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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과 구성원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08.30|조회수237 목록 댓글 0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과 구성원

-조선의용대원 분석과 이들 활동의 의미 -



 



Ⅰ. 머리말


1938년 10월 10일 중국 관내(關內)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한인(韓人)들의 독자적 무장조직 조선의용대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사, 나아가 한국현대사와 중국현대사 그리고 한중관계사에서도 상당한 위상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1)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 세력과 함께 대일항전을 벌인 조선의용군의 모체가 된 조직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조직인 한국광복군의 한 뿌리가 되는 독특한 조직이기도 하다. 더욱이 해방 직후 조선의용군은 북한의 건국 및 건군에 주요한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반 중국동북지역에 성립한 ‘연변조선족자치주’ 건립의 한 주체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의용군의 인적 기반이 되었던 조선의용대에 관한 고찰은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 한 관건이 되는 과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국내외 학계의 조선의용대에 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에야 활성화되었다. 199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립 60주년이 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주관 학술회의에서 4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이 논문 등 5편이 1999년 11월에 발간된『한국근현대사연구』11집에 ‘조선의용대와 민족운동’이란 특집으로 수록되어 주목되는 결실을 거두었다.2) 2001년 염인호가『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이란 단행본을 발간하는 등 지금까지의 연구로 대략 조선의용대의 창건과 그 활동내용, 북상동기, 기관지 발간, 관련 인물, 조선의용군으로의 변화와 한국현대사에 끼친 의미 등이 대체로 규명되었다고 판단된다.3) 그러나 근래 한국 및 중국측 자료와 연구성과가 적지 않게 나오면서4)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각에서의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용군에 대한 연구는 해방 이후의 활동 및 6·25전쟁 관련 내용이 주목되고 있다. 현재 조선의용대, 특히 조선의용군은 남․북한 모두 양쪽에서 거의 잊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는 10월 10일은 조선의용대 창설 70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날이다. 이에 최근까지 비교적 관심이 적었던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 및 구성원과 그들의 특성, 이들의 항일투쟁의 의미, 조선의용군으로의 발전 등을 간단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Ⅱ. 조선의용대의 창립과 초기 구성원


1. 조선의용대의 창립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7년 11월 12일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 남경(南京)에서 결성되었다. 이후 이 조직은 중국 항일전쟁에 참가함으로써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조직은 ① 국내 각 독립운동 조직의 획득 및 군중의 연계문제 ② ‘조선혁명’을 담당할 무장대오의 건립 문제 ③ ‘조선’ 국내외 각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 완성 문제 등을 주요 당면과제로 제기하고 이의 달성을 위해 매진하였다.5) 이 가운데 조선혁명을 추진할 무장세력의 건립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강력한 한․중 연합전선의 형성이 요청됨에 따라 시급한 현안과제로 부상하였다.

이에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리사이자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로 활약하고 있던 김원봉(金元鳳)은 이듬해 7월 7일, 즉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날 중국국민당 총재이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던 장개석(蔣介石)을 상대로 조선의용대를 건립할 방안을 제출하였다.6) 이 방안에 대해 장개석은 비교적 우호적 반응을 보였고, 이 문제를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장 진성(陳誠)에게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7)

한편 이 무렵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반전주의자 아오야마(靑山和夫, 본명 黑田善次) 역시 국민정부를 상대로 ‘국제의용군’을 세울 계획을 타진하고 있었다. 즉 아오야마는  1938년 6월 베트남으로부터 중국 한구(漢口)에 와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활동을 규탄하는 반전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오야마는 7월 3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賀衷寒)을 회견하고 국제의용군 조직계획을 제출하였다.8) 그런데 이 계획안에는 ‘조선인 문제의 해결방법’이란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주요 내용은 현재가 조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이니 재중한인 가운데 양호한 우수분자는 선별하여 무한(武漢) 보위작전에 참가시키고, 그렇지 못한 불량자와 중간분자는 여비를 주어 후방으로 추방하거나 강제노동에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가운데는 우수한 한인 약 70명으로 의용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의 위협에 놓인 무한 방위에 참가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9)    

아오야마(靑山和夫)의 이러한 계획은 재중한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상당부분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오야마의 이러한 ‘국제의용군’ 건립의 제안은 만약 국제의용군이 조직될 경우 이들을 중국항전에 참전시킬 수 있다는 이용가능성 때문에 국민정부 군 관계자들의 긍정적 반응을 유도할 수 있었다.10) 그 결과 하충한은 아오야마의 이같은 건의안을 진성에게 보고하였다. 진성은 다시 그 내용을 장개석에게 보고하였는데, 장개석은 이에 대해 1938년 8월 12일 무한에 있는 한인들이 얼마나 되고 그 성향이 어떠한가를 먼저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11) 이러한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하충한은 무한에 있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주로 의열단계 청년인사들)을 조사한 뒤, 9월에 다시 장개석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그것의 주요 내용은 한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의용대를 조직할 만하다는 긍정적 내용의 것이었다.12) 

결국 조선의용대의 창립은 중일전쟁에 즈음하여 중국항일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삼아 조국의 독립을 전망하고자 한 김원봉 등 한인 민족운동가들의 부단한 노력이 중국의 정세와 맞물려 상당부분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최근 공개된 중국측의 새로운 자료에 따르면 때마침 ‘국제의용군’ 문제를 제기한 아오야마 등 반전주의자들의 활동과 중국측의 정치‧군사적 의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과한 산물이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2. 초기의 조직편성과 구성원의 특징


개석을 비롯한 중국 인사들은 무한전투 이후 한구에서 한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의용군을 창건하고, 이들을 중일전쟁에 참가시킴으로써 중국의 항일전쟁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나름대로의 목적으로 조선의용대의 창건에 동의했다.13) 특히 일본군이 1937년 7월 중국 본토 침략전쟁을 일으킨 이래 중국군은 패퇴를 거듭하여 그 해 12월 13일에는 국민정부의 수도 南京이 함락되었다. 또 이듬해 5월 일본군이 다시 무한까지 다가오는 위급한 상황이 되자 중국군은 7월에 무한보위전을 전개하였지만 결국 무한을 방어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이처럼 위급한 중일전쟁의 와중에 탄생하였다. 이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주함당(周咸堂)과 반문치(潘文治) 등은 조선의용대 조직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김원봉을 만나 수차례 협상을 진행한 뒤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를 구성하였다.14) 이리하여 조선의용대 창립작업이 본격화하게 되었다.

1938년 10월 2일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열고 군대의 명칭과 영도인물을 선정했고, 편제와 경비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에 주함당과 반문치 등은 군사위원회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에게 이 문제를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 때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제1차 회의결의기요(會議決意紀要)’라는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에 따르면 처음 구상한 무장대오의 명칭은 ‘조선의용군’이었으며,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를 관할하도록 되어 있었고 다시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는 직접 조선의용대를 관할하도록 짜여 있었지만, 동시에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도 관할할 수 있도록 구상되었다.15)

이 때 주목되는 사실은 지도위원회 위원으로 주함당과 반문치, 간백둔 등 3인을 위원으로 인선하였고, 비서장 3인도 모두 중국인을 배치할 생각이었다. 또한 총무조(總務組) 지도원으로 교한치(矯漢治)를, 정치조 지도원으로 간백둔을 구상한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현재는 반드시 의용군이라고 칭할필요가 없고, 오히려 ‘의용대’라고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개진되어 있었다. 편제는 본부와 참모부 외에 2개 대로 구분하고 그 밑에 각각 4개 분대(1개 분대에 12인)를 둔다는 구상이었다.16)

그러나 실제로 조선의용대 창건이 구체화되었을 때 이러한 중국측의 구상은 김원봉 등 한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애초의 구상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즉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조선의용대를 관할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인 장교가 조선의용대에 배치되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초기 조선의용대의 편제는 앞의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제1차 회의결의기요’의 구상과 대체로 흡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중국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창립 초기 조선의용대의 편제와 명단은 다음의 <표 1>과 같다. 창립시 전체 규모에 대해서는 분분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지만 대체로 100여명에 달한다는 견해가 타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17) 그러나 현재 이름과 출신지, 경력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표 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87명으로 조사된다.

