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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에도 막부 말기 시대와 메이지 유신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10.05|조회수1,042 목록 댓글 0

일본 에도 막부 말기시대와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명치유신)은 에도 막부에 대한 타도 운동 이후 수립된 메이지 정부에 의한

 

덴노 친정 체제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개혁을 말합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중앙 관제를 비롯하여 법제, 신분제, 지방 행정, 금융, 유통 산업, 교육, 외교,

 

종교 정책 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일본이

 

아시아 최초의 서구화된 국민 국가 체제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아래는 메이지 유신 까지의 과정입니다.

에도 막부 말기인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당시 서양의 배가 검은 색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 일본어로는 쿠로후네)을 이끌고 와서 개항을 요구하게 됩니다.


막부는 서양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1854년에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덴노와 조정의 윤허없이 막부의 다이로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독단적으로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게 됩니다.


원래 막부에서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형식적으로 윤허하는 방식을 통해 처리가

 

되곤 했는데
막부가 권력이 강할 때라면 조정의 윤허를 무시하고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시기는
막부의 권력이 상당히 약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이이 나오스케의 독단적인 처리는

 

큰 반발을 불러오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는 막부의 세력이 쇠퇴하고 쇼군이 아닌 덴노가 일본을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근왕 사상이 은연중에 퍼져나가던 시기였습니다.


막부가 조정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처리를 진행한 것과 외세에 굴복하여 개항을 하게 된

 

이 두가지로 인하여 그간의 존왕양이파들은 본격적으로 반
막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에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1859년 사쓰마, 조슈를 중심으로 하는 존왕파의

 

지도자 요시다 쇼인 등 100명이 넘는 사람을 처형해버렸고 이는 반막부 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됩니다.


1860년 3월에 이이 나오스케가 에도성 사쿠라다문 앞에서 대낮에 암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존왕양이파를 중심으로 하는 도막파와
막부 간에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1862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교토에 상경하게 되면서 이를 호위하기 위한 낭인 집단이

 

구성되는데 이 중에 일부가 신선조의 모태가 되기도 합니다.

 

존왕양이파의 대표적인 번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으로 초반에는 조슈 세력이 덴노의 지지에 힘을

 

얻어 막부 세력과 대결을 펼쳤으나 조슈의 독주를 경계한 사쓰마가 막부 세력에 붙으면서

 

1864년에 금문의 변 사건이 발생하여 조슈 세력은 교토에서 축출당하게 되었고 1차 조슈

 

정벌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로써 막부 세력이 우세해지는듯 했지만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던 사쓰마와 조슈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동맹을 맺어 삿쵸(사쓰마-조슈)동맹이 성립되면서 상황은 역전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사쓰마와 조슈는 1863년의 사쓰에이 전쟁(사쓰마 vs 영국), 1864년의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조슈 vs 4개국 연합함대)을 겪으면서 서양 세력의 무서움을 알게 되자 이전까지의

 

양이를 버리고 개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사쓰마와 조슈로서는 자신들이 개항으로 돌아서게 되면 막부와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원래 그들이 앞세웠던 존왕과 양이 중에 존왕만을 앞세워 막부를 압박하게 된 것입니다.

강력한 삿쵸동맹의 압박과 막부 세력의 쇠퇴를 느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막부의 일본 통치권을 천황에게 되돌려 준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요시노부는 신정부가 구성되더라도 자신이 그 중심에 서서 실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쓰마와 조슈가 중심이 된 도막파는 막부 세력을 아예 몰아낼 작정을 했고 조정의 근왕파와

사쓰마, 조슈가 중심이 되서 신정부가 구성된 후 요시노부를 비롯한 막부 세력은 역적으로

규정되어 토벌 대상이 됩니다.

이로 인해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보신 전쟁(1868년~1869년)

이라고 하며 신무기로 무장한 메이지 신정부군에 의해 막부군은 패퇴를 거듭했고 결국 쇼군

 요시노부는 에도를 넘겨주는 대신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막부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고

하며 이후 계급의 철폐, 서양식 제도의 도입 등 부국 강병책이 실현되게 됩니다.




