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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의 삶과 글

질문 7- 동경유학은 최익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작성자송찬섭|작성시간26.06.13|조회수13 목록 댓글 0

최익한에게 1925년 동경유학을 하였다. 이미 29세 유학생으로는 꽤 많은 나이였지만 그는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꿈꾸었던 듯하다. 그와 면우 문하의 동문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하였던 김규열의 영향이었을까? 동경유학은 전통적 유학자이자 민족주의 지사에서 근대적인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이론가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사상적 전환점이었다.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보자.

1. 사회주의자로의 비약적 도약과 이론적 무장을 하였다. 동경유학은 최익한이 '공자의 제자'라는 구학문의 틀을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라는 '신학문'을 수용하여 당대 최고의 사회주의 이론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학문적 변신을 하게 되었다.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근대 사회과학을 접했으며, 이후 대학을 그만두고 마르크스 학설에 전공하여 '설전필전(말과 글의 싸움)에 당할 자가 없는' 독보적인 이론가로 평가받았다. 특히 처음에는 와세다대학의 정치학 교수 오오야마 이쿠오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당시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거두였던 후쿠모토 가즈오의 이론(후쿠모토이즘)에 심취하여 '방향전환론'을 주도하는 당의 핵심 이론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2. 동경은 실천적 혁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단순히 이론 연구에 그치지 않고, 동경을 거점으로 재일 조선인 운동과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잇는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재일 조선인 사회주의 단체인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여 이론을 담당했으며, 기관지인 <사상운동>과 <대중신문>의 발행인 및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민중 계몽과 전위당 결성에 힘썼다.

 

그는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 일본부 조직부장을 맡았는데 이때 한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동경에서 코민테른 대표 존 페퍼를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 자금을 수령하고 지령을 전달받는 등 조선공산당 내에서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3. 민족협동전선(신간회) 운동의 이론적 뒷받침 역할을 하였다. 최익한은 동경에서 '사상단체 해체론'을 주장하며, 분파 투쟁을 청산하고 민족적 단일당인 신간회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신간회 동경지회의 간사를 맡았으며, 그의 주장은 좌우합작 운동으로서 신간회 결성에도 도움이 되었다.

 

4. 훗날 국학 연구(실학)의 방법론적 기초가 되었다. 동경에서 습득한 경제학 및 사회과학적 방법론은 훗날 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며 조선의 실학 사상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유학적 기반 위에 동경에서 배운 서구적 논리를 결합하여, 다산을 세계사적 시각을 갖춘 서학자로 규정하는 등 국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요컨대 최익한에게 동경유학은 전통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사적 시각을 갖춘 근대 지식인이자 혁명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공간이었으며, 그의 평생 업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국학 연구를 관통하는 핵심 자양분을 얻은 시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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