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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일본군의 처절한 복수. 의사(義士) 윤봉길(尹奉吉)은 이렇게 총살됐다!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01.31|조회수1,40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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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射手)는 모두 8명이었다.

 

사형수(死刑囚)는 바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단원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오전 7시 20분, 40발의 총성(銃聲)이 울려퍼졌다.

 

일본의 교토에서 기차로 다섯시간. 이시가와현 가나자와시는 제2의 교토로 불린다. 전승기념비(戰勝紀念碑)가 즐비하게 들어선 노다산의 육군묘지 일대는 가나자와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동묘지이다. 

 

육군묘지 아래 길가에는 한 한국인의 무덤이 있다. 바로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가 암매장됐던 곳이다.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日反日示威運動), 그리고 1920년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끄는 항일독립군(抗日獨立軍)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승리와 더불어 한국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의 3대 쾌거로 평가되는 1932년 홍구공원투탄의거(虹口公園投彈義擧)의 주인공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

 

매주 이곳을 찾는 박인조씨는 스스로를 윤봉길 의사의 무덤 지킴이라고 한다. 무덤가를 청소하고 돌본 지 올해로 47년째. 스스로 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은 암매장된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는 발굴에 참여한 형의 얘기로 들은 발굴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이광훈 SBS-TV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윤봉길 의사의 유해 발굴 당시 머리는 어느 쪽으로 놓여 있었나요?"

 

박인조씨 "머리가 이쪽으로..."

 

이광훈 PD "그럼 머리가 그 모양 그대로...?"

 

박인조씨 "그렇습니다."

 

이광훈 PD "그렇다면 관은 이 밑에서 나왔겠죠?"

 

박인조씨 "예. 한 2미터 정도 아래였어요."

 

박인조씨의 방에는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자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신문 한장 서류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소중한 자료이다. 윤봉길 의사 관련 자료를 모으게 된 것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았던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마음 때문이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었던 박인조씨는 일본군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에 입대해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 참전하려 했었다. 출격을 앞두고 극적으로 전쟁이 종결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에게 윤봉길 의사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과 죽음에 대한 의미는 남달랐다. 당시 신문에서 윤봉길 의사 처형 장소가 찍힌 사진에 주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그 사진의 지형이 윤봉길 의사의 총살형(銃殺刑) 장소라고 믿고 있지만, 군사 지역이라 지금까지 확인해 보지 못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박인조씨와 함께 현장에 가보기로 했다.

 

이광훈 PD "가까이 가 볼 수는 있습니까?"

 

박인조씨 "육상자위대(陸上自衛隊) 관할 구역이라 못 가요."

 

현재 이곳은 일본 자위대 훈련 현장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넓은 잔디밭으로 다듬어진 이 곳은 총살현장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다.

 

윤봉길 의사가 총살당한 장소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식적으로 확인되거나 검증되지 않았다.

 

최근까지만 해도 윤봉길 의사 총살형에 관한 기록은 일본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문서였다. 우리는 방위성(防衛省)에서 윤봉길 의사 총살형에 관한 기록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만밀대일기(萬密大日記)는 1932년 만주일대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대한 보고서를 모아놓은 비밀문서이다. 윤봉길 의사 총살형 집행 전말 보고서가 있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총살형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 원문에는 처형되던 그 날 찍은 것으로 보이는 윤봉길 의사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보고서에서 눈길을 끄는 지도가 발견됐다. 육군 작업장 안에 있는 서북쪽 골짜기. 즉 사형장의 위치를 표시한 등고선 지도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총살형이 이루어진 육군 작업장내 서북쪽 골짜기는 어디일까? 우리는 그때 지형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지도를 자세히 검토했다.

 

1932년에 발행된 가나자와시 노다산 일대 등고선 지도에서도 이 일대 지형은 크게 변화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근에 노다산 일대를 촬영한 위성 사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실제 지형은 어떤 모습일까? 사형지(死刑地)인 노다산 일대는 지금도 군사시설이 남아 있어서 지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시 육군 작업장은 지금은 자위대 훈련장으로 쓰이고 있다. 훈련장을 중심으로 서북쪽 골짜기를 탐문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사형지는 훈련장 안쪽이 아니라 농경지 쪽 근처 계곡일 가능성이 높다. 주민들이 가르쳐 준 곳은 현재 노다산 안쪽 자위대 훈련장과 연결된 계곡이었다.

