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부활동

[스크랩] (중국영화의 황제) 영화와 항일투쟁 - 김염(김덕린)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01.23|조회수395 목록 댓글 0



김염의 원명은 김덕린이다.

그는 1911년 4월 7일, 조선 서울에서 조선독립운동의 지도자의 한사람이였으며

의사였던 김필순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부친은 서울에서 센프랑세쓰병원에서 꾸린 의학원을 졸업하고 그 병원의 의사로 있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자 김필순은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조직하고 령도하여

반일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후 반일활동이 일제에게 탄압당하고 추구받게 되자

놈들의 체포를 피해 1912년 솔가하여 압록강을 건너 통화에 자리잡고 거주하였다.

 

일제의 침략세력은 이곳에도 뻗치게 되였다.

김필순은 혁명의 힘을 기르기 위하여 1915년 일본침략자들의 눈을 피해 멀리 치치할로 들어갔다.

산설고 물선 이곳에서 그의 일가는 어느 한 사당에서 한동안 지냈다.

당시 조선으로부터 10여세대되는 농민이 이곳으로 이사하여왔다.

김필순은 그들을 치치할에서 백여리 떨어진 농촌에 농토를 얻어 안착시켜놓았다.

그후 김필순은 진료소를 꾸려놓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럭저럭 입에 풀칠이나 할수 있었을 때 김염이네 가정에는 큰 불행이 일어났다.

김염이 여덟살 나던 해 그의 부친은 광란병으로 많은 식구를 남겨놓고 사망하였다.

그의 할머니, 어머니, 두 형님, 두 동생, 두 누이동생, 김염이까지 합하여 아홉식구나 되는 이 가정에

막대한 생활난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이 집을 은근히 주목하고있던 일본령사관에서는 일본군들을 파하여 가택수색을 하였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그의  부친이 유리궤짝밑에 깊이 간수해두었던 비밀문건이 발각되지 않았다.

그 비밀문건이란 20여명의 혁명지사들이 서명한 <<조선독립운동 맹세서>>이다.

일대 정치재난을 면한 온 집안 식구들은 저으기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였다.

 

   아홉식구가 살아나가야 했다. 식구들은 생활의 방도를 생각한 끝에 분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꾸리던 진료소에서 간호원, 조산원으로, 둘째 형님은 진료소의 견습의사로 있으면서

할머니와 동생 하나, 누이동생 둘을 데리고 생활을 유지하도록 하였고

큰형은 큰고모부의 도움을 받아 제남에 있는 산동성제로대학 의학부 예과에 가서 공부하고

김염은 넷째동생을 데리고 집을 떠나 상해로 가서

그는 둘째고모네 집에, 동생은 셋째고모네 집에 각기 얹혀살기로 하였다.

 

   둘째고모네 집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김염까지 얹혀살다보니 살림은 더욱 곤난하였다.

그때 조선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공부하는 류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고모네는 하숙집을 꾸려 살림을 보탰다.

김염은 소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하숙생들의 밥시중을 들어주고 하숙방을 소제하는 등 짬만 있으면 일을 도왔다.

 

    김염은 둘째고모네 집에서 2년동안 공부하고나서 열세살 나던 해

큰형을 따라 제남에 가서 면비로 제미(지금은 제로)중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곳도 오래 있을 곳이 아니였다.

학비는 면제하여주었지만 경제래원이 푼푼하지 못한 형과 함께 계속 공부할수 있는 계제가 못되였다.

때마침 상해에 있는 둘째고모부가 천진 북양대학의 교원으로 초빙받아왔다.

김염은 이 기회에 또다시 고모네 집으로 찾아가서 천진 남개중학교 2학년에 전학하게 되였다.

 

   그의 둘째고모부는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잇었지만 살림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하였다.

김염은 고모네의 경제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하여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상학, 하학 시간이 되면 종을 치고

아침, 저녁으로 사무실청소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김염은 중학교에 다니면서 지식이 퍼그나 늘었다.

하지만 그보다 치치할로부터 상해, 제남, 천지 등지로 돌아다니며 사회와 광범하게 접촉하는 가운데서

사회생활에 대한 산지식이 늘었다.

그는 인제 열일곱살을 잡았다. 셈이 들게 되니 한대중 고모네 집에 끼워사는것이 괴롭고 불안한 감을 느끼였다.

 

그는 둘째고모부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둘째고모부 김규식은 경상남도 울릉도의 가난한 집에서 태여났는데

그후 서룰에 와서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 교장의 도움을 받아 미국류학을 하게 되였다. 

