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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에 영웅사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21.02.24|조회수455 목록 댓글 0


★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 소속 조선혁명군이 별도로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즉 1931년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공하자 조선혁명당은 이 난국을 타개할 방안으로 한·중연합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학규(金學奎)·김이대(金履大)를 당대표로 선출하여 중국당국과 협의케 하였다.


이들 양인은 심양(瀋陽)으로 가서 그곳의 중국국민외교협회(中國國民外交協會) 및 중국 민간지도자들과 접촉하여 협의하였다. 이 양측회담에서 주로 논의된 사항은 재만한인의 국적문제와 더불어 한·중 양민족의 연합항일문제였다.註 016016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8.닫기


그 후 이 회담에서 논의된 것을 기초로 하여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구체화시켜 「동성한교정세(東省韓僑情勢)」와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意見書)」를 만들어 중국당국에 보내었는데 그 내용에 대하여 중국측은 열렬히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작전 구축이 구체화되기 전에 현익철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註 017017 韓中聯合作戰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한 奉天日領事館은 各地에 密偵를 배치하여 玄益哲 등 黨幹部를 추적하였는데 玄益哲은 密偵 劉得貞·鄭致坤에게 체포되었다.닫기 더우기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혁명군 간부들이 신빈현(新賓縣)에서 간부회의를 개최할 때 일군경의 기습을 받아 회의장에 있던 30여 명의 간부 중 이호원(李浩源)·김관웅(金寬雄)·이종건(李鍾建)·장세용(張世湧)·박치화(朴致化)·이규성(李奎星) 등 중요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비운을 맞이함으로써 치명적 타격을 받아 연합작전을 추진하지 못하였다.註 018018 주 16)과 같음.닫기


그러나 이 신빈사변에서 일제의 독아를 피할 수 있었던 양세봉(梁世鳳)·양기하(梁基假)·고이허(高而虛) 등 중견간부들은 이와 같은 불행에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대원들을 규합하여 혈전태세를 적극 추진하여 갔다.


1932년 2월 조선혁명군은 또다시 지도자를 잃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관전현(寬甸縣)에 주둔중이던 양기하부대가 국내에서 침입하여 온 평복 초산(楚山)의 일본경찰대와 만주군 연합부대의 기습을 받고 격전 끝에 전사한 일이다.
이 사건 후 혁명군 총사령관에는 양세봉이 선임되어 부대를 지휘하여 나갔다.
ㄱ. 영통가전투註 019019 蔡根植, 앞 책, p.165.닫기


1932년 3월 11일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참모장 김학규와 중대장 조화선(趙化善)·최윤구(崔允龜)·정봉길(鄭鳳吉)이 지휘하는 3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왕동헌(王彤軒)·양석복(梁錫福)부대와 합세하여 신빈 왕청문에서 무순(撫順) 천금채(千金寨)로 향하여 진군하다가 12일 신빈 남쪽의 두령지(陡嶺地)에 도착 야영하였다. 이때 이 정보를 탐지한 신빈현성을 수비하던 일본군이 총동원하여 중무기로 무장하고 주변 고지를 점령한 후 박격포 기관총 등으로 맹공을 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지리적으로 밝지 못한 일본군이 무리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혁명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즉 주변지리에 능숙한 혁명군은 그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며 교전 1시간 만에 일본군이 장악하였던 주변고지를 탈환하고 맹공격을 가함으로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돌격전을 감행하는 혁명군의 기세에 일본군이 퇴각하자 혁명군은 계속 일군을 추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30여 리에 위치한 신빈성 서쪽에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추격전을 감행하여 상협하(上夾河)를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사상자와 말·무기를 버리고 패퇴하였다.


이 첫번째 한·중연합전투에서 연합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보다 더 큰 의의는 한중연합군이 협동작전을 벌여 획득한 이번 승리가 한중 양민족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높여 주게 되었으며 정신적 유대가 공고하여 졌다는 점이다.
ㄴ. 요녕구국회와의 합작註 020020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一期 ; 蔡根植, 앞 책, pp.165~167.닫기


이와 같이 한·중연합작전의 승리는 더 본격적인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


1932년 4월 20일 중국의 용군 당취오(唐聚五)·왕육문(王育文)·손수암(孫秀岩)·장종주(張宗周)·이춘윤(李春潤)·왕봉각(王鳳閣)·서대산(徐大山) 등이 항인성에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를 높이 들고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을 계획하였다. 동 구국회도 정치·군사 양위원회를 두고 상무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육문이, 군사위원회 위 원장겸 요녕 민중자위군 총사령에는 당취오가 선임되었다.