 

주민들의 증언과 지형은 거의 일치했다. 바로 자위대 훈련장 옆에 있는 계곡이다. 우리는 직접 현장을 찾았다.

 

방위성(防衛省) 소속임을 알 수 있는 표지석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생자나무 숲이다. 사형지 사진에서도 생자나무 숲이 드러나 있었다. 이 계곡 경사면 위쪽 너머가 자위대 훈련장이다.

 

우리는 도쿄 지리원(地理院)에서 확인한 사형지의 좌표를 바탕으로 위성 위치 시스템, 즉 일명 GPS를 바탕으로 사형지 위치를 확인하기로 했다.

 

이 일대에서 확인된 좌표는 북위 36도 31분 31.08초, 동경 136도 40분 17.20초. 도쿄 지리원에서 확인한 좌표와 거의 일치하다. 윤봉길 의사가 총살형을 당한 장소를 우리가 76년만에 처음으로 밝혀낸 것이다. 일본군은 총살형 장소를 포함해 왜 이렇게 윤봉길 의사의 최후를 철저하게 은폐했을까?

 

지난 1932년 4월 29일 일본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행사는 상해사변(上海事變)으로 승리감에 취해 있던 일본군(日本軍)이 전세계를 향해 그 위세를 과시하는 자리였다.

 

일본 군부의 고위급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기미가요[君が代]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기미가요가 끝날 무렵 단상 위로 날아온 폭탄이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단상에 있던 일본군 수뇌부는 일제히 폭탄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미추아키 타무라 호쿠리쿠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윤봉길을 악랄한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저항자, 즉 레지스탕스(resistance)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많은 강대국이 식민지 지배를 했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군사력에 의한 통치가 압도적으로 강했습니다. 그것은 경제·군사·정치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방에 헌병 정치를 실시했던 것입니다. 그런 지배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자주권을 갈망하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이 그 날 낸 호외에는 일본군의 피해가 자세히 실려 있다. 정확하게 단상 위에 떨어진 폭탄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모두 일본 정부의 수뇌들이었다. 이 때에 시라카와[白川義則] 육군 총사령관과 가와바다[河端貞次] 일본 거류민단 단장, 그리고 노무라[野村吉三郎] 해군 제3함대 제독, 시게미쓰[重光葵] 일본 공사 등이 현장에서 사상되었다. 

 

훗날 1945년 미주리호 선상에서 태평양전쟁 항복문서 조인에 일본 측 대표로 참석했던 시게미쓰 마모루. 1932년 중국 주재 공사였던 그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었다. 그가 한쪽 다리를 잃게 된 것은 1932년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였다.

 

신용하 이화여자대학 학술원 석좌교수 "윤봉길 의사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은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1932년에 10만 대병력으로 중국의 영토인 상해를 점령한 완전무장한 일본 군대의 경계망을 뚫고 수뇌부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로 테러가 아니라 대일(對日) 특공작전이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투탄의거(虹口公園投彈義擧)는 여전히 대부분의 일본인에게는 테러로 알려져 있다.  

 

르포 작가인 야마구치 다카시는 가나자와에서 대표적인 윤봉길 연구자이다. 직접 발로 뛰면서 찾아낸 기록을 바탕으로 윤봉길에 대한 글을 써 온 야마구치씨. 그는 윤봉길 의사가 체포된 다음 어떻게 됐는지 그 행적을 추적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저술한 윤봉길 관련 책 두권에서 일본군이 윤봉길을 군법회의에 회부한 사실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윤봉길은 군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홍구공원(虹口公園)은 작전지(作戰地)나 전장(戰場)도 아니었기 때문에 윤봉길이 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1932년 당시 일본의 군법회의 규정을 보면 육군 현역 재임자(단 아직 입영하지 않았거나 귀휴병을 제외), 소집 중 재향군인, 소집에 의해 부대에 있고 육군 군인의 근무에 복종하는 재향군인만이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체면을 잃은 일본군의 분노는 중국을 향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분한 감정을 윤봉길 개인에게 전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군은 증오의 대상인 윤봉길을 그들의 손으로 직접 처형하기 위해 군법회의에 집착했다.」

