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초등시절
나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들판으로 나가 일을 했고,바쁜 농번기에는 어른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였다.
친구들이 띠어놀 때 나는 밭에서 일을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힘들고 고된 날도 많았지만,그 시절의 경험은
성실함과 책임감을 배우게 해 주었다 어린 마음에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원망도 있었지만,새월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그 어려움 속에서 삶의 강인함을 키울 수 있었다.
가난은 많은 것을 부족하게 만들었지만, 가족을 위해 함께 일하며 서로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어린
시절의 땀과 노력은 오늘의 나를 만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초등 4학년 학교를 마치고 배고픈 몸으로 집으로 가는 시골산길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마시던 순간,잔디뿌리를 타고 떨어지는 한 방울 속에서 보았던 작은 우주.
그때의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생명을 이어주는 것이었고,어린 마음에는 희망과 위로였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60세가 훨신 넘은 지금도 그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2.초등학교 시절,나는 자주 아침을 굶고 학교에 갔다.오후 수업가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배고픈
길이었다.어느 작은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나에게 생명의 샘이었다.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땅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잔디뿌리를 거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은 유난히 맑고 달았다
그 물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물방울을 바라보며 큰 우주를 보는 뚯한 느낌을 받았다.작은 물방울 안에 세상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예순을 훌적 넘긴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른다.아마도 그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삶과 희망,그리고 살아가려는 의지가 담긴 기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억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당신 삶의 뿌리가 된 소중한 기억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서 게속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 했다. 큰형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말자서울로 떠났고 둘째형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 형들을 보며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중학교 가는 꿈도 꾸지 않었다.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무렵부터 이미 마음속으로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형들도 가지 못한 학교를 내가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에 대한 열정도 조금씩 사라졌다.
어는 날 5학년 때였다.담임이신 남인수 선생님과 아버지가 학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교실에서 멀리 보이는
점방에서 아버지가 막걸리는 드시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잠시 후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태공이 이리 와 봐라."
나는 선생님 앞으로 갔다
"아버지가 너를 중학교에 보내려고 하신다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했다.이미 내 마음은 오래전에 중학교를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가 1~2년만 더 일찍 중학교에 보내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더라면 어땠을까.나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아을지도
모른다.더 열심히 책을 읽고,더 열심히 꿈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그때의 나는 이미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공부는 내 길이 아니다.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결심을 했다.가난은 나를 너무 일찍 어른으로 만들었다.친구들이 미래의 꿈을 이야기 할때,나는 가족의
생계와 먹고사는 문제를 먼져 생각해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가난이 대신 결정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아버지가 면사무소 근처 막걸리 주조장에서 막걸리 한 통을 사 오면 10원을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20리터들이 막거리 통을 지게에 지고 산고개 경동재 소금재 가말재 새개를 넘어야 했다
왕복 6킬로미터가 넘는 길이었다. 어린 몸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지만 10원은 큰돈이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졸업할 때까지,그리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나는 막걸리 배달
심부름을 하며 돈을 모었다.친구들이 학교에 시간에도 나는 지게를 지고 길을 걸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의 눈길이 싫었다.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지만,어린 나에게는 그 시선이 무겁게 느껴졌다."나는 왜 공부만 하지 못할까."
"나는 왜 일을 해야 할까."그런 생각이 마음속에 쌓여 갔다.그러나 그때는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도 었었다.
살어야 했고,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어린아이였던 나는 이미 어른의 짐을 지고 있었다.
서울행
초등학교를 졸업한 겨울이었다.
마을에 옷장사를 다니던 아주머니가 친구집에 들르셨다 그 아주머니는 서울 영등포구 하곡동 가방공장에서
시다 3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계셨다.
