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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변통신]한국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생활

작성자문대식|작성시간19.11.18|조회수167 목록 댓글 0

ㅁ[연변통신]한국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생활 

한국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생활
철마 59
2013-08-18 08:35:28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국내 신민회의 선발대는 1911년 1월 횡도천을 거쳐서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뒤이어 속속 도착하는 이주민들과 함께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4월 봄에 토지개간과 농업경영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위한 민단으로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으며, 사관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창설하였다. 마침내 신민회가 계획한 최초의 독립군기지가 창건된 것이다.

경학사의 초대 사장에는 이철영(2대 사장은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신흥강습소의 경우 처음부터 '무관학교'라고 하지 않고 '강습소'라고 한 것은 토착 만주인들의 주목과 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흥강습소는 교육과정을 본과와 특별과로 나누어 본과는 중학교과정의 교육을 실시하고 특별과는 속성과로서 사관양성 교육을 실시하였다.
삼원보에서의 첫해 사업은 신흥강습소의 경우 성공을 거두어 제1회 특기생으로서 40여명의 애국청년전사들을 배출하였으나 경학사의 사업은 실패하였다. 이 해에 흉작이 들었을 뿐 아니라 수토병(水土病)이라는 괴질이 유행하여 많은 이주민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이로하여 경학사는 해체되었다.

이석영, 이회영, 여준(呂準), 김동삼, 김창환(金昌煥), 윤기섭(尹琦燮) 등은 1912년 이른 봄에 근거지를 삼원보 추가가로부터 동남쪽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合泥河)로 옮겼다. 독립군기지의 생활조건이 극히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떠나 이곳으로 찾아오는 동포들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

그들은 1912년 가을에 경학사 대신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초대 단장에 허혁(許赫) (2대 단장은 이상룡)을 추대하였다. 부민단은 중앙본부 또한 통화현 합니하로 옮기고 삼원보에는 지방지단(地方支團)을 두었다.

신흥강습소도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졌다. 1913년 이른봄부터 교사가 축성되기 시작하여 5월에 낙성되었다. 학교 이름도 '신흥학교'로 고쳤다가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고쳐졌다. 신흥무관학교의 신교사는 큰 병영으로 지어져 널찍한 강당과 각 학년별 교무실을 갖추고 있었다. 수만평의 연병장과 수십 간의 교사 건물 내부 공사는 거의가 생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신흥무관학교의 1913년 현재의 교직원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교 장 … 여준
교 감 … 윤기섭
학 감 … 이광조(李光朝)
교 사 … 이규봉(李圭鳳)·서웅(徐雄)·관화국(關華國)(중국어 교사)
교 관 … 김창환·성준용(成駿用)·김흥(金興)·이극(李剋)(격검유술교관)
생도대장 … 김창환
생도반장 … 원병상(元秉常)
(원병상,《신흥무학교》 및 신용하,《한국민족독립운사연구》).

학제는 4년제 본과 외에 6개월(장교반)과 3개월(하사관반)의 속성과도 두어 찾아오는 애국청년과 의병들을 수용하였다. 또 졸업한 뒤에는 적어도 2년간은 의무적으로 교명(校命)에 따라 복무해야 했다.
주로 보병·기병·포병 등의 병과와 전술 및 전략학 등에 학과의 중점이 두어졌다. 술과(術科)로는 연병장에서 각개교련 및 기초훈련을 했고, 야외에서 공격 및 방어에 관한 실전연 습을 반복했다. 그외 체력연마를 위한 행군훈련을 비롯, 빙상운동, 격검, 유술, 축구, 철봉, 등이 실시되었다. 군사교육 이외의 교과목으로는 산수, 국어, 한문, 지리, 경제학, 윤리학, 국사, 교육학, 화학, 생리학 등이 실시되었다.

강인한 정병훈련(精兵訓練)을 목표로 한 신흥무관학교는 항상 재정적 궁핍과 싸워야 했다. 1914년 봄 거듭되는 천재로 인하여 동포들의 성금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자, 생도들은 만주인의 산을 빌어 옥수수와 콩을 경작하여 학교유지비의 일부를 보충했다. 겨울의 땔감은 학생 들이 노역으로 조달되었다. 하기방학에는 교직원과 졸업생과 재학생 모두가 각 지방 에 흩어져 각자 기능대로 날품팔이를 하여 그 수입을 모아 학교 유지비를 보충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서는 항일투쟁, 모교를 위해서는 경제투쟁' 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신흥무관학교를 유지시켜 나갔다.

