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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고대사 - 일본 천황은 백제 왕이 했다 - 일본 왜5왕의 실체에 대한 소고(小考)(1/4)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1.07|조회수559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일본 천황은 백제왕이 했다(일본 왜5왕의 실체에 대한 소고).hwp


한국 고대사

 

일본 천황은 백제 왕이 했다

[일본 왜5왕의 실체에 대한 소고(小考)]

 

[목 차]

1

고대사에 있어서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인식 차이

2

한반도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

3

백제가 일본 고대 국가를 건립하고 분국(식민지)으로써 경영했다는 증거의 일례

 

 

1. 고대사에 있어서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인식 차이

 

1)현재 일본의 통상적인 역사인식

 

한반도로부터의 선진 문물과 문화는 전달 받았으나 이는 원래 중국의 것으로 한반도는 단지 전달 매개체로서 일본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중국의 직접 내지는 간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인식.

한반도의 영향을 되도록 부정하고 거의 없었던 중국과의 직접 교류 및 영향은 강조.

 

2) 현재 우리나라 통상적인(주류사학계) 인식

 

중국의 선진 문물과 문화가 우리나라로 들어 온 후에 이를 우리 것으로 만든 다음에 이를 일본 열도에 문물과 문화만을 주로 전달해 주었다는 인식

 

3) 현재 우리나라 재야사학계 인식

 

단순한 문물과 문화 전달이 아니라 우리 한반도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가 소위 지배세력이 되어 고대 국가를 성립시킴은 물론 일정기간 직접 분국으로 다스렸다. 소위 과거 처음 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천황가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다.

 

4) 변칙설

 

일본 각처에 널려 있는 한반도 직간접 영향에 의한 유적유물과 문화 등 증거물을 보고 도저히 위의 “1)“ 인식을 부정할 수 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3)“의 인식에도 따르지 않으면서 ”2)“를 지키는 변칙설이 우리나라에 주류사학계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일제 식민주의 사관이 태동할 시기인 일제 침탈시기부터 일본 식민주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것으로 이는 결국 일본 인식에 동조하는 설이다.

 

기마민족설’, ‘일선동조론등이다.

 

한반도의 우리 민족 국가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 고대 국가를 일으키고 문명을 일으켰으나 이후에는 일본이 이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발전시킨 것이지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거느렸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 나간 잘못된 것이다.

 

즉 문화만의 전파와 식민지 경영설의 중간 절충설인 것이다.

대표적 주창자는 “ ~ 답사기를 쓴 유명한 사람이다.

 

과연 그렇까?

 

일본과 우리나라에는 이를 반증할 증거자료가 차고 넘친다, 더군다나 일본 큐슈와 혼슈(나라, 아스카, 오사카, 교토 등)에는 단순히 문화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며 단순히 한반도에서 건너가서 문명을 일으키고 거기서 현지인과 같이 어울려서 살지만은 아니 하였다는 유물유적 그리고 기록과 문화가 차고 넘친다.

 

이것에 대하여 논하자면 책 한권도 부족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본인의 졸저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1998)다시 쓴 한국 고대사(2015)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히 거론한다.

사실 본 필자의 두권의 졸저를 펼쳐 낸 이유가 바로 이러한 “2) 현재 우리나라 통상적인(주류사학계) 인식과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의 인식을 역사적 진실인 “3) 현재 우리나라 재야사학계 인식으로 바꾸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이를 입증할 가장 재미있으면서 결정적인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2. 한반도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

일본 열도가 미개한 구석기 문화인 죠몽 문화를 영위하고 있다가 BC 3세기경부터 AD 3세기경까지 신석기 시대인 야요이 문화를 일으켰다. 그것도 한반도의 절대적인 영향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닌 중국의 영향도 강조하지만.



                                                                     죠몽인과 야요이인



죠몽인과 야요이인

            

 그리고 이후 AD 3세기경부터 AD 5세기경까지 일본에 갑자기 커다란 고분이 조성되고 신장이 큰 사람이 등장하고 고대 국가가 성립은 되나 아직은 통일 국가가 성립되지 못하고 여러 분국 형태이다. 그 분국도 한반도의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세력에 의한 분국으로써 이 또한 절대적인 한반도에서의 사국 영향이다.

 

일본이 식민주의 사관에 의하여 주장하다가 최근에는 폐기상태에 있으나 아직도 그들의 교과서에 사실인양 기술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일본 열도에는 말도 없고(5세기 초에 들어서야 말이 등장), 철기 생산 능력도 없고(6세기 초에 들어서야 철 생산,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중간 원재료인 철정 수입), 대규모 선박 제조 능력도 없이 소규모 국가 형태에 겨우 접어 든 시기(6세기 초에 들어서야 통일국가, 이전에는 분국형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막강한 한반도 남부를 AD 4세기경부터 200여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한반도는 이미 한참 이전의 신석기 시대(BC60세기 ~ BC30세기)를 지나고 청동기 시대(BC30세기 ~ BC15세기)도 지나서 막강한 철기 무기를 가지고 기마 군사력에 의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 4국이 태동하여 발전하고 쟁패를 벌이던 막강한 국력으로 경쟁하던 시기인 것이다.