반만항일무장군인 요녕민중자위군은 총사령부 아래 52개로 사령부를 두어 환인·통화(通化)·신빈·즙안(輯安)·임강·유하·본계(本溪)·휘남(輝南)·해룡(海龍)·동풍(東豊)·서풍(西豊)·안동(安東)·봉성(鳳城)·청원(淸原)·동강(蒙江)·장백·안도·금천(錦泉)·반석·서안(西安)·관전·개원(開原) 등 20여 현을 관장하며 20만 대군을 거느리는 재만 제1의 항일군단이었다.


조선혁명당에서는 이들과 연합전선구축을 계획하고 당·군대표에 김학규를 선임하여 구국회에 파견하였다. 김학규는 환인성으로 가서 왕육문·당취오와 협상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 양측이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註 021021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9.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中韓兩國軍民切實聯合 來一致抗戰 人力物力須交互通用 在分工合作的原則下 不分國籍隨其能力 分任抗日工作닫기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절실히 연합하여 일치항전하고, 인력과 물력(物力)은 서로 통용하며,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공작을 나누어 맡는다.


이상의 결의안에 의하여 자위군 내에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특무대사령부와 선전임무를 담당하는 선전대대를 설치하고 이 두 가지를 조선혁명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무대사령부를 통화성(通化城)에 두고 양세봉이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김광옥(金光玉)이 선전대대장이 되었다. 또한 구국회 선전부내에 한인선전과를 두어 이곳에서 한글간행물과 신문 『합작(合作)』을 발간하였다.


특무대사령부는 8개 특무대를 두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특무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전투에 임하여는 선봉부대로 맹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계속 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속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速成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 명이 교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각 특무대 소관 지역내에 노농강습소(勞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의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 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 명의 군관학교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있다.
ㄷ. 연합군의 연합작전註 022022 蔡根植, 앞 책, pp.168~17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7~641.닫기


1933년 5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1천 5백 명이 다시 영릉가를 공략하여 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관계로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환인·신빈·유하·휘남지방을 공격하였으며 또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 진격하여 왔다. 중국군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할 수 없어 격전 수 일 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의기양양하여 6월 15일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양대령(楊臺嶺)을 넘어서 흥경 청원 등지로 공격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혁명군 1천 명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혁명군은 일본군에 기습 돌격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소탕하였으나 일본군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이해천(李海天)·김일룡(金一龍)·박석원(朴錫源) 등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백 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전을 당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7월 7일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영웅적 독전과 제3로군 조화선부대의 응원으로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중포 1문, 경기관총 3정, 소총 80여 정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 1개연대를 공격하였다. 2일간에 걸친 격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다.


그 후 일본군 1개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는 제4로군의 최윤구부대를 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응원을 얻어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적은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아군을 공격하였으며 더우기 비행기의 공격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전투 경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와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더우기 사방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한 공격을 전개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기만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조선혁명군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찾아 왔다. 즉 일본군의 밀정으로 있는 박창해(朴昌海)라는 자가 평소 양세봉 총사령관과 친면이 있고 혁명군에 대하여 직접 간접으로 후원하여 오고 있던 중국인 왕씨라는 자를 매수하여 중국군 사령관이 양세봉을 만나 군사문제를 협의하기를 요청한다고 유인하게 하였다. 양세봉 총사령관은 왕씨의 전갈을 받자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부관 김광욱(金光旭)과 김성해(金星海)·최창해(崔蒼海)·김추상(金秋霜) 등의 대원을 데리고 왕씨를 따라갔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는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변장한 수십 명의 일본군이 뛰어 나와 일행을 포위하였다. 이때 왕씨는 태도를 일변하여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모가 아니다. 이 총알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사태에 양세봉 총사령관은 만사가 마지막이라고 각오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왕씨의 행동을 꾸짖었다. 어떠한 위협으로도 양세봉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양세봉과 그 일행을 사살하였다. 이때가 1934년 8월 12일 밤이었다.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왔던 양세봉 총사령관은 이렇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독립전쟁을 계속하기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던 조선혁명군에게 양세봉 총사령관의 피살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김활석(金活石)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다시 군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김활석은 1934년11월11일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라는 군사정부로 바꾸었다. 이 군사정부는 법무·민사·재무·외교·교양·특무·군사부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지방을 9개 군구로 나누었다. 군사부는 총사령 김호석이 부장에 임명되었는데 그 예하의 부대편성은 다음과 같다.註 023023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產主義運動史』제4권(청계연구소, 1986), p.214.닫기


이 당시 병력은 양세봉이 총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1935년 일본군의 추계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조선혁명군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못되어 다른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9월 제1사 사령 한검추는 중국자위대 사령관 왕봉각과 즙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를 조직한 목적은 한국·중국의 동지들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치단결하여 싸우자는 데 있었으며 한·중 양국인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동맹회의 조직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를,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봉각이, 군대 총사령에는 한검추가 임명되었는데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註 024024 金俊燁·金昌順, 앞 책, p.217.닫기


그후 1937년 4월에 일제는 강도높은 토벌 정책에 제1사 사령 한검추.교육부장 윤일파.총령 김동산 까지 투항하는 바람에 조선혁명군은 난관에 처에 있었다. 