사쓰마 번(薩摩藩)과 조슈 번(長州藩)은 에도 막부 시대의 번 중에 하나입니다.


혼슈 서쪽 끝에 위치한 조슈 번, 규슈 남쪽에 위치한 사쓰마 번, 시코쿠 남부에 위치한 도사 번

여기서 말하는 번이란 도쿠가와 막부 휘하의 다이묘들에게 주어진 영지를 말하며 보통

1만석 이상의 다이묘가 지배하는 지역을 말하며 에도 시대 말기에는 300여개에 달하는

번이 있었습니다.

번의 주인인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로 이루어지는 신판 다이묘, 원래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던 가신들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후다이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도자마 다이묘로 구성되는데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도자마 다이묘에

속하는 대표적인 번이었습니다.

도자마 다이묘에 속한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은 다른 번에 비해 차별도 받았고 에도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에도 막부 말기에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이 대표적인 도막파(막부 타도파)로 자리잡게

 된 이유입니다.




신센구미(신선조)는 에도 막부 말기에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낭인들을 조직해 만든

 단체입니다.

초대 국장은 세리자와 카모라는 인물이었으나 당시 신센구미를 후원하고 있던 아이즈번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자주했던데다가 신센구미 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콘도 이사미 일파와도

 대립하고 있었는데 결국 콘도 이사미 일파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이후 콘도 이사미가 신센구미 국장이 되는데 이때부터 아이즈 번으로부터 신센구미라는 이름을

 받아 사용하게 됩니다.

신센구미는
겐지 원년(1864)에 이케다야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는 신센구미가 이케다야라는

 곳에 모여있던 근왕파 낭사들을 습격한 사건으로 이후 교토에서는 신센구미와 근왕파 낭사들

 간에 칼부림이 더욱 격화됩니다.

그러나 막부 세력이 몰락하면서 신센구미에도 위기가 닥치게 되었고 사쓰마, 조슈가 주축이 된

신정부군과 막부군 간에 전쟁(보신 전쟁)이 벌어지자 이에 막부측으로 참가했으며 결국 국장

 콘도 이사미가 참수되고 주요 멤버가 탈퇴, 사망하면서 신센구미는 완전히 붕괴됩니다

답변

re: 일본 에도 막부 말기시대와 메이지 유신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막부에 적의를 품고 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

1865년 6월 29일,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사쓰마(薩摩)번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만나, 조슈(長州)번이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쓰마번이 명의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사이고가 승낙하자 료마는 나가사키의 가메야마샤추(亀山社中. 료마가 주도해 세운 일종의 무역, 해운회사)에 구매 주선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조슈번의 이토 슌스케(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유신 전까지의 이름)가 나가사키에서 8월 중순 영국 상인 토머스 B. 글로버에게 총기 7,300정을 9만2,400량에 매입했다.

이즈음 료마는 사이고의 의뢰로 야마구치를 방문해 군량미 조달을 요청해 조슈번이 500섬을 공급키로 합의했다. 12월 초에는 사쓰마번이 야마구치에 사자를 보내 군량미 지원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했다. 군함은 10월 18일 역시 글로버에게 3만7,500량에 매입했다. 군함 매입비는 조슈번이 지불하고 명의는 사쓰마번으로 하며 운영은 샤추가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듬해 1866년 1월 21일 료마의 주선으로 교토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회담한 끝에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 이른바 삿조(薩長)동맹이 이루어졌다.

이 동맹이 료마의 큰 업적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료마가 처음부터 사쓰마번의 지시에 따라 동맹을 추진했다는 설도 있어 그의 기여도를 두고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1864년 조슈번이 후원하는 존왕파 사무라이들이 교토로 진격했지만 막부 연합군에 패했다. 이후 조슈번은 든든한 재정을 바탕으로 군사력 근대화에 주력했고, 료마가 주선한 사쓰마번과의 동맹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사쓰마번도 조슈번과 마찬가지로 도쿠가와막부에 적의를 품고 있었다. 삿조동맹은 일종의 상호방위조약, 즉 막부가 어느 한 쪽을 공격하면 서로 지원하는 동맹이자 사실상 막부 타도 동맹이기도 했다.