1930년대 후반 중국 관내지역 좌파 민족운동 진영은 조선청년전위동맹 내의 최창익(崔昌益) 계열과 반최창익 계열, 그리고 민족혁명당 연합계열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최창익은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이 당 내부의 비밀조직인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책임자가 되어 젊은 청년들을 이끌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18)

특히 그는 ‘조선군중’이 별로 없는 중국 관내지방 민족운동의 고립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군중이 많은 중국동북지방(만주)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소위 ‘동북노선’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 강릉분교(江陵分校)에서 군사수업을 받고 있던 한인 학생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이 학교 졸업식에 즈음하여 1938년 5월 개최된 민족혁명당 제3차 임시전당대표대회에서는 동북노선이 이 당의 노선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19)

그러나 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은 이 노선을 곧바로 실현할 수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민족혁명당 내의 전위동맹계 청년들은 한구에서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창립하여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원하는 한편, 만주(중국동북) 진출노선을 독자적으로 모색하였다. 그러나 자금난 등 제반 여건이 미비하여 성공할 수 없었고, 이에 전위동맹 내부에서도 동북노선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작용에 의해 전위동맹 측은 조선의용대 건립에 가담하여 제2구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2구대는 김학무(金學武) 등 조선청년전위동맹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제1구대와 약간의 차별성이 있었다.20)

 

<표 1> 조선의용대 창립시의 편제와 명단

          一. 본부

組別

성명

(본명‧異名)

연령

출신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隊長

  金若山

 (金元鳳)

 40

경남밀양

 黃埔軍官學校 4기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機密主任

  申岳

 (申榮三)

 48

경기양평

 황포군관학교 5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검사위원

총무조장

  李集中

 (李仁洪)

 45

전북전주

 황포군관학교 4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검사위원

정치조장

  金奎光

 (金星淑)

 40

평북철산

中山大學 法科 졸업

조선민족해방동맹중앙위원

各組成員

  李瀅來

 (李維民)

 24

전남보성

 군관학교 星子分校

 특별훈련반 수료

 중국공산당원, 민혁당원,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周世敏

 (金雲鶴)

 

 

南京 中央大學 졸업

 미국 거주중 중국 도래

 

  李春岩

 (藩海亮)

 33

황해봉산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레닌주의 정치학교 졸업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참여

민혁당중앙위원, 특무부장

 

  石成材

 (張之民)

 31

경상도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군관학교 성자분교 수료

阿城 조선공산당(화요파)멤버, 민혁당 중앙검사위원


 

  金仁哲

 (金剛一)

 30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김구계 학생훈  련소 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원

 

  尹世冑

  (石正)

 37

경남밀양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의열단원,위 학교

교관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서대문 형무소 7년 복역

1942년 5월 전사

 

  韓志成

 25

경북

중국 중앙정치학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중앙간부

해방후최고인민회의대의원

 

  陳一平

 25

 

南京 中央大 수학,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金錫洛

 

 

 

 

 


         二. 각 구대(區隊)


           제1구대(주로 민족혁명당원, 양자강 이남 제9戰區)

組別

성명

(본명‧異名)

연령

출신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대장

 朴孝三

 35

함남함흥

황포군관학교 4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隊附

  金世日

 (王英載)

 28

 

낙양군관학교(성자분교)

특별훈련반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호가장전투시 한 팔을 잃음


           제1구대 계속

  정치

 지도원

  王通

 (金鐸)

26

함남

낙양군관학교 특별훈련반 및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제1분대장

  崔敬洙

 (崔慶洙)

 

 

군관학교 星子分校 졸업

1932년 한국혁명당 당원

  隊附

  張重光

 (康炳學)

22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1934년 상해 폭탄 투척의거

조선민족혁명당원

제2분대장

  趙烈光

25

경기

일본 히로시마에서 중학교 졸업,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군관학교 성자분교 見習士官,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隊附

  李海鳴

 (李泰龍)

34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원, 박용만 암살

혐의, 임시의정원 의원

제3분대장

  葉鴻德

25

 

남경 중앙군관학교

조선민족혁명당원

  隊附

  李志剛

 (李相勳)

24

 

남경중앙군관학교 11기 졸업,

군관학교 성자분교 견습사관

조선민족혁명당원

  隊員

  王왕왕왕왕 왕왕왕               왕   왕       왕               王現淳

 (李志烈)

21

평북

강계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1941년 12월 전사

 

  趙少卿

 (李聖根)

25

서울

간부학교 및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노동자 출신

 

  林相秀

 

 

의열단 간부학교 3기 졸업,

 

 

  朱東旭

24

평북

철산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安東縣 명신중학 졸업

철산보통학교 

재학시 일인교사와 충돌, 조선민족혁명당원

 

  崔成章

 (盧喆龍)

24

충남

홍성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선민족혁명당원(南   京區), 盧乙龍의 동생


           제1구대 계속

 

  陳國華

19

평안도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上海 仁成學校 교사

조선민족혁명당특무부원, 南京에서 활동 조선의용군 선전위원

 

  河振東

 (河奉禹)

24

평북

벽동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고향에서 우편배달부,

김원봉과 동거, 민혁당원

 

  李明善

 (文鍾三)

崔翰(본명)

28

전남

(충청)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1943년 전사

 

  文明哲

 (金逸坤)

  (韓光)

26

전남

담양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광주학생운동 참가 투옥

조선민족혁명당

특무부원 

 

  沈星雲

 (沈相徽)

26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상해에서 무선전신학교 졸업

1933년 중국망명,

1943년 전사

 

   關鍵

 (黃載然)

28

吉省

雙陽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남경 중앙군교 재입학

 

  馬德山

 (李元大)

27

경북

영천

부농출신,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원,민족혁명당원1943년옥사(총살 순국)

 

  金武

26

강원

인제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전국 방랑, 머슴살이

해방후 인민군 대좌

 

 文靖珍

 22

 

 

 

 

 李東浩

 23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인민군대좌

 

 金興

 

 

 

 

 

 金河哲

(金河喆)

 21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黃奇鳳

 23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朱革

 23

함북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1942년 山東省靑島에 특파됨

 

 陳漢中

(金漢中)

 25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溤仲天

(李東林)

 26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張文海

(李孝相)

 19

평북

선천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부친과 상해망명

조선민족혁명당원,

인성학교 졸업

 

 張之福

(愼海龍)

 25

경남

거창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奉天에서 점원으로 일함

 

徐相錫

 30

 

 

 

 

 李大成

(蔡東龍)

 24

평북

정주

(평남

강서)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韓一來 아들, 민족혁명당원

 

 馬一新

 24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李萬英

(李明山)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 졸업

 




           제1구대 계속

 

 陳敬誠

(申松植)

 

 

남경중앙군관학교 졸업

 

 

 劉敬

 

 

 

 

 

 黃民

(金勝坤)

 23

전남 

담양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참가

민족혁명당원, 광복회장 역임,

 金鍾의 조카

 

  金華

(金一剛)

 28

함남

김구 특무대 예비훈련소 수료,

민족혁명당원, 공산주의자

 

 宋旭東

 

 

의의 의 의 의      의의열단원

군관학교 武漢분교 수학

6개월간 武漢에서 피체

 

 李嬰如

 

 