 

결국 윤봉길 의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일본인들은 일본 군국주의 정권이 아시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황제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신으로 모시는 전쟁신사이다. 이곳에서는 전쟁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광훈 PD "이곳에서 왜 매일 노래를 부르시나요?"

 

오쿠야마 태평양전쟁 참전자 "야스쿠니 신사는 3백만명 정도의 군인들의 영혼을 모시는 무덤이니까 그 넋을 기리기 위해..."

 

태평양전쟁 A급 전범 열네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은 물론,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참배객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특히 전쟁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돼 있는 유취관은 전쟁 학습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전시품이 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이었던 그의 마지막 유품. 홍구공원에서 그가 입고 있던 피 묻은 셔츠이다. 7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 셔츠는 그날의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홍구공원에서 중상을 입은 시라카와 대장은 곧바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일본 황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는 병상에 누워 있는 그의 쾌유를 바라며 남작 작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5월 26일 혼수상태에 빠진 시라카와 대장은 결국 숨을 거둔다.

 

시라카와 대장의 귀향은 화려했다. 1분에 한발씩 모두 17발의 총포(銃砲)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시라카와 대장의 사망을 애도하며 유례없는 대규모 장례식을 치르었다. 그의 시신은 도쿄시내 아오야마 묘지에 안치됐다.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일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낸 것이었다.

 

만주사변(滿洲事變)보다 세배나 많은 사상자를 낸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치르면서 일본군은 군사령관이 세번이나 경질되는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열강의 중재를 받아들여 정전협정을 체결해야 했던 일본군에게 상해사변은 패배나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의 충격만큼이나 일본 군부의 범인에 대한 증오는 컸다. 상해에서 철수하면 패배한 것 같은 모습이 될까봐 계속 파병을 하면서까지 상해에서 계속 버티려 했던 일본군의 체면을 산산이 깨버린 윤봉길에 대해 그들의 노여움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사건 당일 홍구공원(虹口公園)에는 매점을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참석자는 도시락과 물통을 준비하라는 공고가 있었다. 윤봉길의 폭탄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치밀하게 준비됐다.

 

우리는 일본 외무성(外務省)에 보관된 외무경찰사 자료에서 도시락 폭탄의 원리와 구조를 확인했다. 이 기록은 사건현장에서 증거품으로 입수한 도시락 폭탄을 직접분석한 보고서이다. 가로 16.4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 높이 4.5센티미터의 도시락 안에는 폭약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일본 외무성에서 확인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방과학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도시락 폭탄의 구조와 성능을 조사했다. 김현수 박사는 도시락 안에 들어있던 네모난 폭탄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냈다.  

 

김현수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위원 "이게 그 실물 형태로 재현한 모형인데 이미 만들어진 주철에다가 화약을 집어넣고 위장을 하기 위해 도시락으로 감싼 것으로 판단됩니다."

 

컴퓨터를 이용해 실제 크기대로 도시락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안에 폭발물을 넣은 이 폭탄은 당시 중국군 육군본부 군기처장이었던 김홍일(金弘壹) 장군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쇠덩어리 속에 구멍을 내서 그 안에 화약을 넣고 그 앞부분에는 발화장치를 장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폭탄의 무게만해도 무려 3.5킬로그램. 화약은 당시 중국에서 널리 사용됐던 TNT였다.

 

김현수 박사 "성냥에다 불을 긋는 것이랑 똑같은 원리로 보면 됩니다. 이 안에는 톱날 모양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바깥이 마찰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잡아당기면 마치 성냥에 불을 긋는 것처럼 발화지점에 불이 붙는 것이거든요."

