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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1945년 광복군이 한반도 탈환을 위한 작전계획 및 사진자료입니다.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02.10|조회수117 목록 댓글 0

예전에 어떤분이 자료를 찾으셨던것 같은데...

어느 게시판인지 몰라서 자료를 올려드립니다.

 

1945년 8월 16~20일 사이 만주와 한반도 내에서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하고자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8월 15일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면서 무조건 항복을 했기 때문에 미군이 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후 모든 광복군들은 민간이 자격으로만 대한민국 땅을 밟을 수 있었죠...

 

만약 원폭 투하가 1주일만 늦었더라면, 아니면 원폭 투하가 된 후 몇일만 일본이 더 버텼다면, 우리나라가 남북한이

갈리는 일이 없을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독립운동사와 근대사를 풀어가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라 생각되어 글과 자료를 올립니다.

사이버의병 파이팅!!!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흡수한 광복군(光復軍)은 초모 훈련 작전등 여러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세계대전 정세도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의 군사계획도 중국(中國) 뿐만 아니라 다른 연합국과의 제휴내지 공동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즉 1943년(年) 10월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의 이청천(李靑天), 김약산(金若山), 이복원(李復源)등은 새로운 군사정책에 관한 건의안을 작성하여 제35차 임시의정원회의에 제출 통과된바, 그 주요 내용은 중(中)·영(英) 미(美)·소(蘇)등 연합강대국들에게도 군수(軍需) 및 경비(經費)등의 차관을 계획하고 또 각종 특수 군사 교육에 관한 문제로 교섭한다는 것이다.103)
  그리고 이어 1944년 4월 정부에서는 13개 항목의 군무부(軍務部) 공작계획대강(工作計劃大綱)을 작성 실천케 한바 그중에는 공작원을 동맹국 각 전선(戰線)에 파견하여 동맹국 군사당국과의 배합작전을 취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며 한편으로 동맹국의 협조로 새로운 군사지식, 군사기술을 연구, 습득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또 1945년 봄부터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에서는 국제전투의 변동에 따라 「한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고 영구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의 전체 한국 동포를 동원 광복군을 확대 조직하며, 속히 동맹국과 배합작전하여 일본제국을 격멸하되 중(中)·미(美) 양국과 각별 협상하여 동의를 얻어 축차 실시함」을 방침으로 하는 계획을 마련한바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미국기술인원을 초빙 또는 미국기재(器材)의 협조를 얻어 특수훈련을 실시하고 그들을 한국과 적군점령의 적후방(敵後方)에 파견하여 지하군의 조직과 정보 및 모략공작의 진행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 태평양(太平洋) 방면에 한국광복군파견대사령부 설치, 중국경내 및 태평양지구에 각각 한국광복군 비행대를 설치하고 각지에 대한 연락 운수와 맹방(盟邦)공군과의 배합작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104)
  뿐만아니라 「한국현단계 공군건설 개시공작을 미군과 합작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의 이러한 계획은 점차 실천단계로 옮겨졌다. 한(韓)·미합작(美合作)군사행동계획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즉 1943년 봄 위원부에서는 장기영(張基永), 장석윤(張錫潤), 조종익(趙鍾翊), 파터김(金)등 청년들을 미국정보전략처(美國情報戰略處)(Office of Strategic Service, 약칭 O.S.S)에 추천하여 정보, 통신등 특수교육을 받게 하였으며 교육훈련이 끝난 후에는 버마전선에 배치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이는 태평양 전쟁후 한(韓) · 미합작(美合作) 특수훈련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105) 한편 이무렵 중경(重慶)에서 임정(臨政)의 외무부(外務部) 및 선전위원회 요직에 있으면서 대외관계에 활약하던 안원생(安原生)이 미국 대사관 및 군사지도자들과 긴밀한 활동을 하는 중 1943년(年) 2월(月) 김구(金九)주석은 중국주재 미군공군사령부의 정보장교인 윔스(Clarence B Weems)를 연화지(蓮花地)에 있는 임정청사(臨政廳舍)에서 맞이하여 한(韓) · 미군사합작(美軍事合作)에 대한 토의를 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한(韓)·미합작(美合作)의 제 1차 계획으로 정보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 한(韓)·미합작(美合作)의 특수 훈련계획이 추진되었다. 즉 제 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은 중국(中國) 곤명(昆明)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美國) 제14항공대 간부 쉬노우더(진납덕(陣納德))와 접촉을 가진바 있었고 1944년 가을에는 중경(重慶)에서 주중미군사영관(駐中美軍司令官)으로 연합군중국전구부사령관(聯合軍中國戰區副司令官)인 웨드마이어 중장을 만나 광복군(光復軍)의 작전계획과 한(韓)·미합작(美合作)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여, 이는 순차적으로 합의를 보고 실천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1944년 12월경 제14항공대에서 서전트(Clyde B. Sargent)와 정운수(鄭雲樹)를 파견하여 중경(重慶)에서 임정요인(臨政要人)들과 면담하고 제 1.2지대 본부를 방문, 광복군의 실정을 파악하며 지대장들의 의견을 들어 일을 구체화하였다.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은 김우전(金祐銓), 버치 (John M. Berch)와 2월 18일 임천(臨泉)을 출발 3월 12일 곤명(昆明)에 도착 13일 미(美) 제14항공단사령관 첸놀트(Claire Lee chennault)장군과 면담 한(韓)·미공동작전(美共同作戰)에 관한 계획을 설명한 결과 15일 아래와 같이 한(韓) ·미군사합작계획(美軍事合作計劃)은 물론 세부계획과 구체적인 실시 방안까지도 합의를 보게 되었다.