 

 

 

 尹治平

(尹瑞童)

 22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점원출신


           제2구대(조선청년전위동맹원, 기타 양자강 이북 제5전구)

 組別

성명

(본명‧이명)

연령

출신

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대장

  李益星

 (李義興)

 27

함북

경성

남경 중앙군관학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 간부


           제2구대 계속

  隊附

 陳元仲

(林仁俊)

 

평북

용천

간부학교‧성자분교 졸업

 

  정치

 지도원

 金學武

(金俊吉)

 27

함북 

온성

南京 中央大 수학

군관학교‧성자분교 졸업

민족혁명당 중앙위원, 조선청년전위동맹원, 중공당입당

제1분대장

 李世榮

 

 

남경 중앙군관학교 졸업

성자분교 견습사관 복무

  隊附

 張重鎭

(張重振)

 24

 

간부학교‧성자분교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북한

항공학교 부교장

제2분대장

 姜振世

(洪順官)

 23

평북

정주

간부학교‧성자분교졸업

조선민족혁명당 廣東지부원

  隊附

 胡哲明

 (韓震)

 25

경기

군관학교‧성자분교졸업,

북상후 중국공산당 가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1943년 12월 병사

제3분대장

 李永新

(金永新)

 

 

 

조선민족혁명당원

  隊附

 韓得志

(李雲南)

 28

평북

정주

北京 평민대학 졸업,

간부학교‧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특무위원

  대원

 李義興

(李益星)

 

 

 

위와 같음

 

 李健宇

(崔昌益)

 42

함북

온성

와세다대학 정경과 수학,

1927년 조선공산당 간부

조선민족혁명당원, 일제하 7년간 복역, 북한 부수상 역임

 

 馬春植

(李鴻炎)

 29

서울

간부학교‧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북한 인민군 여단장

 

 李達

 23

 

北京 평민대학 졸업,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민혁당원,『朝鮮義勇隊』寄稿論客, 혁명자연맹중앙위원


           제2구대 계속

 

 孔明宇

(朱星)

 

경기  개성

적색노조사건으로 5년간 복역, 廣東군관학교 수학

노동자 출신,

조선청년전위동맹원

 

 陳嘉明

(崔章學)

 29

경남

동래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李鐵重

 24

인천

남경 중앙군교 졸업,

성자분교 교관

北京에서 지하공작

華北朝鮮靑年聯合會 위원

 

 崔萬成

 

 

 

 

 

 吳民興

 

 

 

조선청년전위동맹원

 

 文正一

(李雲龍)

 25

경기도

군관학교‧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조선청년전위동맹원, 중공당 입당

 

  白正

 23

 

 

 

 

  高峰

 

 

 

 

 

 金景雲

 

 

간부학교‧성자분교 졸업

 

 

 王克强

(金昌奎)

 26

 

간부학교‧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朴茂

(朴영호)

 24

황해

해주

中山大 수학,

군관학교‧星子分校 졸업

1941년 중공당 입당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金鐵遠

(金斗聲)

 26

서울

中山大 수학,

성자분교 졸업

조선독립동맹 건립 대중병원 院務로 종사

 

 林平

 28

충청도

조선공산당원, 

성자분교 졸업

광주학생운동 참여, 조선청년전위동맹 간부, 42년 병사

 

 胡維伯

 24

 경남

간부학교‧성자분교 졸업

東京에서 中卒,민족혁명당원

 

 陳東明

(白樂七)

24

함경도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졸업

청년전위동맹, 민족혁명당원

 

 鄭如海

(鄭鳳翰)

22

평북

정주

김구계 특무예비훈련소 졸,

항일선전활동 중 사망,

李達의 동생

 

 金鼎熙

(金正熙)

29

평북 정주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星子   분교 졸업

항일전쟁 중 희생

 

 崔鐵鎬

(韓淸道)

23

대전

간부학교‧성자분교 졸업

衡平운동에 가담, 1941년 12월 胡家庄 전투에서 전사

 

 金煒

(金威那)

 

 

배우 金焰의 여동생, 배우

金昌滿의 처, ‘황군의 꿈’ 출연

 

 周恩龍

 

 

 

 

자료: 楊昭全, 󰡔朝鮮民族革命黨與朝鮮義勇隊󰡕, 長春, 吉林省 社會科學院, 1997, 130-135쪽 및 「在支朝鮮義勇隊の情勢」, ≪思想彙報≫ 22, 160-163쪽;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  비평사, 1997; 한상도,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3; 염인호, 「조선의용군 연구」, 국민대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5 등을 참고로 작성.

<표 2> 창립시 조선의용대 대원 학력별 현황

학교(수학‧졸업)

숫자

비율(%)

   군교성자분교

   중앙군교(분교 포함)

   대학

   의열단 간부학교

   황포군교

   간부학교‧성자분교

49

8

9

22

4

21

65.3

10.7

12

29.3

5.3

28


<표 3> 창립시 조선의용대 대원 출신지별 현황

출신지역

숫자

비율(%)

평안도

서울‧경기

경상도

함경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

해외(중국)

13

9

8

8

5

3

2

1

1

26

18

16

16

10

6

4

2

2

합계

50명

100

 

<표 2‧3> 자료: <표 1>을 토대로 작성.


사실 조선의용대 대원 가운데서도 화북지방으로 북상한 대원들 대다수는 중국공산당군인 팔로군은 적극적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는 반면, 장개석의 국부군은 항일에는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공산당 토벌에만 열중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것 같다.21) 그리고 최창익의 동북노선도 초창기에는 그다지 동조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 증언이 있다. 그 실현가능성에 회의를 품은 대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동북노선 또는 만주노선이 크게 알려지고 주목을 받은 것은 나중의 시기라는 것이다.22)

이제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를 토대로 조선의용대 창립 당시의 구성원들에 대해 간단히 검토해보기로 한다. 창건 당시 나이를 파악할 수 있는 조선의용대 대원의 숫자는 모두 68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들의 나이를 평균해본 결과 27.3세로 파악됐다. 한편 당시 구성원들의 나이를 소속 편제별로 조사해보았다. 그 결과 본부 평균은 34.4세(간부진 43.3세, 대원 29.3세), 제1구대 전체는 26.7세(간부진 27.4세, 대원 24.3세), 제2구대는 26.1세로 파악되는데 간부진은 25.7세, 대원은 24.5세였다. 따라서 조선의용대 본부 구성원들이 1‧2구대 구성원들보다 평균 8년 정도 나이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장 김원봉, 기밀주임 신악, 그리고 조장을 맡은 이집중과 김성숙 등 본부 핵심요원들이 모두 40대로 고령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창립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학력을 보면 대부분이 중국 군관학교 星子分校(한인 특별훈련반)를 졸업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현재 파악이 가능한 사람 가운데 무려 65.3%에 이르는 49명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은 창건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동질성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김원봉이 세워 운영했던 의열단 간부학교(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자, 또는 이 학교를 마치고 성자분교를 졸업한 사람이 각각 22명과 21명으로 파악된다. 이는 김원봉의 조직화‧세력화 과정이 조선의용대 창립으로 구체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표 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학력은 당시 다른 무장조직보다 훨씬 높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23) 결국 이는 추후 조선의용대의 다양한 활동을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창립 초기 대원들의 출신지별 분포는 <표 3>과 같다. 이 표를 통해 초기의 조선의용대는 평안도와 서울‧경기, 경상‧함경도 출신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장 김원봉이 경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상도 출신 대원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표 1>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이 표기되어 있지만, 1938년 창건 당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대원은 별로 없었다. 대원 가운데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무려 34명으로 파악되며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한 사람도 9명으로 조사된다. 그외에도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정치단체에 가입한 사람도 있는데, <표 1>을 통해 우리는 조선의용대가 단순한 군사조직이 아니라, 정치조직의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민족해방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민족혁명당의 주요 멤버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군사조직’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Ⅲ. 조선의용대의 개편과 화북(華北)지방 진출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창건된 이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중국 국민정부군에 배속되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자체 역량의 한계 때문에 독자적 활동을 전개하기는 곤란했지만, 중국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항일전선에 분산 배치되어 중국군에 대한 일본어 교육 및 일본군의 관습․성질(행태) 등을 알리는 등의 정치공작, 일본군에 대한 군사정보 수집과 반전 선전활동, 함화(咸話) 등을 통한 일본군에 대한 투항권고, 일본군 포로심문, 일본군의 후방교란을 위한 선전공작 등 특수분야 작전에 종사하였다.24) 이는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이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일본의 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는 창건 초기부터 중국군의 필요에 따라 각 지역에 분산배치되었다. 즉 박효삼(朴孝三) 등 43명의 제1구대원들은 중국군 제9전구 호남성 장사(長沙) 방면에 배치되었고, 이익성(李益星) 등 32명의 제2구대원들은 처음에는 중국군의 제1(洛陽 방면)․3전구(江蘇省 북부)에 배치되었다가 다시 제5(洛陽 방면)․10전구(西安 방면)로 이동 배치되었던 것이다.25) 그러나 제1구대원들은 다시 호남성 형양(衡陽)에서 두 지대로 나뉘어 절반 가량은 화북 방면으로 가고 나머지는 남녕(南寧) 및 강서(江西) 방면으로 배치되었다.26) 이들 대원들의 활약상은 조선의용대에서 간행한 󰡔朝鮮義勇隊(通迅)󰡕 등 각종 발간물을 통해 대략 알아볼 수 있다.27) 