 

도시락 밖으로 나와 있는 심지를 잡아당기면 에너지가 화약을 폭발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4초. 폭탄의 위력은 무쇠덩어리가 수백조각으로 깨져 나가기 때문에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홍구공원에서 터뜨린 물통 폭탄도 도시락 폭탄과 같이 무쇠덩어리로 제작된 특수폭탄이었다.

 

김현수 박사 "이 무쇠덩어리 안에서 TNT가 터지면 아마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 수류탄은 살상방면이 면적 20평방미터 정도는 되는데 당시 천장절 축하 단상이 면적 12평방미터이기 때문에 수류탄에서 터지는 화약보다 폭발력이 두배 정도 된다. 그러니까 이 폭탄이 터질 때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은 즉사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사건 직후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경찰은 배후 인물을 찾는다면서 조계지역을 집중 수색, 용의자 검거에 나섰다. 무고한 사람이 체포되자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홍구공원 폭탄 사건의 진실’이라는 글을 중국 신문에 기고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산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거사(擧事)였음을 만천하에 알린다. 이 글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에 찍은 사진도 공개됐다. ‘홍구공원 폭탄 사건’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임이 밝혀지면서 윤봉길 처형은 상해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김구를 체포한 이후로 미뤄졌다. 대신 김구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만밀대일기(萬密大日記)에 의하면 60만원이라는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김구에게 내걸린 것이다. 당시 노동자의 한달 월급은 불과 30원이었다.

 

우리는 요코하마 공문서관에서 홍구공원투탄의거(虹口公園投彈義擧) 이후에 작성된 윤봉길 의사 관련 비밀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거(義擧) 이후 한국인들의 동향과 독립운동 상황을 조사한 기록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중국 정부의 태도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금을 제공할 정도로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중국 중앙군 사령관인 장개석(蔣介石)은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할 일을 한 한국 청년이 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군은 윤봉길 의사의 가족에게도 위로금을 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헌병대의 문서에 따르면 이 위로금은 총독부에 압수돼 가족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검거되고 나서 윤봉길은 상해 헌병대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배후관계의 자백을 강요하며 쉴새없이 김구가 있는 장소를 캐물었다. 그러나 윤봉길은 입을 열지 않았고 김구는 체포를 피해 도망다녔다. 만약 김구를 체포했다면 임시정부의 수령을 체포했다는 대대적인 선전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김구를 체포하지 못한 채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상해 파견군 헌병대에는 일본으로의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의거 후 6개월이 지난 11월 18일 윤봉길은 대양함 선창원에 감금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본군은 왜 그를 뒤늦게 일본으로 압송한 것일까?

 

야마구치 다카시 르포 작가 "상하이에서 처형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바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 할 수 없었는가 하면 결국 제1차 상해사변에서 중국군이 쉽게 지지 않았어요. 이기지도 않았지만 지지도 않았어요. 이것은 아주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인들의 항일 의식이 아주 높았고, 거기서 만약 윤봉길을 상하이에서 처형했을 경우 중국인의 항일 의식에 불이 붙지 않을까 해서 굉장히 두려워했던 것이죠."

 

상해를 출발한 배가 도착한 곳은 고베였다. 윤봉길 의사를 태운 배는 고베항 와다곶 선착장에 정박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미쓰비시 조선소 안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야마구치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야마구치씨 "와다곶 선착장에 내릴 예정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왔었기 때문에 갑자기 포기하고 미쓰비시 조선소 안으로 들어갔던 거예요. 역시 배후에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그 조직이 윤봉길을 구출하러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죠. 그런 조직적인 배경 없이 단독으로 일을 결행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죠."

 

상해에서 고베로 옮겨진 윤봉길은 다시 오사카로 옮겨져 오사카의 위수형무소에 수감됐다. 오사카 형무소는 지금의 오사카성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기밀이라 그 때 오사카 형무소의 정확한 위치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당시 사진에서 형무소가 제4사단 사령부 바로 옆의 건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사카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고등학교 교사 츠카자키씨. 그 역시 오사카에서 윤봉길 의사의 행적을 쫓고 있다.

