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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종말까지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1.18|조회수281 목록 댓글 0

1차 세계대전의 원인

                                                                                                                              우석대학교 재활복지학과 4학년

                                                                                                                                20080834 김신애

1. 제1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배경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소속 한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권총으로 암살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라예보'사건이다. 이 사건이 1차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기는 하지만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이전부터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19세기 말 유럽의 열강들은 독점 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으며 이미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충돌을 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프리카, 발칸 반도, 동아시아 등의 지역에서 시장과 식민지 분할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 동맹국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3국 협상국으로 나뉘어져 대립이 더욱 심화됐다. 이런 대립의 한 초점이었던 발칸 반도는 당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였다. 15세기 이래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7세기가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이를 기회로 유럽 열강세력들은 저마다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내게 된다. 여기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도 독립의 의지를 높여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아직 힘이 미약해 이웃의 강대국인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결국 이런 독립 의지의 고양과 열강들의 간섭이 발칸 반도를 국제적인 분쟁의 중심지로 만들게 된 것이었다.

한편 1399년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래 강대국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 독립을 쟁취한 세르비아의 국왕과 귀족들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1908년 이 두 지방을 병합하여 세르비아 인들의 소망을 버렸고 세르비아 인의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고양되었다.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18세의 청년은 이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분쇄하려는 민족주의 비밀 결사의 일원이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독일의 지지를 얻어 1914년 7월 28일에 세르비아 정부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고, 뒤이어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참전함으로써 세계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독일은 중립국인 벨기에 국토를 통과하여 프랑스로 쳐들어갔는데, 이에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을 침범했다 하여 그 해 8월에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동맹국 쪽이 유리했으나, 전쟁을 오래 끌게 되자 차차 동맹국 쪽이 불리해져 갔다. 특히 독일은 강력한 영국 해군에 의해 해상을 봉쇄당함으로써 국민 생활 물자와 군수품 공급에 크게 지장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1914년 8월에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여 중국에 있던 독일 조차지와 독일령 남양 군도를 점령하고, 인도양과 지중해 방면으로 함대를 출동시켰다. 거기에다 1917년에는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이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결정적으로 동맹국 쪽이 불리하게 되어 마침내 1918년 11월에 독일이 휴전 협정에 조인함으로써 4년 이상이나 계속되던 대전은 끝이 났다.

2. 비스마르크 시대에서 사라예보 사건까지  

보불전쟁의 결과 맺어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의해 알사스-로렌 지방이 독일로 편입된 사실이 제 1차 세계대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즉, 프랑크푸르트 조약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알사스-로렌 지방의 귀속권을 두고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국경 문제가 1914년에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게 된 큰 이유가 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조약 이후 유럽 국제정치의 변화를 이러한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분규, 그리고 유럽 세력 균형의 변화로 본다. 유럽 세력 균형의 변화로는 1871년 이후 유럽의 기존 5대 열강 중 오스트리아의 쇠퇴, 프랑스의 상대적 약화, 독일의 통일과 국제 사회에서의 강대국화, 이탈리아의 대두 등을 들 수 있다. 비스마르크 외교 정책의 특징은 프랑스의 고립화, 해외 식민지 확장의 자제, 독일의 동맹국 확보로 요약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가 퇴진하면서 독일은 외교적으로 실책을 거듭하면서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프랑스가 유럽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외교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특징을 보여 주었다.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성공한 것은 프랑스 군사력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델카세, 포앙카레, 폴 캄봉, 줄 캄봉 등 유능한 프랑스 외무 담당자들의 역할과 이 시기 독일의 잇달은 외교적 실수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이 시기 독일 외교의 특징이 과도한 행동을 거듭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에 맞서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삼국협상을 이루어 낸 것은 프랑스의 외교적 승리라고 보여진다. 삼국협상의 특징은 영국과 프랑스, 영국과 러시아가 그들 사이의 제국주의적 분규를 서로의 협상에 의하여 해결한 점, 그리고 러시아가 발칸지방에 대한 그들의 야망 추구에 있어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기대 할 수 있게 된 점이다. 발칸 전쟁이 1914년의 위기의 근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파악된다. 즉, 신생 동남부 유럽국가들의 팽창 야망, 영토 분쟁의 해결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려는 사고, 발칸 전쟁을 고무하는 러시아의 소행, 세르비아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오스트리아의 결의, 마케도니아 문제의 처리에 대한 불가리아의 불만 등이 1차대전의 불씨의 일부가 된다고 파악된다.

