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병인양요와 박해의 확대
1.프랑스군의 1차 침공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와 지도급 신자들이 순교한 1866년 3월 이후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도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9월 9일(음력 8월 i일) 방아책과 연관되었던 김계호 둥에 대한 처형이 결정되고,9월 11일(음력 8월 3일)에 예문관 제학 신석희(申錫禧,18아1873)가 지은〈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되면서 박해는 일단락되는 둣 싶었다.
그러나 뒤이어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즉 프랑스 함대의 무력 침공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 정부의 박해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을 탈출하여 1866년 7월 7일 체푸에 도착한 리델 신부는 즉시 프랑스 극동 함대가 있는 천진(天津)으로 가서 로즈(P.-G. Roze, 1812〜1882) 사령관에게 선교사의 처형 소식을 전하고, 남은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들의 구출을 요청하였다. 로즈 사령관은 이 사실을 7월 10일 본국의 해군성에 보고하는 한편, 북경 주재 프랑스 대 리공사인 벨로네(H. de Bellonet, 白洛內)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당시 인도차이나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즈의 조선 원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고, 벨로네 공사는 7월 14일(음력 6월 3일) 청나라 총리아문의 공친왕(恭親王) 혁혼(奕訢,1832〜1898)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왕국이 프랑스 사람을 처형한 일을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러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 에 공친왕은 ‘근일 프랑스 함대가 조선으로 갈 것이니 화친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조선에 보냈다. 그리고 8월 17일(음력 7월8일)에는 중국의 예부(禮部)에서도 비슷한 공문을 보냈는데, 이러한 연락을 받은 조선 정부는 선교사들을 처형한 것이 국법에 의한 정당한 조치였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다.
이 러한 상황에서 인도차이나에 갔던 로즈 사령관이 8월 20일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조선 원정을 준비했고, 드디어 9월 18일(음력 8월 10일)에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번 원정은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응징에 앞서 정찰을 목적으로 실행된 것이었다.
그는 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 • 심순여(沈順汝) 등 조선 교우들을 안내자로 삼아 프리모게(Le Primauguet) 호 등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체푸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로즈 일행은 즉시 한강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아산만으로 향하다가 9월20일에야 한강 입구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9월 23일부터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9월 26일(음력 8월 18일) 조선군은 염창 부근에서 한강을 가로질러 전선을 배치하고 이들의 진로를 막았다.
그러나 조선의 선박은 프랑스군의 사격을 받고 2척이 격파되는 등 전열이 와해 되었고,한강 양안에서 발사된 포격과 화전(火箭)은 사거리가 짧아 프랑스군의 전진을 막을 수없었다.
이렇게 하여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올라온 프랑스군은 서강 앞에서 1박을 한 후 철수하여 10월 3일(음력 8월 25일) 체푸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