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월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한 최익한은 일제 말기인 1945년 해방 전까지 주로 '국학(國學)'을 주제로 방대한 양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실었다.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사회주의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전통 유학의 조예와 근대 사회과학적 소양을 결합하여 우리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는 데 매진했다. 주요 집필 주제와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다산 정약용 연구와 실학
최익한의 이 시기 활동 중 가장 독보적인 성과는 실학 연구, 특히 다산 정약용에 대한 분석이다. 이는 위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내용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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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역사 및 문화유적 고증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기의 역사와 유물을 다루었다.
역사 해석: 정몽주의 공적, 여말선초의 교체기적 의미(「麗李 交替의 歷史的 意義」), 원운곡의 비전 등을 주제로 글을 썼다.
유물 및 유적 탐구: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연대 추정 및 고증, 광주 객산동 불상 탐방기 등을 통해 실증적인 국학 연구를 보여주었다.
비교 역사: 「역대사담」 등을 통해 중국의 역사(원, 청 등)를 다루며 우리 역사를 유라시아적 관점에서 조망하기도 했다.
3. 사회정책 및 구제 제도사
다산의 황정(구휼 정책)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재해와 구제 정책을 통사적으로 정리했다..
「재해와 구제의 사적 단편관」: 1940년 《동아일보》에 27회 연재한 글로, 고대부터 조선까지의 구제 제도를 정리했다. 이 글들은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사회정책사인 『조선사회정책사』 발간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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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향토문화 및 민속
1938년 《조선일보》의 향토문화 조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문화를 발굴했다. 울진, 삼척, 박천, 구례 등 4개 지역을 직접 답사하며 향토 유적과 가요(구례의 '녹두새' 등)를 채집하여 40회에 걸쳐 연재했다.
5. 한문학, 시조 및 교육사
한시와 시조: 아들 최재소의 옥사를 슬퍼하며 지은 「곡아이십오절(哭兒二十五絶)」이라는 만시를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또한 「한시만화」를 연재하고 《동아일보》의 한시 심사를 맡기도 했다.
교육사: 잡지 《춘추》에 「조선 과거 교육제도 소사」를 실어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발전 과정을 정리했다.
.우리 말: 잡지 《정음》에 「우리 말과 정음의 운명」 등을 기고하며 국어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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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최익한은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 말기까지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실학 연구, 한국 통사적 관점의 사회정책 및 교육사 연구, 그리고 향토문화 발굴 등 여러 축으로 왕성한 집필 활동을 전개했다. 결과적으로 일제의 지배에 맞서 조선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학문적 대응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