나는 마당 한쪽에서 팽이치고 놀다 그애기를 듣고 순간 가슴이 뛰었다. 그 아주머니에게 제가가면 안되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나도 서울에 갈 수있을까?" 용기를 내어 아주머니에게 다시한번 나도 서울에 갈 수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씀하였다."서울에 가려면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한다.허락 받으면 내일 새벽
6시까지 마을 앞 큰나무 아래로 나오너라."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버지는 허락 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붙들고 간절히 말씀드렸다."어머니 서울에 가서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게 해 주세요."몇 번이고
졸랐다.결국 어머니는 몰래 모아두셨던 2.500원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새벽이 밝아 왔다.
작은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는 순간,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나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울고 계신 어머니를 보면 떠나지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렇게 같은 마을 친구 한명과 담양에서 또 한명과 함께
새 사람은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난한 농촌 소년이었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희망도 있었다."기술을 배워 돈을 벌겠다." 그것은 어린 나의 꿈이였다.그리고 그날부터
나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울에 도착해 서울역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리는 순간.산골 시골에서 자란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과
밤하늘을 밝히는 화러한 불빛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 올라온 나를 마중나온 중년아저씨를 따라 20여 분을 달렸다. 한강다리를 건너 김포가도로 접어들자,
주변 풍경은 마치 내가 살던 시골에 저녁처럼 한적했다.하지막 막상 도착한 곳은 하곡사거리 지나 버스정류장 앞
지하 가방공장이였다 1975.2월 경이였다 만13세 5개월 나이었다. 서울 생활은 그렇게 시작 되였다.
서울 가방공장 지하에서의 생활은 고된 나날의 연속이였다. 그러나 나는 고향을 떠나 올 때. 어떤 고생이 닥쳐도
기술을 배워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공장 형들과 기술자들에게 일을 못한다며 구타와 얼차례를 받기도
했지만,꿈은 포기할 수는 없었다.힘들지만 식사는 고향집보다 잘 나왔고.나는 참고 견디며 서서히 공장 생활에
적응해 갔다.
나는 공장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가면서 기술을 배워 돈도 벌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꿈을 더욱 굳게 다졌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힘든 일도 결딜 수 있었다.하지만 담양에서 함께 올라온 나와 비슷한 또래 친구는 공장
생활의 고됨을 이기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고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하루하루 공장 일을 힘들었지만,식사는 잘 나왔고 나는 차츰 생활에 적응해 갔다.그러나 같은 마을에서 함께
올라온 철수는 달랐다.절수는 고된 공장 일과 기술자 형들의 구타를 견디지 못했다.더욱이 철수가 꿈꾸던 서울은
찬란한 불빛과 자동차가 넘쳐나는 대도시였지만,가방공장이 있던 곳은 한적한 변두리였다.철수는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시골이다."라고 말하며 실망했다 결국 철수는 서울에 올라온 지 3주 만에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철수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나는 혼자 남아 공장 생활을 이어가게 되였다.외롭고 힘 들었지만,반드시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으로 더욱 굳어졌다.
고향에서 함께 올라온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힘든 공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결국 나만 홀로
남아 끝까지 버티며 일을 했다.그런 나를 지켜본 공장 강 사장님은 "너는 꼭 기술을 배워 성공 하라."며 격려해 주셨다.
철수가 고향으로 내려간 지 두 달쯤 되였을 때,종로에 사시는 이모님께서 나를 찿아오셨다.
이모님은 "더좋 은 곳으로 취직시켜 줄 테니 공장 강 사장님께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해라.그렇지 않으면 사장님이
너를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고향으로 내려간 철수가 내가 공장에서 기술자들에게 자주 맞는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렸고,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께서 서울에 계신 이모님께 편지를 보내 나를 맞지 않은 곳으로
취직 시켜 달라고 부탁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모님은 나를 데려가기 위해 가방공장까지 직접 찾아오신 것이었다.