 

일본 열도에는 고대사 시기의 각종 유적유물이 온통 한반도의 것 그것도 단지 문화 전파가 아닌 사람이 직접 한반도에서 건너와서 살다가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각종 한반도 계열의 무덤과 그 무덤에서 나온 한반도 계열의 부장품인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나온 인골을 DNA 분석한 결과 일본 타 지역보다 한반도 남부의 사람과 제일 유사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아 다른 증거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반도인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인류학 권위자인 일본 국립 민속학 박물관의 고야마슈조 교수는 1984년 일본 인류학회에 보고한 "죠몽 시대의 인구"라는 논문에서 "죠몽말기(기원전 약 3세기) 일본 총인구는 극심한 추위 등의 영향으로 겨우 758백명에 불과했고, 그 후 야요이 시대에 접어들자 5949백명으로 급격히 늘었으며, 하지키(김해 토기)를 사용한 나라시대(AD 710~784)에는 무려 53998백명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인류학자 중 세리자와 죠수케씨는 죠몽 말기의 인구를 약 12만명, 야마우치 세이오씨는 약 15만명으로 추계했다.

이로 미뤄 야요이시대 초기에 일본 인구가 급증한 것은 고대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대거 진출, 벼농사로 식량이 풍부해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 애리조나대학 유전학자 마이클 해머교수는 "기원전 4세기경에 한국에서 건너간 야요이인들이 죠몽인과 아이누족을 물리치고 일본의 주인이 됐다"고 발표했다.

 

일본(日本) 이란 국호가 생긴 것은 백제 부흥군이 실패한 직후인 AD 670년이다.

1)세금 징수 기록, 경작 면적 및 식량 산출, 무덤의 분포와 수, 전쟁 동원 군사 수 등 과학적 조사에 의하면, 당시 일본 인구가 5~6백만명 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1천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는 약 3천만명 이었다고 한다. 5배 정도의 증가이다. 1천년당 5배 증가.

 

2) 그런데 7세기 말로부터 1천년 전인 BC 3세기 무렵의 일본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10만명에서 5~6백만명. 50배 증가이다. 자연 증가라면 역시 5배 정도가 적당하다. 1~7세기의 인구증가는 다시 말하면 90% 이상이 어디선가 온 이주민과 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1천년당 50배 증가. 자연증가는 절대 아니고 외래 유입의 규모도 엄청난 것이다.

 

고대 죠몽인은 야요이인에게 동화되거나 축출 당하였고, 고대 일본의 인구 증가는 외부의 인구 이동으로 인한 것이며, 현대 일본인과 죠몽인과의 관계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학계는 야요이인을 "한반도를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시아 대륙인" 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쓰고 있다.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되도록 부인하려는 일본 학계의 기본적인 논리선상이다.

 

참고 : 일본서기10 응신 천황기 應神天皇 (譽田天皇)

(14) 이 해 弓月君百濟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은 우리나라 120人夫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新羅人이 방해하여 모두 加羅國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弓月人夫加羅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제로 AD 405년경 궁월군이 120현의 사람을 데리고 일본 열도로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현에 1,000명씩이라고 하면 12만명이라는 인원이다. 가히 엄청난 숫자인 것이다. 이들이 일본 열도로의 이주 원인은 광개토대왕의 백제 및 가야 정벌에 따른 것이 주 원인이고 다른 이유는 이에서 파생된 것이 많을 것이다. 이들 전쟁의 난민들이 바로 삼국사기상에 신라 땅에 가득하였다는 이며, 광개토대왕비문상의 로 본 필자는 보고 있다. 즉 당시에는 백제계 내지는 가야계의 한반도 인이었으나 이같이 일본 열도의 왜국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기록할 때 기록 당시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그 정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상의 는 일본으로의 도래인(도왜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선진 세력이 대거 들어가 과연 미개한 원주민을 왕으로 모시고 살았을까하는 의심이 상식적으로 들지만 백번 양보하여 이는 단지 한반도에서 도래하여 즉 일본으로 건너가서 문명을 전달하고 일으킨 증거라고 밖에 안된다고도 할 수 있으므로 위의 “4)변칙설의 결정적인 반박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밝히려는 것이 지금 거론하고자 하는 일본 5의 실체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건너가서 문명을 일으켜주거나 문화를 전파하거나 혹여 다스리기도 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예 한반도 국가 특히 백제국이 분국, 제후국, 식민지로 일본국(당시 왜국)을 다스리면서 문화와 문명을 공유했으며 일본국의 뿌리는 한반도이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뿌리에 의한 줄기가 박혀 있다는 3)현재 우리나라 재야사학계 인식이 옳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3. 백제가 일본 고대 국가를 건립하고 분국(식민지)으로써 경영했다는 증거의 일례

 

이에 대하여는 이미 본인의 졸저에서 밝힌바 있지만 그동안 새로이 이루어진 많은 분들의 이에 대한 학문적인 성과를 반영하여 알기 쉽게 간략하게 전하고자 한다.