그런데 조선의용대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대원 모집활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면서 초창기 97명에 달했던 인원이 1년 뒤인 1939년 10월 하순 경에는 모두 155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28) 이에 김원봉과 주함당․반문치 등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소요경비의 증액과 조선의용대의 조직개편을 요구하였다.29) 이 때 제출한 보고서에는 ‘조선의용대 조직조례(지도위원회 조직조례와 隊本部 조직조례 등이 있음)’와 ‘조선의용대 조직계통표(지도위원회 및 대본부 조직계통표로 구분됨)’ 등이 따로 첨부되어 있었는데,30) 이는 지도부의 조선의용대 조직개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내용의 하나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는 조선의용대가 중국항전에 참가하는 것을 지도함으로써 중한연합전선을 강화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조선혁명을 촉성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한다”고31)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의용대의 국제지원군으로서의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조선의용대가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반제반봉건 투쟁과 한민족의 해방을 위한 독자적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었던 것이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는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의 위와 같은 보고를 거의 그대로 비준하였다. 그리고 1940년 6월 12에는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 조직규정’과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 편제표’ 등도 승인하였다. 또 같은 해 7월 3일에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훈령(訓令)을 통해 위의 규정을 약간 수정토록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여전히 조선의용대지도위원회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직예(直隸)’하며, 조선의용대를 중국항전에 참가시킴으로써 중한연합전선을 강화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조선의 혁명(즉 독립-필자)을 촉성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었다.32) 따라서 이같은 조선의용대의 근본적 제약은 추후 한국광복군이 ‘행동9개準준승(準繩)’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상황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1940년 2월 조직편성을 보면 초기의 ‘본부’체제가 ‘총본부’체제로, 그리고 1‧2구대로 구분되던 조직이 3개 지대와 유동선전대, ‘3‧1소년단’과 ‘부녀복무단’ 등으로 확대‧발전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뒤의 부록 참조). 다만 일제측 정보에 의하면 유동선전대는 1940년 12월 이후 해산되었고, 대원의 이동이 많았다고 한다.33)

1940년 당시 조직표를 볼 때 주목되는 사항은 두 명의 일본인이 자원입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선의용대의 ‘국제지원군’적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940년 2월 당시 총본부의 구성원은 상당한 변동이 있었지만 평균 연령은 34.1세로 초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한편 1941년 5월경 조선의용대 편제와 대원 명단은 <표 4>와 같다. 1940년 조직편성과 거의 흡사하다.

현재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을 토대로 출신지역을 조사한 결과는 <표 5>와 같다. 파악가능한 사람이 소수이기 때문에 이 결과로만 전체 구성원을 판단할 수는 없으나 <표 5>의 결과는 1941년 5월경 조선의용대가 평안도 출신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경상도‧함경도 인사들도 많다. 서울‧경기지역 인사들이 대폭 줄어들었는데, 이 자료가 미비하여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형편이다.



<표 4> 1941년 5월경 조선의용대 편제 및 대원 명단


          본부(중국 국민정부 정치부 소속)

 직책

성명

연령

출신

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총대장

金元鳳

 44

경남

황포군관학교 4기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부대장

 申岳

 51

 

황포군관학교 5기

 조선민족혁명당원

정치조 조장

金學武

 30

함북

南京 中央大 수학

 조선청년전위동맹 간부

정치조 조원

 李達

 32

평북

北京 평민대학 졸업

 조선혁명자연맹 중앙위원

 선전대장

金昌滿

 28

함남

중산대학 수학

 청년전위동맹간부

 총무부장

李集中

 48

 

황포군관학교 4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검사위원

 서무주임

李海鳴

 37

 

군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검사위원

 외교주임

韓志成

 28

경북

중앙정치학교 대학부

 조선청년전위동맹 간부







         부녀복무단

 직책

성명(본명‧이명)

연령

출신 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단장

林哲愛(朴次貞)

 31

경남 동래

동래 일신여중

조선민족혁명당원, 김원봉의 처

부단장

  張秀延

 22

 

 

조선민족혁명당원, 박효삼의 처

 단원

  李華林

 35

평남 평양

중산대학 수학

민족혁명당원, 조선공산당 입당

 단원

  韓泰恩

 22

 

 

조선민족혁명당원, 이정호의 처

 총원

  20여명

 

 

 

 


         제1지대(중국군사위원회 제1전구 사령부 소속)

직책

성명

(본명‧異名)

연령

출신

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지대장

 王子仁

 (崔仁)

 30

 평북

南京 중앙군관학교 10기

 조선청년전위동맹원

부지대장

 張重光

 (康炳學)

 25

 평남

 평양

군관학교 星子分校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북한인민군 사단장

정치

지도원

 胡一華

 (李相朝)

 28

 경남

 동래

중산대학 수학, 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53년휴전대표,소련대사 역임

정치

助理員

 胡哲明

 (韓震)

 28

 경기

중산대학 수학, 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중국공산당 입당 주도

          제1지대 계속

 대원

 王志延

 (韓斌) 

 37

연해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여

러시아에서 파견됨

민족혁명당원, 조선독립동맹 중앙위원,

중공당 입당

 

 李貞浩

 29

 

중산대학 수학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金仁哲

 (金剛一)

 32

 

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1942년 병사

 

 林平

 31

충청도

성자분교 졸업, 朝共黨 경력

조선청년전위동맹원

 

 張重鎭

 27

 

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楊高峯

 26

 

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陳漢中

 27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의열단원출신

 

 金學鐵

(洪性傑)

 26

함남

원산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원

 조선민족혁명당원, 1940년 중국공산당

입당, 41년 부상 피체

 

 馮仲天

(李東林)

 30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북한 인민군 대좌

 

 陳敬誠

(申松植)

 28

 

광동군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趙少卿

 25

서울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인민군 대좌

 

 朱然

(裵俊逸)

 22

 

성자분교 졸업, 上海

佛租界 中法學堂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佛語 능통,  인민군 대좌

 

