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삼랑성과 고려 왕실의 능을 답사하는 서해랑길(#100~101)
2026년 6월 7일 (일) 날씨 : 흐림 기온 : 섭씨 21~25도
거리 : 20km 5시간 동행 : 로즈마리와 함께
대명항-초지진-전등사-이규보 묘-곤릉-석릉-가릉-능내리
대명항에서 본 초지대교
초지진 소나무의 수령은 약 400년 정도 되었으며, 가지가 삿갓 모양으로 쳐져 아름다운 수형을 이루고 있다.
이 나무들은 1656년(효종 7년) 초지진을 설치할 때 초지 돈대에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기 위하여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초지진(草芝鎭)은 조선 후기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여러 요새 중의 하나이다.
병자호란 이후 수비 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들이 강화도 일대로 옮겨 왔다.
초지진도 안산에 있던 수군 기지를 효종 7년(1656)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 유래한다.
강화도는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 격렬히 싸웠던 곳이다.
초지진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년 운요호 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고종 13년(1876)에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초지진
신미양요 당시 미군 대령의 기록 :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 무기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병인양요 : 고종 3년(1866)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
<초지진과 전등사에서 보는 조선 후기>
흐린 날씨에 찾은 대명항에서 초지대교와 건너편 초지진을 바라보았다. 열강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조선의 후기에 외세의 확장은 한양의 옆구리 강화도에 밀어닥쳤다.
미국 장교의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 무기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라는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1875년 일본군에게 운요호 사건으로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었던 현장에 서서 초지대교를 바라보는 회한의 감정이 400년 소나무의 잔상과 겹쳐 씁쓸하다.
근대화를 막았던 조선의 비극을 400년 소나무는 강화해협을 바라보며 기억하려나!
저수지를 지나 전등사에 들어서며 삼랑성 종해루를 만났다. 고려 시대 이후 개경과 한양을 방어하던 성곽인데 지금은 전등사 입구가 되어 나그네를 반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무찔렀고 강화에서 가장 큰 절 전등사가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길상면을 지나 강남중과 길직리를 거치면 이규보 선생 묘가 나온다. 고려 문신 백운거사 이규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을 쓴 사람이다. 넓은 묘지에는 사가제(백운제)가 있어 관리하며 서해랑길이 지난다. 묘지에 세워진 문양석 외래인의 모습이 흡사 제주도에서 본 모습과 흡사하다.
2km 정도를 더 걸어 100코스의 종착지 곤릉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종해루(宗海樓) : 삼랑성은 고려 시대 이후 개경과 한양을 방어하는 성곽이었다.
둘레는 2.3㎞ 정도이며, 성곽은 산 정상부에서 남문 방향 해발 75m 능선까지 산의 지형을 따라 쌓아서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가 크다.
단군의 세 아들이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 정족산의 한 봉우리씩 맡아서 쌓게 되었고, 이를 본 사람들이 이 산성의 이름을 사내 랑(郞)을 써서 삼랑성이라 불렀으며,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에 있어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도 불린다.
마니산 참성단과 더불어 단군과 관련된 역사 유적이다. 성을 쌓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거친 자연 활석을 이용한 삼국시대 축성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시기를 추정할 뿐이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라 하였고, 1764년(영조 40)에 다시 성을 중수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와 조선 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삼랑성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강화에서 제일 큰 절인 전등사가 있다.
전등사(傳燈寺) :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강화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사왕상 : 전등사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 삼존상을 비롯한 총 31구의 불상
대조루(對潮樓) :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목은 이색의 ‘전등사 시’에서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랑성
이규보 묘 :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묘소이다.
고려 무신 정권기에 활동한 문인으로 명종 20년(1190)에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많은 글을 썼다.
고구려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은 동명왕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장경을 조판할 때 지은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남겼다.
이외에도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사가제(四可齊), 백운제(白雲齊)
서해랑길 100 코스
서해랑길 101코스(곤릉버스정류장-외포항 13.4km)
서해랑길 101코스 시작지점에서 본 진강산
곤릉(坤陵)
강화곤릉(江華坤陵) : 고려 고종의 어머니이며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1239)의 능이다. 지하에 구멍을 파고 돌을 이용하여 방을 만든 후 입구를 세운 돌방무덤이다. 강화 곤릉 주변의 석조물이 없어지고 봉분 또한 무너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강화곤릉은 순경태후의 강화가릉과 함께 남한 지역에 남아있는 단 2기의 고려 시대 왕비 능으로 고려 왕실의 묘지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다. 2011년 곤릉에서 강화곤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덕장남록백운심(德庄南麓白雲深) 덕장산 남쪽 기슭 흰 구름이 덮였는데,
지시곤릉흘도금(指是坤陵屹到今) 이 곤룡이 지금껏 우뚝하게 서 있네.