  <한(韓) ·미군사합작합의사항(美軍事合作合議事項)>
① 한·미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② 한국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기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작전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한다.
③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기재 및 군수물자를 한국광복군에게 공급한다.
④ 미군은 한국광복군에게 육 ·해 ·공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⑤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⑥ 합의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106)

  김학규(金學奎)일행은 3월 16일 중경으로 가 임정(臨政) 및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고위층에 그 경위를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한편 총사령부는 중국군사위원장 장개석(蔣介石)의 동의를 얻게 되었으며 서안(西安)과 부양(阜陽)에 한 ·미 군사합작을 위한 광복군 OSS훈련소 설치승인이 나온 것은 6월경이었다.
  그 사이 3월 25일자로 인도(印度) OSS의 윔스 대위가 중국(中國) OSS본부로 전속되었으며 3월 30일 윔스는 버치와 함께 임시정부의 김구(金九)주석과 이청천(李靑天) 총사령을 방문하고 합의사항 결정에 대한 재가와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내(中國內) OSS 본부(本部)에도 한국 담당부서가 신설되고 윔스대위가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5월에도 한국계(韓國系)미국인 정운수(鄭雲樹)와 이순용(李淳鎔)이 인도(印度)에서 전속되어 왔다. 이때 임정(臨政)과 광복군(光復軍) 총사령부(總司令部)에게로 한(韓)·미군사합동작전(美軍事合同作戰) 특히 무전훈련을 제 3지대에서 뿐만아니라 제 2지대에서도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4월 5일 이범석(李範奭) 제 2지대 대장이 중경에 비래하여 확정을 지었다.
  이와같이 한(韓)·미군합작(美軍合作) 교섭에 성과를 올린 김학규(金學奎)지대장은 부양(阜陽)으로 돌아왔고 김우전(金祐銓)은 광복군 연락장교로 곤명(昆明) OSS본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부양(阜陽)에 도착한 김학규(金學奎)는 곧 OSS훈련생 선발에 착수 엄도해(嚴道海)(총책임자) 윤영무(尹永茂)(훈련대장)등 22명을 OSS훈련 적격자로 선발하였다.
107)
  이들 22명과 연락장교 김군남(金君南)·조병팔(趙炳八)이 동행(同行) 1945년 6월초 부양(阜陽)을 출발한 일행은 6일만에 입황(立煌) 부근의 훈련소 막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여기에서 미군복(美軍服)과 미군용(美軍用)보급품을 지급 받았다. 훈련(訓練)기간은 3개월, 교관(敎官)은 윔스대위, 마아틴, 트르먼상사등 특전단 요원이었다.
  그리고 OSS교육훈련의 주요 내용은 ① 정보에 관하여는 정보학(情報學)을 중심으로 독도법(讀圖法) 첩보의 수집 분석 평가로부터 지형 기상의 판단방법과 선전 비라 작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고, ② 파괴 폭파에 관하여는 각종 폭발물취급에 대한 기술을 터득함에 있었다. ③ 무전 통신에 대하여는 실제의 송수신 방법을 비롯하여 무전기 조작법(操作法) 및 암호문해독(暗號文解讀)등에 있었고, ④ 유격전술에 대하여는 개별 또는 집단적인 행동을 취하는 경우에 적응하는 권총사격, 수류탄 투척, 암살용 무기 사용, 도피훈련, 야간습격, 요인납치, 민중선동파업, 쿠데타등에 대한 기능을 실습으로 터득하는 데 있었다.
  당시 광복군의 목표는OSS훈련이 끝나는 즉시 국내에 정진(挺進)하여 우리의 힘으로 왜적을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다.
  이에 앞선 1945년 2월 28일 임정(臨政)은 또 대독선전포고(對獨宣戰布告)를 하였다. 「독(獨)·일(日) 축심(軸心)국가가 인방(隣邦)의 독립과 자유를 파괴하며 화평질서를 교란하였다. 태평양전쟁 개전일에 본정부는 거듭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며 또 축심국과반(軸心國 伴)의 죄악을 책하였다. 본정부는 연합국과의 최후 승리와 원동 및 세계의 화평과 안전을 촉진키 위하여 독일 히틀러 정부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함」
108)이라 하여 독일(獨逸)에 선전을 포고하는 한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광복군 9개항 행동준승」의 폐기에 성공하여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統帥權)을 중국측(中國側)이 인정하면서 쌍방이 상호협의 군사활동을 전개할 것을 규정한 새 군사협정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관한 한(韓) · 중우방상정판법(中雨方商定辦法)」을 4월 4일(1945) 체결하였던 것이다.
  7월 26일 에는 대일(對日)「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러는 중 8월초에는 3개월 과정의 특수훈련도 끝낸 광복군(光復軍)은 미국과 국내 진입에 대한 구체적 계획의 합의를 보게 되었다.
  8월 7일 김구(金九) 주석(主席)과 이청천(李菁天) 총사령(總司令)이 서안(西安) 제 2지대 본부로 가서 이범석(李範奭) 지대장과 함께 미국측(美國側) 대표인 곤명(昆明)미국 전략첩보대 본부 지휘관 도나반(소장) ·두곡(杜曲)지구주둔대장 서젠트(소령) 등과 함께 「한 ·미 양국간의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 공작의 전개」를 약정하여 한미 합작 특수훈련 대원들의 국내진입 작전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l09)
  그리하여 8월 상순(?) 제 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挺進軍)을 편성하여 국내진입을 준비하였다. 즉 국내를 3개 지구로 나누어 제 1지구 (평안·황해·경기도) 대장에 안춘생(安椿生), 제 2지구(충청·전라도) 대장에 노태준(盧泰俊), 제 3지구(함경 ·강원 ·경상도)대장에 노복선(盧福善)을 임명하였다. 그 편성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110)