통상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체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요아힘 르마크는 1871년에서 1914년 사이의 유럽에 국제적 위기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유래가 없었던 세계대전을 필요로 할 만큼 다른 시대에 비해서 특별히 긴장된 것만은 아니라고 보며, 따라서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두 가지 주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서술한다. 즉, 국제관계의 저변에서 국가 간의 충돌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문제와 1914년의 대전을 야기한 직접적인 위기가 그것이다. 제1차대전 직전의 유럽의 구조적 약체화는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즉, 유럽의 국가체제, 유럽의 동맹체제, 해외 및 유럽 주변 지역에서의 유럽 열강 사이의 많은 쟁투, 국제 관계를 해쳤던 여론과 언론의 역할, 국가 정책의 합법적 수단으로서의 전쟁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측면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먼저, 1차대전이 제한전쟁이 아닌 전면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쟁을 수행하는 단위가 국민국가로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7세기 이후 국민국가가 등장하게 되고, 이후 18,19세기에 들어 특정 계급이 아닌 국민 전체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게 됨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단위가 커지게 되어, 제한을 받지 않는 주권 국가들 사이의 충돌 가능성이 영속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개개의 국가 간의 분쟁을 조정해 줄 초국가적인 권위기구가 존재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유럽은 ‘국제적인 아나키’ 상태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 유럽의 동맹체제가 오히려 유럽 국제관계의 위험을 증폭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유럽이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적대적 진영으로 나뉘어, 평화 유지를 위한 외교 활동의 길이 막히게 되었고, 둘째, 이러한 동맹체제 아래에서는 약소국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각 국은 동맹국의 보호를 믿고 무모한 책동을 벌이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세 번째로,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유럽 국가들은 해외에서 제국주의적 경쟁을 벌였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해외 팽창이 유럽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기여한 구체적 근거로 식민지 건설의 야망이 군비의 증대를 요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유럽 대륙 내에서는 발칸반도내의 끊임없는 분쟁, 알사스-로렌을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영국과 독일의 대립 등이 상존했다. 여기에 자극적인 언론이 영.독 간의 불화를 조장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주권국가들이 전쟁을 분쟁 해결을 위해 궁극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공인된 수단임을 묵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유럽이 1차 대전을 숙명적으로 겪어야 했는가 하는 문제에는 의문이 따른다. 요아힘 르마크는 이러한 문제들의 또 다른 측면 또한 지적하고 있다.

먼저,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 체제가 반드시 전쟁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초국가적 정치형태라는 것은 역사상 매우 드문 존재인 것이다. 다음으로, 당시의 동맹체제들은 오늘날 생각하듯이 철저한 구속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다. 세 번째, 영.독간의 제국주의적 대립 못지 않게 영.불, 영.러 간의 경쟁 역시 격심하였지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대립하는 대신 제국주의적 협력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네 번째, 유럽과 그 주변 지역에 있었던 유럽 열강들 사이의 분규는 결코 전쟁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해군비와 식민지 경쟁, 언론의 역할, 정치가의 자질 등의 문제도 결코 세계대전을 일으킬 필연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과연 당시 유럽의 병세는 얼마나 심각했던 것인가? 심각하기는 했으나 치명적은 아니라 보여진다. 20세기 초의 유럽에는 많은 폭발적인 요인이 있었으나 이들을 세계대전으로 폭발시키려면 도화선에 불을 붙일 불이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요아힘 르마크는 1차대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드 대공의 암살 사건과 그에 이은 사건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제1차 세계대전의 내재적 원인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한편, 러?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Cairo?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Byzantium?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2년, 세르비아?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3년 재차 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원인

제국주의

대립

제국주의 국가간의 대립

삼국 동맹 ↔ 삼국 협상

범게르만주의 ↔ 범슬라브주의

계기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

결과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

국제 연맹 등장

 

 

<제1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종말까지>

 

대전의 폭발과 대전의 성격-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여름에 먼저 유럽에서 폭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폭발은 제국주의의 2대 군사 침략 집단이 상호 쟁탈전을 벌인 결과이며, 또 그들이 전쟁 준비를 위하여 미친 듯이 군비를 확충한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