 

츠카자키 마사유키 고등학교 교사 "윤봉길을 일본으로 이송하고 나서 삼엄한 경계를 했는데 보도진, 그리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빼앗기면 안 되기 때문에 멀리 뒤로 돌아서 갔어요. 원래 형무소는 정문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지만 빙 돌아서 뒤로 들어갔어요. 평소 절대 열어놓지 않는 뒷문인데 열어놓지 않는 뒷문으로 들어갔으니까 그 정도로 윤봉길을 경계했던 거예요."

 

지금은 형무소 자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신사가 들어서 있다. 이 신사는 1961년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신사가 들어서기 전 이 일대는 제4사단 사령부 자리로 이 안에 형무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츠카자키 교사 "이 신사 정문 뒤에 형무소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형무소라는 것은 비밀사항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도면이 없어 이 부근에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 당시 형무소의 규모도 알려져 있지 않고, 사진도 거의 없다."

 

거대한 요새를 방불케하는 오사카 성 안에 있던 형무소는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11월말 찬바람이 몰아치는 오사카 형무소에 인계된 다음 윤봉길 의사는 중앙동사 독방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곳에서 28일간 수감생활을 한다.

 

“슬프다. 내 고향아. 자유의 백성 몰아 지옥 보내고 푸른 풀 붉은 흙엔 백골만 남네. 고향아, 네 운명이 내가 어렸을 때는 쾌락한 봄동산이었고 자유의 노래 터였네. 지금의 고향은 귀 막힌 벙어리만 남아 답답하기 짝이 없구나. 동포야, 네 목엔 칼이 씌우고 입과 눈엔 튼튼한 쇠가 잠겼네. 고향아, 옛날의 자유와 쾌락이 이제는 어데 있는가?”

 

1932년 12월 18일 오전 6시 25분.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윤봉길 의사는 죄수복 대신 양복으로 갈아입고 사복 헌병에 의해 호송돼 감옥을 나섰다. 목적지는 가나자와였다. 그러나 헌병들은 가나자와를 지나쳐 모리모토역에 내린 다음 미리 대기해 놓은 자동차로 극비리에 압송한다. 사형전말보고서는 신문 기자 및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불온 책동을 막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적고 있다.

 

오후 5시 5분 치밀한 작전 끝에 도착한 곳은 가나자와 성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우두머리 가신으로 최대 부호였던 마에다가 집권했던 가나자와는 예로부터 일본 무사의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일본 육군 9사단 사령부가 있던 이곳은 당시 일본군의 거점 도시였다. 윤봉길 의사를 오사카에서 이곳 가나자와로 데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츠카자키 교사 "원래는 윤봉길을 오사카에서 사형시킬 예정이었지만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단체가 많았고 그 중심 멤버가 대개 조선인들이었어요. 그래서 오사카에서 처형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해서 가나자와로 옮긴 거예요."

 

상해에서 오사카로, 다시 가나자와로 사형 집행 계획은 계속 변경되면서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야마구치씨 "개인 테러리즘이 아니라 조직적인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두려워했던 거예요. 배후에 김구가 아직 살아 있고 독립운동 세력은 무너지지 않고 또한 이것은 일본 경찰이 조사했더니 도시락 폭탄을 많이 팔았다는 것이 판명된 거예요. 일본내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몰래 했던 거지요."

 

윤봉길 의사가 수감돼 있던 가나자와 구금소는 가나자와 성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나자와 대학교의 체육관 건물로 쓰이다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여기서 머문 것은 단 하룻밤이었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6시 30분.

 

새벽 공기를 가르며 자동차 몇 대가 구금소를 떠났다. 7시 15분에 도착한 곳은 육군 작업장 안에 마련된 사형장이었다. 사형집행이 끝난 다음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각 기관에는 사형을 무사히 마쳤다는 전문이 발송됐다. 그 후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광복 이후인 1946년. 유해는 관 속에 같이 묻혀있던 몇몇 유품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 있는 충의사에는 사형 당시 몸을 묶었다는 말목이 전시돼 있다.

 

유해 발굴 때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발굴에 참여한 박동조씨는 이 말목이 그 때 나온 것이 아니라고 털어놓았다.