 李東浩

 24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인민군 대좌

 

 李大成

 27

경북 대구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제1지대 계속

 

 金基賢

 24

 

 

 조선민족혁명당원,

金煒 언니

 

 孫一峰

 29

평북 의주

3‧1운동 가담, 중앙군교 廣東分校 졸,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원, 국민정부군 중대장 근무, 41년 12월 전사

 

 胡建

(金在浩)

 27

 

특별훈련반 졸업

민족혁명당원, 조선청년전위동맹원

 

 張重鎭

 27

 

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楊高峯

 26

 

성자분교 졸업

조선청년전위동맹원

 

 陳漢中

 27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의열단원출신

 

 金學鐵

(洪性傑)

 26

함남

원산

성자분교 졸업, 의열단원

 조선민족혁명당원, 1940년 중국공산당

입당, 41년 부상 피체

 

 馮仲天

(李東林)

 30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북한 인민군 대좌

 

 陳敬誠

(申松植)

 28

 

광동군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趙少卿

 25

서울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인민군 대좌

 

 黃民

(金勝坤)

 26

전남 담양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朱然

(裵俊逸)

 22

 

성자분교 졸업, 上海

佛租界 中法學堂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佛語 능통

 인민군 대좌

 

 李東浩

 24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인민군 대좌

 

 李大成

 27

경북 대구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원

 

 金基賢

 24

 

 

 조선민족혁명당원, 金煒 언니

 

 孫一峰

 29

평북 의주

3․1운동 가담, 중앙군교 廣東分校 졸,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원, 국민정부군 중대장 근무, 41년 12월 전사

 

 胡建

(金在浩)

 27

 

특별훈련반 졸업

민족혁명당원, 조선청년전위동맹원


         제2지대(제5전구 사령부 소속)

  직책

성명(본명‧이명)

연령

출신

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지대장

   李益星

 30

함북

군관학교 星子分校 소대장

조선청년전위동맹

부지대장

   陳東明

   (白樂七)

 29

함경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조선청년전위동맹

  정치

 지도원

   胡維伯

 27

경남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조선청년전위동맹

1942년 전사

           제2지대 계속

  대원

  朴茂(박영호)

 28

해주

 중산대학 수학, 중공당 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姜振世(洪順官)

 26

평북 정주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성자분교

조선청년전위동맹

 

   趙明淑

 

 

 신입대원

여성,조선청년전위동맹

 

   韓鐵翼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鄭麟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王連義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洪致彦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대원

   吳桂星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韓贊据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金英俊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金承殷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申泰植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申九燮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郭東曙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崔桂華

 

 

 신입대원

조선청년전위동맹


         제3지대(제9전구 사령부 소속)

직책

성명

연령

출신

지역

학력 및 경력

비고 

지대장

朴孝三

38

함남

 황포군관학교 졸업, 동교 교관

조선민족혁명당

부지대장

金世日

(金世光)

31

평북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정치지도원

  王通

 (金鐸)

29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정치助理員

楊民山

30

 

 中國 華北大學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제3지대 계속

대원

李春岩

35

 

 星子分校 3期 敎官

조선민족혁명당

 

王理元

23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金河鐵

26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陳國華

22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金華

29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金興

36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趙烈光

31

 

 南京 중앙군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馬德三

32

 경북   영천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李元大

 

馬一新

26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崔成章

26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李志剛

26

 

 南京 군관학교 졸업

민족혁명당,李相勳


           제3지대 계속

 

張平山

25

 평북

신의주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민족혁명당,申聖鳳

 

葉鴻德

27

 

 남경 군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張之福

27

 

 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劉萬華

26

 

 남경 군관학교 졸업

조선민족혁명당

 

文德洪

40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李鐘哲

28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李成萬

32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劉相坤

25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姜子生

(姜子星)

28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崔丙植

29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呂運吉

37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崔鳳錄

 

 평북

신의주

 신입대원, 화북지방 행상출신

조선민족혁명당,

 강제입대

 

劉文一

 

 

 신입대원

민족혁명당, 피체됨

 

成德坤

 

 

 신입대원

민족혁명당, 피체됨

 

車鏞徹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李萬華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宋福德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金月星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伊藤進

 

 

 신입대원, 일본군 포로 출신

일본인,민족혁명당

 

松井

一三

 

 

 신입대원

일본인,민족혁명당

 

大竹

義雄

 

 

 신입대원

일본인,민족혁명당

 

井村

쓰키오

 

 

 신입대원

일본인,민족혁명당

 

中村

芳子

 

 

 신입대원

일본인, 민족혁명당

 

金聲烈

 

 

 신입대원

조선민족혁명당


          3‧1소년단

직책

성명(본명‧이명)

연령

출신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단장

崔東善

 

 

 

 

 총원

20여 명

 

 

 

 

자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716-720쪽; 󰡔特高月報󰡕 1943년 1월호 附表(在上海 日本

     大使館 司政部 警務課 조사);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참고로 작성.




<표 5> 1941년경 조선의용대 대원 출신지별 현황


출신지역

숫자

비율(%)

평안도

경상도

함경도

서울‧경기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해외(연해주)

10

8

7

3

1

1

1

1

31.3

25

21.9

9.4

3.1

3.1

3.1

3.1

합계

32명

100

자료: <표 4>를 토대로 작성.


<표 4>에 명시한 바와 같이 조선의용대 본부와 각 지대는 한 지역에 집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부와 각 지대가 각각 따로 분산하여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본부는 중경(重慶)에 있는 중국 국민정부 정치부에, 각 지대는 중국 국민정부군 산하 제1․5․9전구 사령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의용대가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으로 창립되었고, 이 시기까지도 중국측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독자적 활동 및 작전능력을 갖추지 못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의 활동근거지로 이동한 다음에도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이하의 <표 6> 참조). 왜냐하면 <표 6>에서 보듯 제1‧2‧3대는 여전히 중국공산군과 함께 지역별로 달리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 역시 자신들의 생존문제와 조선의용대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조선의용대원들을 분산 배치하였던 것이다.      

위의 표에서 주목되는 점은 제2지대와 제3지대의 경우 신입대원이 다수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선의용대측에서 지속적인 초모공작을 전개하고 중국 화북지방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선전 홍보활동을 벌인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제2지대는 13명, 제3지대는 무려 18명이나 신입대원들이 확보된 것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제3지대에 5명의 일본인들이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원입대 혹은 조선의용대의 선전공작에 동조하거나, 혹은 일본군에 징병되었다가 포로가 된 뒤 전향한 자 등 다양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34)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본인 대원의 존재는 조선의용대가 바로 국제적 무장대오임을 실제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위의 표에 나오지는 않지만 조선의용대에는 ‘권혁(權赫)’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진 일본 여성대원이 있었다(뒤의 <표 6> 본부 참조). 이 일본인은 조선의용대의 취지에 공감하고 1938~39년경 조선의용대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특이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1941년 6월 28일 화북지방의 전선에서 활동하다가 다른 조선의용대원들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延安)으로 왔다. 이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섬감녕변구분회(陝甘寧邊區分會)는 조선의용대원들의 연안 이동을 환영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때 그녀는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감상과 연안에 온 후의 감상을 이야기하여 조선의용대원은 물론 다수의 중국인들까지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35)  

물론 이들 대원 가운데 자발적 의사가 아니라 강제로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제3지대 대원 최봉록(崔鳳錄)의 경우 동생 최동광(崔東光)과 함께 중국 화북지방으로 행상을 나갔다가 중국 국민정부군에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후 이들은 국민정부군에 의해 조선의용대로 넘겨져 반강제적으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36) 그러나 이들처럼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입대한 경우도 조선의용대에서는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새로운 항일투쟁의 전사로 거듭나게 하는 자체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최봉록‧최동광 형제는 입대시의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후일 항일투쟁에 적극 참가함은 물론, 조선의용대의 자랑스런 핵심대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37)

또 3‧1소년단이 산하 조직으로 구성된 점은 조선의용대의 밝은 미래를 예견케 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라나는 새세대들이 장래의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촉망되기 때문이다.

