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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김정오 교수 특강 : 늦깎이 수필문학 입문자에게 드리는 글

작성자김 영 남 (지공선사)|작성시간18.09.19|조회수89 목록 댓글 0













늦깎이 수필문학 입문자에게 드리는 글



            

    짧고 쉽게 쓴
살아 있는 글월이어야

         
                            
                  

김  정  오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문학성이 있는 수필
   수필이란! 마음의 글월이다. ‘글월’이란! 그이가 그리워서 ’긋고‘ ‘그리다’에서 온 말이다. ‘그’(그이)는 이기심을 벗어난 ‘참 사람’이다. 우리 선인들은 수필형식의 글월을 즐겨 써왔다. 강범우는 그것을 “자연을 그려도 노래처럼. 사람을 그려도 시처럼...지나치게 덧없는 삶을 써왔다고 말했다. 고대 <한글소설> 대부분이 그 기법에서 플롯트도 없고, 대화도 별로 없고, 모놀로그(mdndldge)에 가까운 것들로 이루어 졌는데 이것이 수필의 세계와 별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윤오영도 <수필의 개념>에서 “수필이 가장 오래된 문학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문학이며, 아직도 미래의 문학형태”라고 하면서 한국현대 수필문학을 경문학(硬文學)과 연문학(軟文學)으로 나누고 있다. 앞의 것을 포멀 에세이(Formal essay) 즉 사회적 객관적 수필, 뒤의 것을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 개인적 서정적 수필로 나누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경문학은 이지(理智)와 심수(心受) 비판과 실증, 그리고 참(眞)을 찾는 딱딱한 글월이다. 논설이나 평론이 대표적인 글이다. 연문학은 감정, 감동, 공감, 체험과 상상을 바탕으로 서사, 서경, 서정, 설리의 글월로서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순수 수필문학을 말한다. 


  1)시와 수상문학 2018년 봄 호에 실린 글.

 

2)강범우 문학평론가, 수필가, 전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 교육을 위한 한국문학사. 수필창작론 ,수필문학 그 이론과 실제, 100만인의 수필교실, 작품집으로 돌부처의 체온, 사막에 배를 대는 사람들, 상황의 메아리 28, 사랑과 행복의 사회학, 외 다수

   

3)강범우 백만인의 수필 교실, 태학당 P,15,

4)윤오영(尹五榮,1907~1976), 수필가, 교육자, 수필 창작과 이론으로 현대 수필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호는 치옹(痴翁), 동매실주인(棟梅室主人), 보성고보(普成高普)에서 20여 년 동안 가르쳤다. 195750살이 넘어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厠上樂)을 발표, 20여년 동안 작품을 발표 했다. 연암박지원, 노계박인로 등의 문장을 연구한 평문을 썼다. 수필문학의 이론 정립에 힘을 기울여, 1972년에 창간된 수필문학지에 수필 이론을 연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측상락(厠上樂),부끄러움, 양잠설,부끄러움,온돌의 정,마고자,백사장의 하루, 달밤,방망이 깎던 노인등의 수필과 연암의 문장,노계 가사의 재평가등의 평문이 있다. 수필집으로는 고독의 반추(1974), 방망이를 깎던 노인(1977) 등이 있다. 특히 첫 수필집 고독의 반추1970년대 수필문학의 주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수필 창작론을 정리한 수필문학입문(1975)을 발간했다. 훗날달밤54편의 작품을 골라 곶감과 수필(2000)이란 선집을 발간했다.

  

   강범우는 말한다. “하루 종일 들판에 나가서 일하다가 돌아와서 밥 먹고 잤다.” 이런 글은 일반적 사실에 대한 기록일 뿐, 문학은 아니다. 문학이나 예술은 감동(evoke)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시적이미지로 씌어진 산문이다. 그 방법은 비일상화(非日常化)에 있다. 시도 노래에 실은 감동이다. 수필은 따뜻한 마음(心)을 감동적으로 쓴 이야기이다.
   현재 한국의 수필문학 활동은 날로 새로운 문학 형태로 거듭나고 있다. 만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글월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식의 맑은 빛으로 아름다운 마음속을 비춰줄 수 있는 깨끗한 거울로서의 문학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좋은 수필은 인간의 마음을 맑게 해주고, 깊은 예지의 꽃을 피워 생명의 빛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글월이다. 그러나 이런 수필을 쓸려면 피나는 노력과 함께 진실한 마음으로 누리를 보는 아름다운 눈이 있어야 한다. 