미국에서 문학박사의 학위를 수여받은 그의 둘째고모부는 지금 대학의 교원으로 있지만 생활은 씨원치 못하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김염은 이 수수께끼를 풀수 없었지만

어쨌든 글뒤주가 되여 박사학위를 탔다 하더라도 대단치 않다는 생각만이 갈마들었다.

김염은 자기 손으로 앞날을 개척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럼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김염은 어릴 때 아버지께서 <<어떤 일이나 자기 노력에 의하여야 하느니라>>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그는 밑천을 들이지 않고 생활하여 나갈수 있는 길, 일을 하면서 공부할수 있는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그에게 밑천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김염의 어렸을 때의 일이다.

영미연초공사에서 매란방이 주역을 맡은 <<천녀가 꽃을 뿌리다>>라는 영화를

장사의 광고로 삼아 치치할로 갖고온 일이 있었다.

그들은 은지박이 권연갑 10갑에 영화표 한장을 바꾸어주었다.

그때 여라문살에 난 김염은 어찌나 영화를 구경고싶었던지 맨발로 온 거리를 뛰여다니며

겨우 권연갑 10갑을 얻어 영화표 한장을 바꾸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녀장을 한 매란방의 형상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동안 남아있었다.

 

   그후 그는 상해, 제남, 천진 등지에서 중국영화와 외국영화를 적지 않게 구경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 점차 영화감상능력이 높아졌다.

김염이 보건대 어떤 국산품영화는 연기가 매우 졸렬하였고

공연태도도 단정하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하여 아주 어색하였다.

 

그는 자기가 영화배우로 된다면 그들보다 더 훌륭하게 공연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의좋은 동창들에게 자기 생각을 토로하였다.

   <<난 영화배우가 된다면 진실하게 표현할수 있겠어. 어때, 내가 배우가 된다면말이야?>>

   <<좋아! 그건 참 훌륭해!>>

   동창생들은 환성을 올리며 지지하여나섰다.

 

김염은 상해로 가서 영화배우로 될 리상을 품고 고모네에게 그 의향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고모는 펄쩍 뛰면서 반대하였다.

    <<우리 김씨네 가문에는 종래로 광대질한 사람이 없었단다.>>

   고모부 김규식도 잡생각을 그만두고 공부를 잘하여 립신양명하라고 준절하게 타일렀다.

하지만 배우를 천시하는 고모의 태도나 공부를 잘하여 출세의 길을 닦으라는 고모부의 권고도

한번 먹은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온 <<대공보>>의 천진주재 기자 하심랭은 <<소화원>>이라는 부간을 책임지고 편집하였다.

이 편집은 상해의 려민위가 꾸리는 민신영화공사의 연출 후요를 익히 알고있었다.

이런 내막을 알아낸 김염은 세번이나 하심랭을 찾아가서 떼가 사촌보다 낫다는 격으로

후요에게 보내는 소개신 한장을 겨우 얻어냈다.

 

그런데 고모네들 몰래 떠나는 길이라 려비를 얻지 못하였다.

의좋은 동창생들이 이런 사정을 알게 되자 돈을 모아 그에게 돈 7원을 주었다.

김염은 6원으로 배표를 사고 1원은 용돈으로 남겨두었다.

 

   1927년 초봄, 김염은 천진부두에서 상해로 떠나는 륜선을 탔다.

김염은 갑판의 란간에 기대여서서 가없이 넓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갈매기들이 바다우로 훨훨 날아옌다.

영화배우가 되려는 아름다운 꿈을 안고 떠나는 김염의 가슴은 희망으로 사뭇 부풀어올랐다.

그의 마음은 출렁이는 바다의 물결처럼 설레였고 창공을 날아예는 갈매기처럼 자유로왔다.

 

   김염은 상해에 도착하자 가난한 학생들을 돌봐주는 학생회조직을 찾아가서

우선 숙소를 정해놓고 곧 민신공사를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후요는 영화 <<목란종군>>의 연출임무를 맡고 산동성에 야외배경의 촬영으로 떠난 뒤였다.

김염은 다시 명성영화공사로 송지평이란 사람을찾아가서 찾아온 의향을 말하였다.

 

김염의 모양을 아래우로 훑어보고난 송지평은 천진까지 돌아갈 려비를 줄테니 되돌아가라고 권하였다.

김연은 단연 거절하고 거기에서 물러나왔다. 며칠 지나니 고대하던 후요가 외지에서 돌아왔다.

김염은 그를 만나 하심랭의 서신을 보였더니

뜻밖에 너그러운 태도로 대하면서 민신공사에 눌러있으라는 허락을 하였다.

공사에서는 월급을 한푼도 주지 않고 그저 잠자리와 먹는것만 해결하여주었다.

그래도 김염은 밥먹을 걱정은 덜게 되였으니 무엇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염의 배우생활은 <<목란종군>>의 부차적배역을 맡은 때부터 시작된셈이다.

