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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활동

[스크랩] 노블레스 오블리주 1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04.04|조회수295 목록 댓글 0


1. 220년 내려온 구례 유씨 '운조루'
"가난한 사람 퍼가시오" 자선 쌀 뒤주 마련

 

한국사회에 부자는 있지만 귀족이 없다.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귀족, 제대로 된 상류층의 부재가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이다.

존경받는 계층이 없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자 병든 사회이다. 근세 이전의 한국 사회는 이렇지 않았다. 아무리 재산을 늘리려 해도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 않았고 파장에는 물건을 사지 않는 금도가 있었다.

지조와 의리를 꺾으면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집안이 있었다. 청렴, 강직, 기개, 남에 대한 배려, 예의...
전통사회의 명문가들이 지녔던 이같은 선비정신,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책임)의 회복이 시급하다. 이젠 부(富)와 귀(貴)를 맞트레이드해야 할 때다.
"젊었을 때는 설악산이 좋고, 나이 먹어서는 지리산이 좋다"는 말이 있다. 설악산의 호쾌한 암벽들은 루틴한 일상에 지친 봉급쟁이들의 정신을 번쩍 나게 만든다. 반대로 지리산은 사람을 훈훈하게 감싸고 어떤 허물이라도 용서해 줄 것처럼 후덕한 육산(肉山)이다. 쉬지않고 3천리를 달려 오던 백두대간이 숨을 멈추고 결국(結局)을 이룬 지리산.

그 지리산의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은빛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임수(臨水) 삼아 류씨 집안의 고택 운조루(雲鳥樓)는 자리잡고 있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그 호방한 품격만큼 이름도 낭만적이다. 그러나 이 집에 바로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수(精髓),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에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집이다. 99간의 대저택이었던 이곳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 지점에 곳간 채가 있고, 그 곳간 채에 지금도 쌀뒤주가 하나 놓여져 있다.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뒤주라서 네모지지 않고 둥그런 원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뒤주의 특이한 장치는 하단부에 가로 5센티 세로 10센티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뒤주는 누구라도 와서 쌀을 마음대로 퍼갈 수 있는 뒤주인 것이다. 류씨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다. 보통 가난한 동네사람들이 주 대상이었고, 그 외에도 운조루를 찾아오는 지리산 일대의 과객들도 조금씩 쌀을 가져가곤 하였다. 그런데 왜 주인이 직접 쌀을 주지 않고 이처럼 곳간 채에 별도로 뒤주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가져가도록 했을까? 이 집 후손인 류응교 교수(60·전북대)는 자존심을 배려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주인에게 직접 쌀을 받아 가면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곳간 채에 설치한 쌀뒤주는 주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쌀을 가져갈 수가 있다. 아름다운 마음씨는 이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법이다. 이 쌀뒤주에는 쌀이 약 2가마 반이 들어간다고 한다. 상당히 큰 뒤주이다. 뒤주 하단부의 타인능해 마개는 옆으로 돌리게 되어 있다. 마개를 옆으로 돌리면 쌀이 나온다.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보통 1~ 2되 분량이었다고 한다.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5~6되씩 몽땅 가져가는 양심불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가난하긴 하였지만 불문율과 염치가 살아 있는 사회였다. 운조루에서 지은 논농사가 2만평, 연평균 200가마를 수확했는데 쌀 뒤주에 들어간 쌀이 1년 36가마 분량이었으니 유씨 집안은 1년 소출의 약 20%를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로 쓴 셈이다.
이 집안에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사헌부감찰과 상주목사를 지낸 바 있는 류억(柳億: 1796-1852)가 어느 날 집안 곳간 채에 놓여 있는 쌀뒤주를 살펴보니 뒤주에 아직 쌀이 남아 있었다. 즉시 며느리를 불렀다. "왜 이렇게 많은 쌀이 남아 있단 말이냐? 우리 집안에서 그만큼 덕을 베풀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냐. 당장에 이 쌀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 줘라. 항상 그믐날(월말)에는 뒤주에 쌀이 없도록 해라!" 운조루에 남아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또 한가지 유물은 굴뚝이다. 이 집은 다른 집에 비해서 굴뚝이 아주 낮게 설치되어 있다. 1미터 높이도 안된다. 건축적으로 볼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술술 잘 빠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낮게 설치한 이유는 밥하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쫄쫄 밥 굶고 있는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펑펑 올라가는 굴뚝 연기를 보면 자연히 증오와 질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운조루의 나즈막한 굴뚝을 보면서 조선의 선비정신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동학과, 여순반란사건, 6.25의 한 가운데인 지리산에 있었으면서도 운조루가 불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운조루에 경치를 감상하는 루(樓)마루가 3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 사랑채에는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루가 있었고, 아랫 사랑채에는 아버지, 그리고 오른쪽의 안 사랑채에는 할머니와 여자들이 사용하던 루가 있었다.한 집에 3개의 루(樓)를 설치한 경우는 전통 고택에선 좀처럼 찾아 볼 수없다. 뛰어난 경관을 남자들이 독점하지않고, 여성들도 골고루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은 운조루의 가장 큰 미덕이다.