 대전이 폭발되기 전야에 유럽의 발칸 반도는 수시로 폭발할 수 있는 화약통으로 되어 있었다. 발칸 반도는 장기간 터키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사이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반복적인 투쟁을 거쳐 터키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리스,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열강들은 모두 발칸 반도에 손을 내밀고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넘어오는 사이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1908년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 두 곳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당시 인민들은 세르비아와 결합하여 대남부 슬라브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1914년 6월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태자가 오스트리아에 새로 병합된 보스니아에서 군사 연습을 검열하고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이번 연습은 세르비아를 적으로 가상하고 진행되었다. 이것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6월 28일에 태자의 행렬이 사라예보 거리를 지날 때 세르비아의 비밀 민족주의 조직의 성원이 총을 쏘아 태자 부부를 죽였다.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다. 이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이 사건을 전쟁 도발의 좋은 기회로 간주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기회를 타서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후 일주일간에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이 연이어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일방으로 한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다른 일방으로 한 협상국이 서로 싸웠다. 세계대전은 바로 이렇게 폭발되었다. 전쟁의 규모는 끊임없이 확대되어 유럽의 범위를 벗어났다. 갈수록 더욱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감겨들었다. 이탈리아는 이해 관계가 있어 협상국 편에 가담하여 싸웠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한 차례의 제국주의의 약탈 전쟁이었으며, 교전 쌍방에 대해 말한다면 모두 비정의 적 전쟁이었다. 세르비아는 자기의 주권과 독립을 보위하기 위하여 싸웠다. 이 점에 대해서 말하면 전쟁은 정의적인 민족 해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반 전쟁의 비정의성을 변경할 수 없었다.

 

전쟁의 과정- 전쟁이 시작되자 유럽에는 세 갈래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벨기에, 프랑스 북부 및 독일-프랑스 접경 지대에 서부 전선이 형성되었는데, 그곳에선 영국, 프랑스가 독일과 싸웠다. 동부 전선은 발틱해의 남안으로부터 루마니아에까지 이르렀는데, 거기에선 러시아가 독일, 오스트리아와 싸웠다. 남부 전선은 발칸 전쟁이었는데, 그곳에선 오스트리아-헝가리아가 러시아, 세르비아와 싸웠다. 이밖에 쌍방은 또 아시아의 남카프카즈, 양강 유역과 팔레스티나에서도 싸웠다. 유럽의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은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1914년 8월 4일에 벨기에에 침입한 독일 주력 부대는 프랑스 북부를 돌연 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8월 하순에 독일 군대는 벨기에 군대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저항을 짓부시고 벨기에를 거쳐 곧장 파리에 다가 들었다. 9월 초에 파리 북부의 마르느 강 부근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첫 대회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쌍방의 군대는 150만 명을 초과하였다. 4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거친 다음 독일군은 할 수 없이 후퇴하였다.

쌍방은 방어 진지를 쌓고 장기적인 진지전으로 넘어갔다. 독일 참모부에서는 본래 여섯 주일 내에 프랑스를 격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실 이 계획은 파탄되었다. 전쟁은 지연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것은 독일측으로 보면 불리하였던 것이다.

 동부 전선에서는 8월 중·하순경에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에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동, 서 두 개 전선에서 동시에 작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독일은 할 수 없이 서부 전선으로부터 병력을 떼어 러시아군에 대항하게 하였다.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마주르카 지역에서 잘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갈래의 러시아군을 섬멸하고 러시아 경내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같은 때에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의 동부 지구로 깊이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쌍방의 대치 상태가 형성되었다.

 1915년에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동부 전선엔서의 작전을 종말지으려고 생각하였다. 1월에 독일군은 연속 진격하여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전선을 리가만으로부터 드레스뜨르 강 일대까지 밀고 나갔지만 러시아를 압박하여 투항시키려던 주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동부 전선에서의 위협도 해제시키지 못하였다.

