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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 친필 편지, 프랑스서 발견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1.18|조회수117 목록 댓글 0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 친필 편지, 프랑스서 발견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950년·키워드 참조)이 3·1운동 직후 프랑스의 한 고위 공무원에게 조국 독립의 정당성과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보낸 친필 편지<사진>가 발굴됐다.


주프랑스 대사관은 11일(한국시각) “김규식 선생이 지난 1919년 당시 프랑스 교육부 국장을 지내던 로베르 브뤼셀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프랑스 교육부로부터 최근 건네받아 공개한다”고 밝혔다.

주프랑스 대사관에 따르면 이 편지는 김규식 선생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활동하던 1919년 5월 19일에 작성됐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끝난 뒤 전쟁에서 이긴 나라들이 1919년 파리에 모여 영토 조정, 평화 유지 방법 등을 논의한 평화 회의다. 당시 우리나라는 영어와 프랑스 어에 능통한 김규식 선생을 파견, 나라의 독립을 호소했다.


편지는 깔끔한 프랑스 어 필기체에 유창한 문장으로 쓰였다. 김규식 선생은 편지를 통해 “우리의 독립 요구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도 같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당신이 보내준 지지 편지 등이 소중한 격려가 되고 있다”며 브뤼셀 국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또 “내가 만난 프랑스인들로부터 프랑스 여론이 우리나라의 독립 회복을 희망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우리나라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주권을 회복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 등의 국가처럼 될 수 있을까요?”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박흥신 주프랑스대사(57세)는 “마침 어제(10일)가 김규식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주년 되는 날이었다”면서 “투철한 애국심과 뛰어난 외교 실력으로 조국을 위해 애썼던 김 선생의 관련 자료가 뒤늦게나마 발굴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 대사는 “향후 편지의 외교사적 가치 등을 검토해 외교사료관 등 적절한 장소에 보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김규식 선생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호는 우사(尤史)다. 1881년 1월 29일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1903년 미국 버지니아주(州) 로노크 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유럽·미국 등을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의 중심에 섰다.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등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엔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 선생(1876~1949년)과 남·북 협상에 나서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6·25전쟁(1950~1953년) 때 납북돼 1950년 12월 10일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우리 정부는 지난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조선일보 20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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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서 독립운동한 김규식 선생 친필 서한 발굴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 프랑스 고위 공무원에게 조국 독립 정당성과 지지를 호소했던 친필 서한이 발굴됐다.

자비에 시롱 프랑스 교육부 중등교육 수석 장학관은 10일(현지 시각) 김규식 선생이 1919년 당시 프랑스 교육부 국장으로 알려진 로베르 브뤼셀에게 보낸 친필 서한을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 전달했다. 10일은 김규식 선생의 타계 61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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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선생(사진 왼쪽)과 친필 서한. /연합뉴스

파리강화회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활동했던 김규식 선생은 이 서한에서 "우리의 독립 요구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어려운 항쟁이지만 브뤼셀 국장이 보내준 지지 편지 같은 글들이 소중한 격려가 되고 있다"면서 "독일오스트리아로부터 주권을 회복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처럼 우리나라 국민도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돌려받아 행사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김규식 선생은 A4 용지 크기의 종이를 반으로 나눠서 깔끔한 프랑스어 필기체로 네 쪽 분량의 편지를 적어나갔다. 마지막에는 서명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탄원서 사본을 동봉한다"는 추신도 덧붙였다.

이 서한을 발굴한 시롱 장학관은 "이 감동적인 서한을 몇년 전 입수해 읽고서 파리강화회의 당시 프랑스 대표였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가 아시아의 외교적 상황을 조금 더 면밀히 주시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았다"고 말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독립운동사)는 "당시 서구 국가 중 드물게 한국의 독립을 지원했던 프랑스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아직 체계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면서 "파리강화회의 당시 김규식 선생이 프랑스 고위 관료에게 협력을 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김규식 선생은 1933년 조소앙·김원봉 선생과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고 1943년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1950년 6·25전쟁 직후 납북돼 같은 해 12월 10일 별세했다.

김규식 선생이 1919년 프랑스 교육부 국장에게 보낸 친필 서한 전문

브뤼셀씨께,

보내주신 편지에 선생의 정중함과 진심이 어려 있어 송구스럽고 감사했습니다. 제가 파리에 도착한 이후 제게 보여주신 선생의 호의와 존중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저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정의를 수호하는 세기의 투사이자 약자들의 변호인, 또 억압받는 이들의 보호자였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이 나라 국민들이 고난 가운데 있는 한국의 대표자에게 보여준 호의로 인해 이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해 들은 사실로 미루어 저는 프랑스 여론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독립 회복을 축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론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지도자들에게도 반향을 울릴 수 있을까요? 우리와 동일한 상황에 처했던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주권을 인정받은 것처럼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얻어내 이를 행사할 수 있을지요? 이는 한국인들이 제게 맡긴 중대 사명이며, 저는 이 사명을 제가 가진 능력과 용기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위에 계란 치기'와 다름없는 이 항쟁 속에서 당신이 제게 준 편지 같은 글들이 저에게 소중한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진심을 다해 감사드리고 '골루아'지에 실렸던 저의 항의문 내용 중 선생에게 특별히 해가 될 것은 전혀 없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한 '호소의 외침'이었습니다.

(저를 만나게 된다면) 선생이 아마도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한국인 철학자 동료를 보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제게도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13세기 저명한 철학자의 직계 자손 중 한 사람을 보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며칠 안으로 선생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고 싶습니다.

큰 존경과 호감을 드리며.

1919년 5월 19일 김규식 드림

추신: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던 우리측 문서의 사본 1부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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