5왕의 실체

 

중국의 사서인 진서(晉書), 송서(宋書), 제서(齊書), 양서(梁書)상에 AD 413년부터 502년까지 나오는 일본 열도의 왕인 찬()(일본발음 : ), ()(), ()(사이), ()(고오), ()() 5왕을 왜5왕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왕의 명칭은 일본서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런 연고로 오래전부터 일본 학자들은 이들을 일본서기상의 저들의 천황에다 갖다 맞추고 있지만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맞추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를 오히려 백제의 왕 내지는 백제에서 일본 열도 나라를 다스리려고 건너온 백제의 태자 내지는 왕자에 비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정사인 삼국사기에도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일본과의 관계 기사는 부정확하거나 이상할 정도로 간략하거나 아예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그들의 정사인 일본서기에는 그들의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상세하기도 하지만 온통 한반도 관련 기사라 할 정도로 많다. 그리고 한반도 국가 특히 백제와의 관계 기사가 대부분이고, 자기들의 역사적 활동라고 하지만 백제의 역사적 활동을 자기들의 것으로 해 놓은 것이 태반이다.

 

왜 그럴까?

 

 

                                                                                 삼국사기

 

▶ 『삼국사기의 실상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에 의한 사서인 점에서 찬반 논란이 많다. 중국 국가에 대하여 상당히 삼국을 저자세로 표현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중국의 수나라 및 당나라 관계에 있어서 적대적이면서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위에 있었던 고구려를 낮은 위치에 두는 기사를 써서 사대주의에 의한 사서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부식 등 삼국사기편찬자들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있었는지 여부를 떠나 중국 사서를 많이 아니 대부분 참조해서 쓴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 뿐만 아니다. 다른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신라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썼다는 평가도 있다. 즉 신라의 개국년도가 고구려 보다도 앞선 것으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뿐만이 또한 아니다. 가야에 대해서는 아예 기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후손들인 우리도 삼국시대라고 하지만 그 시기를 사실은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가야의 역사적 활동도 다른 삼국에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은 이 가야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또한 이 뿐만 더욱 더 아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백제의 대표적인 역사적 활동으로서 오히려 중국의 여러 사서에는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중국 대륙 진출(본 필자는 진출이 아니라 백제의 본거지였던 중국 대륙의 일정 지역에서 백제 잔류 세력이 한반도 본국의 백제의 힘을 지원 받아 그 일정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담로, 다무로)하였다는 의견임) 사실과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에는 왜곡되거나 관계가 거꾸로 도치시켜 기록했지만 자세히 기록한 것과는 달리 백제와 당시 일본 열도의 왜와의 관계사를 아예 무시하고 싣지 않거나 거의 싣지 아니하였다.

  

참고 : 담로

양서백제조 권 54, 열전 48에서 號所治城曰固麻謂邑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고마라고 부르고 읍()담로라고 부르는데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다. 모든 종족의 자제들이 그것에 따라 나뉘어 살고 있다.

담로는 단순한 백제의 지방행정 조직이 아니라 식민지 내지는 분국을 경영하는 체제로써 22개 담로는 백제의 한반도 지방을 비롯하여 중국 본토의 요서지방과 양자강 연안, 일본의 대마도 지방, 일본 열도의 큐슈, 나라지방, 도쿄지방 등을 일컫는 것이.

 

                                                                             백제 22개 담로

 

이는 무슨 이유일까?

 

그 이유는

 

(1)첫번째로 사대주의 사상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2)두번째로 삼국(사국)의 통일에 의하여 망한 나라인 가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이 없어서 존재하고 있지 않는 점도 있었겠으며,

(3)세번째로 그래서 중국 사서를 주로 참고하거나 아예 중국 사서만을 참고하여 편찬했을 가능성도 많고(김부식은 편찬경위에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였음),

(4)네번째로는 적대국이었던 나라가 없어지면서 신라에 의한 역사 세우기에 따라서 신라 외의 나라들에 대한 소위 잘나갔던 역사적 사실은 무시하였던 신라의 역사 체계를 그대로 이어 받았을 가능성이 있겠다.(이에 대한 연구 내용은 상당히 많은 편으로 김부식의 편찬 당시 고려 국왕인 인종이 신라계라는 연구도 있다),

(5)다섯번째로 신라와 백제의 분국이었던 왜나라는 백제의 신라에 의한 멸망 이후 상당한 적국 상대방이었던 관계로 백제와 분국인 왜나라의 관계사는 의도적으로 (->남북국 시대)신라에 의하여 없어진 것을 김부식이 그대로 이어 받은 이유가 있겠.

