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1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예수님 안에 머무는 일상. イエス様の内にとどまる日常。
본문: 요한복음 15장 1절~10절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 「わたし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わたしの父は農夫である。、2. 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がら、実を結ばない枝はみな、父が取り除かれる。しかし、実を結ぶものはみな、いよいよ豊かに実を結ぶように手入れをなさる。3. わたしの話した言葉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既に清くなっている。4. 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さい。わたしもあなたがたにつながっている。ぶどうの枝が、木につながっていなければ、自分では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ければ、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5.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その枝である。人がわたしにつながっており、わたしもその人につながっていれば、その人は豊かに実を結ぶ。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できないからである。6. 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枝のように外に投げ捨てられて枯れる。そして、集められ、火に投げ入れられて焼かれてしまう。7.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つながっており、わたしの言葉があなたがたの内にいつもあるならば、望むものを何でも願いなさい。そうすればかなえられる。8. あなたがたが豊かに実を結び、わたしの弟子となるなら、それによって、わたしの父は栄光をお受けになる。9.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てきた。わたしの愛にとどまりなさい。10. わたしが父の掟を守り、その愛にとどまっ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掟を守るなら、わたしの愛にとどまっていることになる。
예수님과의 행복한 동행의 연습을 위한 시리즈 설교 세 번째 주일의 말씀을 나눕니다. 이제까지 함께 나눈 말씀의 핵심을 정리해 보면, 첫째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자들 안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재하고 계십니다. 둘째, 내 안에 임재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생활의 처음과 끝이며, 전부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주님 안에 머물며 거하는 삶’에 대해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매주 거의 유사한 주제와 메시지로 말씀을 나누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처럼 여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과 내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굳이 차이를 말한다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생각의 차원’이라면, 주님 안이 거하는 것은 ‘순종’, 즉 ‘행실(언행)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요. 지식적인 믿음과 의지적인 믿음으로 구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지식적인 믿음이란 어떤 정보를 신뢰할 수 있다거나, 신빙성이 있다고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돈의 가치나, 가족의 사랑에 대해 자연스레 지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의 값어치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돈을 사용할 수 없지요. 자기 집에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가족은 나를 해치거나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그래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은 정보를 신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지식적인 믿음은 자연스럽게 의지적인 믿음으로 연결됩니다. 돈의 가치를 믿으면, 그 믿음에 의지하여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돈을 들고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이지요. 만일 돈의 가치는 알지만, 그 돈으로 물건을 살 의지나 행동이 없으면 돈의 가치를 체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족이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정보를 머리로는 믿지만, 가족에게 자신의 몸을 의지적으로 맡기지 못하면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작은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 입니다. 아시다시피 어린이집에 직접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합니다. 어떤 날은 아이들이 어린이집 운동장에서 놀면서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 저 멀리서 부터 아빠를 확인하고 저에게 달려옵니다. 그리고 제 앞에 와서 저의 가슴팍을 향해 점프를 하지요. 그럼 제가 받아서 안아줍니다. 어떻게 아이가 저에게 점프를 하며 안길 수 있지요? 제가 아빠인 것과 아빠는 자기를 안아 준다는 정보를 알고 믿는 것이지요. 그와 더불어 정보를 의지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말이지요.
이처럼 믿음이란 우리의 생각과 일상의 언행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신다고 지적으로 믿으면, 주님을 바라보고자 하는 행실과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의지적인 행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현실의 범주에서 그리고 영생의 영역에서 어떤 유익함이 있고, 능력이 되는지 지난 주일에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드리는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주님께 연결되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 안에 거하는 것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의지적인 행실에 속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가치관과 목표를 주님께 맞추는 행실이라면, 거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지침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목표를 삼고 바라보는 바를 자신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지요.