<표 4>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제2지대의 경우 전원이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입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3지대도 전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있으며,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원이 23명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전위 동맹원도 12명이 있어 양 정치조직 참여자가 골고루 참가하고 있다. 1941년 5월경 조선의용대 본부 구성원의 평균연령은 37.3세, 부녀복무단은 27.5세, 제2지대 간부진은 28.7세, 그리고 제3지대의 경우 장교들은 32세, 사병(대원)들은 28.9세의 평균연령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화북지대 대원 전체의 평균연령은 29.5세로 파악된다. 역시 본부와 장교집단이 고령이고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성립과 그 구성원


1.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성립


조선의용대는 1941년 여름 중국공산당 계열의 팔로군(八路軍)이 활동하고 있던 화북지방으로 북상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그곳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한인 청년들과 함께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건립하고 중국공산당 세력과 연계하여 지속적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38)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이듬해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대가 북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었지만, 최근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그 원인이 규명되었다. 특히 염인호는 새로 공개된 자료들을 토대로 상세히 규명하였다.39)

선의용대원으로서 호가장(胡家庄) 전투에 참여한 뒤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힌 김학철(金學鐵, 본명 洪性杰)에 따르면 중국공산당 세력이 활동하고 있던 화북지방으로 북상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대원들조차 실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은 소수였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의용대의 성격은 공산당의 전위조직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대중조직의 성격을 띠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40)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1년과 1942년 중국공산군과 함께 여러 번의 전투를 치르며 상당수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이들은 나중에 ‘순국열사’로 추앙되며 의용대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41)


2. 화북지대 구성원 고찰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과 연계를 맺기 시작한 시기는 1939년 초부터 본격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김학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시기가 이 해 2월이었던 것이다. 특히 상당수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39년 조선청년전위동맹원을 주축으로 한 제2지대 안에 중국공산당의 지하조직이 세워진 뒤부터였다.42) 당시 제2지대는 호북성 제5전구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공산군 신사군(新四軍)의 대홍산(戴洪山) 정진종대(挺進縱隊)사령부 당위원회(黨委員會)는 1939년 말경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호철명(胡哲明)을 서기(책임자)로 하는 비공개 지하조직을 건립하였다. 그 후 이 중국공산당 소조(小組)는 상당수의 대원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였고, 조선의용대 전체의 핵심적 역량으로 성장했다고 한다.43) 또한 이들 조직은 조선의용대의 북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선의용대원들이 중국공산당 활동지역으로 이동한 뒤 상당수의 대원들이 입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 대원 가운데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필자가 현재 파악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입당자 숫자는 23명 정도이다.44) 물론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더 있을 것이다.

현재 파악할 수 있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구성원들의 현황은 <표 6>과 같다. 본부 장교들의 평균 연령은 33.8세, 제1대는 28세, 제2대는 28.6세, 제3대는 28세로 조사된다. 화북지대 전체 평균 나이는 29.5세이다. 지도집단의 출신지역은 대부분 함경도(5명), 평안도(3명)로 파악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조선의용군)가 해방 이후 중국 동북지역 교포사회나 북한에 진출하여 상당한 정치세력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지역출신 배경이 아닌가 한다.

조선의용대가 정식으로 창립된 뒤, 이후 중국공산당 및 그 산하의 팔로군 활동지역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연대하여 투쟁한 이후의 시기에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조선의용군) 안의 (중국)공산당원 숫자는 모두 합쳐도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45) 특히 조선독립동맹 핵심멤버의 한 사람인 김두봉(金枓奉)이나 조선의용대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윤세주(尹世冑, 石正)조차 공산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46)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조선의용대가 태항산 지역으로 가기 전인 1939년이나 1940년경에도 조선의용대 안에 중국공산당 소조가 건설되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지만,47) 공산당원은 여전히 소수였던 것이다. 이는 결국 조선의용대 구성원들의 성향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공산당원이 다수를 차지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의용대의 성격 자체를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김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조선의용군) 한개 중대가 150명이면 공산당원이 기껏해야 7~8명, 많으면 10명 정도였다고 한다.48) 따라서 우리는 더욱 객관적이며 다양한 시각에서 조선의용대의 구성원들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표 6>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구성원 현황


         본부

직책

성명(본명‧異名)

연령

출신 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지대장

  朴孝三

  38

함남 함흥

황포군관학교 4기

 

 부지대장

  李益星

  30

함북 경성

남경 중앙군교 졸업

 

 정치지도원

  金學武

  30

함북 온성

군교 성자분교 졸업

중공당 입당

 留守隊長

  呂運吉

  37

 

 

 

 留守隊員

崔昌益, 王志延, 張振光, 崔孫, 馬春植, 李經民, 楊民山, 李達, 李大成, 李哲俊, 朴成浩, 金平, 村尙, 申泰植, 胡一華, 鄭康, 朱然, 張志福, 文正元(女)  張秀延(女), 趙明淑(女), 權赫(女), (李相朝)

          제1대(安陽‧磁縣방면, 太行軍區 제5군 분구)

    직책

성명(본명‧이명)

 연령

 출신지역

 학력 및 경력

  비     고

대장

 李益星

30

 함북경성

남경중앙군교 졸

 

정치지도원

 陳漢中(金漢中)

28

 

군교성자분교 졸

 

제1분대 분대장

 河振動

27

 평북벽동

군교성자분교 졸

 

제2분대 분대장

 李志剛

27

 

남경중앙군교 졸

 중공당 입당

제2분대 대원

崔指南, 李文浩, 李漢中, 金基億, 尹治中, 張重鎭, 韓鐵翼, 崔鳳元, 劉相坤, 金成萬, 吳柱昇, 王子仁, 車鏞徹, 關建, 崔亞立, 王輝, 夏醫堂, 閔周鎬, (黃載衍)


          제2대(贊皇‧莊代‧臨城방면, 태항군구 제1군 분구)

직책

성명(본명‧이명)

연령

출신지역

학력 및 경력

비고

대장

金世光(金世日)

 31

평북용천

군교특훈반 졸

 

정치지도원

馮仲天(李東林)

 29

 

군교성자분교 졸

 

대원

柳新(金容燮)

 26

함경도

군교성자분교 졸

중공당 입당

제1분대 분대장

趙烈光

 28

경기도

군교성자분교 졸

 

제1분대 대원

崔啓源, 崔鳳錄, 張禮信, 高相喆, 許金山, 奉五植, 韓淸道, 金剛, 申容純, (金榮濟), 金興(?)

제2분대 분대장

   孫一峰

 29

평북의주

군교廣東分校 졸

1941년 전사

제2분대 대원

金學鐵, 朴喆東, 王現淳, 趙少卿, 文明哲, 宋銀山, 金聖國, 郭東曙, 趙寬, (余成三)


         제3대(順德방면, 태항군구 제6군 분구)

직책

성명(본명‧이명)

연령

출신지역

학력 및 경력

비고

대장

 王子仁(崔仁)

  30

평북

남경중앙군교 졸

’35혁명동지회

정치 지도원

 朴茂

  27

황해 해주

군교성자분교 졸

중공당 입당

제1분대 분대장

 韓慶(韓璟)

  24

충남 부여

낙양군교 졸

 

제2분대 분대장

 關鍵(黃載然)

  31

중국 길림성

성자분교 졸

 

제2분대 대원

金雲國, 姜子生, 申億(韓靑, 張元福), 張平山, 金華, 李東浩, 陳國華, 朱文波, 李鐘哲, 楊界, 李華林

자료: 內務省 警保局 保安課, 󰡔特高月報󰡕 1943.1 附表 「在支不逞鮮人團體組織系統表」;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참고로 작성.