정심시간에 이모님은 저를데리고 중국집에 가셔서 짜장면을 사주셨다.그리고 가방공장 강사장님께 "공부를 더하려고
시골에 더하겠다"고 말씀드리라고 하셨다.그렇지 않으면 사장님이 저를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이모님이 저를 찿아오기 전에 강사장님과 통화하셨는데,당시 저는 공장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고 일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그래서 강 사장님은 제가 시골로 내려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그런데 갑자기 이모님이 나타나
저를 데리고 가 다른 곳에 취직시켜 주려고 하셨기 때문에 사장님이 쉽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생각 하셨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친 후.저는 사무실로 가서 강사장님께 시골로 내려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말씀드렸다.강 사장님께 인사를
드린 뒤,저는 이모님과 함께 가방공장을 나왔다.
이모님과 합께 가방공장을 나와 버스를 타고 종로3가 세운상가 근처에 있는 전기회사로 갔다.이모님은 저의 앞날을
걱정하시며 그 회사에 저를 취직시켜 주셨다.
저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가방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갑자기 전기회사로 옮겨 새로운 일을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작은 공장이었지만,무슨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었었습니다.저의 삶은 청계천 장사동에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이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워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습니다.
장사동 공장이라고는 했지만,사실 공장 규모는 5평도 채 되지 않은 작은 공장이였습니다.당시 1970년 우리나라에는
대규모 공단이 많지 않았습니다.그러나 1975년 초 중 청계천 주변 상가와 사무실에는 우리나라 명문 공과대학 출신
사장님들과 뛰어난 전기 전자 엔진어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청계천에는 우수한 인재와 기술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서로 기술을 합치면 못 말들 것이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장사동 주변에는 작은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전기 전자 제어기기,기계 판금 등 산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물건이나 부품이 있으면 많는 회사와 기업 관계자들이 청계으로 찾아왔습니다.
필요한 것은 무었이든 청계천에 오면 해결 할수 있었기에,청계천 장사동은 대한민국 산업의 중심지와도
같은 곳이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타향애서 가방공장 생활을 하였습니다.친구가 고향에 내려가저녁마다
구타를 당하며 힘들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전해 드렸다고 합니다.어린 아들이 먼 타향에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으신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걱정 되셨을지.이제67세가 된 저는 그때 부모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부모님의 사랑과 걱정 속에서 제가 살아왔음을 새삼 느끼게 됨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모님의 도움을 받아 청계천의 한 전기제품 제작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곳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작은 가게 규모였지만,당시 청계천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곧 공장이였다.물건을 판매하는
가게이면서도 손님이 찾아오면 주문울 받아 직접 제품을 만들어 주는 곳이였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변압기와 각종 trans fomer (트랜스포머)를 제작하는 공장이였다.1970년대 당시 청계천에는
전기.전자 기술자와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고,기술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무었이든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내가 취직한 회사는 상신전기였다.사장님 성함은 박덕민 사장님이셨는데,고향이 평양이며 평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고 들었다.
취업 첫날 저녁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공장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5평남짓한 작은 공간에 온갖
제품과 자재들이 가득 쌓여 있어 몸을 제대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조차 어려웠다.그작은 공장이 곧 작업장이자
기숙사였다.
작업대는 폭이 약 40cm 길이가 2m 정도 되었는데,낮에는 그곳에서 일을 하고 밤늦께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일이 끝나면 작업대를 정리한 후 그위에 얇은 이불을 깔고 잠을 자곤 했다.지금 생각하면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나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전기기술을 배우며 열심히 일하였다.
비록 생활은 힘들었지만,어린 나이에 기술을 배우겠다는 의지 하나로 하루하루를 견뎌냈고, 그 시절의
경험은 내 인생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월급을 달라고 요구한다는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한 달 동안 먹고 자며 생활할 수 있고,
간장과 버터를 밥에 비벼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오직 기술을 배운다는 생각 하나로 일했고,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장에는 화장실조차 없었다.용변을 보려면 동네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고,밤이 되면 화장실을 가기 어려워 참고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아침저녁으로 세수를 하려 해도 공동 수도나 공동화장실에 가야만 가능했다.특히 저녁이 되면
세수조차 하기 여려운 환경이었다.
