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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동학농민운동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1.12|조회수189 목록 댓글 0

2대 교주 최시형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4년에 일어났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과는 10년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 기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 시기 청(淸)나라는 서구 열강들에게 휘둘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일본도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日本)에서는 헌법 제정을 둘러싸고 의회세력과 정부 세력 간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이 10년은 조선에게 있어서는 거듭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략을 제대로 세웠더라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다르게 쓰일 수 있었을 것이다.


🌹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

조선 조정에서는 동학(東學)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종교라고 단정짓고, 1863년 동학의 교조인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교도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동학의 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의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동학을 포교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도의 수는 늘어났고 조직은 체계화되었는데, 이는 '포접제(包接制)'의 역할이 컸다. 교주 아래 대접주, 또 그 밑에 접주를 두어 지역을 관할하게 하는 피라미드식 종교조직이 바로 포접제(包接制)였고, 이 조직이 동학농민운동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동학은 나라에서 금지한 종교이다. 동학교도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조선 조정의 동학(東學)에 대한 탄압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가혹했다. 수령에게 잡혀간 동학교도들은 관청에 돈을 바쳐야 풀려날 수 있었다.벼슬아치들이 나라에서 동학(東學)을 금지했다는 것을 핑계로 동학 교도들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탄압이 계속되자, 1892년 10월 공주집회를 시작으로 동학 교도들은 교조인 최제우(崔濟愚)의 누명을 벗겨주고 동학을 인정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이기 시작했다.그리고 마침내 1892년 11월 1일, 수천 명의 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 모였다.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 달라. 동학에 대한 탄압을 멈춰라."
집회를 마친 동학교도들은 전라감사에게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 1893년 2월에 동학 지도자 40여 명이 광화문 앞에 엎드려 왕에게 최제우(崔濟愚)의 누명을 벗겨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3일 동안 엎드려 호소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농민전쟁을 예고하다 ㅡ 보은과 금구 집회

동학교도들은 삼례집회와 광화문 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에서 각각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동학 교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참여했다. 집회에 참여한 수만 명의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요구도 주장했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이다.
'척왜양창의'란 왜놈과 양놈들을 배척하고(斥倭洋), 의를 내세운다(倡義)는 뜻이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처벌하라."
"지금 조선 땅은 오통 오랑캐의 소굴이 되었다. 일본과 서양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
수만 명의 농민들이 모이자,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 온건개혁파로 비교적 때묻지않은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로 삼아 보은에 내려 보냈다.

조정에서 내려온 어윤중(魚允中)이 동학교도들의 뜻을 왕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하자, 동학교도들은 스스로 흩어졌다. 비록 스스로 흩어졌지만, 보은과 금구집회를통해 그들은 부정부패를 없애고 외국세력을 반대하는 그들의 뜻을 드러내 보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전 동학은 크게 최시형(崔時亨)을 중심으로 한 북접과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한 남접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접은 보은에서 집회를열고, 남접은 금구에서 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에서 동학 교도들은 부정한 관리를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과 서양세력에 대한 배척 등 정치적인 내용을 강조했지만 보은 집회를 이끄는 최시형(崔時亨)의 태도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최시형(崔時亨)은 동학교도들이 정치적인 요구를 하면서 난을 부리는 것을 걱정했다. 동학(東學)이 나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부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금구에서도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인 집회가 열렸는데, 이는 최시형과는 달리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전봉준 (全琫準)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금구집회는 보은 집회보다 훨씬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북접 교도들이 스스로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은 스스로 흩어져 새로운 불씨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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