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한은 1897년에 태어나서 1957년까지 활동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되 활동은 1957년까지 나타나니 그까지가 일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만 60년의 세월이었다.
앞서 서술했듯이 최익한이 1925년 일본 유학을 기점으로 사회주의자가 된 후, 1928년초에 체포되었으니 여기까지가 전반기의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반기의 마지막 3년의 삶을 정리하자면 사회주의사상의 이론 정립, 언론 및 출판, 그리고 조선공산당 내 핵심 간부로서의 조직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사회주의 사상 수용과 이론적 활동
일본 유학과 일월회 참여: 1925년 2월 동경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급속도로 사회주의 사상가로 변모했다. 그는 곧바로 재일 조선인 사회주의 단체인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동료는 그를 마르크스 학설을 공부하여 '설전필전에 당할 자가 없는' 독보적인 이론가로 평가하였다. 설전은 말발, 필전은 글발을 가리킨다.
특히 일본 마르크스주의 거두 후쿠모토 가즈오의 영향을 받아,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방향전환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당의 핵심 이론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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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론 및 출판 활동
기관지 발행 주도: 일월회의 기관지인 《사상운동》에서 이론 부문을 담당했으며, 1926년 6월 창간된 《대중신문》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데 힘썼다. 이때 쓴 글로서 1926년 《사상운동》에 <맑스 유물론적 변증법의 개설>을 실었으며, 체포 직전인 1928년 초에는 《조선일보》에 1927년 한 해의 사회운동을 결산하는 <1927년 조선사회운동의 빛>을 연재하여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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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공산당 내 핵심 조직 활동
당 간부 역임: 1927년 4월 조선공산당 일본부를 재조직하고 조직부장을 맡았다. . 이후 1927년 9월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고, 11월에는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어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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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연결과 자금 수령: 1927년 11월, 코민테른 대표인 존 페퍼(John Pepper)를 동경에서 비밀리에 만나 대회 준비 자금(약 2,800~3,300엔)을 수령하고, 신간회를 무산자 중심으로 강화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전달받아 국내로 운반하는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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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족협동전선(신간회) 및 사회단체 활동
중앙협의회 상설화 저지: 1927년 5월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서울파가 주도하던 협의회의 상설화를 반대하는 '상설무용론'을 제기했다. 그는 대신 신간회와 같은 협동단일정당 아래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다수의 공감을 얻어냈다. 신간회 동경지회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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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1926년 11월 결성된 사상운동 단체인 신흥과학연구회를 주도하며 사회주의 사상의 학술적 심화를 꾀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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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은 1928년 1월 동경에서 일본공산당 대표 사노 마나부와 회견하는 등 마지막까지 활발히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2일 조선공산당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때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었다.
돌이켜보면 최익한이 1925년 2월 11일 동경으로 떠난 뒤 1928년 2월 2일 체포되었으니 만3년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여러 차례 동경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물론 울진에도 가끔 들렀으니 그것까지 포함한다면 매우 활동적이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일본에서도 동경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고 일본내 노동문제에도 관심을 가졌기에 오사카 등 여러 지역을 다니지 않았을까 한다.
아무튼 크게는 서울과 동경... 오가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비용도 만만찮을텐데 고학생으로서 어떻게 감당했을까? 최선의, 그리고 능력을 다해 활동해 나갔기에 이겨내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