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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설교원고

2019년 1월 27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사도의 소원.

작성자소대섭 목사|작성시간19.02.09|조회수38 목록 댓글 0

2019 1 27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사도의 소원. 使徒

본문: 로마서 1:8-15

1: 8 ○나는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은, 내가 그 아들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충심으로 섬기는 분이시기에, 내 마음 속을 알고 계십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하며, 10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여러분에게로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11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신령한 은사를 좀 나누어주어,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이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가려고 여러 번 마음을 먹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열매를 거둔 것과 같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것을 좀 거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14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15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8.まず初めに、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あなたがた一同についてわたしの神に感謝します。あなたがたの信仰が全世界に言い伝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9.わたしは、御子の福音を宣べ伝えながら心から神に仕えています。その神が証ししてくださることですが、わたしは、祈るときにはいつも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起こし、10.何とかしていつかは神の御心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へ行ける機会があるように、願っています。11.あなたがたにぜひ会いたいのは、󰡒󰡓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力になりたいからです。12.あなたがたのところで、あなたがたとわたしが互いに持っている信仰によって、励まし合いたいのです。13.兄弟たち、ぜひ知ってもらいたい。ほかの異邦人のところと同じく、あなたがたのところでも何か実りを得たいと望んで、何回もそちらに行こうと企てながら、今日まで妨げられているのです。14.わたし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恵のある人にもない人にも、果たすべき責任があります。15.それで、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告げ知らせたいのです。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지요. 오늘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사도에게도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먼저, 그리고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기도로 무장하는 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소원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소원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직접 연결되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사도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계획과 바람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도 이와 같은 소원으로 기도제목을 삼는다면 그 소원은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믿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자녀도 함께 원할 때 부모의 기쁨은 이루다 표현할 수 없지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인 이삭의 아내가 될 여인을 가나안 땅의 이방인 가운데에서가 아닌, 자신의 고향에서 찾기를 원하였습니다. 이 소원을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의 고향 땅에 도착하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종의 기도가 다 마치기 전에 그 앞에 리브가가 나타납니다(24장의 내용).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는 그 응답이 분명하고 신속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도의 소원에 합당한 기도를 주님께 드릴 때 우리도 그 응답을 반드시 받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르쳐 주시는 사도의 소원은 세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보다 근본적인 소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11, … 여러분(로마의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좀 나누어주어, 여러분(성도들)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열매를 거둔 것과 같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것을 좀 거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첫째 성도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굳세게 한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굳세게 한다는 것을 견고하게 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어 성경은 힘이 되기를 원한다고 표현하지요. 원어 성경의 뜻을 보면 고정시켜 흔들리지 않게 하겠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신령한 은사를 통해서라고 표현합니다. 말 그대로 영적인 은사를 뜻합니다. 은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은사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분명하게 밝힌 내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내용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령한 은사의 종류는 고전 12장에 잘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면 되구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7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령한 은사를 통해 성령이 나타나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로가 유익하게 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은사나 성령의 능력을 통해 다른 지체를 곤경에 처하도록 하거나, 혹은 다른 지체에게 손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표적이 나타나는 것은 말세에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꾸밀 수 있다는 예언이 적중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도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은사는 우리의 믿음이 더욱 분명하고, 우리의 공동체가 더욱 하나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원하는 첫번째 모습은 신령한 은사가 나타나게 되어 교회 공동체가 미혹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게 서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적이나 표적이 나타나서 공동체가 혼란에 빠지거나, 혹은 분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그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거두어 가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더 큰 기적을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서로의 믿음으로 격려를 받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서로 격려를 받는다는 말씀은 심파라클레오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접두어 파라클레오로 이루어진 단어인데요. 다시 파라클레오파라칼로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파라칼로는 권면하다, 소원을 빌다, 위로하다는 등의 뜻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말하는데 이 보혜사가 파라칼로에서 파생된 파라클레토스라고 말하지요.

이 과정을 풀어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성도인 우리가 현실에서 순종하는 것이 믿음으로 서로 격려하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 10주년 성회에 오셨던 유 목사님의 일기에 우리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기도하시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으신 감동을 짧게 쓰셨습니다. 전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구절에서 주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의 10년 안에 기쁨과 감사, 그리고 좌절과 낙심도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들을 하나님께서 주목하셨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구절입니다. 성회 후에 장로님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교회에 오셔서 저희 부부를 위해서 항아리기도를 해 주시며 같은 내용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일을 주목하고 계심을 잊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행동을 가볍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제 멋대로 하고 싶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목하신다는 것이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도 위로하시고, 귀한 손님을 통해서도 위로하셨습니다.)

 

세번째로 다른 이방인들에게서 얻은 열매를 로마의 성도들에게서 얻고 싶은 소원입니다. 성경에 열매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특히 알곡이나 무화과 열매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알곡에 관한 비유에서는 알곡과 가라지, 혹은 알곡과 쭉정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분별해야 할 것은 첫째, 알곡과 가라지는 전혀 다른 종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알곡의 씨앗을 뿌렸지만, 밤에 악한 이들이 가라지라는 전혀 다른 종자를 뿌렸지요. 마지막에 알곡들 사이에 끼어 든 가라지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 ‘쭉정이알곡의 관계는 같은 씨앗이지만, 알곡을 맺지 못한 껍데기만 남은 것을 쭉정이라고 말하지요. 따라서 신앙생활의 겉모습만 지킨다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껍질만 남은 쭉정이의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든 쭉정이든 분명한 것은 꽉찬 알곡의 열매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분명한 앨매가 맺는 알곡 신앙이 되기를 소원하고 또한 소망합니다.