(6)위의 ‘(5)다섯번째의 근거로 본 필자의 졸저에 자세히 거론했지만 김부식은 백제의 기원에 대하여 당시에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였으면서도 임의로 고구려계 설을 취한 것이며, 앞으로 여기서 다룰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만 거론하더라도 구이신왕의 재위기간(AD 420~ 427) 7년간의 활동 기록이 전혀 없다거나, 이후 개로왕 재위 기간(AD 455~ 475) AD 455~ 467년 까지 13년간의 기록 전혀 없는 사실과 이외 백제와 왜의 관계 및 활동에 관한 기록은 오류가 많거나 없는 경우가 많은 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오히려 일본서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일본서기의 실상

 

일본서기는 당시 본국인 백제국이 멸망한(AD 660) 후 한반도와의 단절을 꾀한 후 일본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일본의 신화시대부터 제41대 지통여왕 시대까지를 취급하여 AD 680년경에 시작하여 720년에 걸쳐 처음 독립국으로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 역사서는 이상한 것이 자기들 나라의 역사적 활동을 기록하여야 하나 온통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계만을 나열하였다 특히 백제와의 관계를 적은 것이 거의 전부이다. 이를 거꾸로 보면 백제가 행한 역사적 활동인 것이다. 적고 있는 모든 내용이 백제가 행한 역사적 활동을 자기들 왜국이 행한 활동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상한 역사서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대사의 정사로 취급받는 삼국사기의 부족한 사국(삼국) 특히 백제의 대 일본열도 국가 즉 왜와의 관계 역사 기록을 보충할 수 있으나 신공황후 삼한 정벌기록이나 임나일본부기록 그리고 실제 역사와의 120년 차이 발생 오류등 오류와 조작도 많아 면밀히 검토하면서 참고하여 할 대상이다. 또한 편찬 이후 근세의 메이지 유신 때까지 여러 번의 가필 및 조작 의심도 있는 사서이다.

 

그중의 한 일례가 신공황후 삼한 정벌기록으로써 이는 사실 백제 근초고왕의 가야 지방 및 남해안 일대를 정벌한 역사적 사실인데 일본서기는 이를 자기들이 꾸며낸 신공황후라는 가공의 인물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정벌한 것으로 꾸며낸 것이다. 주체만 바꾸어 놓고 나타난 궤적은 그대로 따르면 역사적 실체를 알 수 있게 만든 묘한 책이 일본서기로써 일본이라는 나라는 당초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신공황후 삼한 정벌도 (상상도)

 


신공황후 지폐 초상화

 

물론 일본인들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서기상의 역사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나라의 정복 역사이고 일본서기는 이를 감추려고 조작한 역사서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자신들의 입지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설()로 돌려서 주장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정복설과 기다 사다기치의 일선동조론이다.

 

일본은 온통 한반도 세력에 의하여 그들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시키지 않으면 일본의 모든 역사 그리고 모든 일본의 것을 부정해야만 하는 결과가 나온다. 따라서 계속 왜곡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침략 사실 부정 내지는 미화 등의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2차 대전 후에도 전쟁을 일으킨 전범 내지는 후손 그리고 그 세력이 제거되지 않고 일본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반성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부정 내지는 왜곡의 역사는 이미 시작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사석에서 정직하게 고백한다. ‘일본이 이만큼 빨리 문명하게 된 것은 역사를 위조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야만이고 한국에게 다 지배 받았다고 하면 자부심이 없어지고 기가 죽어 안되니까 이걸 거꾸로 해서 용기를 내게 했다.“ ”역사를 날조한 것은 한국에게는 큰 피해지만 우린 그것 때문에 빨리 깨고 자부심을 가지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한국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한 다음 이러한 것을 영구화하기 위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한국 국민에게 뿌리 박았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해방이 된 후 74년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통상적인 역사학계(주류 사학계)에서는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왜곡하여 스스로 일본의 의도대로 움츠려들고 스스로 망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이러한 이상한 역사기록은 당초 편찬 경위부터 잉태된 것이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의 활동 기록 즉 우리의 고대 국가이면서 그들의 본국인 백제가 행한 역사적 활동을 자기들이 행한 것으로 도치시켜 꾸미고 일본 열도에서의 활동 기록은 자기들이 탈피하여야 할 대상인 백제 왕족이 백제 분국으로서 행한 활동이다 보니 이것을 가공의 일왕(천황)이 행한 것으로 꾸미려 하니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 다시 후인 현재에 이것에 맞추다 보니 이상한 역사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서상의 왕과는 맞지 않는 엉뚱한 왕이 나타나서 맞추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쓰여진 그대로 즉 자귀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면 역사적 왜곡이 된다. 따라서 쓰여진 기록을 역사적 사실과 중국 등의 사서와 면밀히 비교 분석하여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적 진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중국 사서상의 일본국(왜국) 왕인 5과 자기들이 편찬한 일본서기상의 왕인 천황과의 연결인 것이다.