생도들의 주식은 좁쌀밥, 부식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 밖에 공급되지 않았지만, '독립전쟁'의 날 일사보국(一死報國)을 결의한 그들의 사기는 충천하였으며 온갖 어려움 속 에서도 학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1920년 8월까지 이 학교가 길러낸 졸업생은 약 3,500명이나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7년 봄에는 통화현 제8구 팔리초(八里哨) 소북대(小北岱)란 곳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백두산 노맥(老脈)으로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밀림지대였다. 이 곳에 애국청년들이 모여서 막사를 세우고 토지를 개간하여 또 하나의 독립군기지를 세우고「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白西農莊) 분교」라고 이름하였다. 장주는 김동삼이 맡았다.

신흥무관학교는 그 졸업생을 조직하여 신흥학우단을 만들었다. 이것은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 및 제1회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의 발기로 조직된 동 창회 성격의 단체였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었다. 신흥학 우단의 목적은 '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대의(大義)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 일각까지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신흥학우단은 졸업생이 증가함에 따라 서간도 독립운동의 핵심체로 성장하였다. 그 대부분은 독립군에 편입되었으며, 여기에 편입되지 않은 졸업생들도 각 곳에 흩어져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학교를 옮겼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물밀듯이 찾아드는 애국청년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한 학년의 인원 수는 600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신흥무관학교 창설이래 최대의 성황이었다.
신흥무관학교가 다시 옮겨간 곳은 유하현 고산자(孤山子) 하동대두자(河東大 子)였다. 합 니하의 교사에는 분교를 두어 김창환 교관이 이를 총감하도록 하였다.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 교사진은 다음과 같았다.


교장 …… 이천민(李天民)
교감 …… 윤기섭
교관 …… 이청천(李靑天) · 성준용 · 이범석(李範奭) · 박(이?)장섭(朴章燮) · 김성로 (金成魯) · 계룡보(桂龍輔)
의감(醫監) …… 안사영(安思永)

바로 이 해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핵으로 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북로군정 서(北路軍政署)의 강력한 새 독립군단이 편성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본군의 출병과 토벌작전, 중국관헌의 압력, 마적단의 내습, 재정궁핍 등의 요인이 겹쳐 1920년 8월에 폐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가 길러 낸 독립군전사들은 도처에서 헌신적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세웠다. 당시 독립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유명한 청산리전투도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참모와 장교가 되 고 그들이 훈련시킨 병사들이 주축이 된 ‘독립전쟁’이었다.


(나)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와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

신민회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후 이와 별도로 만주 왕청현(汪淸懸) 나자구(羅子溝) 대전자(大甸子)에 또 하나의 무관학교를 설치하였다.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1913년에 세운 이 무관학교는 (일명 )라 불리웠다. 동림무관학교 는 안창호, 이갑, 이종호, 유동열, 김희선, 신채호 등 망명한 신민회간부들이 1910년 설립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그후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동휘는 일제관헌이 신민회원들을 검거할 때,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로 1911년 1월에 체포되어, 그 해 7월에 경기도 대무의도(大舞衣島)에 유배되었다. 이동휘는 1912년 말∼1913년 초 무렵에 이 섬을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거기서 1910년 4월 안창호와 더불어 망명한 이종호 등의 신민회 회원을 찾아 왕청현 나자구로 갔다. 이종호는 1912년 3월에 나자구에 대흥학교(大興學校)라는 중학교를 설립하고 교포들에 대해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나자구 대전자에서 이동휘는 이종호, 장기영(張基永), 김립(金立), 김하석(金夏錫), 오영선(吳永善) 등과 함께 동림학교(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동림무관하교는 개교 1년 후인 1914년에 학교 재정의 궁핍과 만주 군벌 및 토착인의 압력 등으로 일단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생도들은 이 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러시아 영내로가 공장노동자로 취업하기까지 하였다.

동림무관학교는 그 후 실제로 러시아영내에서 재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활동 내용과 사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러시아령 니콜리스크를 중심으로 일단의 강력한 독립군기지로 이 무관학교가 세워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밖에 신민회 회원들은 만주 밀산현(密山縣) 봉밀산자(蜂密山子)에도 제3의 무관학교인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일제 관헌의 1916년 첩보 자료에는 배일주의(排日主義)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인의 무관학교가 밀산현 봉밀산자에 있으며 이갑이 교장이라는 간단한 보고가 있다.

밀산무관학교도 안창호 등 신민회 망명간부들이 1910년에 설립하려다 실패한 것을 그 후 이갑 등이 설립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경우도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 자세한 활동 내용은 알 수 없다.



청산리 전투를 기념하는 독립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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