부사령 박대호와 제2사령 사장 최윤구는 손을 놓을수는 없어 총사령 김활석.외교부장 김두칠과 모색한 결과 양정우가 이끄는 동북항일연군과 여러번 회를 거쳐 결국에는 1938년 9월6일 임시정부 정통성 당을 마음대로 조선혁명당을 해산할 권한이 없어  총사령 김활석.외교부장 김두칠 비서.정동오.혁명군 대원 수명과 결국 동북항일련군과 통합이 불가 하였다.


그러나 한축의 중심으로 박대호.최윤구가 1938년3월에 대원 60여명과 양정우부대 동북항일련군에 합류하게된다. 련군 내에 한인 독립사를 설치 하여 사령 최윤구가 영도해 활동하다가. 동북항일련군 참모장 정빈이 투항하자  한인 독립사 사령 최윤구를 작전참모로 안배하여 맹 활동하게 되자 항일연군 교도대대 대대장 겸 참모장으로 활동하다 1940년 2월15일 토벌때 적600여 명과 일제와 맞서 싸우다 부하들과 함께 전사 순국 하였다.註 25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11집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조선혁명군 정부 연구 장세윤 1997)pp223~260.   (최윤구의 손자 최희봉 증언ㅣ및 중국인 이해군.장서해씨 증언 청취 참고) 김일성1912~1945 하권 역경의결전 유순호 2020.8.20 서울셀렉션(주)


그리고 군부 부관장 박대호.조화선은 1942년 9월에 조화선은 대원 몇명과 마지막까지 즙안 일대 압록강 변에서 일제와 견지하다 체포된다. 그후 봉천성 조선총독부에 압송하여 가는도중에 탈출하다 실패하여 사살 되었다. 부관장 (동북사령)박대호는 1943년3월까지 지하 유격활동을 하다  변절한자에 의해 체포된다. 안도현 명월진 수용소에서 광복되어 출옥된다.옥중에 고문에 누적된 병으로 1947년 55세 별세하였다.  註 26  (항일투쟁반세기 김양 저 료령민족출판사1995)pp283~293.

조선혁명군은 1945년까지 김병기등 만천홍이라고 변명하여 일제침략자와 싸우다 광복을 맞이한 독립항쟁 역사이다.


註 001
 :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48), pp.156~157.
註 002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五(1969), pp.107~108.
註 003
 : 國史編纂委員會, 앞 책, P.791.
註 004
 : 이때 편성된 7個地方軍의 관할범위는 第1隊는 寬東·寬西地方, 第2隊는 桓仁·輯安地方, 第3隊는 通化·臨江地方, 第4隊는 柳河·興京地方, 第5隊는 海原·撫順地方, 第6隊는 開原·磐石·吉林地方, 第7隊는 東滿地方이다.
註 00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5권, P.594.
註 00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95.
註 007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2卷 第1期(重慶 : 大韓民國 24年 1月 20日), p.53.
註 008
 : 주 7)과 같음.
註 009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앞 책, pp.53~54.
註 010
 : 蔡根植, 앞 책, pp.172~1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5~629.
註 011
 : 韓國光復軍總令部編, 앞 책, P.55.
註 012
 : 蔡根植, 앞 책, pp.175~1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9~630.
註 013
 : 蔡根植, 앞 책, pp.176~177.
註 014
 : 蔡根植, 앞 책. pp.177~17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1~632.
註 015
 : 蔡根植, 앞 책, p.179.
註 016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8.
註 017
 : 韓中聯合作戰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한 奉天日領事館은 各地에 密偵를 배치하여 玄益哲 등 黨幹部를 추적하였는데 玄益哲은 密偵 劉得貞·鄭致坤에게 체포되었다.
註 018
 : 주 16)과 같음.
註 019
 : 蔡根植, 앞 책, p.165.
註 020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一期 ; 蔡根植, 앞 책, pp.165~167.
註 021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9.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中韓兩國軍民切實聯合 來一致抗戰 人力物力須交互通用 在分工合作的原則下 不分國籍隨其能力 分任抗日工作
註 022
 : 蔡根植, 앞 책, pp.168~17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7~641.
註 023
 :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產主義運動史』제4권(청계연구소, 1986), p.214.
註 024
 : 金俊燁·金昌順, 앞 책,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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