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한이 공개적으로 가장 뛰어난 활동을 한 것은 1927년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 창립대회라고 할 수 있다. 최익한은 정우회(正友會) 측의 입장을 대변하며, 서울파 잔여세력이 주도하던 협의회의 상설화 시도를 저지하고 신간회 중심의 민족협동전선을 옹호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회의는 종로 YMCA 강당에서 5월 16일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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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설무용론(常設無用論) 제기: 1927년 5월 16일, 최익한은 창립 준비위원회에서 규약을 통과시키려 할 때 "사상단체는 이미 그 임무를 다했다"며 중앙협의회를 상설기관으로 두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배치된다는 '중앙협의회 상설무용론'을 제기했다.
양당론(兩黨論) 비판과 협동단일정당 강조: 그는 무산계급 정당과 민족주의 정당이 대립해야 한다는 서울파 전진회(前進會)의 양당론을 비판했다.
대신 조선의 특수한 사정(일제 지배)을 고려할 때, 반자본주의의 두 요소(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가 신간회와 같은 협동단일정당 하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을 통한 임시기관화 관철: 최익한은 중앙협의회가 900개 단체를 포함하더라도 실질적인 지도 역량이 부족하며, 조선의 현실에 불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여 다수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 결과, 협의회는 상설기관이 아닌 '임시회합'의 형태로 운영하기로 가결되었다. 의안 작성 주도: 최익한은 이우적 등과 함께 의안 작성위원 7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앞서 최익한이 말하는 '상설무용론(常設無用論)'의 구체적인 근거는 크게 조직적 역량의 문제와 조선의 특수한 현실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실질적인 지도 역량의 부재: 최익한은 어떤 사회단체의 상설 최고기관이 되려면 단순히 회원 수나 단체 수가 많은 것이 아니라, 모든 세포단체를 지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중앙협의회에 900여 개 단체와 40만 명에 가까운 회원이 참가하더라도, 그 숫자만으로는 조선 운동을 지도할 역량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둘째 조선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 조선 민족은 일본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조선의 민족운동은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가진다.
. 따라서 조선 현실에서 민족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산계급과 민족주의 정당이 대립하는 '양당론'보다는 신간회와 같은 협동단일정당 하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상단체는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았다. 그는 세계 정세와 조선의 형편을 고려할 때, 사상단체는 이미 그 임무를 다했다는 것이다. 운동의 방향이 전환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강령을 고수하며 중앙협의회를 상설기관으로 두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원칙에도 배치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리고 민족단결전선으로의 집중을 주장하였다. 최익한은 별도의 상설 기구를 만들기보다는 민족단결전선을 결성하여 그 속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고 이론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결국 그의 주장은 중앙협의회를 상설화하려는 서울파 잔류세력의 시도를 저지하고, 신간회를 중심으로 전위적 역량을 집중시키려는 전략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논리적인 발언은 많은 참석자의 공감을 얻어, 결국 중앙협의회를 상설기관이 아닌 '임시회합' 형태로 운영하기로 가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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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관철동 경상여관에 모여 '일반정세 보고', '파쟁의 청산', '전민족적 단일당 결성' 등 11개 항목의 새로운 토의안을 작성하며 회의의 방향을 주도했다.
일제의 집회 금지와 중단: 최익한 등이 작성한 의안이 정치적인 성격이 짙다는 이유로 일제 종로경찰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결국 5월 18일 경찰의 강제 해산 명령으로 중앙협의회는 좌절되었다.
최익한은 이 과정에서 단순한 참석자를 넘어 반대 의견 개진, 논리적 토론, 의안 작성 등 창립대회 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한 논객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