단초처처송말노(短草萋萋松末老) 풀들은 우거지고 소나무도 안 늙어서,
유함구국가련심(猶含舊國可憐心) 고려 왕조 가련한 마음을 아직도 머금고 있도다.
- 華南 高在亨(1846~1916) -
곤릉
희종이 쫓겨난 자리에 세워진 임금은 희종의 사존 형인 강종이었고, 그의 부인이 바로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다.
종실 신안후 왕성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시아버지 명종이 최충헌에게 폐위되어 당시 태자였던 남편과 함께 14년째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희종의 최충헌 암살 시도 실패가 그녀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최충헌이 강종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위에 앉히면서 원덕태후도 왕비가 되었다. 개성에서 태자비였다가 폐서인이 되어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하다 왕비가 된 것이다.
비록 남편 강종이 재위 2년 만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들 고종이 있었다. 아들 고종의 효성 속에서 태후의 지위를 대몽항쟁기 강화도에서 누렸다. 1239년(고종 26년) 세상을 떠나 곤릉(坤陵)에 안장됐다.
석릉(碩陵) : 고려 21대 국왕 희종이 안장된 왕릉
고려 희종이 고종 24년(1237)에 57세로 죽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그 무덤을 석릉이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때에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으나, 이후에 무너진 무덤을 1974년에 손질하여 고쳤다.
1211년(희종 7년) 겨울, 개경 수창궁(壽昌宮) 깊은 곳에서 고려의 권력 지도를 뒤바꿀 거사가 벌어졌다.
무신정권의 절대 권력자 최충헌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희종이, 내시 낭중 왕준명(王濬明) 등과 은밀히 짜고 최충헌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성공했다면 1170년부터 1270년까지 무려 100년이나 이어진, 무신정권의 종식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최충헌이 내전에 들어서자, 매복해 있던 병사와 승려들이 칼을 들고 덮쳤다. 최충헌의 부하 몇이 버티는 동안 최충헌이 도망쳐 와 희종에게 매달리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희종은 문을 닫아걸고 그를 외면했다.
최충헌은 궁궐 어느 방 안, 종이 병풍(紙障 지장) 사이에 숨었다. 왕준명 일파는 3번이나 궁궐을 수색했으나, 최충헌을 찾지 못했다. 결국 거사는 최충헌 세력에 의해 진압됐고, 가담자들은 모두 붙잡혀 역사에서 사라졌다.
희종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도와 교동도, 영종도를 전전하며 유배 생활을 했다.
1219년에 최충헌과 사돈을 맺고 유배에서 풀려 개경에 돌아왔으나, 1227년 복위 운동에 휘말려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돼 1237년(고종 24년) 강화도에서 기구한 생을 마치고 석릉(碩陵)에 묻혔다.
800년의 세월 온갖 풍상을 겪은 무덤은 말이 없다. 능의 주인공은 희종(熙宗, 1181~1237). 고려 제21대 왕이다. 희종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희종은 1204년에 즉위했는데, 이때는 무인 집권기 최고의 실세 최충헌이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허수아비 왕 노릇을 7년 동안 하던 희종은 1211년, 최충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시 왕준명 등과 최충헌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왕이 신하를 죽이려 한 것이 마치 신하가 왕을 암살하려 한 역모죄처럼 다스려졌다. 희종은 강화도, 자연도(紫燕島, 영종도) 등지로 유배형이 내려졌다.
그는 1227년에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에 의해 복위를 시도했다는 무고를 당해 교동의 법천정사(法天精舍)로 또다시 옮겨지는 가중처벌을 받았다. 거기서 10년을 살다 세상을 떴다.
강화가릉(江華嘉陵) :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1222~1237)의 능이다.
순경태후는 고종 22년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아들인 충렬왕과 딸을 연이어 낳고 1237년에 1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경태후는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외손녀로 외증조부는 최충헌이다. 순경태후의 아버지는 김약선으로 그는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의 신임을 받던 무신이었다.
가릉은 돌방무덤으로 지하에 구멍을 파고 돌로 돌방과 입구를 만든 무덤이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졌으나 1974년 보수하고 정비하였다.