알곡으로 열매 맺는 신앙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의 씨앗 비유를 가르쳐 주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러 가서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을 자갈밭에, 어떤 것은 가시밭에, 어떤 것은 좋은 밭에 떨어졌다고 하지요. 좋은 밭에 떨어진 것 외에는 모두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바로 악마에 빼앗겨버리는 길가와 같은 마음, 들을 때는 좋게 여기고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지만 곧 시련이 오면 포기하는 마음, 말씀을 듣고 나름 신앙생활을 하지만 일상생활의 당면과제에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밭은 열매를 맺습니다. 최소 30, 그리고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저나 여러분에게 주어진 과제나 짐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할 때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먹을 때에도 마실 때에도 대화할 때에도 버스를 탈 때에도 직장에서 낙심할 때에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신다면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신 열매는 복음을 믿고 예배하는 우리 자신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통해서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입니다. 모두 외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가 지금 나를 통해 맺히고 있음을 인정하고 내게 주신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맺어집니다. –주님 안에 사람은 바뀐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바뀝니다.

 

이 세가지 소원이 이뤄지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보다 근본적으로 바라던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로마의 성도들과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소명의 사람들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입니다. 죄를 회개하여 구원받아 오늘 당장 죽더라도 천국에서 깨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들입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로마의 성도들은 그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전 세계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믿음이 전세계에 소문이 날 정도라면 우리가 사는 하치오지시는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러 오는 이들을 통해 육신적으로도 흥왕할 것입니다. … 사람들이 연휴가 되면 세계 각지로 여행을 갑니다. 어떤 이는 뉴욕으로, 어떤 이는 파리로, 어떤 이는 방콕으로, 어떤 이는 시드니로, 어떤 이는 LA, 어떤 이는 도쿄로 오겠지요. 그런데 하치오지로는 잘 안 옵니다. 일본에서 가장 경사가 높은 케이블카가 있는 다카오 산이 있는데요 말입니다. 왜죠? 잘 모르니까요

로마에 있는 신앙인들의 믿음은 로마 제국 곳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모든 이방인, 유대인 성도들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그 정도로 믿음생활에 자부심이 있었던 성도들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매일 그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간구한다고 하시지요. 왜 일까요?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제 끝난 것일까요? 아니요. 실은 그 때부터 우리의 전투는 시작됩니다. 무슨 전투일까요? 바로 구원받은 자의 아름다운 삶을 지켜야 하는 전투가 시작됩니다. 물론 우리가 내어주지 않는 이상은 사탄이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방심하면 우리의 구원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더 심하게 타락할 수도 있다(벧후 2: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은 명확합니다. 그 능력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구원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방심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선물 받는 것은 어쩌면 상대적으로 수월한 것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주님을 부르고 믿고 따르면 되니까요. 그게 뭐 어려운 일입니까? 하지만, 구원받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것에는 만만치 않는 노력이 들어갑니다.

시간사용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살았던 모습을 제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보다 구원을 지키는 것에서 실패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받은 구원을 지키는 것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자신의 몫도 있기 때문이지요. 하늘에서 은혜의 생수가 쏟아져도 그 생수를 받아 마시려면 자신의 그릇이 필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씨앗의 비유처럼 우리의 삶에 자갈밭과, 가시밭이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과 우리에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지금 함께 동행하며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다시금 전하겠다고 말하는 복음은 불신자가 구원받은 속죄의 복음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의 삶을 지켜가는 임재의 복음입니다. 물론 속죄의 복음이나 임재의 복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내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산다는 것을 뚜렷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자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던지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군에서 제대하고 안산에 있는 태평양 호텔이라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단돈 3만원에 욕심이 나서 제 양심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거슬렀습니다. 주님께서 양심으로 말씀하신 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감사하게도 그 일로 호텔 부장님은 저를 절도죄로 경찰에 넘기지는 않으셨습니다. 걸렸지만, 곧 사죄하고 돈도 다시 제자리에 돌려 놓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그 호텔에서 알바기간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야 할 때 제 양심은 호텔에서 요구하는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양심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저처럼 여러분도 어떤 때는 양심에 순종하여 승리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실패하여 낙심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승리할 때나 실패할 때나 오직 우리는 지키시는 것은 우리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불신자가 구원을 받는 것도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가 믿음과 구원의 삶을 지키는 것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말씀은 속죄의 십자가에 나는 이미 죽었고, 부활의 예수님과 나는 영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은 그래서 불신자나 성도 모두에게 주님 오실 그 날까지 계속 전해져야 하고, 고백 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곧 우리의 소원을 그리스도의 소원과 일치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과 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원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구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근거로 서로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셋째, 열매 맺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가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오직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간구하는 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직접적인 돈벌이도 안 되고, 취업을 위한 스펙 안 되고, 진학을 위한 성적도 안 되고, 질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은 안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위해 구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능력을 체감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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