그는 처음 영화의 촬영기록을 하였다.

그러다가 <<목란종군>>의 실내배경을 촬영할 때 후요는 그더러

적과 싸우는 병사의 배역으로 분장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그는 처음 맡은  배역인지라 비록 하찮은 보조적배역이였지만 엄숙하게 대하였다.

그는 공연중 나무칼에 눈두덩을 맞아 피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이 끝날때까지 견지하였다.

그의 이런 열성에 대하여 후요는 만족해하였으나 공사의 주인은 그저 쌀쌀하게 대하였다.

영화공사를 틀어쥔 자본가들은 돈벌이에 눈이 어둡다니니 영화의 예술성을 도외시하였는데

어떤 영화는 지어 일주일에 한부씩 제작하여내는 현상까지 있었다.

그러한 거친 영화에 비하여 <<목란종군>>은 비교적 공력을 들여 촬영한 셈이였다.

 

  김염이 생활하던 당시는 배우들을 스타로 모시는 지금과는 달리

배우를 천하게 여겨 지어 부자들의 노리개로 삼았다.

그러기에 배우들은 자기의 본명을 밝히지 않고 별호를 지어 불렀다.

김염은 중학생 시절부터 예술인이 되려는 꿈을 꾸었는지라 별호를 생각하여둔 일이 있었다.

 

그는 로신선생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로신선생을 존경하였다.

그는 장래 사회에 진출하면 김신이라는 별호를 쓰려고 하였다.

한데 천진한 그의 생각에도 로신의 필명을 그대로 붙인다는것이 너무나 당돌한 감이 들어

다시 그럴듯한 글자를 찾던차

불꽃처럼 청년들의 정열을 상징하는 <<염(焰)>>자가 마음에 들어 김염이란 별호를 달았다.

 

   당시 천대받던 예술인들의 운명은 평탄하지 않았다. 김염은 배우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곡절을 겪었다.

그가 참가한 두번째 영화 <<열혈남아>>에서 꼬마야장으로 분장하여 촬영을 마쳤을 때 그만 해고되여버렸다. 

다행이 <<열혈남아>>의 연출을 맡아보던 상해연극계의 명배우 만뢰천이 그를 가긍히 여겨

전한이 꾸리고있던 <<남국예술극사>>에 소개하여주었다.

배우생활을 한지 일년도 못되여 쫓겨나다보니 그의 심정은 몹시 괴로웠다.

 

   전한의 집에는 10여명이나 되는 식객들이 아무런 할일도 없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김염도 그들속에 끼워 무료하게 세월을 보냈다.

전한은 김염을 조선족이라는데서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중국현대연극의 정초자이며 걸출한 희곡작가인 전한은

짬만 있으면 김염에게 어떻게 배우생활을 대하여야 한다는것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어떻게 인생을 대하여야 한다는 도리를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김염은 전한의 교양하에서 예술인으로서의 수양뿐만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도덕수양도 갖추게 되였다.

이것은 그의 예술생활에서 중요한 한단락을 이루게 되였다.

김염이 늘 말하다싶이 전한은 예술의 길에 들어선 그의 첫 스승이였던것이다.

 

   연극을 한막 올리려면 세트로부터 복장, 도구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비가 들어야 했다.

원체 자금이 없는 <<남국예술극사>>는 한동안 공연하지 못하고있다가

1928년 하반년에야 겨우 몇막 준비한후 남하하여 광주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김염은 순회공연대를 따라가지 않고 타포교에서 남의  집을 지켜주었다.

 

   김염은 밥줄이 또 끊어졌다.

한푼도 없는 그는 하는수없이 타포교부근의 골목굽인돌이에 있는 자그마한 음식점으로 다니며 외상밥을 먹었다. 

어느덧 음력설이 다가왔다. 빚을 새해에 넘기지 않는 법이라고 음식점 주인은 밥값을 재촉하였다.

김염은 아껴 입고 다니던 단벌 솜두루마기를 벗어 밥값을 치렀다.

 

    입에 거미줄치게 되여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 김염은 체면을 차릴 처지가 못되여

명성공사의 정정추에게 일자리를 얻어달라고 간청하였다.

정정추는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가련히 여겨 받아주었다.

김염은 그동안 정정추가 창작중에 있던 극본 <<피눈물의 황국>>을 베껴주었다.

이 극본은 주인과 노복이 련애하는 사회적일화에 근거하여 쓴것으로 그는 별반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호구지책으로 써주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배경이 없이는 한걸음도 내디디기 어려웠다. 

뒤심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아무리 날고뛰는 재간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회에 진출하기 힘들지만 재산과 세력이 있는 집 자식들은 멍청이라도 고관대작에 오를수 있었다.