운조루에 루마루가 많았던 것은 주변 산세가 엮어내는 전망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운조루 전망의 핵심은 고택 앞으로 파노마라처럼 펼쳐지는 안산이다. 안산의 숨은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서 풍수지식이 필요하다. 먼저 둥그런 바가지 5개를 엎어놓은 형태인 오봉산이 바로 앞에 엎드려 있고, 그 뒤로는 수, 화,목, 금, 토 오행의 모습이 모두 갖춰진 관모산(冠帽山)이 도열해 있다. 하늘에도 오행이 있지만 땅에도 오행이 있음을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안산이다. 전망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위치가 일단 높고 앞이 시원하게 트인 전망대가 있어야 한다. 전통고택의 루가 바로 그러한 용도이다. 자세히 보면 운조루의 기단은 다른 집에 비해서 1m 가량 높다. 주변의 웅장한 전망을 감상하기 위해서 높인 것으로 보인다.


2. 숙종때 윤증의 '열린 사고'
"지역차별하는 정권 참여못해" 20번 공직 거절


中人신분도 제자로 맞아 재야서 지도자교육 전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 충남 논산의 윤증 고택. '논어'도 좋지만 '맹자'도 또한 맛이 있다. '논어'가 한일관 설렁탕처럼 담백한 뒷맛이 남는다면, '맹자'는 목포집 홍탁처럼 입천장을 시원하게 해주는 맛이 있다. '맹자' 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達則兼善天下하고 窮則獨善其身한다'라는 대목이 바로 그 맛이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세상에 나가 좋을 일을 해보지만, 궁할 때는 홀로 도닦는데 힘쓴다는 정신은 조선 선비들의 진퇴관(進退觀)이었다. 특히 '궁즉독선기신'은 궁색한 처지로 몰렸을 때에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잃지 않게 해주는 '문자보약'과도 같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명제 윤증(明齋 尹拯·1629~1714) 고택을 찾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 정신과 품위가 보고 싶기 때문이다. 계룡산에서 고만고만하게 내려온 금체 형태의 산봉우리들이 소담스럽게 내려온 노성산. 그 노성산 자락의 양명한 터에 윤증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산세는 부드러운 곳에 자리잡았지만, 이 집에 살았던 인물은 세상이 아무리 불러도 나가지 않았던 강골의 선비였다. 윤증은 평생동안 조정으로부터 20번이 넘는 벼슬을 제의 받았다.
대개의 경우 2~3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나가주는 것이 상례이다. 윤증은 달랐다. 말년에는 임금인 숙종이 직접 정 1품 우의정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았다. 조선 선비 중 임금이 당사자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정승 자리를 제수한 경우는 윤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는 끝까지 벼슬을 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행을 닦는 처사로서 일생을 마쳤다. 윤증이 그처럼 벼슬자리를 거부한 이유는 당대의 '메인 스트림'(mainstream)을 대표하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우암으로 대표되는 노론 중심의 정치체제를 거부한 윤증은 노론의 전횡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그는 일생에 딱 한번 벼슬을 하려고 서울 근교의 과천까지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벼슬을 하는데 있어서 전제조건이 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 소외받던 영남의 남인들을 포용할 수 있는 내각구성을 하면, 조정에 입각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즉 지역차별이 해결되지 않으면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였다. 당시는 영남의 남인들이 기호지방의 노론들에게 밀려 심각한 지역차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윤증은 당대의 논객이라 할 수 있는 박세채(朴世采)와 과천에서 이 문제를 밤새도록 토론한 끝에, 이 전제조건이 실현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결연하게 벼슬을 포기해 버린다.
그는 정녕 명분에 맞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선비이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OK 했다가 스타일 구기고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던 사례를 우리는 근자에 수없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윤증은 재야의 처사로 살았지만 죽림칠현류(竹林七賢流)의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영위한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조정에 상소문을 올리면서 정치현실을 타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많은 제자들을 키웠다. 윤씨 집안에서 세운 사립학교인 종학당(宗學堂·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선 47명의 과거급제자가 배출됐다. 대부분 윤증의 훈도를 받은 제자들이다. 자신은 벼슬을 거부하는 독선기신의 삶을 살았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 좋은 일 많이 하는 겸선천하의 인생을 살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그는 종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킬 때 중인 신분에 있던 사람들도 받아들였다. 배움에 신분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와 같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이런 포용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었다.
한 번은 노성리 윤씨들이 동네 사람들의 원망을 산 적이 있었다. 양잠에 필요한 뽕잎을 양반인 윤씨들이 수탈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윤증은 다음같이 선언했다. "우리 가문이 선대 이래로 이곳 노성리에 와서 살게된지 백년이 넘도록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았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씨 집안에선 원망의 원인인 양잠을 지금부터 일체 금지하라."
윤증 고택은 담장이 없다. 여자들이 사는 안채에만 담장이 있고,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담벼락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대문과 담장 없이 사랑채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는 우리 나라 고택에서 매우 희귀하다.윤증이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았던 무외(無畏)의 처사였음이 드러난다.
현재 고택은 여자 둘이 지키고 있다. 11대 종부인 양창호(梁昌鎬·84) 할머니와 며느리이자 차종부인 신정숙(申貞淑·58)씨다. 3000평의 대지에 50여칸의 전통 한옥을 지키기 위해서 말못할 고생을 하고 있다. 고택의 청소와 관리도 대단한 일이거니와 1년에 5000명 가까이 몰려드는 답사객들을 안내하고 접대해야 한다. 조상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사명감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고생하지 않으면 자랑스러운 조상의 유업이 유지되겠습니까?" 양창호씨의 답변이다. 정신을 이어가는 일은 이렇듯 대가를 치뤄야 하는 모양이다.
명재의 면모를 살피는 데 있어 그가 남긴 문집과 각종 문헌기록이 공식적인 자료라면, 고택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비공식적인 자료가 하나 눈에 띈다. 명재의 초상화다. 사실적인 초상화는 무엇보다 흥미로운 자료이다. 얼굴은 의지와 정신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소프트웨어'라면 관상은 '하드웨어'이다. 불러도 나가지 않았던 강직함과 '노'(NO)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결단성은 그의 얼굴 가운데서도 특히 코에서 나타난다. 명재의 코는 콧대가 높고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힘있게 뻗었다. 코는 자존심과 일 처리에 있어서 분명함을 상징한다. 콧날이 이처럼 높고 힘이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왔다 갔다 하는 일은 없다. '마의상법'(麻衣相法)에 나오는 전형적인 용코(龍鼻)에 해당한다. 용코는 대귀(大貴)하고 100년동안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반대로 콧날이 휘어지면 비곡(鼻曲)이라고 해서 좋지 않게 본다. 두 번 휘어지면 양곡(兩曲)이라고 한다.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배신의 가능성이 있다. 나폴레옹이 부하를 뽑을 때 얼굴중에서 코를 보고 뽑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관상의 관점에서 보면 일리있는 얘기다.