이처럼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전기기술을 배워야 했다.어린 나이였지만 기술을 익혀
훌륭한 기술자가 되겠다는 꿈 하나만은 결코 포기 하지 않았다.
기술자들이 일을 하면서 영어로 "무엇을 가져와라 무었을 사 오라"고 지시하는 일이 많았다.심부름을 시킬 때도 매모지에
영어로 적어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영어를 알지 못했던 나는 그때마다 매우 힘들고 난감했다.
일을 하면서도 다시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영어를 모른다는 것이
큰 어려움이었고,배움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곤 했다.당시 담임이셨던 남인수 선생님께서"태공아,
네 아버지께서 중학교에 보내 주신다고 하시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어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기술자 형들에게서 "영어도 모르면서 어떻게 기술을 배우려고 하는냐"는 핀잔을
듣곤 했다. 그 말은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척 아프고 속상했다.
나는 처음으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나,아니면 이곳에서 계속 일하며 공부를 해야하나 하는 깊은 갈등에 빠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겟다고 스스로에게 굳게 맹세하고 있엇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공장 일은 보통 밤 9시가 되어야 끝났지만,일이 끝난 뒤에도 쉬지않았다.
헌책방에서 영어책을 사 와 밤늦게까지 영어공부를 했다.알파벳 ABC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하며,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기술을 배우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하루하루를 견뎌 나갔다.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밥을 먹고 영어와 수학 공부를 하며 힘들고 고단한 나날을 보냈다.그러나 전기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수학과 영어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꾸준히 공부하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였다.
취직한 지 3개월 정도 지나자 환경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되었다.이제는 기술자 형들이 무슨 일을
시키더라도 할 수 있는 작업에 최선을 다하며 매진 할 수 있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술자 형들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고,허드렛일과 심부름도 도맡아 해야 했다.주거환경은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전쟁터와 같을 정도로 열악했다.수면 환경도 너무 열악하여 작업대 위에서 잠을 자다가 바닦으로 떨어져 머리와
몸을 다친 적도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세월은 흘러갔다.어는덧 1년이 지나자 영어의 기초와
전기.전자 설계에는 수학 계산이 필수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변압기 제품을 직접 만들면서 제품의 기능과 생산 과정을 하나씩
배워 나갔고.나도 모르는 사이 실력은 점차 향상되어 가고 있었다."
"변압기 (트랜스포머) 설계는 사용되는 분야와 목적에 따라 모두 달랐다.승합용과 따온용 변압기를 비룻하여 산업용 충전기
변압기와 정류기용 대용 변압기 산업용 제품. 소형 트랜스포머는 산업기계 제품의 특성에 맞게 각각 다르게 설계하고 생산하였다.
따라서 제품마다 설계 방식과 제작 과정도 서로 달랐다."
"일을 하며 기술을 배운 지 1년이 넘도록 월급은 한품도 받지 못했고.용돈조차 받지 못했다.지금 돌이켜 보면 노동 착취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한 달에 한 번 쌀과 간장. 버터를 살 수 있는 비용만 지급되었는데 .그것마져 내가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던 형이 받아 장을 봐와 식사를 해결하였다.우리는 아침과 정심을 직접 지어 먹으며 일을 계속해 나갔다."
트랜스 및 변압기 공장 취업한 지 1년 반쯤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기술자 형들에게 변압기 설계 방법을
하나하나 매모하며 기록하였다.커피도 끓여 드리며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곤 했다.그러나 기술자 형들은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며 나를 무시했고 좀처럼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내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배움을 청하면
무시하거나 화를 내며 끝내 기술을 알여 주지 않었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하면 평생 기술을 배우지 못할.또한 내가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면 기술자 형들이 더욱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기술자 형들에게 더욱 마음을 다해 잘하면서,기술에 대해 하나하나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기술자 형들이 모르는 척하며 자세히 알여주지 않아지만.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고,결국 조금씩 기술을
배워 나갈 수 있게 되였다.