<몽골과의 전쟁으로 피난 온 강화 고려 왕릉>
강화는 고려의 옛 임시 수도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고려는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하여 겨우 나라를 유지했다.
그 무렵 무신정권이 연명하던 고려 왕조는 4개의 왕릉을 남겼다. 왕과 왕후의 무덤이 있는데 곤릉, 석릉, 가릉, 홍릉이다.
고종의 무덤인 홍릉,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 희종의 무덤인 석릉,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이다.
101코스 시작하는 곳에서 교회를 지나 조금 가면 곤릉 입구이다.
좁은 산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만나는데 숲이 우거진 언덕에 제법 잘 갖춰진 돌방무덤 곤릉은 고려 고종의 어머니이며 강종의 비 원덕태후 능이다.
강화가릉 순경태후가 묻힌 가릉과 함께 남한에 남아있는 2기의 왕비 능이다. 아주 깊은 강화 산기슭에 묻혀 세상과 단절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시 되돌아 나와 석릉을 찾았는데 고려 21대 의종의 능이다. 무신정권의 총수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강화도와 교동도, 영종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1237년에 기구한 생을 마쳤다.
가톨릭대학교를 지나면 능내리에 있는 강화가릉을 만난다.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능이다.
16세에 아들과 딸을 낳고 죽었는데 최우의 외손녀로 외증조부는 최충헌이다. 순경태후의 아버지 김약선은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잘 가꾸어진 가릉은 위쪽 능내리 석실분과 함께 중요 사적이다. 난간석과 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수가 있어 특이하다.
무덤 뒤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나지막한 담이 둘러싸여 우리나라 다른 무덤이나 능에서 보기 힘든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가릉과 석실분을 보고 능내리로 내려와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조지아 트레킹 때문에 미리 찾은 서해랑길에서 고려의 몽골 침입으로 천도한 강화 왕릉 답사와 초지진, 삼랑성, 전등사 방문으로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육지를 떠나 강화도 섬을 일주하는 서해랑길 마무리 여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날씨와 교통 그리고 건강이 함께해서 1,800km 먼 여정이 잘 끝나기를 기도한다.
능내리 석실분(石室墳) : 진강산 남쪽에 있는 고려 시대 무덤이다. 무덤의 앞쪽에는 고려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의 가릉이 있다. 무덤의 구조는 지하에 만든 석실 위로 흙을 쌓아 올린 봉분이 있고, 그 바깥쪽으로는 난간석과 석수(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가 배치된 형태이다.
무덤 뒤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나지막한 담이 둘러싸여 있다. 석실의 높이는 203cm로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규모와 은으로 만든 장식 등 출토 유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인물로 추정된다. 축조 연대는 강화가 도읍이었던 시기인 1232~1270년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500년 역사에 수도가 개성이라 왕릉이 거의 다 그곳에 있다. 무신정권기에 몽골과 항쟁한다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강도시기(江都時期, 1232~1270)에 죽은 왕족이 있어 남한에서 오직 이곳에만 고려 왕릉 4기가 남아있는 것이다.(고려 시대에 조성되지 않은 고양 공양왕릉 제외)
<강화도 고려의 왕실 능>
강화도에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 도읍을 옮겼던 강도(江都) 시기에 고려 왕실이 조성한 석실분(石室墳, 돌로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봉토를 만든 무덤)이 7기 남아있다.
그중 사적으로 지적된 무덤이 넷이다. 고종의 무덤인 홍릉,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과 희종의 무덤인 석릉,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이다.
홍릉만 무덤의 주인이 고종으로 확실하다. 가릉도 근처에 있는 능내리 석실분과의 관계 때문에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논란이 있다. 곤릉과 석릉은 누가 주인인지 확정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고려 시대에는 사람이 죽은 뒤 묫자리를 쓸 때 풍수지리에 따른 명당을 골라 택했으며, 장례 기간도 무척 길었다. 왕이나 그 가족의 경우 묫자리를 택하는 기준이 더욱 엄격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 왕 또는 왕후의 무덤이 강화에 4기가 있다. 석릉, 가릉, 곤릉, 홍릉이다. 이는 명확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되는 경우만 그렇다. 고려 시대 왕들은 실제로 명당에 묻힌 것일까.
강화가릉은 고려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곤릉과 함께 남한 지역에 단 2기밖에 없는 고려 시대 왕비의 능으로 고려 왕실의 묘지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진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