3. 청렴의 표상 안동 金係行
"우리집엔 보물이 없다…있다면 오직 청렴뿐"
"정실인사하다니" 권력실세 조카에 매질


"우리 집의 보물은 오직 청백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천민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지금 '천자(賤資)'가 천하를 휩쓸고 있지만, 아직 휩쓸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안동이다. 뼈대는 없고 오직 돈만 가진 졸부가 행세할 수 없는 곳이 안동이다. 그 뼈대를 추적하다 보면 수백년간 면면히 이어져온 이름난 양반 집안들과 만나게 된다. 청렴과 강직으로 존경받았던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1431~1517)의 집안도 그런 집안 중 하나이다.
안동 지역에 선비문화를 정착시킨 주역은 역시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퇴계 선생이다. 외래 사조인 불교를 이 땅에 토착화시킨 인물이 원효라고 한다면,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조선 실정에 맞게 토착화시킨 이는 퇴계이다. 하지만 안동에서 퇴계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백당 김계행 같은 한 세대 앞선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안동 시내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길안면 묵계리가 나온다.길안천 따라서 묵계리로 가는 길은 산색도 푸르고 물색도 맑아서 지나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흔든다. 가히 선비가 거처할만한 동네이다. 마을 이름도 '신선이 사는 동네'라는 뜻의 선항(仙巷)이다. 평생 청렴과 강직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보백당 종택이 자리잡은 곳이다. 보백당은 벼슬이 늦었다. 초시에 합격하고 32세가 되던 1462년에 성주향교의 교수로 발령 받았다. 요즘 식으로 보면 지방교육담당관 정도 되는 말직이었다. 당시 집안의 장조카로서 불문에 출가한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성주에 들렀다.조선 초기에 공식적으로는 억불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왕실의 내부, 왕비나 상궁을 비롯한 여자들은 여전히 불교를 믿고 있었으므로 학덕이 있는 승려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학조대사는 당시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重創)했으며, 후일 성종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연산군의 비였던 신비(愼妃)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의 대장경 판각을 중창한 궁중 실력자였다. 안동 출신인 학조대사가 성주에 들렀을 때 성주목사에게 "내가 숙부를 좀 뵈러 가야겠다"고 말하자, 목사는 "왕실의 존경을 받는 대사께서 거기까지 직접 가실 필요가 있겠느냐. 이리로 오라고 하면 된다"고 했다. 목사가 사람을 시켜 보백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관아로 오라고 하자, 보백당은 "공무도 아닌데, 사적인 일로 관아에까지 갈 일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소식을 들은 학조대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 부랴부랴 성주향교로 숙부를 만나러 갔다. 학조대사는 미관말직에서 고생하고 있는 숙부를 도와줄 요량으로 좋은 벼슬자리로 옮길 의향이 없는가 하고 타진했다. 왕실에 줄을 대어서 숙부를 중앙 관직으로 옮길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이야기였다. 보백당은 "너한테 부탁해서 내가 어떻게 벼슬을 하겠느냐! 그렇게 되면 내 체면은 무엇이 되느냐, 우리 집안의 정신이 그것 뿐이란 말이냐. 너,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일갈했다. 보백당은 학조대사를 호되게 꾸짖고 회초리 세례를 안겨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김계행은 49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50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기 때문에 사임과 취임을 반복해야만 했다. 마침내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와 말년에 짓고 산 집의 당호가 보백당이다. 그는 87세에 운명하면서 자손들을 전부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이오,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이라." "우리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로지 청백 뿐이다"는 뜻이다. 그의 유언은 조선 선비가 생명처럼 지키려 했던 정신의 뼈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백당에는 지금도 '보물유청백'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보백당의 청백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족보에 올라 있는 남자들만 따지면 그 후손은 대략 8천명. 이 가운데 뇌물 먹어서 교도소에 들어간 후손은 거의 없다는 게 후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특히 공직에 있는 후손들은 '보물유청백'이란 가풍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만약 보백당 후손이 뇌물 몇 푼 먹어서 구속되면 이는 조상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문중 전체를 망신 주는 행위로 생각하고 있다.
보백당의 19대 종손인 김주현(73·전 경북 교육감)씨는 "94년 설립된 보백당 장학재단에도 그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후손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보백당 장학재단에는 '청백공무원 자녀 장학금'이 있다. 시청과 군청, 교육청, 경찰서 등 공공기관 공무원 가운데에서 청렴하다고 추천받은 공무원 자녀들에게 주는 장학금이다. 경북도내에 수백개의 장학재단이 있지만 청백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제도로서는 유일하다고 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도 있다. 하지만 자기 후손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타성받이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다. 장학재단을 세워서 자기 문중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은 보백당의 정신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천자(賤資)가 휩쓰는 이 세상에도 청백의 선비정신은 길안천이 감돌아 흐르는 묵계리의 김씨 집안에 면면히 남아 있었다.
보백당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계명산(鷄鳴山)은 마치 철모를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의 금체형(金體形)이다. 이런 모습의 산은 풍수가에서 봉황 또는 금계로 표현한다. 그래서 보백당 터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국으로 불리운다.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에서 놓고 볼 때 보백당이 자리잡은 터는 바로 그 '알'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만휴정(晩休亭)은 보백당의 맞은편 계곡에 세운 정자이다. '늦게야 쉰다'는 뜻이 말해주듯, 보백당이 벼슬을 버리고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 세운 만휴정은 주변 경치가 일품이다. 조선 선비들은 계곡에서 정자를 지어 거주하는 계거(溪居)를 최고로 여겼다. 계거는 시냇물과 바위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조선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는 지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이다.