자동차에 있는 내비게이션을 예로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차를 운전하지요. 실제로 운전하는 것을 주님 안에 거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눈치를 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천 번, 만 번을 들어도 그 말씀에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겪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도, 실감나게 체감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특별히 오늘 본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표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7절에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께 연결되는 것은 1차적으로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모두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 가르침을 모두 암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언제나 어디서나 그 가르침이 바로 바로 떠오르고 순종하게 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힌 간증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율법에 대하여 묻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29-31)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핵심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일서 4:16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이 구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를 사랑하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주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지요.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또,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의 저자인 로렌스 수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과 친해진 뒤에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귀히 여기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생각합시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도, 주님 안에 거하는 것도 모두 순종인데요. 사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계속 생각하고, 그 생각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신 이웃까지도 사랑하려는 지경에 서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사랑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완성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피곤하고 지친다고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왜 일까요? 자기가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피곤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완성하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선택했기에 지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지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사랑을 건강하게 쓸 때에만 그런 능력이 샘솟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지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늘 새로운 힘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에너지가 넘치는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 보시면 사랑의 원초적인 능력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받게 되는 사랑의 힘으로 사랑하게 되면 피곤할 수 없습니다. 지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너지가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할 힘을 끊임없이 주시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웃과 타인을 사랑하도록 필요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었던 예화입니다. 이 목사님과 친한 어느 미국인 목사님이 한국에서 딸을 입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입양된 아이에게 소아마비 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은 건강한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인데 말이지요. 의아한 이 목사님께서 물었답니다.
‘어떻게 당신은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할 수 있었습니까?’
그 때 미국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하지요.
“주님은 나와 같은 죄인도 양자로 삼아 주셨지요. 이렇게 미소가 아름다운 아이를 입양하는데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예화처럼 우리가 모두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힘,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2-4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2-4)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표현 그대로의 “모든 것”을 뜻합니다. 시간적으로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과거의 나의 모습과 지금의 나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나의 모습까지도 주님께서 모조리 다 알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현재 어떤 마음의 상태에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까지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어떤 평가나 지적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녀가 회복해야 할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예배의 회복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가 예배의 영적인 매력을 체감할 수 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공간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곳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멋지고 큰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도 그리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말씀은 모든 곳에 계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도 하늘로 덮혀 있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시 139:8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8)
스올은 땅의 가장 깊숙이 숨겨진 곳을 뜻하며, 동시에 가장 어둡고 사악한 멸망의 일들이 일어나는 저주받은 곳을 상징합니다. 보통 음부라고도 번역이 되는 곳인데요. 지옥과 마찬가지의 장소입니다.
혹시 삶이 지옥처럼 느껴진 때가 있습니까? 그 곳에도 주님은 함께 계십니다. 삶이 천국처럼 느껴집니까? 그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오직 우리는 삶의 모든 형편에서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주된 사명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사도 바울은 ‘비천함’에도 ‘풍부함’에도 모두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두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가난하거나 재산이 부족하여 삶이 비참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도 마음이 빼앗기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려운 형편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삶의 형편이 지나치게 넉넉하면 여러가지 못된 행실의 유혹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갖고 있으면 마냥 행복할 것 같지만, 갖고 있는 만큼 불안함에 시달리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인생의 아이러니이지요.
우리에게는 불안과 염려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답이 빌립보서 4:13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승리 선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은 비참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입니다.
불안함에 휘둘리지 않고 든든히 서는 능력입니다.
그 어떤 유혹도 이겨내는 영적인 에너지입니다.
이런 능력이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는 자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의 삶은 곧 천국의 삶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곳이 곧 하늘이라고 솔로몬이 고백하였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하늘이고,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천국이라고도 말하지요. 하나님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 하나님의 통치가 충만한 곳이 바로 천국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천국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삶을 우리는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은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또한 영생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에 영원히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더욱 명확하게 말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영생을 산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삶입니다. 능력의 삶입니다. 활력의 삶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삶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삶입니다. 영생의 삶입니다. 인생을 살지만 영생을 살고 있는 능력이 넘치는 믿음의 삶이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인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일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가장 복되고 풍성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받은 가장 큰 복이 곧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현실이 더욱 크게 느껴지고 보일 지라도 그것은 시간과 함께 변화되고, 결국 사라질 안개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안개에 비치는 허상이 걷히고 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뜻이 완성된 실재의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마주하게 될 날이 옵니다. 그 때 가서 크게 고함치며 후회하면서 온갖 몸부림을 치며 탄식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주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에 순종함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당장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휘말리지 않고, 보이지 않으시지만 내게 손을 내밀고 계신 주님을 손을 붙들고 동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