었다. 신민회가 다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운동이 퇴조기에 들어가기 시작한 1909년 봄이었다. 이때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선정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실천에 들어가기 전에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살사건이 일어나고, 일제는 이 사건과의 관련혐의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김희선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을 일제헌병대에 구속했다가 그 이듬해인 1910년 2월에야 석방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설립과 독립군기지 창설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독립전쟁전략’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독립군기지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청국령 만주일대에 설치하되, 후임 독립군의 국내진입에 가장 편리한 지대를 최적지로 선정한다. ② 최적지에 일정면적의 토지를 구입하되, 그 자금은 신민회의 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모금하고, 이주민에게도 휴대하도록 한다. ③ 토지가 매입되면 국내에서 애국인사들과 애국청년들 중심으로 계획적인 단체이주를 실시하여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한다. ④ 신한민촌에는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교회 등 문화시설을 건설하는 한편, 무엇보다도 특히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사관을 양성한다. ⑤ 무관학교에서 사관이 양성되면 이들과 이주한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한다. 이 독립군은 정병주의를 채택하여 철저한 현대적 군사훈련과 현대무기로 무장시켜 일본정규군과의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현대적 군대로 만든다. ⑥ 독립군이 강력하게 양성되면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하기로 한다. 절호의 기회는 일본제국주의의 힘이 더욱 증강되고 침략야욕이 더욱 팽배하여 대륙지방이나 태평양지역으로 팽창하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날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 등이 일어날 때라고 추정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므로 이 기회를 기민해서 그동안 국외에서 양성한 독립군으로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군이 국내로 진입하고, 국내에서는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내외호응에서 일거에 봉기하여 실력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신민회 주요회원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1911년 이른 봄에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처음이름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신민회 회원들은 1913년에는 왕청현 나자구(汪淸縣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밀산현 봉밀산자(密山縣蜂蜜山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신민회의 이 3개의 무관학교의 설립은 국내의 신민회가 해체되는 도중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재정부족으로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3개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의 창설은 그후 만주에서의 독립군 창건의 모체가 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자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탄압책으로 1911년 1월 <안악사건>을 일으켜 황해도일대의 애국자 160여명을 체포 투옥하였다. 일제는 동시에 양기탁 등 17명의 중앙 지도군 애국자들을 ‘보안법위반’이라 하여 체포 투옥하였다. 일제는 이어서 서북지방의 애국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소위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신민회 평안남도지회의 회원을 비롯해서 전국의 신민회 회원 700여명을 체포하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민회’라는 한국인 애국자들의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있음이 드러나, 일제가 잔혹한 탄압을 받고 국내에서 신민회는 해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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