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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원문

2025-08-10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히 10:32~39)

작성자김수옥목사|작성시간25.08.09|조회수82 목록 댓글 0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

히브리서 10:32~39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간 목회를 하면서 많은 성도님이 제 곁을 지나갔습니다. 그중에는 세월이 지나면 새록새록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들었던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관광버스 기사를 오랫동안 해 오신 그분의 남편은 키가 자그마하고 인물은 별로였지만 친화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대할 때 칭찬을 잘하는 편이라 주변에 많은 여인과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분입니다.

 

눈이 펄펄 내리던 추운 겨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녁에 술에 잔뜩 취하여 술집 여자를 데리고 와서 잠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남편에게 아무런 탓을 돌리지 않으시고 권사님은 말없이 따뜻한 아랫목에 두 사람이 잘 수 있도록 하였고 권사님은 윗목에서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북엇국을 끓이고 반찬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두 사람이 먹도록 하기까지 했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건은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 아이가 자기 핏줄이라며 아이를 키워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럴 때 기가 막혀 울어야 합니까? 아니면 기절을 하여 쓰러져야 합니까?

 

이런 말을 남의 이야기 하듯 담담하게 내뱉는 권사님의 얼굴을 보면서 내심 이분은 바보인가? 아니며 성녀(聖女)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담담하게 심경을 밝히시는 대목에서 저는 그만 말문이 막혔습니다. 오죽하면 남의 남자에게 의지하고 사는지를 생각하니 술집 여자도 불쌍하였고, 아이를 낳은 여인은 그 많은 세월 아이를 배고 있는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나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어요. 아이도 마찬가지고요. 핏덩이로 제 엄마에게서 떨어져야 하는 아기를 보는 순간 그렇게 애처롭고 안타까울 수 없었어요.” 권사님의 말씀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은 갓난아기를 안고 내 평생 내 자식처럼 키우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권사님에게서 신비한 것을 느꼈습니다. 전혀 남편에 대해 원망을 하거나 배신감에 치를 떨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편으로 선택하고 함께 하기로 한 이상 남편이 어떠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겠다는 결단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권사님의 모습에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대한 관계가 이러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신 사람은 조건에 없습니다. 내가 너를 택하신 이유는 이러한 모습이 보기 좋아서 택하였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이며 조건 없는 택함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부르심에 대하여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뜻을 정하시면 변함이 없으심을 표현하는 단어 중에 미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총 16번 등장하고 있는데요. 그 뜻은 신뢰할 만하다, 진실하다, 믿음직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고유 우리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신실하신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아들의 피로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를 하나님 자녀 삼아 주셨고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결하여 주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안에 계셨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증을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를 하나님께 소유된 자녀라고 하셨기에 어떤 여건과 환경에서도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변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우리 믿음의 성도의 관계를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택하심은 삼중구조로 이뤄져 어떤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담으면서 아무렇게 살아도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먼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이셨고, 그다음에는 우리에도 이를 이룰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한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변질하지 않는 신앙의 길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영어로는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시점까지 신실함 지키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의 마음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신실한 것입니다. 한 번도 변덕을 부린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가진 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찾아 용서하시고 사랑을 회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범을 따라 믿음의 성도도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을 지킬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평탄하고 기쁨의 길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히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들에게는 많은 환난과 핍박이 따랐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빛을 받은 후에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싸움(아들레신)이란 본래 운동 경기를 가리키는 데 본문에서는 박해를 뜻합니다.