그런고로 재주가 있어도 인재가 매몰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그런데 혹시 어떤 사람은 어쩌다가 우연한 기회를 만나 일약 명성을 떨쳐 청운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바로 김염은 그런 사람들중의 한사람에 속한다.

 

  미국류학으로부터 갓 돌아온 손유는 1929년 영화 <<풍류검객>>의 연출을 맡고 배우를 물색하는 중이였다.

손유는 국외에서 갓 돌아온데다 이번까지 세번째 연출을 담당한지라 명배우들을 청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명성공사의 풋내기들가운데서 골라잡을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염을 추천하였다.

 

손유는 천진 남개중학 출신이였다.

손유가 그 전해 국외에서 금방 돌아왔을 때 남국사에서 남개중학출신이라는 김염을 만난적이 있었다.

손유는 같은 중학교의 출신이라는데서 김염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있었다.

손유는 곧 김염이 참가한적이 있는 영화 <<목란종군>>과 <<열혈남아>>의 필림을 통하여

초보적으로 그 연기를 관찰하고나서 직접 불러 만나보았다.

 

열아홉살에 난 김염은 미목이 수려하고 훤칠하게 생겼으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활발하여 신형의 학생다운 자태였다.

손유가 보건대 이 젊은이는 당시 영사막이나 무대에서 꼭지 달린 모자를 쓰고 삼동을 꺾어치며 행동하는

이른바 풍류인물의 인재였다.

손유는 김염같은 젊은 배우야말로 침침한 중국의 영사막을 환하게 빛뿌리게 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인상을 받은 손유는 김염을 대담하게 <<풍류검객>>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김염은 처음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로부터 손유와 김염은 예술상에서 장기적인 합작자로 되였다.

김염이 영화계에서 얻은 예술적성과와 빛나는 영예는 실로 손유의 도움이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김염은 <<풍류검객>>의 주역에서 예술적재능을 과시하게 되자 사회적인 인정을 받게 되였다.

1930년, 김염은 련화영화공사에 들어가 손유가 연출에 착수한

<<야초한화>>의 남주인공 배역을 맡고 원령옥이 녀주인고의 배역을 맡았다.

반봉건적정신이 있는 이 영화에 대하여 김염은 매우 중시하여 열정적으로 자기 맡은 배역에 림하였다.

 

이 영화의 남주인공은 부자집 도련님인데

가정에서 맺어준 강제결혼을 반대하여 집을 뛰쳐나와 독립적생활을 도모하는 봉건적가정의 반역자이다.

주인공은 거리에서 꽃을 파는 처녀를 만나 그에게 마음이 쏠린다.

 

이 소녀는 후에 저명한 가수로 되였다. 로령의 부모는 그들의 애정에 한사코 훼방을 놓았으나

그들은 봉건적속박을 짓부시고 나와 끝내 자유결합한다.

이 영화는 반봉건적사상으로 하여 청년학생들과 로동자들속에서 매우 큰 영향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김염과 원령옥의 명성도 높아졌다.

 

   <<야초한화>>의 뒤를 이어 김염은 미국적을 가진 작가 싸웅의 극본을 개작한 <<련애와 의무>>에서 주역을 맡았다. 복만창이 연출을 맡았고 김염과 원령옥이 합작한 이 영화는 반봉건적인 진보적의의가 있는것으로 하여 사회에 널리 파문을 일으켰다. 김염과 원령옥은 일약 영화계의 명배우로 되였다. 김염은 련화공사의 저명한 녀배우들인 원령옥, 왕인미 등과 합작하여 민신, 명성, 련화, 예화 등 영화공사에서 1931년도에 4부, 1932년도에 6부로 모두 10부의 영화의 주역을 맡았다. 이러한 반봉건적영화에서 그의 생기발랄하고 영준하고 소박한 기질은 훌륭하게 표현되여 관중의 절찬을 받았으며 그의 명성은 전국을 뒤흔들어놓았다.

 

   1931년부터 1932년사이에 있은 일이다. 상해에는 전문 영화소식만 보도하는 <<전성(電聲)>>이란 신문이 있었다. 이 신문에서는 판매로를 확대하고 명성을 높이기 위하여 <<영화황제>>를 선출하는 활동을 벌리였다. 선거표는 신문에 찍어 영화애호가들인 투표자들에게 팔았다. 표수정황은 수시로 신문에 발표하여 투표가 제일 많은 영화배우를 <<영화황제>>로 선거하였다. 이 선거활동에서 영화관람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던 김염은 <<영화황제>>의 월계관을 쓰게 되였다. 영화계에서 있은 이 사실은 당시 관중들의 명배우에 대한 흠모의 정서와 열정적인 희망을 반영하였다. 관중들은 김염과 같은 명배우가 더 많이 나타나기를 바랐고 김염이 주역을 맡은 그러한 우수한 영화가 더욱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했던것이다.

