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일낮설교원문

2026-06-14 만족과 결핍의 경계선(호 4:7~10)

작성자김수옥목사|작성시간26.06.13|조회수29 목록 댓글 0

만족과 결핍의 경계선

호세아서 4:7~10

 

7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8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

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10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제 인생을 돌아보며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른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며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볼 때였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40년 넘게 함께 한 아내가 있고, 아무 부담 없이 저녁을 사 먹을 수 있는 여유와 음식을 소화할 수 있고, 맛을 누릴 수 있는 건강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만하면 우리가 부자로 사는 것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하게 저와 마음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순간을 떠올리라고 말한다면 교회 건물을 건축하고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좋은 승용차에 넓은 아파트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허울 좋은 개살구처럼 은행에 많은 빚을 지고 시작한 교회 건축이라 매달 어김없이 다가오는 이자 납입이라는 부담이 크게 저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한 달을 메꾸고 나면 어김없이 또 이자를 내야 하는 반복적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분명 내가 소원하고 이루고 싶은 것을 성취하였음에도 내게는 만족이 없었고, 어떤 때는 너무 마음이 괴로워 이대로 자다가 하나님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만족과 결핍의 경계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성취할 때는 만족이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내 뜻이 성취되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닌 것에는 결핍이 따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완벽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이 그 안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제 욕심을 따라 나의 노력으로 무엇인가 이루고자 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빠져 있었고 그로 인하여 만족 또한 없었습니다. 그런 저를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모든 욕심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내 영혼이 머물렀을 때 겉으로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그 안에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더라면 나는 만족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만족과 결핍의 경계선은 사랑에 의하여 좌우됨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호세아 선지자가 눈물로 선포했던 영적 어둠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국경이 확장되며, 모든 것이 번성하던 '황금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화려한 번영의 이면을 보시고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번성할수록 더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과거보다 더 잘 먹고, 더 편안해졌으며,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영혼도 그만큼 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까? 아니면 우리 역시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번성의 덫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라는 사람은 풍요 속의 빈곤(Poverty in the midst of plenty)”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케인스가 이 말을 한 지 거의 100년이 지났지만, '풍요 속의 빈곤'은 오늘날에도 다른 형태로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의 방대한 정보와 지식을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풍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마음은 더 외롭고 빈곤함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모습, 혹은 전 세계에 식량은 넘쳐나는데 한쪽에서는 여전히 기아로 고통받는 모순적인 상황들이 그렇습니다.

 

결국 케인스의 이야기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제대로 순환하고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부터 흐르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더라도 결핍에서 벗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 냉냉한 마음을 호 4:8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고 한 내용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번역을 하면, 그들이 죄악에서 기쁨을 얻는도다라는 의미입니다. 속죄제는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를 주관하는 제사장은 제물의 일정량을 가져가도록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죄를 지을수록 제사장의 소득은 비례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를 통하여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제사장이 사람들의 죄를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기는 것입니다.

 

남이야 죄를 짓든 말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철저한 이기심에서 나온 모습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여겨진다면 이것은 사랑의 부재임을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더니 그 건강으로 세상 쾌락을 즐기러 가고, 물질의 복을 주셨더니 그 물질을 지키고 불리느라 예배할 시간을 잃어버리며, 세상의 성공을 주셨더니 내 능력을 자랑하느라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삶,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졌던 '번성의 덫'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예화에서 부자가 세상에 살 때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고 하였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부자로 태어나 잘 먹고 호화롭게 즐겼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건강하고 풍성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축복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자는 이 사랑을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집 앞에서는 헌데투성이의 가련한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돌보심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자를 매일 마주 대하면서도 그 마음이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시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흐르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우리 주위에 언제나 불쌍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부자는 이 덕목이 닫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이유도 내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선하고 의로워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온전하게 드린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불쌍하게 여기셔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의 마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귀한 덕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을 옳은 데로 인도하여야 하는 제사장이 자기의 육신에 속한 유익을 위하여 백성이 죄를 짓고 드리는 속죄제를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 안에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것입니다.

 

4: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떤 특별한 직분에 의하여 차별받지 않고 그가 행한 대로 받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특권 의식이 가장 정점에 달했던 시기는 중세 유럽입니다. 이 시기 성직자는 단순한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사제를 통하지 않고는 신에게 나아갈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고해성사나 성찬식 같은 성례전을 집행할 권한이 오직 사제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사제는 평신도의 구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영적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직자는 일반 세속 법정이 아닌 교회 법정에서만 재판받을 수 있는 '재판 특권이 있었을 뿐 아니라 세금이 면제되었고, 평신도들이 바치는 십일조와 각종 교인들이 드리는 의무금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며 귀족층과 다름없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을 하는 성직자는 거룩하고, 세상 일을 하는 평신도는 속되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성직자는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영적 지배 계급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중세 교회는 타락하였고, 이에 반기(反旗)를 들고 16세기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가톨릭의 성직자 특권 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하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신분적 격차를 허물고자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목회자의 특권 의식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독점하려는 영적 우월감에서 출발하여, 시대에 따라 법적·경제적 기득권 보호, 성경 해석권의 독점, 그리고 현대의 카리스마적 독재라는 형태로 끊임없이 변형됐습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일컬어지는 교회는 각 사람에 주어지는 은사에 따라 어떤 직분도 직책도 차이가 없습니다. 고전 12: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판단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의 사랑이 온 지체에 흐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형제와 자매를 바라보고 내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나의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만족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과테말라 선교사에게 매월 30만원씩 선교비를 4년 동안 보냈습니다. 이렇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제게 책정된 사례비를 줄이면서 가능했습니다. 나 보다 해외의 선교지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가 더 어렵다는 것을 느꼈기에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흘렀습니다. 나는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부족함이 없이 만족감이 내 안에 흘러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되었더니 만족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게서 흐르지 않고 꼭 쥐고 있으면 결코 만족이라는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나사로와 부자, 그리고 많은 수확을 이루었지만 이를 흘려보내지 않았던 부자 농부, 구약에서는 자기의 가축 떼를 돌봐 주었던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며 양털 깎는 시기에 찾아와서 먹을 것을 구할 때 이를 경멸하며 거절한 나발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긍휼을 얻지 못하고 그의 인생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족과 결핍의 경계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는 자와 움켜쥐는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존귀한 직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다면 이를 나눴어야 했습니다.

 

4:10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시킨 종교는 바알 종교였습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그들은 곳곳에 바알 신당을 만들고 바알을 섬기는 여인들은 바알 제사장과 신전 안에서 성범죄를 저지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풍조가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도 파고들었다는 점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악한 행위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언약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결과가 먹어도 배부르지않았다는 것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리고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음행이란 부부간에 애정이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사랑의 결실이 자식입니다. 사랑이 메마른 상황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는 슬픔의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는 겉으로는 많은 것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짐이 될 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않는 것"입니다. , 열심히 노력하고 세상의 것을 가득 채우는데도 심령 속에 참된 만족과 행복이 없는 '영적 흉년''밑 빠진 독'의 상태로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채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할 것 같지만 더 큰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세상의 쾌락을 좇아가지만, 남는 것은 허무함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야만 만족하도록 창조된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족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셔서 이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자연 만물을 주셨고, 우리의 정서에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흐르도록 할 때 우리의 심령에 만족이라는 행복을 주십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까지 주셨습니다. 이 큰 사랑을 이미 얻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이 내 안에 머물러 기쁨을 누리게 하고 흘러 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행복과 만족이 충만하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