 

이렇듯이 조작 내지는 억지로 꾸며진 일본서기상의 왕(천황)과 중국 사서상에 나오는 5과의 연결 작업은 심히 어렵고 난해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반도와의 관계를 끊는다고 편찬한 사서인 일본서기상에는 한반도와의 관계만이 도치 내지는 조작한 역사적 활동이 억지로 윤색되어 들어가 있으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므로 한반도 특히 백제와의 관계와 함께 분석하면 풀리게 되고 일본서기상의 도치 내지는 조작된 역사가 아닌 실제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처음에 언급한 인식중의 ‘3인식3. 현재 우리나라 재야사학계 인식이 입증이 되는 좋은 일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많은 증거 중에서 가장 적합한 일례로 선택하였다.

 

이 사례를 보면 백제가 단지 문물과 문화만을 전수한 것도 아니고,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이 문명을 전파하자 이후 자체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반전시켜 일본 문명이 일으켜진 것이 아니라 백제가 한반도의 본국에서 중국 사서에 나오는 담로(분국, 식민지)에 의하여 분국 내지는 식민지로써 일본 왜국을 경영한 역사적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사서인 양서(梁書)남사(南史)에는 백제에서 성()고마라고 부르고 읍()담로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또한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거주하게 했다거나 모두 아들이나 아우의 종족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방법은 백제 왕족 중 차기 왕이 될 왕자 내지는 왕과 제일 가까운 친 혈족이 일본 열도 당시 왜나라(AD 670년 이후 일본 국명 사용)를 왕으로서 다스리다가 백제에 다시 와서 차기 왕을 이어 받아 왕으로 등극하면서 왜나라에 있는 후왕을 제후와 같이 간접 지배하는 형식으로 백제는 왜나라를 다스린 증거가 바로 5의 실체인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서기상의 왕(천황) 1대부터 14대까지의 왕은 실제 존재하지 않은 왕이고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는 실제 존재하는 최초의 왕은 일본서기15응신(応神)[(추존명):오진(일본명), 호무다 다께(본명)]으로서 재위 기간이 AD 270~310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학자조차도 인정하는 바 재위 기간도 실제보다 앞선 것으로 조작되어 있다. 여기에서 2주갑(120) 인상설이 나오는 것이다. 응신왕 역시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의 분국(식민지)경영 체제인 담로에서의 후왕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5을 살피는 나중에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5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당연히 일본학자들은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배제한 채 일본서기상의 왕들과 맞추는 학설만을 내놓지만 합리적인 조합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주류 사학계인 강단 사학계에서는 제대로 연구조차 하지 않고 이러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결과만을 추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 우리나라 국가가 고대에 일본을 식민지로 다스렸다는 언급은 큰일 날 헛소리라는 것이 지상천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류사학자계로서 사학과 교수들인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어떤 연구를 했는지 궁금하므로 이에 대하여 살펴보고 제대로 된 역사를 알아보기로 한다.

 

이러한 우리나라 학자들의 대표적인 연구 결과는 2005한일관계사연구논집2’편에 5왕 문제와 한일관계라는 서책에 5명의 학자인 대학교수 논문으로 실려 있다.

 

  

5왕 문제와 한일관계

 


 

이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왜5왕의 중국에 대한 상표문 내용에 나타나는 관작요청 및 정복활동 그리고 고구려와의 적대관계 등에 대하여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한다든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거나 하려 했다는 식의 연구결과에 반박만 하면서 제대로 된 연구 결과는 없는 것이다.

 

감히 역사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본 필자의 판단으로는 제대로 된 연구라고 판단되지 않았다. 이런 연구 결과를 내놓은 학자들의 양식과 자질에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면 감히 본 필자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에 여부에 대하여 여러분들도 평가를 해보기 바란다.

 

먼저

 

1. 노00 교수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1)당시 왜국은 아직 통일고대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호족연합적 정권의 성격을 가졌다.

   (2)한반도에서는 도래인 선진문물 전수받고 있었다.

   (3)‘5의 중국 왕조에게의 관작요청은 무리한 관작요청으로써 그 이유는 단지 주위국들과 비교한 자기 과시를 하기 위한 것임

 

(비판)

   (1)스스로의 연구결과 당시 왜국은 아직 통일 고대국가를 이루지 못하여 한반도의 대규모 출병은 불가능한 단계이라고 하면서도 당시 강력한 고구려와의 대결을 인정하는 모순을 범하였다.

   (2)특히 나중에 살펴 볼 백제 개로왕과 5의 무왕의 상표문을 비교분석하면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도 이를 하지 않은 것은 학자로서 있을 수 없는 것임.

   (3)또한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의 도래인은 단지 문물을 전수하였다는 기존 역사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 양00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1)‘5과 중국과의 최초 교류(사신 파견)AD 413년의 왜5왕의 찬왕이 중국 동진에의 사신 파견에 의한 공물 기사는 그 공물이 초피와 인삼으로써 일본열도와는 관련 없는 것이므로 신빙성 없고 이는 고구려로 혼동 하였거나 고구려의 포로로써 같이 간 것이라는 주장.

   (2)또한 에다 후나야마와 이나리 야마 철검은 왜왕이 스스로 자기 지역정권을 거느린 증거가 된다는 주장.

