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학의 대가 오경석
금석학은 그릇‧장신구‧악기‧불상‧비석 등 쇠붙이나 돌에 새겨져 있는 문자나 그림을 토대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오경석(1831~1879)은 역관 신분으로 13차례나 북경을 내왕하면서 청국의 발달된 금석학에 매료되어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오경석의 집안은 원래 양반이었으나 15대조가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이 되면서 이후 대대로 중인 신분인 역관을 지내왔다.
역시 역관이었던 아버지 오응현은 치부에 성공하여 아들에게 저택 두 채와 2천석지기 전답을 물려주었고,
아들 오세창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다방면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청나라가 서구열강에게 짓밟히는 참상을 보고 국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오경석은 개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오경석은 유대치‧박규수와 함께 ‘개화파의 3대 비조(鼻祖)’로 불린다.
역관의 아들로서 의원이 된 유대치는 오경석이 주장하는 개화의 당위성에 공감하여 동참한 뒤
개화를 실현하기 위해 양반인 20세의 김옥균을 끌어들여 성과를 거두었다.
중인의 신분으로는 백성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박규수는 평안감사로 재직 중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킨 공로로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김옥균‧박영효‧박정양‧서재필‧윤치호‧홍영식 등 많은 개화파 청년들을 양성했다.
오경석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중국의 골동 서화를 대거 사들였다.
골동 서화를 사들인 과정과 물품의 내용은 자찬(自撰) 「천축재차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분야의 전문가끼리는 서로 존중하고 협조하는 법,
청나라 학자나 골동상들은 오경석과 대면하거나 서신을 통해 희귀한 석각(石刻)과 탑본(榻本) 수집에 적극 협조했다.
오경석이 청나라 문사(文士) 61명과 주고받은 편지 292통이 7권의 책으로 편찬되어 후손 오천득씨가 소장하고 있다.
오경석은 이재에 밝은 역관답게 인삼으로 비용을 충당하며 값비싼 골동 서화를 대거 구입하여 금석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우리나라 금석학의 출발점인 「천축재차록」은 멸실되었고 아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내용의 일부만 전해온다.
근대문화의 마당발 오세창
오세창(1864~1953)은 부친 오경석이 이룩해놓은 학문적 성과를 토대로 청출어람을 구현한 선각자다.
정치인‧계몽운동가‧언론인‧독립운동가‧서화가‧조각가‧고미술감정사‧저술가 등
인명사전에 나오는 활동영역만 봐도 그가 얼마나 다방면에서 활약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서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스승인 추사 김정희를 능가한다고 평가되는 ‘오세창체’를 구축했다.
오경석은 아들 세창이 8세가 되던 1871년 1월, 저택에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의원인 친구 유대치를 가정교사로 모셨다.
1879년 세창이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 자격을 취득하자 오경석은 바로 가숙을 철거했다.
오세창은 그해에 차례로 부모상을 당하고 이듬해에 사역원에 등용되었으며, 1882년 9월 종9품 차비관(差備官)에 제수되었다.
실력이 뛰어난 오세창은 승차가 빠른 편으로 1885년 12월 종7품인 사역원 직장에 제수되었다.
1896년 오세창은 왜국공사의 초청으로 왜국에 있는 외국어학교에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면서 바깥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눈부시게 발전한 왜국의 실상을 두루 살펴보는 동안, 오세창은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0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인 만세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직함은 사장이지만 취재와 기사 작성까지 직접 했으니,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이자 신문기자이기도 했다.
만세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를 연재하는 등 민족지로서 큰 족적을 남겼으나
경영난으로 불과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1910년 8월에는 종로 YMCA에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을 개설하여 골동서화 유통에 나섰다.
1915년 1월 13일자 매일신보에 ‘그림 150점을 비롯하여 총 1175점의 서화를 수집했다’고 보도된 내용을 참조해보면
수지내역은 알 수 없지만 오세창의 화랑은 상당히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이 이처럼 서화 수집에 매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왜국으로 팔려가는 이 나라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종로의 거부 전형필은 오세창의 권고로 고서화를 비롯한 각종 문화재를 수집, <간송미술관>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세창은 서화의 수집에 머물지 않고 종합자료집인 다섯 권의 「근역서화징」을 저술했다.
「근역서화징」은 신라의 솔거부터 시작하여 화가 392명, 서가 576명, 서화가 149명의 경력과 작품을 수록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조차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방대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신문을 통해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외에서 수백 권의 주문이 쇄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고서화에 대한 오세창의 열정은 만년에도 식지 않아 74세 되던 1937년 「근역인수」 6권을 찬술했다.
「근역인수」는 우리나라 문인화가 830명의 이름‧호‧별명 등을 새긴 인영(印影) 3930방을 집대성한 자료집이다.
이 책은 도장 파는 일을 전각(篆刻)이라는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 고서화 감상의 좋은 자료가 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