 

박동조씨 "형틀... 이건 내가 본 게 아닌데... 그러니까 6·25사변 때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본 것과 많이 틀리죠.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지금도 파묻어서 한 10년 있어 보면 얼마나 썩었는지 알 거예요."

 

우리는 발굴 때 찍은 사진 속의 말목과 현재 전시된 말목을 비교한 결과 밑둥 부분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 양재동의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있는 윤봉길 의사 동상도 논란이 일고 있다. 신문 사진을 근거로 만든 동상은 의거(義擧) 때 윤봉길 의사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이 흉상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 호외에 실린 사진을 본따서 만들었다.

 

「범인은 밝은 회색 양복을 입고 쥐색의 중절모를 쓴 25~26세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신문기사는 사진과 전혀 다르다. 기사와 달리 호외에 실린 사진 속의 인물은 양복이 아니라 트랜치코트를 입고 있다. 현장에서 직접 범인을 체포했던 고모토 하사관도 범인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신문들도 서장 소년, 즉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고 보도했다.

 

한 외신보도를 보면 윤봉길 의사는 헌병들에게 피체된 이후 걸어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공포에 떨던 군중이 분노하는 가운데 스물다섯살의 윤봉길은 일본군에 의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된 그는 질질 끌려다가시피 일본군 사령부로 이송됐다.」

 

사진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오사카 아사히 신문 본사를 찾았다. 호외로 발행된 그 날의 신문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에서도 복사조차 안 되는 귀중본이었다. 신문사 관계자는 호외 원본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이 사진이 특종 사진임을 강조했지만 기사 내용이 사진과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아사히 신문사 관계자 "양복 입은 범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만약 코트였다면 속에 양복을 입었을 것으로 표현했을 것 같은데 그건 우리도 의문을 가지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표현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중요한 사건에 들어간 특종 사진이라면서도 사진의 진위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대신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내부적으로 진상조사를 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아사히 신문사 관계자 "취재를 요청하셨기 때문에 이 사진이 어떻게 5월 1일 호외로 배포되었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사건 발생은 4월 29일, 우리 기록으로는 오전 11시 40분경입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조금 전 오다 우노스케 기자. 여기서 사진을 촬영하게 되는데요. 이것은 오다 본인이 촬영을 했는지 아니면 동행했던 사진 기자가 촬영을 했는지 그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오다 본인이 촬영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계속해서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런 점에서 우리도 앞으로 이런 형태로 기사를 써서 계속해서 검증해나갈 예정입니다."

 

사진을 찍은 기자가 누구인지도 확인할 수 없는 이 사진은 윤봉길 의사가 체포될 때의 모습으로 지금까지도 왜곡되어 알려지고 있다.

 

지난 5월 윤봉길 의사가 순국(殉國)했던 총살(銃殺) 현장을 윤봉길 의사의 직계 손자인 윤주웅(38)씨가 찾았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홍구공원투탄의거(虹口公園投彈義擧) 이후 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윤주웅씨의 아버지는 평생 윤봉길 의사를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이 자리가 그에게는 더 각별하다.

 

윤주웅씨 "산 아래에서는 별로 이 자리라고 느낌이 오지 않았었는데 더 찾아보다가 이 자리에 오면서 GPS가 약간의 오차가 있겠지만 GPS를 크게 고려한 건 아니었어요. 와서 보니까 딱 이 자리에 오니까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저를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총살의 흔적은 섬뜩할 정도로 생경하다. 총살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윤봉길 총살에 사용된 총기(銃器)가 어떤 기종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김낙진 전쟁기념관 학예연구원 "그때는 윤봉길 의사가 1932년에 순국하셨는데 당시는 38식 소총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1905년에 러일전쟁이 끝나고 나서 개발된 총기가 38식 소총인데 그것이 191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해서 그것이 개량된 49식 소총이 나온 것이 1939년이니까 그 이전에는 38식 소총이 전 일본 육군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38식 소총의 위력은 1초에 7백 60미터, 명중률이 높은 총기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마에 탄흔을 남길 수 있는 것일까?