졸-졸-졸 흐르는 소리를 듣다 보면 세상사 번뇌를 잊고 내면의 세계로 침잠할 수 있다. 화강암 바위에서 품어 나오는 암기(岩氣)는 정신을 충만하게 만든다. 물은 水氣를 산의 바위는 火氣를 상징한다. 이런 곳에서 오래 생활하면 水昇火降 (수기는 올라가고 화기는 내려옴)이 되어 머리는 시원하고 아랫배는 따뜻해진다. 수승화강이 되어야 내면의 깊이를 닦은 高士라 할 수 있다. 보물유청백이라는 청백과 강직의 정신은 계거가 주는 이러한 수양의 바탕위에서 완성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산수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만휴정은 선비의 품격을 엿볼 수 있는 무대장치이자, 조선 인문정신의 정수를 함축하고 있는 정자라고 생각된다.

 

4. 베품의 모범 정읍 김영채 집안
흉년들자 "끼니도 굶을텐데"…面전체 세금 대납
아들은 논 2만평 팔아 마을에 전기시설


영호남의 명문가들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한가지 차이점을 발견했다. 영남의 명문가들은 강직과 청렴에 관한 일화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호남의 명문가들은 적선(積善)과 분배에 관한 미담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경향이 그것이다. 강직과 청렴은 벼슬을 하는 권력자가 지녀야할 덕목이고, 적선과 분배는 재물이 많은 부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다. 부자가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무조건 내 앞에 큰 감 놓고 보는' 탐욕과 인색 때문이고, 부의 집중을 해소하는 방법은 결국 공동체에 대한 재물의 분배와 적선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의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국)의 터에 자리잡은 강진 김씨 고택인 소고당(紹古堂). 이 집안에서 보여주었던 적선과 분배의 미담은 오늘날까지 전북지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소설 '토지'의 무대가 평사리이듯이, '평사리'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곳은 대체적으로 넓은 들판이 있기 마련이고, 들판이 넓으면 비례해서 부자도 많다. 강진 김씨는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양주목사 김약묵(金若默·1500~1558) 이래로 이 지역에서 인심을 잃지 않았던 향반(鄕班)이면서 부자였다. 현재 소고당의 주인이자 장손인 김환재(金煥在·82)씨의 고조부인 김기혁(金驥赫)은 별명이 '밥 님' '돈 님'이었다.밥과 돈에 대한 경외의 표현으로 '님'자를 붙인 것이다. 길 가다가도 나락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면 주어서 도포자락에 넣었다. 길에서 개똥 소똥을 발견하면 집어다가 남의 논에 거름되라고 넣어주곤 하였다. 그렇게 절약하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베푸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증조부 김태흠(金泰欽)도 역시 천석군이었지만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아낌없이 쌀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집안의 가풍은 다름 아닌 적선이었던 것이다. 조부인 김영채(金永采:1883-1971)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였지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최선을 다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8(戊辰), 1929(己巳)년은 이 지역에서 '무기(戊己) 대흉년'으로 일컬어지는 대단한 흉년이었다. 2년 연속 흉년이 들다 보니 당장 먹을 양식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세금이었다. 그 지역 산외면 면민들은 호세(戶稅)를 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데모라도 해서 세금을 경감 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살벌한 왜정 치하라서 데모는 커녕 진정서도 쉽게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영채는 산외면 면민들의 전체 호세를 대신 내주었다. 이 지역의 어른이고 부자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를 고맙게 여긴 면민들이 '산고해심'(山高海深)과 같은 은혜라고 칭송하면서 현 칠보면 지서 자리에 시혜비를 건립하였다. 시혜비가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영채는 "보기에 민망하다. 산 사람 비문을 세우는 법이 아니다. 철거해서 땅속에 묻어달라"고 지역민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래서 그 비문은 다시 땅속에 묻혔다가 그가 죽은 해인 1971년에야 비로소 다시 꺼내어 세워지게 되었다. 김영채는 자기 스승이자 의병장이었던 김영상(金永相·1836~1911)의 가족 생계를 평생동안 책임지기도 하였다. 김영상은 면암 최익현과 함께 무성서원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주동적인 역할을 했고, 한국병합 후에는 일제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군산 형무소로 이송되던 중 만경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분이다. 그 분의 가족들이 생활고에 시달리자 논과 밭을 사주면서 호구지책을 삼도록 했고,일제 감시에 시달리자 보호막 역할을 자청하였다. 비록 일선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이선에서 해야 할 도리는 했던 셈이다.