 

  김염은 영사막에서 창조한 예술적형상이 소박할뿐더러 평시의 생활도 매우 단정하였다. 주색에 잠긴,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이 범람한 상해에서 어떤 영화배우들은 멋을 부리며 무도장이나 기생집으로 드나들었다. 천재적인 예술기교를 소유하였다고 하던 주비같은 명배우는 죄악적인 사회기풍의 심연에 빠져 나중에 아편쟁이로 타락되여버렸다. 그러나 김염은 외도에 빠지지 않고 벗들과 함께 체육장, 수영장으로 다녔으며 공장, 학교 등 곳에 가서 생활체험을 쌓았다.

 

   <<9.18>>사변이 일어난 그 이듬해, 일본침략자는 상해를 진공하여 <<1.28>>사변을 일으켰다.

 

   김염은 유명한 극작가인 전한이 꾸린 남국사에 가입하였다. 그는 대부분 영화에서 위엄있는 권세에 굴하지 않고 부귀에 미혹되지 않으며 빈천하여도 부지런히 일하는 배역을 담당하였다. 이것은 바로 현실생활중의 김염의 성격을 말하여주고있다. 그는 전한이 쓴 씨나리오 <<녀성의 빛>>, <<황금시대>> , <<세 현대녀성>>의 주역을 담당하였고 <<들장미>>, <<대로>>등 진보적영화에서도 주역을 맡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인 영화가 국민당정부의 비위를 크게 거슬릴줄이야!

 

   1933년, 국민당의 특무조직인 <<람의사>>의 특무들은 예화영화공사를 습격하여 들부시고나서 상해 각 극장에 소위 <<반동영화>>를 상영하지 못한다는 경고서를 내렸다.

 

   한번은 남경에 있는 일본령사가 돌연적으로 실종되였다. 그후 중산로에서 배를 갈라죽은 그놈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일본놈들은 이것은 공산당의 작간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장개석정부에 제기하였다. 그가운데는 김염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장개석정부는 일본주재 남경령사의 밀신을 상해시장 오철성에게 전하였꼬 오철성의 부인은 <<김염은 원명은 김덕린으로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한 혁명가의 후대다. 그자는 공산당이니 주의하라.>>는 쪽지를 써서 민신영화공사의 주인  려민위에게 넌지시 보냈다. 려민위는 한때 손중산의 혁명활동을 지지한 사람으로 북벌전쟁시에는 촬영기를 메고 북벌군을 따라다니며 많은 기록영화를 찍은 일까지 있었다. 그는 당년을 생각하였던지, 아니면 동정심이 동하였던지 자기 안해를 통해 이 일을 김염에게 귀띔하여주었다.

 

   김염은 이렇게 각방면으로부터 오는 위협과 공갈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투쟁을 반영한 영화거나 진보적영화의 주역을 서슴없이 맡아하였다. 한시기 류행되였던 <<세 현대녀성>>은 1933년  련화공사에서 촬영제작한 영화이다. 이것은 전한이 1932년에 쓴 극본이였으며 또한 김염이 주역을 맡은 가운데서의 대표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1.28>>사변후, 전한은 국민당특무들이 체포하려고 쫓아다니니 한때 김염의 숙소에 숨어있었다. 전한은 온종일 방안에 박여 할일이 없다보니 김염이 손수 책처럼  한데 묶어 제본한 영화애호가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가 그속에서 계발을 받고 홀연 령감이 떠올라 이 극본을 쓰게 되였다.

 

그는 이 극에서 얼빠지고 감상적이고 비관적이며 지어 자살하려 한 영화애호가인 소녀 진약영, 적극적이고 락관적이며 시대의 풍랑을 맞받아 나아가는 전화교환수인 진보적녀성 조숙정,  물질향수속에 빠져들어가 타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남국의 처녀 우옥 등 세 현대녀성의 형상을 부각하였다. 이 세 녀성과 함께 청년영화배우 장유라는 인물도 창조하였다. 이 영화에서 김염이 장유로, 원령옥이 조숙정으로, 진연연이 진약영으로, 려작작이 우옥으로 분장하였다. 극은 주요하게 장유를 둘러싸고 슈제트를 전개시켜 부동한 인생도로를 제시하였다. 

