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촌.
그저 단순하게 지명이겠거니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독립운동의 기지인가보다 했다.
그것은 그냥 글자였으나, 신한촌의 의미를 파고드니 거칠어져 피가 배어나오는 투박한 손이 떠올랐다.
그 손으로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자식을 키워내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어떤 가장이 상상이 된다.
그 가장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조금 안정적으로 살만한 곳이 되었을 때 강제로 메마른 땅으로 쫓겨간 한인들이 새로 만든 마을이라는 의미로 신한촌이다.
현재 신한촌 터는 평범한 주택가로 보인다.
상점들과 주택이 줄지어 서있어 여느 거리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항일운동 기념탑만이 신한촌임을 알려줄 뿐이다.
우리는 주변을 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작은 건물이 있어 그곳을 관리해주고 계시니 오직 감사할 뿐이다.
1912년 그 마을 가운데에 넓은 터를 닦아 한민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라를 잃었지만 어디에서고 학교는 세워졌으며 교육이 이루어졌다.
1920년 4월 신한촌의 학교와 신문사, 가옥들이 불타 대한국민의회, 한인사회당, 노인동맹단, 애국부인회의 활동가들은 도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에 의한 4월 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 거리 중심에 이동휘선생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빈농의 아들이었고, 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중 군수의 악행에 분개하여 화로를 군수 머리에 뒤엎고 도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사관 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가 되었다.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1년 유배생활을 한 이후 1915년경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918년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나는 이동휘선생의 집으로 추정되는 두 곳의 설명을 들으며 흔적이 남아있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의 흔적을 지켜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다른 나라에서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겠다.
그보다는 이 거리를 거닐며 나라의 독립을 고민하고, 죽더라도 이루고자 한 독립에의 의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음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시간여를 달려 크라스키노에 갔다.
연추하리로 불렸던 크라스키노에는 한인 최초의 정착지인 지신허마을 흔적이 있고 안중근의사 단지동맹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지신허마을에는 음악인 서태지가 러시아 한인 이주 140년을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고 해서 무척 기대했는데 군사지역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폴짝 넘으면 넘어갈 수 있는 줄로 막아선 마을 입구에서 목을 빼고 바라보기만 했다.
1863년 배고픈 사람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국경을 넘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그때는 농사를 짓지 않고 있는 벌판이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길을 떠났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대목에서 또한번 목이 메어왔다.
대체 그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그 당시 내가 가진 전부일 수도 있는 그 공간을 내어주고, 예측할 수 없는 낯선 길을 떠나는 그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신걸까? 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특별히 이름을 남긴 분들도 아닌, 그냥 평범한 가장 혹은 아내였을 그 분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나는 역사의 교훈을 그곳에서 얻었다.
위기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위대함을 만들어냈음을, 특정한 사람만이 독립운동가가 아니고 그분들이 모두 독립운동가였음을.
위태로운 순간에 나와 더불어 남을 생각하는 모습이 제대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다음으로 간 곳은 안중근 단지동맹 기념비이다.
1909년 2월 7일 연추 근처 여관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왼쪽 손가락 약지를 단지한 11명의 동지들의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적었다.
기념비앞에서 가져간 술을 한 잔 올리고 다같이 묵념을 했다.
자꾸 내 왼쪽 손가락이 신경쓰였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뒤 뿜어나오는 피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 피로 원한것은 오직 하나.
대. 한. 독. 립.
나머지 11분도 기억해본다.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기념비 주변으로 안중근의 손, 안중근을 기억하는 현재의 모습, 안중근이 이등박문 죄악 15개조를 열거한 상징적인 돌 15개가 설치되어 있다.
주변에 동물의 똥이 있어서 나무가지를 이용해 청소도 하고 왔다.
한국문화유산연구센터 김재홍 대표의 제안으로 만세삼창도 했다.
문화재지킴이로서 유적지 상태의 모니터링과 정화활동, 그리고 한민족 후예로서 속시원한 만세삼창이었다.
세째날은 우수리스크이다.
여행 가기 전에 이상설 선생님께 술 한 잔 올려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선생님은 7세에 양자로 갔으나 14세 친부와 양부를 잃고 다음해에 친모를 잃어 3살된 동생을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 고종에게 자진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선비이다.
27세에 성균관교수 겸 관장이 될만큼 전통 유학자이신 선생님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독학으로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그렇다하더라도 제사나 매장관습을 버리기는 참 어려웠을 것 같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관습을 버릴만큼 나라의 독립만을 생각하신 그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게 되니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17년 48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 얼마나 가슴이 터질듯 안타까웠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임종 전 남기신 유언을 읽으며 나는 또 울었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기념비 앞에서 성균관 교육부장으로 계신 박평선박사님이 술을 올리고 절을 올렸다.
술을 따라드리고 옆에 서있던 나는 이상설선생님의 비분을 감당하기 어려워 울컥했다.
수이푼강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속에서 우리는 묵념을 하였다.
유허비가 있는 이곳은 러시아사람들은 캠핑하는 장소라고 한다.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 일부가 잠기기도 해서 가이드샘이 안타까워하며 자리를 옮기면 좋겠다고 한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러시아당국과 긴밀한 협조 속에서 해결이 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재형선생님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