                                         수필과 칼럼
 우리나라는 수필(隨筆essay)과 칼럼(1.column 2.opinion)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필과 칼럼은 다른 장르이다. 수필은 지은이가 주인공이 되어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글월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바라본 삼라만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여 느끼고 깨달은 바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적인 언어로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자유스러운 형식으로 그려내는 사색적인 글월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철학적 감성과 서정(抒情), 서사(敍事)가 정서적 감동으로 얽혀 있는 문학이다. 시처럼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그 어떤 생각을 순간 떠오르는 그 무엇으로 그려 내는 글이 아니다. 또 소설처럼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글도 아니다.
    수필은 다른 갈래의 문학과도 알맞은 거리를 두면서 영역을 넓혀가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가치에 대한 철학적 감성이 그 바탕에 깔리면서 지성과 감성, 서정(抒情)과 서사(敍事)가 조화를 이루는 글월일수록 오래도록 감동을 주는 좋은 수필이 된다.
   그러나 칼럼(column)은 그때그때 있었던 사건이나 시사성이 있는 문제나 정보, 사회의 관심거리 등에 대해 짧게 평하기 위해 쓴 섞인 글(雜文)이다. 다시 말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 쏠림이 많은 일(關心事)을 풍자하거나 쪼게고 나누고 파헤쳐서(分析) 그 정보와 지식을 누리(世上)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 공감과 흥미를 주는 이성적, 논리적인 글이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칼럼니스트(Columnist)라고 한다.

                                짧고 쉽게 쓴 글월이어야 한다
 좋은 수필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 준다. 조선 후기 문신 김매순(金邁淳,1776(영조 52)~1840(헌종 6)은 좋은 글월은 "바르고, 간결하고, 진실해야 하는 삼체(三體)를 이루어야 한다고“고 말했다. 필요한 말만을 골라 짧게 써야 하고, 실상을 억지로 꾸미거나 비틀어 곱새기지 않아야 하며, 진실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글월을 짓는 사람들은 마음의 미묘함을 알리기 번거로워 비유를 하게 되고, 뜻을 돌려서 쓰게 된다. 그것이 창작의 어려움이다.
  여말선초의 문신 이첨은 ‘눌헌명(訥軒銘)’에서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말했다. “말을 삼가기를 옥을 손에 쥐듯, 가득찬 물그릇을 들었듯이 조심하라” 고 하면서 “문사는 덕이 밖으로 나타나야 한다.(文辭德之見乎外者也)”고 말했다. 덕이란 인격이다. 문장은 그것을 구조적인 이미지로 떠올리게 한다. 이미지의 구조를 언어적인 소재로 형상화한다는 말이다. 글과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6)김승우-함경도 영흥 출신,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수필문학 교수,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부소장 역임. 19723, 아내 김효자 교수(경기대)와 함께 한국에서 처음으로 월간 수필문학창간, 1974년 그 책에 피천득 인연 발표,

 