 

   영화 <<대로>>는 항일구국의 소원을 품은 단결된 일부 청년들이 서로 우애정신을 발휘하면서 견강하고도 용감하게 군용도로 수축에 참가하는 내용을 묘사하였다. 김염은 길닦기 로동자인 김가로, 장익은 장씨로 장지직은 장대로, 한란근은 한소륙자로, 라붕은 라꼬마로, 정군리는 대학생 정군으로, 진연연은 전향으로, 려리리는 말리로 분장하였다. 이 영화에는 이처럼 당시 영향이 있는 저명한 배우들이 다 등장하였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타나자 관중속에서 강렬한 반응과 공명을 일으켰다.

 

특히 저명한 음악가인 섭이는 이 영화의 <<대로가>>와 <<선봉가>>에 작곡을 하였는데 이 노래는 당시 인민들속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애국적가곡으로 되였으며 많은 청년들을 항일열조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되였다. 섭이는 이 두수의 노래를 창작하기 위하여 당시 건축중에 있던 대상해영화관의 건축현장으로 가서 로동자들을 직접 관찰하고 자기가 실제에서 체험한후 예술적구상을 하였다.

 

   <<대로>>는 항일을 선전하였다는 죄목으로 상영을 금지당하였다. 강서성에서 <<대로>>를 상영할 때 국민당들은 노기등등하여 필림까지 태워버렸다.

 

 

(흑룡강코리언 김광춘 씀

 

 

 

김염에 관한 기사 집필에 도움을 준 박규원선생, 조복례교수, 광주국제영화제측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김염을 조명한 책은 소개란을 참고하길 바란다._편집자 주



영화황제 김염(電影皇帝 진옌). 1930년대 상해영화계의 별이자 조국광복을 열망한 항일조선인. 당시 상해 영화잡지 『전성(電聲)』에서 영화황제를 뽑는 인기투표가 있었다. 단연 김염은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이 세 질문에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매력적인 외모와 단련된 몸매도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1930년대는 그야말로 김염의 말, 김염의 행동, 김염의 모든 것이 전 중국 젊은이들의 유행이 되었다. 그 때 얻은 ‘영화황제’라는 칭호는 이후 그와 비견되는 배우가 없어, 유일한 호칭이 되었다.


편지봉투에 주소 없이 ‘중국 상해 김염과 진이’라고만 써도 그에게 편지가 전달될 정도로 김염은 중국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남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공중파 방송을 탄 것은 1996년 4월 28일 KBS에서 방영한 기록영화 와 2003년 9월 ‘TV 책을 말하다’ 정도다.

그러다가 이번 광주국제영화제에서 김염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왜 그간 소개되지 않았는가. 반공을 국시로 하던 이남정부와 중국정부가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남에 들어온 중국영화는 대만과 홍콩의 무협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염이 출연한 진보적인 내용의 영화들은 이유야 어쨌든 소개될 수 없었던 것이다.


8년 이상 전 세계를 돌며 김염의 흔적과 그의 영화세계를 파헤친 한 연구자에 의해 그의 모습이 세상에 크게 소개되었다. 바로 『상하이 올드 데이스』의 저자 박규원씨다. 그에게 김염은 작은 외할아버지가 된다. 그는 김염을 알기 위해 열정적으로 자료를 수집했고 8년의 공력은 한 권의 책으로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번 광주국제영화제에서 김염회고전을 기획, 주관한 프로그래머 조복례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조복례교수는 김염의 영화에 대해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선도적인 인물이다. 17세에 중국영화계에 입문한지 5년만에 중국 최고의 배우가 된 김염. 그의 삶과 영화는 오늘 코리아(COREA) 영화계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


1. 김염의 불꽃같은 삶과 사랑

17세 청년, 영화계에 입문

1927년 상해로 간 김염은 영화 단역부터 출연하고, 기록계원 등의 일도 마다않고 열심히 일했다. 얼마안가 김염은 자신의 영화관에 큰 영향을 미친 전한감독을 만나게 된다. 전한감독은 김염의 세계관, 예술관, 연기철학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인데, 김염은 그의 지도로 , 등의 연극에서 좋은 연기를 창조해 인정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 열정과는 달리 좀처럼 영화에서는 기회가 없어 어려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신을 최고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을 손유감독을 만나게 된다. 손유감독은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뉴욕영화연구소에서 수학한 실력파 감독이다.

그는 다른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청년상을 김염에게서 발견하고, 전격적으로 이란 첫 영화에 주인공역을 맡겼다. 세 도둑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은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하고 내용적 평가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처음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실패하자 김염은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손유감독은 두 번째 영화 (1930)의 주인공으로 다시 김염을 발탁했다. 영화는 부잣집 청년이 봉건사회의 계급질서를 뛰어넘어 거리에서 꽃을 파는 처녀를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봉건적 신분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형상해 낸 김염과 하층계급 처녀역을 잘 연기한 완영옥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일약 최고의 배우로 등극하게 된다.