부친인 김윤술(金允述·1903~1958)도 역시 집안에 내려오는 적선의 가풍을 이어갔다. 정읍시 칠보면에는 일제 말기에 섬진강 상류의 물을 막아서 건설한 칠보발전소가 있다. 당시 1만5000㎾의 발전용량을 가진 수력발전소로서 건립연대만으로 따지면 남한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발전소였다. 그러나 이 발전소의 전기는 외부로 송출되었기 때문에 정작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전기 혜택을 볼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윤술은 "발전소 옆에 사는 사람들이 호롱불만 키고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면서 전기시설에 드는 비용 일체를 부담하였다. 논 100마지기,즉 2만평의 사재를 내 놓았던 것이다. 그 때가 해방 다음해인 1946년이다.
평사리에 자리잡은 대지 2,000평에 50칸 규모의 고택 당호는 소고당(紹古堂)이다. 소고당의 뜻은 '옛것을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소고당의 바깥 주인인 김환재씨에게 있어서 소고란 "대대로 집안에 내려오는 집안의 가풍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일제시대 중앙고보와 평양 대동공전을 나온 인텔리였지만 그가 평생 주력한 일은 고향에 있는 서원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을 관리하고 뒷바라지 한 일이었다. 이제 과거와 같이 천석의 부자는 아니지만 집안의 가풍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그마한 실천을 하고 있다. 그 실천 방법은 장학금. 1982년부터 정읍군 산외면, 칠보면, 산내면의 3개 면에 있는 중학교 한 곳씩을 골라 각각 매년 쌀 한가마니를 보내고 있다. 햇수로는 올해로 22년째이다. 드러내 놓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금액이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덕망가 집안의 후손으로서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고당의 안주인이자 우리 나라 규방가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여류시인인 고단(高▩, 80세)여사도 남편의 실천에 적극 동조한다. "내 친정이 제봉 고경명 선생 집안인데, 하인들이 몰래 쌀을 퍼가고 김치를 퍼가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어른들은 일부러 모른 체 하였다. 가난한 집안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나도 나중에 꼭 장학금을 주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집와서 보니 시가집도 덕망가였다."
소고당 답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김환재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돈만 많고 법도는 모르는 졸부를 옛 어른들은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 " '부한'(富漢)이라고 했지. '부자 상놈'이라는 뜻이야."
"아버지께선 식구들이 둘러앉은 저녁 식사 때면 선대의 가풍을 이어가야한다며 밥상머리 교육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청백리였던 할아버지 정신을 이어받아 깨끗하게 살라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으셨구요." 김환재(82)씨의 7남매중 막내 아들인 형균(43·아시아나 항공 중국팀장)씨는 코흘리개 때부터 집안 내력을 들으며 컸다고 했다. 첫 대부터 30대까지 집안의 휘자(諱字)를 외울 정도로 뿌리를 강조하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제사 때나 가족 모임 때면 항상 '돈님, 밥님 할아버지'를 본받아 재물을 아끼고, 모은 후에는 유용하게 쓰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작 선조들이 어떤 적선을 했는지는 잘 몰랐다. "집안 어른들이 좋은 일했다는 얘기를 식구들에게 세세히 일러주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도 도움을 받은 마을 분들이 얘기해줘서 아셨답니다." 92년부터 9년간 금호그룹 중국 본부에서 근무하던 김씨는 작년 '적선지가'(積善之家) 후손다운 실천을 했다. 박봉을 털어 베이징 중앙민족학원의 조선어문학과에 최신식 펜티엄 컴퓨터 2대를 기증한 것. "티벳어과, 몽골어과, 위구르어과에는 모두 컴퓨터가 있는데 조선어문학과는 학교 지원도 변변찮고, 우리 기업들도 관심을 갖지 않아 컴퓨터가 없다는 거에요.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고, 제가 도와줬으면 하셨습니다." 그는 "이런 게 신문에 날 거리가 되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5. '행동하는 양심' 안동 이만도 집안
"공동체와 운명 함께"…모든 기득권 버리고 '항일 3대'


