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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대원군의 3정제도 개혁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0.10.06|조회수508 목록 댓글 0

 

 

민생안정을 위한 기득권과의 한판 싸움, 삼정 바로 잡기

조선 말기 삼정(三政)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을 둘러싼 부패는 그 도(道)를 넘어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흥선대원군은 문란한 삼정(三政)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

먼저 전정(田政).

전정을 바로 잡기 위해 대원군은 양전사업을 시행했다.양전사업은 토지조사 사업과 같은 말인데, 왜 토지를 조사한 것일까?
그 이유는 세도 가문들의 토지 소유 방식에 있었다. 세도 가문들은 자신의 토지를 다 면세지로 만들어 세금을 내지 않았다.

과세대상에서 빠져 있던 토지를 찾아내 국가재정을 확충한 사업이 흥선대원군의 양전 사업이다.오늘날로 따지면 탈루(脫漏)를 막은 셈이다.

그리고 군정(軍政).

군정(軍政)이란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포를 내는 것을 말한다.대원군은 군정에 대해서도 엄청난 개혁을 가했다.
처음에는 마을에 대해 포(布)를 부과하는 동(洞)포제를 실시해 그 마을에 사는 양반도 포(布)를 내게 했으나, 시행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대원군은 더 강력한 조치를 내놓았다.
그 이름 유명한 호포제!

즉 마을 단위가 아니라 범위를 좁혀 집집마다 (戶) 포를 매기는 '호포제(戶布制)'를 단행했다.
이는 평민의 집뿐 아니라 양반 집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긴다는 뜻이었다.

이 호포제(戶布制)는 강의 현장에서도 거듭 강조할 만큼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조선 말기, 백성들의 피를 빨아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바로 양반들이었다. 양반들에게 돈을 많이 버니 세금도 많이 내라. 이것이 호포제의 핵심이다.
호포제(戶布制)는 조세정의(租稅正義)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세금제도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호포제(戶布制)는 신분제도를 약화시키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너도나도 족보를 사대고 국가에 돈을 받쳐 양반이 엄청 늘어난 통에, 양반과 평민의 구별이 애매했다.따라서 군포(軍布)를 내는가 내지 않는가로 진짜 양반을 구별했는데, 포(布)를 내라고 하는 것은 양반의 명예를 흔들고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기득권층, 즉 양반들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흥선대원군은 이리 말했다.
"세금을 내는 것이 양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면, 노비의 이름으로 내면 되지 않겠소?"

세 번째로 환곡(還穀).

농민들의 가장 극심한 원성의 대상은 환곡(還穀)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그간 환곡으로 꾸어간 곡식은 모두 탕감해주고, 환곡제도에서 더 이상 관리들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했다.
마을마다 쌀 창고를 짓고 창고관리를 조정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 중 덕망있는 자를 뽑아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위임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아가자, 요리조리 토지세를 피해 다니던 땅 많이 가진 놈들도 꼼짝없이 세금을 내야 했으며, 토지가 없는 농민은 세를 부담하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말이 쉽지 수백 년 동안 아무도 감히 엄두를 못 내던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조선은 그동안 기득권층에 의해 정권을 농단하면서 개혁안마다 물고 늘어져 멍청한 왕이 아니더라도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개혁(改革)이란 어차피 기득권자의 이익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기득권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들이 굶어 죽든 말든 제 당파, 제 집구석, 제 새끼들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었다.
이런 기득권층을 쓸어낸 대원군(大院君)이 백성들 편에서 과감한 개혁을 강행하자, 대원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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