총지휘 : 이범석(李範奭)
부 관 : 김성근(金星根)
제 1 지구대장 : 안춘생(安椿生)
제 2 지구대장 : 노태준(盧泰俊)
줴 3 지구대장 : 노복선(盧福善)
본부요원 이재현(李在賢) · 민영수(閔泳秀) · 김석동(金奭東) · 이윤장(李允章) · 강일성(江一成) ·
오건(吳建) · 최철(崔鐵) · 한경수(韓景洙) · 김동걸(金東傑)
     제 1 지 구
평안도반 반장 : 강정선(康楨善)
   1조 : 장덕기(張德祺) · 계의성(桂義成) · 장철(張鐵)
   2조 : 김용(金湧) · 이지홍(李志鴻) 이우경(李宇卿)
   3조 : 김중호(金仲浩) · 전성윤(田成胤) · 선우기(鮮于基)
   4조 : 김영호(金榮鎬) · 박명광(朴明光) · 안국보(安國寶)
황해도반 반장 : 송면수(宋冕秀)
   1조 : 노성조(盧星燥) · 황삼룡(黃三龍) · 이동환(李東煥)
   2조 : 홍기화(洪基華) · 신덕영(申悳泳) · 석호문(石鎬文)
   3조 : 이우성(李宇成) · 허봉석(許鳳錫) 송수일(宋秀一)
경기도반 반장 : 송준하(宋俊河)
   1조 : 이준승(李濬承) · 이명(李明) · 박수덕(朴樹德)
   2조 : 송창석(宋昌錫) · 정정산(鄭正山) · 최문식(崔文植)
   3조 : 김유길(金柔吉) · 오서희(吳庶熙) · 이순승(李淳承)
     제 2 지 구
충청도 반장 : 정일명(鄭一明)
   1 조 : 이덕산(李德山) · 박영섭(朴永燮) · 김욱배(金旭培)
   2 조 : 장재민(張在敏) · 박재화(朴載華) · 송석형(宋錫亨)
   3 조 : 윤치원(尹致源) · 윤태동(尹泰銅) · 김세용(金世用)
전라도반 반장 :박 훈(朴 勳)
   1 조 : 노능서(魯能瑞) · 신국빈(申國彬) · 김상을(金商乙)
   2 조 : 이정선(李正善) · 장두성(張斗星) · 백준기(白俊基)
   3 조 : 임재남(林裁南) · 한종원(韓宗元) · 박금장(朴金章)
     제 3 지 구
함경도반 반장 : 김용주(金容珠)
   1 조 : 석근영(石根永) · 태륜기(太倫基) · 이욱승(李旭昇)
   2 조 : 최봉상(崔鳳祥) · 김덕원(金德元) · 김광옥(金光玉)
강원도반 반장 : 김준엽(金俊燁)
   1 조 : 이계현(李啓玄) · 임정근(林正根) · 이준명(李俊明)
   2 조 : 고철호(高澈浩) · 홍재원(洪在源) · 김성갑(金成甲)
   3 조 : 김춘정(金春鼎) · 동방석(董邦石) · 이호길(李浩吉)
경상도반 반장 : 허영일(許永一)
   1 조 : 김성환(金聖煥) · 구자민(具滋民) · 이동학(李東學)
   2 조 : 유덕량(劉德亮) · 이지성(李志成) · 윤재현(尹在賢)
   3 조 : 이종무(李鍾鵡) · 이건림(李健林) · 이운학(李雲鶴)

  이들은 8월 20일 안으로 함경도로부터 남해(南海)에까지 잠입하게 되어 있었다.111)
그러나 적의 항복이 예상외로 빨랐다. 미군의 일본(日本)본토에 대한 원자폭탄투하로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진입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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