 

그들이 겪은 고난의 큰 박해는 곧 순교로 이어졌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에게 처참한 모습으로 찢기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소리를 지르며 모욕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혹 살아남았을지라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마음을 나누며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아픔도 겪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그들의 변함없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가치관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지만, 땅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와 나이가 동갑인 큰 동서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일찍이 은행에 취직하여 일취월장(日就月將)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농촌에서 어렵게 살 때 손윗동서는 아파트에서 편안한 삶을 즐겼습니다. 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만날 때는 그 집 식구들과 현저한 차이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 저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제가 자기보다 공부도 많이 했음에도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궁색하게 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저에게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잘 사는 것이 최고이고 가치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주어지는 삶에 더욱 가치를 두고 그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종종 세상으로부터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교훈을 전하는 것을 순종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미워하였고 박해를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순금같이 연단하시고, 인내와 소망을 배우게 하십니다. 고난은 성도의 내면을 다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1:6-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을 붙드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복음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길은 마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두 개의 바퀴로 움직이는 자전거는 쉼 없이 페달을 밟아주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자전거의 특성은 뒤로 물러가는 기능이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만 나가야 합니다. 신앙도 푯대를 향하여 멈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추위가 몰아치더라도 예배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더 크고 영구한 소유 (better and lasting possessions)큰 상 (a great reward)을 소망 중에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빅터 프랭클 (Victor Frankle)박사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그의 책에서 나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근거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먹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희망으로 사는 것이다. 오직 기다림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희망을 품은 사람이고 기다림이 있는 사람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고 살아남아서 이룩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권사님께서 자신을 배신하고 불의를 행한 남편을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남편으로 선택한 것에 대하여 끝까지 신의를 지키겠다는 것과 나의 틀에서 벗어나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닥치는 고난의 때가 있습니다. 피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당할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하였습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아내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끝이 선한 것으로 맺을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실수하기 쉬운 것이 자기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것을 어떻게 하든 극복해보려는 노력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던 중 시험에 든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자 그로 인하여 교인들 다수가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물은 다른 교회로 넘어가게 되었고, 남은 성도라야 젊은 청년 몇 명과 나이 많으신 분들만 남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 몰아닥쳤습니다.

 

그러면 주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혜를 짜내고 내 능력으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지인을 통하여 정미소와 연결하여 쌀을 공급받기로 하고 교회들을 네트워킹 하여 쌀을 팔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20Kg 쌀 한 포대를 팔면 5,000원이 남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쌀을 팔고, 잡곡도 팔았습니다. 나중에는 떡국 떡과 곶감까지 그런 식으로 팔았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해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듯 마음은 어두워졌고, 불안하며 괴롬만 더해 갔습니다.

 

마음에 쉼이 없고 부주하게 이리저리 몰아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으로 새사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많아지고 나름 지혜를 짜내면서 에너지가 소진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서지 못합니다.

 

우리의 두뇌 회전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성인 기준 평균 뇌의 무게 약 1.4kg으로 체중의 약 2%에 해당하지만, 사람의 전체 에너지 소비량 중 뇌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20%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내 계획을 버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나를 지키시고 사랑하심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우리는 믿음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상황에서 제 아내는 저녁 기도회가 있는 먼 거리에 있는 교회를 찾아 밤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추운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기도하고 돌아올 때는 눈이 퉁퉁 부어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 아내의 모습에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와닿지 않을 때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보니 내 안에 평안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불신앙의 마음을 돌이켜 저의 잘못을 회개하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자고 결단하였습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주님께 돌아가자 변함없이 저를 바라보고 계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내는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얻어지는 용기입니다.

우리가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변함없은 사랑을 베푸시고 그 사랑으로 인격에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분주함입니다. 내가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성공을 이루겠다고 내 두뇌를 회전하면서 많은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우리나라에서 AI 인프라 전력 수요가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2026년까지 최대 1,000TWh에 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1테라와트시는 1조 와트시와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정 전체 연간 전기 사용량은 약 74 TWh라고 보면 AI산업에 소요되는 전력의 소요량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알 수 있습니다.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주님으로 이 땅에 곧 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는 죄에 대한 형벌을 주시려고 오시지만 인내하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하늘의 상급을 주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뒤로 물러가는 신앙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는 믿음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얻게 될 구원에는 환희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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