특히 이러한 성격은 조선의용대 대원 자신들이 간행한 발간물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즉 조선의용대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체의 성격을 스스로 ‘계급의 부대’가 아니라 ‘민족의 부대’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궁극적 투쟁 목표가 중국항전에 참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독자적 역량에 기초한 무장대오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49) 이는 조직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한 나름대로의 고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조선의용대의 성격은 추후 자신들의 여건미비로 중국공산당측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상당부분 퇴색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 말경까지 조선의용대의 이러한 주체적 인식은 이 무장세력의 존재가치를 재평가하게 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1년 말에서 42년 초에 후방 침투 공작조를 운용하여 적의 정보수집이나 특수작전, 기타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명단과 간단한 내역은 아래 각주에 간단히 소개한다.50)  

Ⅴ. 일부 대원의 한국광복군 편입과 조선의용군으로의 발전


1. 일부 대원의 한국광복군 편입과 그 편제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으로의 편입은 잘 알려진 대로 중국 국민정부측의 강력한 종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원봉 등 조선의용대 대원 출신 인사들은 광복군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조선의용대 대원이라는 차별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51) 조직이나 편제상으로는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독립되어 편제되었던 배경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상당기간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경위야 어쨌든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위상을 강화시키고 중국 내 민족해방운동의 역량을 제고시켰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민족협동전선적 성격이 강화되었음도 당연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의용대의 창건과 운용과정에는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대체로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대일항전에 소극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또한 자신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대해 내심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52) 여기에 조선의용대원들의 뛰어난 자질과 항전의지를 주시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의 포섭책도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다. 결국 80% 가량의 대다수 조선의용대원들이 중국 화북지방으로 북상하여53) 중국공산당 세력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국측의 지원을 토대로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중국공산당 세력으로의 가담은 중국 국민정부의 의구심을 일으켜 나머지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대폭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중국정부는 조선의용대의 북상 직후인 1941년 가을부터 김구와 김원봉에게 합작을 종용하였던 것이다. 특히 장개석은 1941년 10월 30일 중국군사위원회 총참모장 하응흠(何應欽)에게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모두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켜 직접 장악‧운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4) 그러나 양 조직의 통합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에 중국군사위원회는 1942년 5월 15일 일방적으로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을 강요하였다. 결국 이러한 진통 끝에 중경 지역에서 횔동하고 있던 잔류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흡수되고 대장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과 제1지대장을 겸하게 되었다.55)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정식으로 편제되는 시기는 거의 두 달이나 지난 뒤였다. 즉 조선의용대는 그 해 7월 ‘조선의용대 개편선언’을 발표하고 한국광복군으로의 편입을 정식으로 천명하였던 것이다.56)

하지만 한국광복군으로 편제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한동안 어수선하고 복잡한 분위기가 감돌아 본격적 대일항전을 전개하기 어려웠으므로 후방근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1943년 김원봉 대신 이집중(李集中)이 제1지대장에 임명되고, 이어서 항일투쟁 경험이 풍부하고 중국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채원개(蔡元凱)가 지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차츰 정비․강화되었다고 한다.57)



<표 7> 한국광복군 제1지대 편제 및 직원(1942년 5월)


          본부

직책

인원

계급

성명

연령

국적

지대장

1

上校

金若山

44

한국

부지대장

1

中校

申岳 

52

한국

부관 

1

上尉

 孫漢林

25

중국

비서

1

少校

李達 

27

한국

司書

2

少尉

 張競群

26

중국

총무조장

1

少校

李集中

49

한국

組員

1

上尉

寥西屛

28

중국

사서

1

准尉

李友松

33

중국

정훈조장

1

少校

金仁哲

33

한국

組員

3

上尉

李貞浩

30

한국

조원

 

上尉

韓志成

29

한국

조원

 

中尉

周世敏

 

한국

司書

1

准尉

王成宇

 

중국

司藥

1

 

李明守

27

중국


          제1구대

직책

인원

계급

성명

연령

국적

대장

1

少校

金俊(金鍾)

44

한국

副區隊長

1

上尉

金昌國

42

한국

서기

1

中尉

郭以昌

25

중국

특무상사

1

下士

 

 

 

간호사

2

下士

 

 

 

제1분대장

 

 

金石山

24

한국

제2분대장

 

 

林平

32

한국

제3분대장

 

 

王子仁

31

한국




          제2구대

직책

인원

계급

성명

연령

국적

대장

1

少校

李蘇民

34

한국

副區隊長

1

上尉

康弘九(이명 康晉)

30

한국

서기

1

中尉

金志剛(李志剛:필자 )

26

한국

제1분대장

 

 

鮮宇國風

25

한국

제2분대장

 

 

成玄園(成周寔)

46

한국

제3분대장

 

 

文正一

29

한국


          제3구대

직책

인원

계급

성명

연령

국적

대장

1

少校

朴孝三

39

한국

副區隊長

1

上尉

李益星

31

한국

서기

1

中尉

 

 

 

특무상사

2

上士

 

 

 

간호사

2

下士

 

 

 

제1분대장

 

 

 

 

 

제2분대장

 

 

楊民山

29

한국

제3분대장

 

 

趙烈光

29

한국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5, 정음사, 81-82쪽 및 「대한민국 24년 10월 27일자 군무부장 曹成煥의 군사보고서」, 󰡔독립운동사󰡕 제4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940-941쪽.


<표 7>은 1942년 5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으로 한국광복군에 편제된 인원 현황이다. 이를 통해 1942년 전반기 중경 일대에서 횔동하고 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표 7>의 명단은 1942년 5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한 명단이기 때문에 실제로 중국 각지에서 분산되어 있던 대원들의 활동지역을 고려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표 7>에 나오는 박효삼과 이익성, 이지강(李志剛)․문정일(文正一) 등은 이미 북상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표 4>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명단 참조).

이러한 사실은 <표 8>을 통해 확인된다. 즉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1942년 11월 5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주임 하응흠에게 보낸 양곡 지급요청 공함(公函)에는 39명의 조선의용대 출신 한국광복군 제1지대 대원 명단이 나온다. 이 명단을 보면 <표 7>의 명단과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본부의 간부진과 분대장 등을 제외하면 분대원(25명)은 1942년 5월 당시의 편제구성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이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참가자들과 중경에 잔류하여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성향이나 학력, 경력 등을 비교분석해 볼 경우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하는 문제도 중요한 연구주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 고찰을 할 수 없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공통점 못지않게 상당한 차별성이 있으리라고 추정된다.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표 8>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보낸 공함을 통해

확인되는 조선의용대 출신 광복군 제1지대 대원 명단

직책

명단

분대원 명단

支隊附

申岳

馬一新, 鄭象山, 王現德, 徐振武, 韓泰恩, 金鍵玉, 金福玉, 尹虯雲, 崔友江, 張熙守, 梁東根, 金令洲(金尙德), 朴始昌, 崔昌禮, 陳嘉明(崔障學), 王通, 尹澄宇, 曹斌, 李蘇元, 文靖珍, 宋英順, 李丙淑, 崔東仙, 金尙燁(金枓奉 딸), 朴新淑

副管

孫漢林

비서

李達

司書

張競群

사서

寥峻德

총무조장

李集中

組員

寥西屛

사서

李友松

組員

周世敏

組員

韓志成

司書

王成宇

軍醫

韓錦源

司藥

李明守

분대장

成玄園

(成周寔)

합계

                                 39명

자료: 「광복군 제1지대원 家屬의 양곡지급에 관한 건」, 󰡔자료 한국독립운동󰡕 3, 추헌수 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184-185쪽.