   (3)백제 개로왕과 5의 무왕 상표문 비교 분석 결과 고구려가 공동의 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관작 요청의 이유는 왜왕권의 위상 제고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

 

(비판)

   (1)당시 왜는 백제의 분국이며, 백제는 중국 대륙 요서지방에 대륙백제를 또 다른 분국으로 두고 있었으므로 여기서의 생산품인 초피와 인삼을 왜국 사신에게 주어서 공물로 중국에게 준 가능성은 전혀 무시한 채 고구려 혼동 내지는 포로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여 학자로서의 한계성이 엿보임.

   (2)상표문을 비교 분석한 것은 다행이나 분석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그 상표문이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같은 혈족인 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문제점이다. 즉 비교 분석 결과 백제와 왜를 분리한 채 공동의 적인 것을 나타 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비교 분석을 잘못하였거니와 당시 왜의 한반도에서의 역할과 군사력을 과대하게 평가한 채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였다.

   (3)또한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두 곳의 철검에 대한 평가가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연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철검 명문상의 백제 개로왕 표시를 일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시한 오류를 그대로 따랐다. 이는 학자로서의 치명적 결함으로서 당시 왜국에 대한 백제의 영향을 무시한 연구 결과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강단 주류사학계가 지금도 자신들이 극복하였고 지금도 노력한다는 식민사관 극복이 아직도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원천적인 식민지 사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3. 주00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1)AD 413년 찬왕 공물 신빙성 없는 것으로써 포로라는 가능성에 제기한 주장을 비판하면서 고구려 사신과 같이 조공한 것을 중국 사서가 오해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왜의 국제무대 등장으로 평가

   (2)작호 요청 및 수여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외교활동은 백제와 경쟁, 백제 등 여러 정치세력들의 연합에서 군사력의 대수장을 지향, 백제와 경쟁에서 우위 장악 노력으로 평가

   (3)‘5은 이러한 외교전 실패해서 세력 교체되어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는데 그 단서가 일본서기편찬시 배제되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를 일본서기와 연결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비판함.

 

(비판)

   (1)(2)여러가지로 왜의 위상을 백제보다도 우위 내지는 고구려와 동격으로 과대 평가히였다. 당시 왜국은 철기 생산도 못하고 통일국가도 못이루어 한반도에의 대규모 출병과 군사력 유지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을 식민사관에 의하여 고의로 무시 내지는 인식상 결여된 원천적인 한계를 드러내었다.

   (3)일본서기와의 연결 작업은 비판하면서도 제대로 된 연결고리 제시는 학자로서 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한계를 나타내었다. 더군다나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 및 과정 그 실상에 의한 백제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않음으로써 식민사관 극복이 아닌 여전히 식민사관에 의한 인식 결과이거나 학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백제와 연결만하면 자연히 해결되는 것을 고의 내지는 인식 결여로 실패하는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4. 이00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1)일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인 전방후원분 체제(3세기말부터 4세기 초)에 의한 연합정권 성립을 비판하면서 5세기 중엽부터 야마토 정권이 초월적인 지위(유라쿠 왕 시기)가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유물인 선산고분대도(에다 후나야마) 및 도하산(이나리 야마) 철검의 해석을 일본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獲加多支鹵大王명문을 와카타키로-오키미로 해석하여 일본서기상의 왕중 웅략왕(유라쿠, 와카다케루)으로 연결 해석하여 이것이야말로 당시(AD 471) 일본왕이 지방 호족들을 통치하여 통합 왕조를 이룬 증거물이라고 하였다.

   (2)위의 전방후원분 체제는 수장 연합의 통합성을 주술에만 의지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연합의 체제를 정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고안된 장치로써 만세일계의 천황가를 지향하는 일본서기이래의 인식을 나타내는 대화정권의 우위성을 내세우는 일본학계를 비판하면서 지방세력을 군사력으로 제압하지 못해 타협책으로 나타난 것이 전방후원분 체제라고 주장하였다.

   (3)5세기 왜왕권은 한반도를 통해서 기술자와 물품을 독점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열도지배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며 5의 관작 요청 및 수여 행위는 왜왕의 권위 높이려는 의미라고 해석 하였다.

   (4)일본 교과서 기술에 의하면 도래인이 사회발달 촉진 기여하였으며 야마토 정권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활동시킨 백제계 도래인은 이 왕권에 봉사하여 문서 작성 담당하였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5)가야의 역할을 강조하여 단순한 기술 전달만 기술하는 일본학계를 비판하며 가야의 행정제도 전파를 강조하였다.

   (6)한반도의 도질토기를 바탕으로 한 수혜기 일본 생산은 5세기 전반 (400년 전후 도래인에 의함), 4세기까지 일본열도에 말이 없었으며 마구 및 승마에 관련된 지식 5세기 초에 보급, 6세기 이후 자체적인 철 생산되었으며 이전에는 한반도 철기 유입 의존하였다는 절대적인 평가를 하였다.