어느 사회나 그 사회를 이끌어갔던 주도계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도가 브라만, 영국이 신사(gentry), 일본이 사무라이였다면, 조선은 양반계급이었다. 서민층에서는 지배계층의 문화나 언어 그리고 상징들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아무나 보고 '이 양반, 저 양반'이라고 부르게 된 관습은 바로 이런 관행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양반이라는 호칭은 이처럼 대중화됐지만 정작 양반계층은 토색질이나 일삼는 착취계급으로 철저하게 매도됐다. 그 결과 양반계층이 지니고 있었던 '선비문화'라는 긍정적인 측면마저도 도매금으로 처리되어 버렸고, '선비정신'의 실종은 공동체 유지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도덕성의 실종으로 이어진 것 같다.
안동의 향산 이만도 (響山 李晩燾·1842~1910)집안은 구한말 공동체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자 3대에 걸쳐 목숨과 재산을 내놓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양반 가문이다. 향산 이만도는 퇴계의 11대 후손이면서 3대에 걸쳐 내리 문과급제를 배출한 명문이었다. 향산의 조부는 글 잘하는 선비들이 가는 홍문관 응교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서울대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을, 향산 본인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격인 동부승지를 지냈다. 조부대부터 향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급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향산은 부귀를 겸비한 잘 나가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일본 침략이 시작되자 그는 잘 나가는 양반을 버리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바뀌었다. 1896년에 봉기한 예안(禮安)의병대의 대장을 맡았고, 1910년 합방에 이르자 단식을 감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일본군에 의하여 안동시의 1천여호 가까운 민가가 불타면서 많은 사람이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하였고, 안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종택 마저 불타 버리는 참상을 겪으면서 그는 죽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공동체가 절단난 상황에서 그 책임을 져야 할 양반이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현실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던 것 같다. 죽는 방법은 단식이었다. 음독이나 할복에 비해 단식은 단번에 죽지 않고 오랫동안 시간을 끄는 방법이라서 실천에 옮기기가 가장 어려운 자살방법이라고 일컬어진다. 단식은 특히 주변 가족들이 어렵다. 당사자는 죽기 위해서 곡기를 일절 끊고 있는데, 가족들은 한쪽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며 끼니를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향산의 단식 기간은 무려 24일이었다. 단식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나자 각지에서 친척, 제자, 동료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향산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단식 5일째에는 집안의 손자들이 할아버지의 단식현장에 모였다. 그는 손자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 왼쪽 엄지손가락을 펴지 않고 오므리고 있었다.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펴지 않기로 결심했다가 과거에 급제한 후에야 비로서 엄지손가락을 폈다. 너희들도 촌음을 아껴서 열심히 공부를 하거라"는 당부를 남겼다. 죽어 가는 현장에서 그런 당부를 들었던 손자들은 과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향산은 찾아오는 제자들과 경전들을 논하기도 했고, 친구들과는 일제의 야만성을 비판했다. 집안의 남자들에게는 자신의 장례 절차를 이렇게 하라고 유언했고, 여자들에게는 부도(婦道)와 함께 집안 살림을 잘 이끌어 가라고 당부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담담하게 주변의 일들을 정리하면서,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명망가인 향산의 단식 소식을 입수한 일본 경찰은 현장에 찾아와 강제로 향산의 입에 미음을 집어 넣으려고 시도 하였다. 그러자 혼수상태인줄 알았던 향산이 벌떡 일어나 "누가 감히 나를 설득하고 협박하려 하느냐"고 호령했다. 향산은 단식 24일째인 1910년 9월 8일에 운명했다.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어른답게 최후를 마친 것이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던 양반의 죽음은 안동의 명문가 선비들에게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안동독립운동사에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김대락(金大洛·1845~1914)과 이상용(李相龍·1858~1932),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이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행렬을 이끌고 만주벌판으로 떠나게 된 계기는 바로 향산의 죽음이었다. 이때 만주행은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함을 의미한다. 향산의 죽음은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장남인 이중업(起巖 李中業·1863~1921)은 을미의병 때 이미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여했고, 1917년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이중업의 집에 은신해 있을 정도로 광복회 활동에 깊숙이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김창숙과 함께 주도적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이중업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남긴 시가 하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을 함께 하지 못할 이 아버지의 원수들과 어찌 한 배를 타고 건너가랴. 생각 같아서는 이 강물을 떠다가 천만년의 치욕을 씻어 버리고 싶구나"(不共戴天讐 何忍濟同舟 欲挽此江水 洗却萬古羞)
독립운동은 이중업 대에서 끝나지 않고 손자대에까지 이어졌다. 이중업의 아들인 이동흠(李棟欽·1889~1967)과 이종흠(李棕欽·1901~1975) 형제는 군자금모금 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했다. 이때 각 문중을 순회하며 모은 군자금은 결국 상해의 김구선생에게 전해져 의열단원을 양성하는데 사용됬다. 1926년 나석주(羅錫疇) 열사가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외환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을 던지는데 사용된 자금은 이때 모은 군자금이었다. 2차 유림단 사건으로 인하여 동흠, 종흠 형제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로마의 귀족들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었던 게 아니다. 조선의 양반들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들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 정신은 지금도 안동의 청년들에게 집안의 영광이자, 민족의 영광으로 자랑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이만도의 며느리 金洛
삼천석 부호의 딸…3.1만세 참여, 고문으로 실명까지
그녀의 삶은 남자들 못지않은 가시밭길을 걸었다. 시아버지인 향산의 단식 현장을 지켜보면서 수 많은 내방객들의 접대를 맡았던 며느리였다. 남편 기암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만 하였다. 아들 둘도 시아버지와 남편을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고초를 겪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봤다. 그녀 자신도 58세 때인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군경에 체포됐다.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양쪽 눈을 잃었고, 11년간 맹인으로 고통받다가 죽었다. 김락 여사의 친정인 안동 내앞의 의성 김씨 집안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밥 천 석'으로 유명했던 속칭 '삼천석 댁'이었다. 만삭의 임신부였던 손주 며느리와 손주 딸을 데리고 엄동설한인 12월에 만주로 간 백하 김대락이 바로 친정 오빠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큰 형부였다. 학봉 김성일 집안의 종손이자 파락호로 소문났던 김용환은 그녀의 사위였는데, 김용환 역시 나중에 독립운동에 관계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그녀의 삶을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로 표현한 바 있다. 여성으로서는 안동에서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았다.