 김승우는 “ 덕이 인격적 차원이라고 한 이첨의 말은 글월을 지을 때 그 인격적 차원을 구조적인 이미지로 떠올려 그 어떤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글을 지을 때는 필요한 말만 골라 쓰되 그 이미지의 실상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글월은 관조적인 성격과 품위에서 격조를 이룬다. 자세하고 넓게 쓰려면 끝이 없다. 주제가 버겁거나 넘친다면 줄이고 좁히고 나누고 쪼개야 한다. 때와, 곳, 종류로 점층법, 열거법을 활용한다. 큰 호수에 돌을 던지면 반응이 없다. 그러나 작은 연못에 돌을 던지면 개구리가 놀라 솟구친다. 말이 많으면 알맹이가 없다.
  세종대왕이 쓴 훈민정음 서문과 신숙주가 쓴 동국정운 서문은 똑같은 말이다. 세종은 15자로 간결하게 썼고, 신숙주는 93자로 길게 늘어놓았다. 세종의 서문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지만 신숙주의 서문은 기록으로만 존재한다.
   1863년 11월 19일, 미국 게티즈버그에서 역사적인 두 인물이 연설을 했다. 국무장관, 상원의원, 메사스추세츠 주지사, 하버드대총장을 지낸 ‘에드워드 에베렛’과 16대 대통령 ‘링컨’이다. 에베렛이 200자 원고지 68장, 1만 3천 6백7자로 된 원고를 놓고 두 시간 넘게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문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링컨은 200자 원고지 1장반도 안 되는 272 자로 된 연설문으로 미국의 민주 정치를 세 마디로 요약, 3분 안에 끝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이 땅에 영원할 것이다.” 이 연설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비롯되는 성경의 산상수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기친 연설로 알려져 있다.
   “간결한 말은 지혜의 산물”이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의 말이다. “싫증나는 글월보다. 배고픈 글월을 써야한다.”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말이다. “두 자루 붓을 가지고  글을 써라. 하나는 쓰기 위해 하나는 줄이기 위해”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의 말이다. “문장을 쓰는 일은 정확한 인간을 만드는 일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말이다. 짧고 길게 여운을 남기는 글월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한 구절의 글은 22자 안팎이어야 한다. 이음말은 적게, 군더더기는 깎아내고 큰 줄기에 그림씨 어찌씨, 간결체로 쪼개고 깎아 공글린 옥돌을 만들어야 한다. 오래 동안 글 짓는 법을 연구해온 장재성의 예문을 본다. “설악산에 갔더니 공기가 어찌나 맑던지, 시린 공기가 내 혈관을 마구 들쑤시며 달리는 듯했다. → 설악산에 갔다. 맑은 공기가 내 혈관에 마구 자맥질했다.(37→22자, 60%)” “글을 잘 쓰는 능력은 줄임 질 잘하는 깜냥이다. 두 자루 붓을 가지고  글을 써라. 하나는 쓰기 위해 하나는 줄이기 위해” 체호프의 말이다. 고전이란, 세월의 파도에서 깎이고 남은 보석이다. 글은 이해하기 쉽고, 짧고, 재미있게 써야한다.… 장황하게 쓴 글은 지루하고 요지를 흐리게 한다. 진솔, 간결, 깔끔한 글이 전달 효과를 높인다. 

