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 가람 이병기의 일기가 발간이 되면서 최익한과의 교유가 크게 드러났다. 최익한에게 이병기와의 교유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병기는 최익한보다 6세 연상으로, 두 사람 모두 한학을 공부하다가 근대학문으로 전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익한에게 이병기는 한학의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우리 말과 글, 그리고 국학에 대한 관심을 높여준 ‘스승격 동학’과 같은 존재였다. 반면 이병기는 최익한의 한문학 조예에 대해 "들을 만한 것이 많다"며 찬탄하는 등 서로 학문적으로 깊이 교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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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민족 종교인 대종교를 매개로 더욱 각별해졌다. 특히 이병기는 최익한의 권유로 대종교(한배님 가르치는 길)에 입교할 정도로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두 사람이 중국 중심의 사유 체계에서 벗어나 조선의 주체성을 찾는 '조선학 운동'의 정서적 기반을 공유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최익한이 한시를 넘어 우리 말로 된 시조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이병기의 영향이 컸다. 이병기는 최익한이 지은 초기 시조에 대해 "조사(措辭)는 서투르나 정취는 얻었다"며 비평해주기도 했고, 최익한이 일본 유학을 떠난 뒤에도 시조를 주고받으며 문학적 교류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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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병기는 최익한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인 정인보, 권덕규, 홍명희 등과 교유할 수 있도록 돕는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최익한이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 직업이 없어 방황하던 시기에, 이병기를 매개로 형성된 학자들과의 네트워크는 그가 훗날 국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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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고비를 함께한 진정한 우정: 이병기의 일기인 《가람일기》는 최익한의 삶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이병기는 최익한이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 직접 출석하여 그를 응원했고, 그가 징역형을 선고받자 "눈물이 쏟아진다"며 애통해했다.또한 최익한이 옥중에 있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시와 시조를 지어 보내는 등 정서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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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병기와의 교유는 최익한에게 전통적 지식인에서 근대적 국학자이자 사회주의자로 변모해가는 격동의 시기를 버티게 해준 정신적 지주이자, 그의 학문적 성과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자양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