번과 막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꿈꾸다

사카모토 료마는 오늘날 일본 시코쿠 고치(高知)현 고치시, 당시의 도사(土佐)번 고치성에서 태어났다. 조닌(町人)이었다가 최하급 무사 신분 고시(鄕士)를 획득한 집안이었다. 12살 때 쿠스야마쥬쿠(塾)에 들어갔지만 친구와 심하게 다투어 함께 퇴학당하고 14살 때 히네노벤지의 도장에 들어가 오구리(小栗)류의 검술과 유술을 익혔다.

료마가 어린 시절 선생님도 포기한 지진아였다는 이야기는 그를 대기만성형 인물로 부각시키려는 허구라는 설이 있다. 1

853년 에도로 가서 호쿠신이토(北辰一刀)류 검술을 배웠고 같은 해 말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서 공부한 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와 화가이자 유학자 가와다 쇼류에게 서양 사정에 관해 배우고, 1856년 다시 에도로 가서 검술을 익힌 뒤 1858년에 돌아왔다. 에도로 유학 다녀올 수 있었다는 것은 집안 재력이 든든했다는 뜻이다.

1861년에는 다케치 즈이잔이 주도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실천하기 위해 결성된 도사 근왕당(勤王黨)에 가담했지만, 번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다케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1862년 말 료마는 막부 관리 가쓰 가이슈와 만나 크게 감화 받아 문하생이 되었다.


간사한 관리들을 물리쳐

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며 막부타도를

강력히 주장한 료마

가쓰는 막부가 건조한 증기선 지휘관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근대적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양이(攘夷)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 준 것도 가쓰였고, 료마는 사이고의 배려로 사쓰마번의 보호를 받으며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가메야마샤추를 결성했다. 료마의 생각은 번과 막부 차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향하고 있었다.

"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 막부 타도의 뜻과 포부

“이 모든 일은 간사한 관리가 외국인과 내통해서 벌어졌습니다. 간사한 관리들이 기세가 등등하고 수도 많지만, 저는 다이묘 두세 명과 굳게 약속하여 동지를 모으고 에도의 동지, 하타모토(쇼군의 직속 가신), 그밖에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합쳐 간사한 관리들을 물리쳐 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 보통 사람처럼 쉽사리 죽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죽는 날은 천하에 큰일이 일어나 살아 있어도 쓸모가 없고, 사라져도 상관없는 때가 될 것입니다. 도사(土佐)의 시골뜨기도 뭐도 아닌 얼치기로 태어나 한 사람 힘으로 천하를 움직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결코 교만해지지 않고 더욱 몸을 낮춰 개펄 속 재첩처럼 늘 코를 땅바닥에 붙이고 모래를 머리에 덮어쓰고 있으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료마가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1863년 조슈번은 조정과 막부의 양이(攘夷) 방침에 따라 미국 상선을 포격했지만 군함의 포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개항해야 했다. 그런데 막부는 조슈번의 포격으로 손상된 군함을 에도에서 수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료마는 막부가 사실상 외국 함대의 조슈번 공격을 도와 외국과 내통했다고 보았다. 편지의 ‘간사한 관리’란 그렇게 내통한 관리를 뜻한다. 막부에 대한 비판적 인식, ‘일본을 세탁해야 한다’는 결의, 천하를 움직이겠다는 포부, 그러면서도 때를 기다리는 처세 등을 엿볼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과 새로운 일본의 탄생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는 료마


1866년 여름 막부는 조슈번을 공격했다. 사쓰마번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조슈번은 막부군을 참패시켰다. 료마는 가메야마샤추의 배로 조슈번을 지원했다.