6. 英陽 이시명 집안
상수리열매로 끓인 죽, 유랑민 200명에 매일 먹여


'救貧의 철학' 실천, 병자호란 치욕에 평생 은둔

풍광 좋기로 소문난 미국 캘리포니아의 고급 주택들은 평지가 아닌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집값이 올라간다. 서양인들이 언덕 위쪽의 집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전망의 높이와 통찰력은 비례하게 마련이다. 로마의 고택이나 유럽의 주택이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선 전망이 좋은 위치를 '○○대'(臺)라고 부른다. 대(臺)는 보통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이나 바위 절벽위를 지칭한다.

조선 선비들이 언덕 위의 대를 좋아했던 이유는 만물(萬物)을 정관(靜觀·고요하게 관찰함)할 수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의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 종택을 비롯한 재령 이씨 고택들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동네 전체가 9~10m 높이의 화강암 암반 층에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석계 이시명은 병자호란 때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수모를 당하자, 산간 벽지로 은둔하여 처사로서 일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가 경북 영해의 본가에서 산간 벽지였던 영양의 석보로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40년부터이다. 원리리에는 대략 100여m의 간격을 두고 4개의 대(臺)가 일렬로 자리잡고 있었다. 동대(東臺)·세심대(洗心臺)·낙기대(樂飢臺)·서대(西臺)가 바로 그러하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낙기대(樂飢臺)'다. 풍수적으로 볼 때 이 동네의 지기(地氣)는 낙기대쪽에 뭉쳐있다. 조선시대 마을 풍수에서 보면 지기가 뭉쳐있는 곳에 그 동네의 가장 중심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낙기대는 지맥도 그렇지만 이름도 독특하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 있는 수십 개의 이름난 대에 올라가 보았지만, '배고픔을 즐기는 곳'이란 낙기대 이름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낙기대는 눈앞에 펼쳐지는 전망만 즐기는 곳이 아니라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는 곳이다. 주변 사람들의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대응은 낙기대 주변의 상수리 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낙기대 주변에 대략 50여 그루의 상수리 나무가 오랜 풍상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수령이 300~400년된 것들이다. 집안 어른인 이병균(72)씨에게 "왜 유달리 상수리 나무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기민 먹이'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기민(飢民)이란 '굶주린 백성'이다. 재령 이씨들은 상수리 열매를 통상 '기민 먹이'라고 부르고, 상수리 나무를 '꿀밤나무'라고 부른다. 흉년이 들거나 보릿고개가 닥쳐 인근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낙기대 위의 상수리나무 열매를 비상식량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낙기대와 상수리나무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보완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보릿고개에 접어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비상수단으로 그동안 모아 놓은 상수리, 도토리 열매를 갈아서 분말을 만든다. 그런 다음, 커다란 솥 단지를 걸어 놓고 이 분말가루에 물을 붓고 죽을 끓였다. 이 죽이라도 한 그릇 먹으면 굶어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을 담당하던 집안이 재령 이씨들이었다. 이씨 집안에서 커다란 솥을 걸어 놓고 죽을 끓이면 이곳 원리리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배고픈 사람들도 모두 와서 먹었다. 보통 하루에 끓이는 죽의 양이 200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수리 죽으로 배를 채운 유랑민들은 "다른 집의 쌀죽보다 이씨 집의 상수리가 더 달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곤 했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였던 그 성의를 고맙게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물론 사라졌지만 광복 이전까지도 기민들에게 상수리 죽을 끓여 주던 전통은 살아있었다. 그 전통은 400년 전 장씨 부인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장씨 부인은 바로 입향조인 이시명의 부인이다. 영남 유학의 거봉이었던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로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훈도를 받고 성장했다.특별한 훈도란 남자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과 유교적 교양을 전수받았음을 말한다. 