생산 볍압기 트랜스 작업은 매일 평균 저녁 9시에 끝났고,밤 11시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목욕탕에
제대로 목욕한 지 6개월이 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일하는 모습은 내가 보아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모습과는 상관없이 하루하루 힘든 노동은 계속되였다.나는 기술자 형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기술을 구걸하다시피
배워야 했고,그 과정에서 한없이 인격이 무너지는 경험도 했다.
하지만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오직 기술을 배워야만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최대한 많은 질문을 하며,일을 하면서도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년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 못했다.나는 하루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깨끝한 옷을 입고 출퇴근하며,편안하게
화장실에 가고,따뜻한 물로 목욕도 하며 살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당시의 나에게는 너무나 간절한 소망이었다.언젠가는 기술을 배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힘든 시간을 견뎌 나갔다.
겨울에 제일 힘든 공장 제품 생산 생활은 특수 변압기 생산이 많었는데 대형 청복사기 기계 제품에 들어가는 레엑터 트랜스
볍압기 생산 과정이 철심 코어 CORE 철심이 미군부대 통신 기계에서 나온 철심을 하나하나 불리 작업을 통해 추운
겨울의 휘발유 통에 코어를 넣어 손으로 한 장씩 닦어서 공장가게 앞 길에서 쪼구리고 벽에 코어를 CORE를 널어 일할때 손이
마비 될 정도로 일을 하였을때 옷도 여름 옷 및 가을 옷입고 작업 할때는 너무추워 몸이 얼어 너무 가혹한 환경 구조에서
일할때 너무 추었고 많이 힘들었던 공장생활 생산 과정이 생각이 난다.
전기회사에 입사한 지 2년이 되어 갈 무렵까지도 제대로 된 급여는 없었다.그러나 나는 오직 기술만 있으면 반드시 성공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힘든 생활을 견뎌 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1970년대 전기기술자들은 지금과는 달리 매우 강한 권한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기술자들의 영향력이 워락 컸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회사에 나오지 않은 날도 있었고,출근 시간도 자유로운 편이었다.회사 사장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에 의견을
주장할 수 있었던 시절 이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더욱 변압기 설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청계천 동종 업계의 기술자들을 찾아가 시간이 날 때마다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하였고,서로 토론하며 지식과 경험을 쌓아 나갔다.비록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기술을 반드시 익히겠다는
열정만은 결코 식지 않았다.
어느 날,평소와 같이 공장 가게를 정리하며 하루일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소같으면 일찍 출근하던
기술자 형이 오전 9시가 되이도 나타나지 않았다.10시가 지나도록 기술자 형은 끝내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혼자서 가게를 지켜야 했다.처음에는 걱정도 되였지만,손님들이 찾아오자 차분하게 손님을 맞이하였다.
손님들이 제품에 대해 질문하면 내가 직접 설명하였고,주문받은 제품도 하나하나 스스로 제작하였다.
그동안 나는 기술이 없어서 늘 기술자 형들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그날 나는 중요한 사실을 께달았다.
나는 이미 기술자 없이도 혼자 제품을 만들고 손님을 응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엇던 것이다.
그날의 경험은 나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다.기술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미
한 사람의 기술자로 성장해 있었다.
비록 한 달에 15000원이라는 적은 급여였지만,나에게는 그 어떤 큰돈보다 값진 돈이었다.나는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기술을 배우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았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일이 끝난 후에도 기술 서적을 보가나 선배 기술자들에게 질문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갔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도 많았지만,기술만 배우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견뎌냈다.
나는 언젠가 훌륭한 기술자가 되어 성공하겠다는 꿈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