기존의 부르주아적이고 낡은 내용이 아닌 진보적이고 새로운 내용에다가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은 감동하고 열광했다. 이후 손유감독은 중국의 하층민들을 그리거나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작품들에서 대부분 김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22살에 영화황제가 되다

1930년대 상해시절은 김염의 영화인생에서 절정에 해당한다. ‘영화황제’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때다.

이 시절 김염의 작품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진보적인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한 청년이 현실을 인식하고 항일에 나서는 이야기인 손유감독의 (1932), 한 여성의 운명을 통해 낡은 생활방식을 비판한 (1933), 중국인민들의 항일염원을 도로건설청년노동자들의 건설투쟁을 통해 보여준 김염-손유의 대표작 (1934), 일제를 비유하는 도적떼를 맞아 마을주민들이 단결된 힘으로 격퇴한다는 내용의 항일영화인 오영강감독의 (1936) 등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의 주제가 와 등은 당시 중국 젊은이들의 항일유행가가 될 정도였다. 일제의 침략이 전면화되고 국민당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중국인민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김염은 193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 김염은 7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1940년 중국 최초의 공군영화인 에서 김염은 중국 공군병사의 애국심과 항일투쟁을 잘 연기하며 영화로나마 평소의 꿈인 비행사가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염은 1941년 12월 8일 다시 홍콩에서 내륙으로 들어간다. 일제패망 후 찍은 (1948)는 국민당 관리들의 실정과 부정부패를 폭로한 내용으로 국민당일파를 강하게 풍자, 비판했다.

1944년 성도의 사천극장에 올린 연극 . 당시 연극을 본 사람들은 로미오역을 완벽하게 창조한 김염의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지금까지 중국역사상 로미오역을 가장 잘 연기해냈다고 평가한다.


1949년 마침내 부패한 장개석국민당일파가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아내 진이가 열렬한 중국공산당원이었던 반면 김염은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방 후 상해영화제작소 예술위원회 부주임, 상해 인민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을 맡으며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 영화예술인, 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을 지지했고 새 중국 건설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 무렵 중년의 김염은 왕이감독의 역작 (1957)에 출연한다.

이 작품은 마을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민당세력에 맞서는 순결한 청년혁명가들을 형상하며, 홍군과 마을사람들의 단결로 항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작이다. 영화에서 김염은 원숙하고 중후한 연기를 잘 보여줬다. 김염은 중국공산당정권 수립 후 6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황제라는 명성에 비해 김염은 오직 42편의 작품에서만 주인공으로 연기했다. 그는 영화를 함부로 찍지 않았다. 항상 정의로운 사상이 들어있는 극본에만 관심을 두었고 뜻이 좋지 못한 작품은 절대 출연하지 않았다.

김염의 능력을 발굴하고 그와 7편의 영화를 함께 찍으며 절친했던 손유감독은 김염의 그런 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손유감독은 정의롭고 진취적인 청년, 억울한 민중들을 위해 투쟁하는 청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청년, 신분을 뛰어넘어 고상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는 청년 등 ‘김염다운 영화’만을 제안했다.



문화대혁명과 부인 진이

김염을 말할 때는 진이를 함께 얘기해야 한다. 첫 번째 부인인 배우 왕인미와 , 등을 같이 찍었다. 그러나 성격상의 차이와 항전시기의 혼란 속에서 두 사람은 파경을 맞게 된다. 그 후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김염은 1947년 배우 진이와 결혼하면서 생활과 사상이 크게 정돈되었다.

이후 줄곧 진이는 김염의 곁에서 영화와 인생을 함께 했다. 김염은 일제침략시기나 국민당탄압시기보다 문화대혁명 때 더 큰 시련을 겪었다. 1966년부터 10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오류와 강청의 야욕이 빚은 10년내란기였다. 강청은 자신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1930년대 상해 연극, 영화예술들을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하며 숙청했다.

이때 김염도 숙청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영화계를 떠나있고 평소 성실히 노동하는 그는 더 탄압받을 수 없었다. 다만 진이까지 집을 떠나 격리조치됨으로써 외아들 김첩이 정신장애를 앓게 된다.


시련기를 보내며 건강이 쇠약해진 김염은 요양원 생활을 거쳐 1983년 12월 27일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김염의 묘와 부조는 상해 복수원(중국의 국립묘지)에 완영옥의 전신와상과 함께 영화인으로는 유일하게 안장되어 있다.

1930년대 영화황제 김염의 명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중국을 호령한 여배우 진이. 그는 청년시절 이미 공산주의청년동맹 활동을 했고 열렬한 중국공산당 당원인 진보예술가이다. 당원으로서, 김염과 문화대혁명의 시련기를 이겨낸 동지이자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진이는 중국인들의 큰 존경을 받고 있다.