 

김낙진 연구원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가 흘러나오고 번지는데 쏘고 나서 바로 찍은 사진이라고 생각됩니다. 총을 쏘자마자 바로 기록을 남겨놓은 사진 같습니다."

 

사진에서 보여지는 총상(銃傷)의 흔적은 이마 한 군데뿐, 총을 단 한발 맞은 것처럼 보인다. 사형 전말 보고서에도 정사수가 쏜 탄환 한발이 미간에 정확히 명중했다고만 적혀 있다. 그러나 취재 중 다른 주장이 제기됐다.

 

박동조씨 "총 쏘는 소리가 아주 많이 났다고 그러더라구. 그 날 재일교포 가운데 윤씨라는 사람이 있었다구. 그 사람이 총 쏘는 소리가 날 때 수십번 나서 가봤는데 일본 사람에게 몇 발 쐈느냐고 물어봤다구. 총 쏘는 소리는 많이 났는데 딱 한발밖에 쐈다고 그러더라구."

 

윤봉길 총살 때 상황에 대한 의혹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가나자와의 한 신문사에 몸담았고 2005년에 작고한 오토 고우 호로리쿠 신문 기자는 윤봉길 의사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사형 과정을 직접 취재했다고 한다. 오토 기자가 살아있을때 그를 직접 만난 야마구치씨는 오토 기자의 취재 메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메모에 따르면 사수는 모두 여덟명. 이들에게 모두 지급된 열발의 실탄과 삼십발의 공포탄, 그 중에서 최소한 세발의 총탄이 윤봉길 의사의 미간과 머리 부분에 맞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야마구치씨 "근처 미츠코지 마을 사람이 노인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윤봉길은 겸허하고 의지가 강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모습은 초라했지만 군인과 대등하게 말했고, 군인도 정중하게 다루었고, 성품이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증언을 오토씨가 듣고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일본의 군인들은 그를 증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오히려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에 그를 존경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의거(義擧) 후 사형을 기다리며 살아야했던 235일. 윤봉길 의사는 낯선 이국(異國) 땅에서 홀로 최후를 맞았다.

 

다음날 일본의 모든 신문에서는 그의 사형 소식과 함께 사체가 화장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14년 후 그의 시신은 사형장에서 멀지 않은 육군묘지 앞 길가에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지난 4월 윤봉길 의사 암매장 현장에서는 한식일을 맞아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제사를 올렸다. 이 자리에는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 때 직접 참여했던 팔순의 박기동옹도 함께 했다. 그는 지금도 암매장 현장을 발견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박기동옹 "아무리 찾아다녀도 없었어. 그래서 여기 집 지키는 일본 사람을 잡아 구타해서 문을 부숴버렸어. 그러니까 겁을 내면서 저기 아닌가? 하더라고. 그러면서 도망쳤어. 그리고 땅을 파보니까 처음에 구두가 하나 나오더라고. 여기다! 하고 소리치며 모두 모여들었지. 모두 울었어."

 

일본군이 시신을 사형지(死刑地)가 아닌 다른 곳에 암매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육군 공동묘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는 곳을 선택한 것은 시신마저 감시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야마구치씨 "총살한 장소에서는 감시할 수 없습니다. 넓은 곳에 아무도 없고 농민들 뿐이죠. 이곳에 묻으면 잘 감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계단 아래에 사람을 묻는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숨기기에 아주 좋은 장소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죽은 후에도 일제(日帝)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일본이 철저하게 숨겨온 윤봉길 의사의 사형과 순국. 그 가운데 잊혀졌던 것은 스물다섯살 청년 윤봉길의 짧은 삶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감추려는 또 하나의 범죄였다.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兵丁) 모순(募純)·담(潭)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朝鮮)을 위해 용감한 투사(鬪士)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넣으라. 그리고 너희는 아버지가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成功)하기를. 동서양(東西洋) 역사상 보건대 동양에는 문학가(文學家)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에는 불란서국(佛蘭西國)의 혁명운동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美國)의 발명가(發明家)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 친필 유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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