 

(비판)

   (1)‘獲加多支鹵大王명문을 한반도 백제와 연결시켜 백제의 확가 대(=) (=)로 대왕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본 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였다. 여기서 확가확고‘(확고 : 분국인 다물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거느리는 대왕을 뜻하는 백제말이다. 따라서 일본학계가 주장하는 바인 이 시기의 일본 왜나라의 자체적인 통합왕조 성립의 증거가 아니라 당시 왜나라는 아직도 백제의 분국으로써 백제의 지배를 받는 명확한 증거물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여기서 거론할 5과 가장 밀접하게 관계가 있으며 바로 이 증거물과 논리가 이 글의 핵심이며 이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2)전방후원분이 일본 고유의 수장 형태라는 일본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한 채 한반도 관련성을 부인히였다. 하지만 그 위치 및 부장품의 성격에 의하면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부인하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연합정권의 주체는 한반도 도래인(도왜인) 세력이 분명한 것인데도 이를 무시한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특히 전방후원분은 본 필자가 최초로 주장한 바와 같이 홍산문명에서의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즉 원형의 제단과 방형의 무덤(적석총)]의 영향이 분명한 것으로써 이러한 문화는 중국 민족이나 문화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 민족은 고조선-부여-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거쳐 일본에 까지 계승되어 나타나는 한민족 전통 내지는 부여족의 일본 진출의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

   (3)왜왕권이 도래인을 통솔하거나 조정하는 주체세력으로 파악하였으나 이 왜왕권은 한반도 왕권과 무관하지 않은 밀접한 관계 속에 통치 차원에서 문화나 기술 등 모든 것이 전달되었던 것이고 도래인(도왜인)은 바로 일본 왜 정권의 주체세력이지 종속된 세력이 아닌 것인데도 이를 간과하였다.

   (4)도래인의 역할은 단지 기술 전달에 국한시켰다고 파악하였으면서도 그 내용을 보면 모든 것이 도래인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졌는데도 일본 학자들의 결론과 같이 단순히 복종관계에 있어서 피지배자 위치에 있다는 것은 모순이며 오히려 왕권 주체가 바로 도래인이라는 것을 간과하거나 인식부족의 한게성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모든 한반도 영향 무시한 결론의 내용은 모든 문화 유입인데도 단지 문화 유입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교묘한 일본학자 그리고 식민지 사관의 방법인데도 그대로 이에 따르는 것은 식민지 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증거이다.

   (5)가야의 역할을 기술력만 강조한 일본 학계를 비판하면서 행정제도를 전수시켰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행정제도는 왕권과 관련이 있어 큰 나라의 경우 왕권 보조세력에 불과할지 모르나 당시 왜나라와 같이 미약한 나라의 경우 권력 그 자체가 되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은 자체 모순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6)이와 같이 한반도 세력은 이 시기에 막강한 군사력과 기술력 그리고 행정력에 의하여 강국이었던 것에 비하여 왜나라의 경우 겨우 철이 생산되고 기마 문화가 전수되면서 통일 국가가 아닌 연맹체 수준의 소국 연합체 시기라고 일본 학자들과 같이 분석하면서도 결국 일본 학자들이 내는 결론인 한반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무시한 일정한 도움을 전수 받아 자체 발전에 이르렀다는 모순에 이르는 상당한 모순점을 극복하지 못한 연구결과이다.

 

  

본의 전방후원분

 

  

한국 광주시 월계동 장고형 무덤

 

  

산문명 우하량 유적(원형 제단 방현 적석묘)

 

5. 김00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도왜인 발생 사실은 특히 백제인의 경우 고구려 군사력에 밀려 발생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로써 백제와 왜의 화친에 의하여 그 필요성에 따라 백제는 왜에 대한 군사적 도움 그리고 왜는 백제에 대하여 선진 문물 요구 했다는 그동안의 도식적인 결론을 도출하였다.

 

(비판)

일본학자들의 전형적인 결론과 같은 것으로 백제와 왜를 동격으로 파악하였으나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국력과 국가 발전 상태로 보아도 그렇고 일본 열도의 왜나라에 대한 한반도의 각종 도래인, 군사력, 문화력, 기술력의 유입 상태를 보아도 상식적으로 이와 같은 결론은 납득이 안되는 것인데도 이러한 결론을 도출한 것은 학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6. 권00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에 대한 여러 가지 설 나열하면서 소개하고 차후 연구 과제 및 방법 나열하였다.

 

(비판)

하지만 이에 대한 근원적인 연구나 독창적이거나 개인적인 연구 결과에 의한 학설 주장이나 결론 도출 없는 연구의 한계가 있었다.

 

7. 박00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일본 연구자들은 5세기대 일본 열도의 문명화와 고대국가 형성의 배경을 왜 왕권에 의한 임나경영 혹은 한반도 침략에서 구해 왔다. 그리고 가야와 왜 관계를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활동을 기반으로 선진문물과 필수물자의 도입루트를 왜왕권이 독점적으로 장악하는 것에 의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고대국가가 출현하는 것이 일본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파악했다. 그러면서 이를 비판하면서 여러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당시 왜 정권은 한반도의 문물 도입루트를 독점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하였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비판)

한반도와의 관계를 문물의 흐름으로만 파악하는 한계가 있으며 일본학계의 주장을 비판하면서도 한반도 국가에 의한 일본 정권의 조정 같은 근본적인 파악은 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한국 사학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연구 결과이다.