83세인 진이는 현재 상해영화협회 회장직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 김염의 사상과 투쟁

김염의 항일정신, 그리고 민중성

김염(본명은 김덕린)은 1910년 4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에서 수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이며 신민회 활동에 참여한 항일투사다.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신민회사건)을 피해 1911년 서울을 떠나 서간도로 갔고, 이상촌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절친한 친구인 안창호는 아들 이름을 김필순의 영어이름인 필립으로 지을 정도였다.

김필순의 누이 김순애, 처남 서병호와 김규식, 조카 김마리아 그리고 서병호의 아들 서재현 등 여섯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같은 집안이다. 김덕홍, 김위, 김로, 서재현 등 김염의 형제자매들도 대부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런 항일운동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김염이 항일의식과 진보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던 김염은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항상 약자와 빈곤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억압받는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 민중들에게 각별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김염의 민중적 품성은 그가 연기한 영화속 인물들과 너무나 닮아있다.

의 청년노동자, 의 정의로운 경비대장(나중에 의적이 된다), 의 도적을 물리치는 청년지도자, 의 홍군과 연합해 마을을 지키는 장년지도자. 모두가 김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김염은 자신의 항일의식과 진보성, 민중성을 모두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시켜 연기했다. 생활과 사상을 반영한 김염의 연기는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웠고 관객은 그의 연기와 영화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항일, 그리고 진보적 영화를 위하여

집안 어른들, 형제들과 달리 그의 항일운동방식은 영화였다. 항일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공군비행사 시험에 응시했다가 불합격한 적이 있는 김염은 결국 영화를 통해 이 꿈을 이뤄냈다.

김염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사회현실을 보여주며 신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진보적인 사상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1933년 2월. 상해에서 중국전영문화협회가 설립되자, 전한선생의 지도를 받은 김염은 자신의 예술관이 그대로 드러난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배우는 자신의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힘써야 하고, 항일반제투쟁을 불러일으키는데 힘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손유감독, 오영강감독도 항일영화를 만들기 위해 김염과 많은 시간 토론을 하며 극본을 만들어 냈다.


그는 영화황제로서, 예술가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운동하고 스스로를 단련한 건강한 청년이었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뒤돌아서서 험담하지 않았다.

강직한 성격에 고지식하고 말이 없는 사람. 후배들은 영화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그런 사상과 인격, 그리고 고상한 정신세계를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하기에 오늘 13억 중국인과 중국영화계가 ‘영화황제’로 회고하는 김염은 배우를 넘어 ‘진보적인 예술가’인 것이다.



3. 중국영화 100년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지난 1995년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영화계가 선정한 대표적인 영화인들이 있다. 감독으로는 손유, 정군리 등이 뽑혔고, 여자배우로는 중국의 ‘전영황후’로 불리는 완영옥을 비롯해서 호접, 백양, 여리리, 왕인미, 진이 등이 이름에 올랐다.

그러면 남자배우는 어떨까. 조단, 유경, 한난군 등의 이름보다 맨 위에 있는 이름은 바로, 김염이다. 중국이 나라 잃은 조선출신 배우를 20세기 중국영화사상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중국영화계는 지금 중국영화역사 100주년 영화제 준비로 들떠있다.

관심은 중국을 빛낸 100편의 영화 중 3편이 될 김염의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는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토론중이라고 한다. 김염의 영화역사는 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다.


항일시대 진보주의자로서, 1930년대 상해영화를 이끌었던 진보적 영화예술가로서 김염은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냉전시기 김염은 이남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머니와 누이가 있는 이북에만 다녀가야 했다.

탈냉전시기이자 6.15통일시대인 오늘 더 이상 항일조선인이자 조국의 명예를 드높인 김염은 감추어진 역사일 수 없다. 4회 광주국제영화제가 그 기치에 맞게 ‘발견, 재발견’한 항일 영화황제 김염은 우리 영화계와 문화계, 우리 역사의 소중한 재보이다. 조국의 분단을 가슴아파하고 조국통일을 열렬히 염원했던 김염의 뜻이 그 부인 진이를 통해, 그 후손과 후배들을 통해 맥박친다.

내년 중국영화 100주년과 때를 같이하여 그의 영화들이 더 많이 그의 고향 서울에서 상영되기를 기대한다. 진보적인 영화시사 월간지 『COREA』도 이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corea_007?Redirect=Log&logNo=60028311296


--- --- ---

아래 김염의 부인 진이의 사진 몇장 올렸습니다.




어린시절의 진이.


젊은시절의 진이.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한국독립운동사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