                                살아 있는 글월이어야 한다
   좋은 글월은 제목만 보고도 내용을 알 수 있는 글월이다. 충실한 내용 정확한 정보, 글월의 생명은 글 속의 내용이다. 기승전결이 뚜렷해야 한다. 시작과 끝맺음이 하나로 이어져 일목요연해야 한다. 그런 글월이 살아있는 글월이다. 
   영국의 철학자, 수필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문장을 쓰는 일은 정확한 인간을 만드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의 영혼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생명의 빛은 글 속에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 글월은 읽는 이들이 지적 성장감과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으며, 감동을 받게 된다.
   연암 박지원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어떤 글월들은 이름만 바꾸면 거의 같은 사연들을 오직 자신만이 겪은 듯이 알맹이 없는 글월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연암은 나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월을 써야 한다고 했다.
   연암은 길을 가다가도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을 해서, 간직했다가  "훗날 다시 생각하고 점검해서 조리가 일관된 글월로 남긴다고 "했다. 좋은 글월은 인간미가 넘치고 생각이 깊은 글이다. 사물을 보는 눈에서 인간미가 물씬 솟아오른 글월은 읽는 이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그런 글은 담백하고 청신하다. 언제나 젊은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 사물을 보는 눈이 늘 새롭고, 따뜻한 정감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말한 김광섭의 말이나 피천득의 “수필은 무형식의 글이다.” 라는 말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것은 시나 소설처럼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쓰는 글월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폭 넓고, 자유스럽게 주제를 찾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글이 활자로 바뀌는 순간 그 글은 읽는 이의 글이 된다.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쓴 글을 발표한다는 것은 만용이다. 다만 최선을 다해 쓴 글월인데도 읽는 이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은이의 한계이다. 그러나 그런 글은 문학적 생명이 없기에 글을 발표해도 섞인 글(雜文)이 되고 만다.
  수필가 박연구는 “나는 이 글을 쓰고 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글을 쓴다.“고 했다. 대충대충 쓴 글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문학으로서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혼이 녹아 있는 글월이어야  읽는 이가 감동을 받게 된다.  
   수필가 오창익은 수필가와 수필문학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했다. 수필은 산문성과 문예성을 따진다는 말이다. 산문을 대표할 미래문학으로서의 수필은 장르 의식의 구체화 내지는 그 위상 세우기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수필은 머리로 읽는 글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글월이다. 밤을 지새우는 아픔과 고뇌를 거치면서 글월을 쓰는 작가가 되어야 수필문학가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에 갇혀 허둥대기 보다는 사유의 굴레를 벗어날 때 즉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사유와 진정한 삶이 가능할 수도 있다. 생각의 노예이기보다는 생각을 마음껏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총명 그것이 수필을 쓰는 이의 재질이어야 한다. 
  


                                        마무리
   좋은 수필이란 읽는 이가 감동, 공감해야 하는 글월이다. 그러나 가치 쪽으로 너무 기울면 계몽, 교훈의 글이 되기 쉽고, 흥미에 무게를 두면 통속으로 치우치게 된다. 글을 쓸 때는 주제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짧은 지식을 자주 인용하면 섞인 글(雜文)이 되고, 눈높이가 낮은 글은 신변잡기가 된다. 넓고 깊은 지식을 자기화 하여 쉽게 써야 한다.
    비행기 조종사는 ‘처음과 끝의 13분’이 가장 긴장된 시간이라고 한다. 이륙 5분, 착륙 8분이 안전의 고빗사위이기 때문이다. 글을 지을 때도 첫 문장과 끝 문장에 혼을 심어야 한다. 들머리에서 구슬을 캐내고 마무리에서 보석 빛을 내야한다는 말이다. 짧고, 자극적이고, 눈길을 끄는 체험이 글월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리듯이 쓰는 묘사체, 그림씨(형용사)는 묘사의 다른 얼굴이다. 다만 꼭 들어갈 자리에 그 낱말이 들어가야 한다. 현실은 차고 맵다. 낱말 하나하나를 쪼아 새기는 피 말리는 긴장! 첫 문장과 끝 문장은 잉크로 쓰지 말고 금으로 새기라. 했다. 처음과 끝말에서 인상적인 글을 써서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정오(金 政 吾 )
수필가, 문학평론가, 1975년 6월,「현대수필」62인 집, “생각에 잠긴 얼굴”과 그해 「한국문학」11월호 “기적” 발표로 수필가 등단, 1994년 「계간 문단」 가을호 “고월 이장희의 사상과 시세계”로 평론 등단,
  숭실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받음, 경기대, 중국연변대학교 객원교수역임, 러시아 국립극동연방대학교 교환교수 역임, 한국문인협회 이사(역).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역). 한국문협 서울 역대지부장회 회장(역), 현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2002년 한국일보 수필공모 심사위원장,(역) 2018 대한민국 문학공모대회 심사위원장(역),
  수필집: 빈 가슴을 적시는 단비처럼,- 그 깊은 한의 강물이여,- 양처기질 악처기질,- 한이여 천년의 한이여,-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푸른솔 이야기 외 논저 및 평론 다수, 소청문학상, 법무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대한민국문화예술 대상, 왕인 문화 대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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