2.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조선의용군으로의 개편과 만주 진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되는 등 정세 변화에 따라 1942년 7월 마침내 조선의용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러한 조선의용군으로의 개편은 단순히 명칭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조선의용군이 본격적 군사‧정치집단화를 시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용군으로의 변신은 중국공산당의 지원과 협조를 바탕으로 그들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한편, 해방후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전망을 모색한다고 하는 조선의용대 창설 이래 한인 민족해방운동가들의 숙원을 실현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여기에 중국동북지방(만주)을 거쳐 궁극적 투쟁목표인 조국 해방전쟁의 실현, 즉 동북노선의 구체화라는 전략적 목표도 있었다.

1938년 10월 무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가 창건될 때는 국공합작 기간으로 이 무렵에는 중국국민당의 후원을 받던 김원봉이 영도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의용대는 무정․최창익․이유민 등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한‘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연계하여 이듬해 7월‘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로 개편되었다. 1942년 12월 임시정부 의정원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였다. 이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부와 북상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사실상 별개의 조직이 되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1년 1월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 전방총사령부 소재지인 산서성(山西省) 동욕(桐谷)에서 성립하였다. 이 청년연합회는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던 소수의 한인 당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연합회는 "전 화북의 조선청년을 단결시켜 조국광복의 대업에 참가시킬 것"등 6개항의 강령을 채택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한 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도 발표하였다.58) 이후 청년연합회는  조선의용대 대원의 대부분을 중국공산당 활동지역인 화북지방으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했다.

조선독립동맹은 1942년 중반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8월 중순부터는 중국동북(만주)으로 이동하였다. 독립동맹은 중국공산당, 특히 모택동의 노선을 수용하고 그것을 추종하기로 했다. 독립동맹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신민당은 1945년 8월 해방 직후 모택동의 논리와 유사한 '신민주주의론'을 국가건설론으로 내세운 것을 볼 수 있다.59)

1945년 8월 조선의용군의 무정(武亭) 등은 조선독립동맹과 별개의 독립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조선의용군의 중국 국공내전 참전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대일참전이 결정되면서 중국공산군 총사령 주덕(朱德)이 화북(華北)에 근거를 둔 조선의용군에게‘동북(만주)’과 조선해방을 위해서 만주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부터였다.60) 이 명령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대항하면서 중국 동북지방을 장악하기위해 한인 부대를 동원하는 의미, 나아가 한인들의 총체적 역량을 동원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61) 

그러나 조선의용군에 대한 고찰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고찰은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62)



Ⅵ. 맺음말 :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과 구성원의 특징


조선의용대의 창립시 여기에 참가한 구성원들은 사실상 김원봉 계열의 인맥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는 김원봉 등의 조직화‧계열화 작업이 일정하게 성공하고 있음을 뜻한다. 조선의용대 구성원의 자질은 거의 대부분이 군관학교나 군관학교 부설 훈련과정을 마치는 등 당시의 다른 항일무장 세력, 즉 만주 빨치산 세력이나 광복군보다 비교적 우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당시에도 이들의 자질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중국인이 있었다.63)

또한 조선의용대 대장을 지냈던 김원봉 역시 조선의용대가 “군중 단체가 아니라 간부집단”이며,64) “관내에서 제일 우수한 군사정치 간부의 절대 다수 골간(骨幹)으로 조직된 간부집단”이라고65)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즉 그는 조선의용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일종의 半군사‧半정치집단으로 자기규정했으며,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과업수행의 일익을 담당할 기간인재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거의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의 이러한 뛰어난 인적 구성은 후일 조선의용군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정치세력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자못 크다. 더욱이 조선의용군은 해방 직후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 인민군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함으로써 한국현대사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과 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낸 최창익의 경우 1952년 11월부터 1956년 9월 사망할 때까지 북한 내각의 부수상겸 정무원 부총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김창만(金昌滿) 역시 1962년 10월부터 1965년 12월까지 같은 직책을 맡는 등 조선의용대 출신 인사는 북한 고급정치간부의 인재 풀(pool)로 작용했다. 또 조선의용군 부사령과 독립독맹 중앙위원을 역임한 박일우(朴一禹)는 1948년 9월부터 1952년 10월까지 4년이 넘는 동안 내상(內相, 한국의 내무부 장관)을 지내는 등 초창기 북한정권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66) 

특히 조선의용대의 초기 구성원들이 군사학교를 졸업하였거나 대학에서 수학한 경력이 있는 등 소수정예의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인적 구성을 보였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조선의용대의 규모가 커져 신입대원들이 참가하면서 이러한 인적 구성은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된다. 즉 다양한 출신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원들의 자질이 그만큼 대중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판명되지만, 오히려 구성원들이 여러 갈래로 다양해지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결국 조선의용대의 참가자 또는 그 구성원들은 일부는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었고, 또 다른 일부 세력은 북상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됨으로써 중국 관내의 핵심적 양대 무장세력-즉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인적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의용대의 조직화와 세력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조선의용대가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한국현대사에도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서 확인한 바와 같이 조선의용대는 출범부터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지원과 통제가 상당한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음도 확실하다. 1941년 중반 다수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화북지방으로 북상하는 배경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의용대의 입장에서 볼 때 국민당측의 지원과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서의 간섭과 통제는 조선의용대 구성원들의 당초 의도-한인 대중의 획득과 그를 통한 조국 해방전쟁의 전개-와는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는 출범 초기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1년 반이 안되는 짧은 기간에 대원이 314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조직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만큼 이 조직이 활성화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조직의 인적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대중의 획득과 그를 통한 전술․전략적 목표의 달성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다수 조선의용대원들의 북상 이전 시기까지를 한정해서 볼 때 조선의용대의 운용과 조직의 편성, 부대의 분산 배치 등은 중국 국민정부측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의용대가 갖는 한계도 자명하다.

조선의용대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조선의용대(화북지대, 나아가 후일의 조선의용군)는 중국공산당 및 그 산하의 공산군과 함께 연대하여 투쟁하면서도 정작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대략 50여명 내외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요소만으로 조직의 성격을 판단하기에는 무리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와 거기에 참여한 구성원들을 일률적으로 좌파계열의 조직이나 인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핵심적 인물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67) 강령이나 구체적 활동내용을 볼 때도 이러한 시각은 유효하다고 본다.

조선의용대 구성원들은 주로 평안도‧함경도‧경상도 출신 인사들이 많았고 간부진도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 창립 당시 평균연령은 27.8세, 1941년 중반 북상한 뒤 화북지대 전체 구성원의 평균연령은 29.5세로 파악된다. 이는 결국 조선의용대 참가자들이 별다른 변동 없이 그대로 조직에 헌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의용대가 전반적으로 급진적‧진보적 성향을 보였다고 평가되는 원인을 이러한 젊은 나이, 고학력, 다양한 정치활동 경험 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해방 후의 활동을 고려할 때 이들이 갖는 이러한 속성이 그들의 향후 진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과 변천, 구성원의 특성 등 상세한 분석을 하지 못한 미흡한 부분은 추후 별도의 논고를 통해 수정․보완할 것을 기약하고자 한다.68)

조선의용대 창설 70주년이 되는 때이지만,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사회나 중앙(정부)의 차원에서는 거의 무관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반면, 경북 영천이나 후손들을 중심으로 차분한 70주년 기념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은 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더욱이 지난 9월 25~26일 중국 상해에 있는 복단대학(復旦大學) 한국연구중심에서 한국보다 먼저 ‘조선의용대 창설 7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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