 1916년에 전쟁의 중력 중심이 다시금 서부 전선으로 전이되어 2월과 7월에 베르덩과 쏨므강에서 두 차례의 큰 전투가 벌여졌다. 전쟁은 연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두 차례의 큰 전투에서 쌍방은 20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내었다. 그 결과 서부 전선에서 전세를 결정지으려고 서두르던 독일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형세의 발전은 갈수록 더 협상국측에 유리해졌다. 해상에서의 전쟁 국세는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해 더욱 불리하였다. 독일, 오스트리아의 군함은 항구내에 장기간 포위 견제되어 있었다. 1916년 6월의 유트란드 대해전은 또 독일 해군의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해상 운송이 거의 전부 봉쇄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나라는 물자가 날로 결핍하여져 궁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10월 혁명의 승리와 대전의 종말- 제국주의 전쟁이 폭발되어 2년 남짓 한 동안에 교전 쌍방은 모두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하였기에 그 처지가 매우 곤란하였다. 독점 자본가들은 근로 인민들을 전선에 내몰아 피를 흘리게 하고 후방에서 굶주리게 하였지만, 저들은 도리어 전쟁 가운데서 거액의 이윤을 얻었다. 예를 들면 독일 군수품 대왕 크루프회사의 이윤이 1913년에는 3,300여만 마르크이던 것이 1914년에는 8,600여만 마르크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교전국의 주민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일용품이 결핍되어 생활이 몹시 곤란하였다. 1916년 겨울에 독일의 도시 주민들이 거의 다 제한된 순무를 먹으면서 생활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짜르 러시아는 제국주의 쇠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로서 특히 엄중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선에서는 군수품이 매우 결핍하였으며 심지어 병사들의 보총까지도 부족되었다. 후방에서는 연료의 부족과 운송의 곤란으로 하여 공장의 생산량이 감소되었다. 국가의 경제는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1917년 초에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 운동이 수도 빼뜨로그라드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이어 모스크바, 바꾸 및 기타 일부 큰 도시들에서도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1917년 3월 10일(러시아 역서로 2월 25일)에 레닌의 지시에 근거하여 볼셰비키당 빼뜨로그라드위원회는 봉기를 일으켜 짜르 전제 정권을 타도하라고 호소하는 삐라를 내었다. 이튿날 빼뜨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짜르 황제가 봉기를 탄압하기 위하여 전선으로부터 끌어온 짜르 군대들도 봉기자들편에 가담했다. 3월 12일에 빼뜨로그라드의 봉기가 승리하였다. 그날 밤에 봉기자들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건립하였다. 빼뜨로그라드 봉기의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짜르의 독재 통치는 전복되었다.

2월 혁명의 승리는 “제국주의 전쟁을 국내 전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레닌 사상의 승리이다. 그것은 교전국 인민들의 반전 운동을 고전시켰고, 교전국 통치 계급의 공포를 자아냈다. 바로 이와 같은 정황하에서 미 제국주의가 전쟁에 참가하였다.

 미 제국주의는 대전 초기에 ‘중립’을 견지하여 교전국들과 장사를 하면서 전쟁에 치부하였다. 대전이 종말되어 가고 교전 쌍방이 기진 맥진하였을 때 미국은 세계 패권을 쟁탈하고 전리품을 탈취할 시기가 닥쳐왔다고 판단하였으므로 ‘중립’이란 가면을 벗어버리고, 1917년 2월부터 개시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1917년 4월에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2월 혁명 후에 러시아 자산 계급은 정권을 절취하고 임시 정부를 조직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볼셰비키당은 노동자, 농민을 영도하여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였다. 볼 셰비키당은 11월 7일(러시아 역서로 10월 25일)에 무장 봉기를 거쳐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창건하였다. 신생한 이 소비에트 국가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단호히 퇴진하였다.

 10월 혁명의 영향하에서 교전국들의 혁명 운동이 전례없이 앙양되자 동맹국은 밑뿌리째 뒤흔들렸다. 1918년 10월 하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와해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가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전선의 군대들은 더 싸우려 하지 않았다. 1918년 11월 3일에 독일 키일 군항의 해군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봉기가 전국을 휩쓸었기에 독일 황제는 할 수 없이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11월 11일에 독일은 투항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동맹국의 실패로 종말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남짓 동안 계속되었는데 30개 국가, 15억 인구가 전쟁에 휩쓸려 들었다. 교전 쌍방은 자기의 신식 무기를 모두 꺼내어 사용하였다. 비행기, 탱크, 독가스가 처음으로 전장에서 사용되었고, 원거리 대포도 교전 쌍방에 매우 큰 손해를 주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한줌도 못 되는 독점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하여 세계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대전 가운데서 사망된 수는 800여만 명에 달하였고 부상당한 수는 2,000여만 명에 달하였으며, 참전한 모든 나라들의 직접적인 전쟁 비용이 3,000여억 달라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 의하여 가장 큰 다른 한 가지 결과가 나타났다.

즉, 러시아 노동 계급이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전취하고 지구의 6분의 1의 땅 위에 첫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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