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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치유신, 정한론에서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04.05|조회수100 목록 댓글 0

 1853년 7월 8일 오후 5시경. 미국의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3500t급 黑船을 비롯해 대포를 장착한

 네 척의 검은 증기선을 이끌고 일본의 에도(江戶·현재의 도쿄) 만 우라가(浦賀) 항에 나타난 이후

 큰 충격에 휩싸인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이듬해인 1854년 미국측 요구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1860년 막부와 조정이 연합한다는 내용의 공무합체론公武合體論)이 막부로부터 제시됐지만 조정이

수용하지 않았으며, 결국 1867년 정권을 조정에 완전히 반납한다는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

(德川慶喜)의 ‘대정봉환(大政奉還)’ 발표로 264년간 이어지던 막부 통치는 마감하게 되었다.


 1868년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성공으로 일본은 점차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당시 내각을 주도하던 명치유신 3걸의 우두머리격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1873년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다.

 그가 정한론을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일본내 무사계급의 어려운 상황이 깔려 있었다.

 18세기 초부터 농민이 납부하는 연공(年貢)의 감소로 막부재정이 악화되면서 무사들이 빈궁해진 데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부유 상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무사들이 상인들로부터 차입하는

 자금규모가 급격하게 증가함으로써 무사계급은 급속하게 몰락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 자신 무사계급의 수장으로서 대륙 진출을 통해 이 난국을 해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정한론은 관철되지 않았다. 같은 명치유신 3걸의 한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비롯한 상당수의 개방파들이 당시 일본의 국정 과제는 대외 확장보다는 내치의 충실이 더 시급하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정한론은 한동안 잠잠해지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을 뿐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낙향한 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스마(薩摩) 지역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고 이른바 세이난센소(西南戰爭)에 참가하여 정부군과 대결을 벌였으나 구마모토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퇴각하다 1877년 50세의 나이에 가고시마의 동굴에서 자결을 하고 만다.

 

  그러나 정한론은 조슈번(長洲藩- 야마구치현) 하기(萩)를 본거지로 한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1830~1859)에 의해 주도돼 하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실행에 옮겨진다.

  요시다 쇼인은 1859년에 처형되었으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그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 -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와 그들의 뒤를 이은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2대 조선 총독) 등이 정한론을

실천하여 한일합방을 하기에 이른다.

 

 야먀구치현 하기(萩)는 제국 일본의 힘을 탄생시킨 모태다. 메이지정권의 최고 설계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성장했다. 일본의 군사제도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도 여기다. 야마가타로부터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다케로 이어지는 근대 초기 육군의 실세가 모두 동향이다. 이토, 야마가타, 가쓰라, 데라우치는 차례로 총리를 지냈다. 한국인에게는 병탄의 원흉들이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 국가 건설의 공신들이다.

 참고로 이 야마구치현에서는 일본의 총리를 모두 9명이나 배출했는데, 그 중 3명이 하기 출신이다. 

  현재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요시다 쇼인의 사설 학교인 쇼카손주쿠.
이토와 야마가타의 관계가 각별하다. 그들은 한국 병합의 공식라인을 대표한다. 경쟁적으로 일본 근대화와 조선 침략을 이끌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리더가 그들을 키웠다.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둘은 함께 공부했다. 동지이자 라이벌이다.

이토는 문관으로서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다. 야마가타는 징병제를 비롯해 근대적 군대를 육성했다. 이토가 문관을 대표한다면, 야마가타는 무관을 대표한다.

둘 다 유럽에 유학했고, 그 경험을 일본 근대화에 활용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정권을 다투는 경쟁관계이기도 했지만 대외 팽창적 국익 앞에선 콤비를 이뤘다. 이토는

45세이던 1885년 초대 총리에 오르며 내각책임제를 확립한다. 이토에 이어 1890년 총리에 취임한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을 발표하면서 “이익선(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임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일본의 이익선은 한국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시베리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그리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확대됐다.

1894∼95년은 한·중·일 3국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야마가타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이 이익선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내부적으로 다져온 힘을 외부로 돌린 첫 시도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을 주도한 인물은 이토였다. 야마가타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토가 수습하며 일본의 국익을 챙기는 호흡이 절묘하다. 청나라의 리훙장을 야마구치현으로 불러들여 조약을 체결했다. 이토는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표현을 썼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얽혔던 시절, 조선의 독립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1873년 정한론 대두로부터 시작된 조선 침략 프로젝트의 1단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1885~95년 총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선 침탈의 밑그림을 완성해갔다.

그러나 그 10년간 조선은 일본과 정반대로 개화와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다. 당시 조선의 리더들도 전통적

유학 지식에 새로 습득한 서양 지식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몇몇 주도자가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변화를 주도할 힘을 전반적으로 상실했던 것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부국강병과 총화단결, 그리고 대외침략. 메이지 유신과 한국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위세는 지난 100년간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증오와 저항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선망의 모델이기도 했다.


ㅡ 위 글은 일본 야마구치(山口)여행을 앞두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일부 짜깁기한 글입니다.(鶴軒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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