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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안중근의사 의거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1.17|조회수348 목록 댓글 0

혈혈단신 헌병대를 뚫고 들어가 한 손으로 저격 !
7발 발사. 7발 모두 명중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5~6초.어떻게 저격대상의 얼굴도 모른 채,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 것일까?
의거 110주년이 되는 201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총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의거 직후 일본 측에 압수된 총은 <리볼버>.
그 중 ‘일련번호 262336’이 새겨진 것이
안중근 의사의 총이다.

그런데 1910년대 당시 널리 사용된 권총은
의병들 사이에서 육혈포라고 불리던 <리볼버>였다.
때문에 세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총도 ‘육혈포’라고 알려져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왜 파괴력이 큰 것으로 알려진 <리볼버> 대신, 파괴력이 약하고 작은 *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왜 한손으로 저격한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 손 사격으로 7발을 모두 명중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성주(작가)와 강준환(총기 연구가).
총기 관련 콘텐츠 채널을 운영하는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안중근 의사의 총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6개월에 걸친 수소문 끝에 미국의 경매사이트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과 같은
모델의 총을 찾았다.

1907년 벨기에 FN사에서 제작된 안중근 의사의 의거, 그 미스터리를 추적하기 위해 총이 보관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도시 그린즈버러에서 저격 실험을 하기로 했다.

“저는 매일 총을 쏘는 사람이지만 안중근 의사처럼 한손으로 쏜 것보다 정확하지 않아요. 안중근 의사는 굉장히 정확도가 높은 저격을 했다고 할 수 있어요.”
- 애런/ 미국 전문 사격수

저격 실험에는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전문 사격수 두 명이 참여했다. 실험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7m 거리에서 진행됐다.
*VS <리볼버> 비교 실험 결과, *의 사격속도가 <리볼버> 더 빠르고 명중률도 더 높았다.
<양손 사격> VS <한 손 사격> 비교 실험에서는
<한 손 사격>이 더 정확했다.

미국의 전문 사격수들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였다. 명사수로, 총에 대해 꿰뚫고 있었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저격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이었고,
<한 손 사격>이었던 것이다.

안중근과 동지들이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0월 21일.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작전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4명이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했고
하얼빈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조도선과 러시아 통역 담당으로 유동하가 합류했다.

거사 후보지는 모두 3곳. 현장 답사까지 실시한 끝에 플랜A로 선정된 거사지는 채가구역.
그리고 플랜B로 선정된 곳이 하얼빈역이었다.
채가구역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맡기로 하고,
하얼빈역은 안중근 의사가 맡았다.

10월26일 아침 7시. 안중근은 채가구역 거사가
실패한 줄도 모른 채 하얼빈역에 잠입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총에 거사의 승패가 달린 것을 알게 됐다.

퇴로를 생각하지 않고 최대한 가까이 접근,
7발을 쏘아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안중근은
도주하지 않았다. ‘코레아 우라(대 한국 만세)’를 외치며 체포됐고, 그의 총도 압수됐다.
안중근 의사의 총 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총에 새겨진 역사 그리고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
이토의 첫 번째 죄는
그의 지휘 아래 조선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는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째는 을사오조약과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째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는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
열다섯 번째는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죄다
- <안응칠 역사>에 기술된
15개조의 「이토 히로부미 죄상」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하얼빈의 재판정에서
이토의 죄를 당당하게 폭로한 안중근 의사.

그의 법정 투쟁은 제국주의를 향한 엄중한 경고였다.
역사의 부름 앞에 목숨을 걸었던 안중근,
그의 총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1908년 6월 말,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쳐,
두만강 너머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1909년 2월에 동지 11명과 단지동맹을 맺고
스스로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독립 의지를
다지기도 한 안중근은, 1909년 10월 만주의 하얼빈에 이토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동지들이 세운
암살 계획에 자원했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관할로서,
이토가 만주 철도 부설권 등 만주 문제와
한반도 병합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초프(V. N. Kokovtsev)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독립운동 진영은 이토와 같은 거물 정치인을 암살함으로써 세계 만방에 대한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재판 과정에서 일본이 대한제국에 저지른 죄상들을 폭로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안중근 역시 헤이그 특사단 중 한 명인 이상설이 구미열강을 순방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으로 볼 때,
개별적인 의병 항쟁보다 세계열강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킬 수 있는 이토 암살이 효과적인
투쟁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우덕순, 조도선 등 동지들과 함께
거사일 며칠 전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마침내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하얼빈
철도역에 내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의 총을 쏘았다.

이어서 2~3발의 총성이 더 울렸지만, 첫 3발이 이토의 복부에 명중하여 열차 안으로 옮겨진 이토는 30여 분 뒤 숨을 거두었다.

메이지유신과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자 대한제국 보호국화의 주범인 이토를 약관 31세의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러뜨린 순간이었다.

자신을 일개 살인 피고인으로 다루지 말고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다가
적군의 전쟁포로가 된 경우로 취급해달라고 요구했다.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채택된
포로에 관한 법에 따라 대한제국,
청국, 일본 어느 나라의 법도 아닌 만국공법,
즉 국제법에 의해 재판해달라는 주장이었다.

ㅡ 이토 히로부미 일행과 안중근의 거리가
열 걸음 정도 됐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이토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맨 앞의 사람을 이토로 단정하고
네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이렇게 많은 총알을 발사한 것은
이토의 모습을 몰랐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해두자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맨 앞의 사람에게 네 발을 쏘고 난 뒤,
그는 걱정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의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안응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사람의 뒤쪽을 향해 세 발을 더 발사했다.
자신의 급한 성미 때문에 일을 그르쳤을까봐,
확실히 하고자 세 발을 더 쏜 것이다.

급한 성격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침착할 수 있었던 안중근.이렇게 일곱 발이나 발사한 뒤에도
그는 의심이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몇 발 더 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이 상황이 <안응칠 역사>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또 다시 생각하니, 만약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잘된 일은 아니다,
라며 잠간 주춤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평소에 그렇게 성급했던 안중근은
이 순간만큼은 고도의 침착성을 유지했다.
그는 네 발을 쏜 뒤에도 잠깐 생각했고,

세 발을 더 쏜 후에도 또 생각했다.
자신의 급한 성격에 대한 염려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침착했던 것이다.

처음 네 발 중에서 세 발은 이토 히로부미에
정확히 명중했다. 누군지 모르고 쐈지만, 그게 이토였던 것이다. 그 네 발 중에서 네 번째는
이토의 뒤에 있던 일본인을 쓰러뜨렸다.

나중에 쏜 세 발 중에서 두 발도 일본인들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해서 이토 외에 일본인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일곱 번째 총알은 불발이었다.
그래서 실제 발사된 총알은 여섯 발이었다.

만약 안중근이 평소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그런 성격이었다면,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여러 발의 총알을 더 발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세 발이나 맞고 확실하게 쓰러진 것은 안중근의 성격 때문이었다.
성급한 성미 때문에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안중근을 신중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그의 의거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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