 

8. 안00 교수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연구 결과)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를 종래의 주장과는 조금 달리하여 왜계 집단을 거느린 재지인 즉 왜인을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면서 영산강 유역 집단의 유력자는 영산강 유역 또는 백제권의 유력자이면서도 왜의 유력자이기도 한 이중국적자와 같은 성격이라고 파악하였다.

 

(비판)

영산강 유역과 백제권 그리고 왜를 동시에 같이 지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새로운 일층 발전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잘못 되면 기마민족설일선동조론과 같이 일본과 동격 내지는 일본 우위론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주장으로 판단된다. 결국 당시 국력으로 보나 문화나 기술, 행정력의 유입 방향으로 보아도 왜국을 경영하는 것은 한반도 세력이라는 전제 조건하에서 논리가 전개되어야 역사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어쩌면 지나치게 상세하게 우리나라 학자들의 당시 일본 그리고 5에 대해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는 것은 이 비교적 짧은 글에 어울리지 않고 학문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살펴보아야 앞으로 전개할 논리가 제대로 된 것인가를 파악할 수 있고 증명이 되기 때문에 살펴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앞에서 그 개략적인 인식의 방향은 설명하였다. 여기서는 주장하는 결론만을 대체로 살펴보고 본 필자의 주장을 설명하고자 한다.

 

일본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전 식민주의 학자들은 식민주의 사관에 충실하여 식민주의 사관의 근간에 맞게 쓰다 소기치(津田左右吉)5이 임나일본부의 지배자로 파악하였으며,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나 오다 료(太田亮)5이 야마토 왜의 지배자로 보았고, 이께우찌 히로시(池內宏)는 임나의 지배자들이 천황을 사칭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대부분 야마토 즉 일본국 이전의 왜나라의 천황들이라고 보고 있다.

 

즉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왜5왕을 응신왕(應神)(오진 천황인덕왕(仁德)(닌토쿠 천황)부터 웅략왕(雄略)(유라쿠 천황)에 이르는 천황들에 비정하고 있다. -인덕왕/-반정왕/-윤공왕/-안강왕/-웅략왕 특히 5일본서기상의 웅략왕(유라쿠청황)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이에 덧붙여 당시 웅략왕의 일본서기상의 기사 내용과 함께 이미 소개한 두 개의 철검 명문상의 잘못된 해석을 증거로 하여 이 시기에 드디어 자체적으로 소규모 호족 연합 국가를 중앙에서 통치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들이 한반도 국가 특히 백제와의 관계 속에서 일본서기와 중국 사서를 종합적으로 검토 한 바 일본 당시 왜나라는 백제에서 다스린 분국(식민지) 이었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다. 이제부터 설명할 사항이 그것이다. 그것을 살펴보는 출발점은 5중의 왜왕 무()(일본명 : )’ 즉 백제 무령왕이다. 왜냐하면 명백히 증명이 되고 이것에서 출발하면 무리가 없고 설명이 쉽기 때문이다. 나머지 5명의 왕 중 4명의 왕은 이에서 출발하면 연결이 쉬워진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 중에서도 이견이 있다. 특히 5중 무()을 곤지로써 개로왕의 아들로 주장하거나 반대로 일본 학계나 우리나라 학계의 통설대로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고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다. 그리고 무령왕이 5의 무()이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여러 가지 자료를 세밀히 검토한 결과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 아니라 아들이며, 무령왕 역시 개로왕의 배다른 자식으로써 곤지와 이복 형제라고 판단하며 이 판단이 합리적이고도 역사적 진실이라고 여긴다. 이에 대하여는 후에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니 여러분도 판단해 보기 바란다.

 

또한 이미 거론하였듯이 일본의 일반적인 학설은 왜왕 무()일본서기상 제 21대 웅략왕(유라쿠 천황)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 무()왕이 백제의 곤지나 무령왕이라는 것은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본의 왜 무()왕이 백제에 와서 무령왕(이름:사마, 무령은 사후 추존명)으로 등극하기 전에는 백제의 분국인 왜나라(당시 대왜(大倭), 대화(大和), 야마토 정권)를 중국사서상의 5중 무()왕으로서 다스린 것이 역사적 실체인 것이다.

 

또한 그 무령왕 즉 왜5왕 중 무()왕의 이복 형이자 아버지인 개로왕의 아들인 곤지가 중국 사서상의 왜5왕 중 무()왕의 윗대인 ()(고오)’(----)

 

것이다. 이가 바로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제 21대 웅략왕(유라쿠) 천황)이지 그들이 주장하는 무()왕이 유라쿠(雄略) 천황이 아닌 것이다.

즉 무왕=무령왕이고 흥왕=곤지=웅략왕(유라쿠 천황) 인 것이다.

그럼 이에 대해서 자세히 증명하며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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