료마는 1866년 이 때부터 대정봉환(大政奉還), 즉 막부가 정권을 일왕 조정에 반환하는 것에 관한 구상을 내놓고 1867년 2월 하순부터 도사번의 참정(參政) 고토 쇼지로를 설득했다. 고토는 도사 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를 설득하여 료마의 대정봉환론이 도사번의 공식 입장이 됐다.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상하 의정국을 설치하여 의원을 두며, 외국과의 교류를 위해 널리 공의(公議)를 취하는 것”이 골자였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막부 무력 타도에 주안점을 둔 데 비해, 료마와 도사번은 무력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평화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1867년 10월 3일 도사번은 대정봉환 건의서를 막부에 제출했고 료마는 10월 10일 막신 나가이 나오무네에게 건의를 수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13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니조성에서 번주 회의를 소집하자 료마는 고토 쇼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만일 당신 한 사람의 실책으로 이 절대적인 호기를 놓친다면 그 죄는 천하가 용서치 못할 것”이라며 대정봉환에 전력을 다해줄 것을 촉구했다. 결국 10월 14일 대정봉환이 최종 결정됐다. 료마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제도와 강령의 작성에 들어갔다.

1867년 12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군대가 교토를 장악했고, 이듬해 1868년 1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촉구에 따라 메이지 일왕은 왕정복고를 공식 선포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왕정복고와 막부폐지에 반발해 저항했지만 교토에서 대패하고 에도로 후퇴한 뒤, 1868년 4월 막부군 사령관 가쓰 가이슈가 에도를 포기했다. 260여 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체제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일본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근대 일본의 길을 연'국민적 영웅

1867년 12월 10일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오우미야(近江屋) 2층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료마는 오우미야 종업원이라 생각하여 방심하고 있었다. 료마는 머리에 칼을 맞아 사망하고 나가오카는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 당시 나이 31세. 괴한들의 정체는 막부의 별동대 신센구미(新選組)라는 설과 막부가 교토의 치안유지를 위해 결성한 미마와리구미(見廻組)라는 설이 있다. 어느 경우든 막부 상층부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료마는 1864년 7월에도 교토의 데라다야(寺田屋)에서 신센구미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마모토 료마는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이에 따라 그에 관한 과장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가 검술의 달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불분명하며(그는 권총을 선호했다), 허풍이 심한 성격이라는 주위 사람의 증언이 있고, 유달리 돈을 밝혔다는 평가도 있으며 엽색 행각도 심한 편이었다. 삿초 동맹, 가메야마샤추 설립, 대정봉환을 비롯한 정국 구상 등을 전적으로 료마의 독창적인 업적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료마가 지속적으로 접촉한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글로버 상회는 아편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영국의 자딘 매디슨 상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글로버의 직함도 ‘매디슨 상회 나가사키 대리인’이었다. 료마가 당대의 유력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당시 일본 최대의 서양 무기 구매창구인 글로버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심지어 료마가 사실상 ‘서양 무기상의 세일즈맨’ 구실을 한 셈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굳은 의지와 비전, 유연하고 열린 사고, 다양한 입장의 세력들을 오가며 타협하고 중재하는 능력 등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그는 격변의 시기 몇 년 간의 활동을 통해 일본 역사에 지워질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신센구미(신선조)

신센구미(일본어: 新選組 しんせんぐみ, 신선조)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인 1863년에

조직된 무사 조직이다. 원래는 교토로 가는 쇼군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이후 교토의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과 싸웠다.

이후 막부 체제가 붕괴하자 막부군의 일원으로 정부군에 저항하는 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

. 원래 에도에서 조직될 당시에는 '浪士組'(로시구미)라고 칭하였으나 이후 신센구미로

 바꾸었다. 한자로는 '新撰組'라고 표기된 자료도 있으나 국장인 곤도 이사미도 '選'과

'撰'을 모두 썼다. 엄한 규율 유지를 위해 도입한 국중법도로 숙청을 하거나, '誠' 한

글자로 만든 깃발, 소매 부분에 톱니모양의 무늬를 넣은 독특한 하오리(羽織 - 일본옷

위에 입는 짧은 겉옷)복장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유명하게 된 계기로는 이케다야 사건

(池田屋事件)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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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일본에서 19세기의 후반에 발생한 대규모의 정치적ㆍ사회적 변혁이다. 서양 국제체계의

 수용, 다원적 정치체제의 일원화, 신분제의 대폭적인 간략화, 중국에서 서양으로의

문명의 전환 등을 핵심으로 한다. ‘유신’이라는 호칭은 막부말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쳐 사용된 ‘일신(一新)’을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고상한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주수구방(周雖舊邦), 기명유신(其命維新)’과 갈이 원전에서의 ‘유신’은

혁명’, 즉 왕조교체와 동의였지만 근대 일본에서는 고전에 의거한 의미로 사용된 예가

거의 없다.