그 결과가 굶어죽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나타났고, 보릿고개를 당해서 도토리 죽을 끓여서 같이 먹는 나눔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체적인 살림의 운영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여자의 비중이 더 크게 마련이다. 안방에서 틀어 버리면 곤란한 법인데, 이 집안의 경우 안방에서 더 적극적으로 기민구호 사업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의 재산은 어떠했는가. 16세기 중반 이시명의 조부가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노비가 700명 가량 있었다고 나온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700명이 모두 노비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비라기 보다는 라틴어의 '클리엔테스'로 개념으로 보는 게 적당할 성싶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의 클리엔테스란 특정한 귀족의 보호를 받는 평민으로,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가신(家臣) 개념에 가깝다. 가신은 어느 정도 예속되어 있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노비는 아니다. 기민 먹이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700명이란 숫자는 이씨 집안에서 최소한의 호구를 책임을 져야 하는 클리엔테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반이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했다. 원리리 이씨 고택들의 지붕을 보면 한 가지 어색한 부분이 발견된다. 석계종택, 석계서당을 비롯한 기와집들의 지붕 끝에 마감재로 사용하는 앙와(仰瓦)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앙와로 마감을 하지 않으니 기와지붕의 양쪽 끝이 매우 어설퍼 보인다. 집을 짓다 만 것 같기도 하다. 집안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집을 지을 때 앙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수백년 내려오는 재령 이씨들의 전통이라고 한다. 돈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어떤 이유 때문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미완으로 남겨놓기 위해서이다. 미완이란 겸손을 뜻하기도 한다. 앙와를 설치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이 집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사치스럽게 짓지 않기 위해서이다. 전통 기와지붕에서 멋을 낼 수 있는 부분이 앙와이기도 하다. 궁궐 지붕의 끝에 설치하는 치미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기도 한데, 화려하고 맵시 좋은 앙와로 지붕을 단장하는 것은 선비정신에 어긋난다고 간주한 것이다. 낙기대와 앙와 없는 지붕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후손 이문열씨, "문중은 나에게 민족개념 가르쳐줘"…
'낙기대'를 마을 가운데 둔 우리 고향과 문중에서 내가 받은 교훈은 말씀으로 된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거기' '그냥' 있음으로써 보여준 것들이다. 고향에선 동족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문중이라는 말보다 일가(一家)나 집안이란 말을 더 잘 썼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스무 촌(寸)이 넘는 사람까지 함께 묶인 집단이라 오늘날의 혈연 개념으로는 남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나의 직계는 여러 대를 내리 독자(獨子)로 내려오는 바람에 집안에서 가장 가까운 일가도 열두 촌이나 되었다. 하지만 내게 민족의 개념을 형성케 한 것은 바로 그 일가의 집안이었다. 내게 있어 민족은 그것들이 겨레나 동포라는 말을 거치며 확대 재구성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그 다음으로 고향이 '거기' '그냥' 있어 준 교훈은 나눔의 정신, 특히 앎과 느낌을 남과 나눌 줄 아는 태도이다. 마을의 중심인 서당과 집안의 정사(精舍), 서실(書室)뿐만 아니라 산기슭 정자(亭子)까지도 원래는 강마(講磨)와 수양의 터였다. 그리고 거기서 배우고 익힌 뒤에는 나아가 서원이나 향교의 좌장(座長)이 되고, 들어와선 정사나 서실에서 인근의 자제를 가르쳤다. 그도 안되면 사랑방에서 아들과 조카에게 천자문이나 깨우쳐주더라도 옛 사람들은 자기의 앎과 느낌을 남과 나누기 좋아했다.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병통'이란 핀잔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 또한 훌륭한 나눔이요, 베풂일 수 있다. 그것을 나는 고향에서 배웠다. (작가 이 문열)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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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대구광역시 행정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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