유신의 기간의 시점(始点) 은 천보(天保) 말년의 개혁(1840년 전후)이나 페리의

내항과 개국(1850년대), 종점(終点)은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이나 서남(西南)

 내란(1877), 입헌정(入憲政)의 실현(일본제국헌법의 제정과 제국(帝國)의

회의 개회, 1889ㆍ1890) 등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변혁은 근대

 서양이 만들어 낸 주권국가 질서로의 강제 편입을 계기로 시작 되어 일련의 국제와

 사회제도의 개혁을 거쳐 다음 시대로 이행하였다는 견해는 공통하고 있다.

유신 초기에 자주 사용되었던 정치 상징은 ‘양이(壤夷)’였다. 후기 수호학에서 유래하는

 이 상징은 동시대의 한반도에서 실행되었던 ‘서쪽 오랑캐를 국토에서 몰아낸다’는

의미이다. 정신으로서는 ‘쇄국(鎖國)’으로의 자폐(自閉)와 반대의 극에 있으며 따라서

 ‘개국’ 정책으로 쉽게 전화하여 혁명을 계속하기 위한 정한(征韓) 등이라는 변종도

발생하였다. 내정 면에서는 ‘공의(公議)’가 널리 사용되었다. 당초 친번(親藩) 외양(外樣)의

대대명(大大名)의 막부정치 참가 구상 중에 등장하였지만, 안정(安政) 5년(1859년) 정변으로

그들이 탄압을 받아, 조정 조약 조인에 항의하기 위해 ‘천하지공론(天下之公論)’을

청취하도록 요구하여 전제(專制)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도 획득하였다. 정권 구상은

 막부말에는 천왕 하에 주요 대명(大名)이 연합정권을 만든다는 형태로 수렴하였지만

왕정복이고 쿠데타에 의한 도쿠가와(德川)의 배제를 거쳐 전국에서의 관료 등용, 관사

 내부에서의 공선(公選)으로 전개하고 또한 서양의 정치사상과 접합하여 의회제의

구상에 이르렀다. 민선의원 설립 백서가 ‘여론공의(輿論公議)’를 정통성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다. 막부말에는 또한 ‘복고(復古)’라는 상징도 등장하였다. 이것은 ‘왕정복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1862년에 도쿠가와(德川) 장군은 서양식의 군제개혁을 ‘관영(‘寬永)

 이전’으로의 복고로서 정통화하였다. 왕정복이고 시에 내걸었던 것은 ‘신무창업(神武創業)

’이었지만 의거해야 할 제도가 없는 신화(神話)세계의 참조는 천왕의 친정(親政)이라는

 원칙을 준수하는 한 서양의 제도를 임의대로 섭취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막부말 10년간 원만하였던 정치체제의 변화는 왕정복고와 무진(戊辰)내란 후에

가속화되어 폐번치현, 미유럽에 대한 대규모 사절과 유학생의 파견, 에조치(蝦夷地 :

훗카이도의 옛 이름)ㆍ류큐(琉球 :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내국화(內國化)와 근린 제국과의

 조약체결 등이 잇따라 단행되었다. 그리고 통치 신분이었던 무가의 녹봉도 해소되었다.

왕족(王族)ㆍ화족(華族)이 창설되는 한편, 기타의 신분이 피차별 신분이나 맹인을 포함하여

 일률 평등의 신분으로 재편성된 사실은 개혁이 막부말의 정치과정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사회의 심부까지 미쳤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변혁은 몇 개의 무사반란

 일으켰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서유럽에 대한 굴욕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침략적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러일전쟁의 도발하고, 1910년에는

 무력으로 조선을 강제 합병하여 식민지배한 것이다. 계속해서 1937년 중일전쟁

일으켰고, 1941년에 미국의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결국

1945년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 세례를 자초한 자업자득

(自業自得)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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