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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작성자石박사|작성시간23.07.13|조회수110 목록 댓글 0

《기도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이따금씩 일부러 바라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임종수 목사님이 그린 그림인데, 한 사람이 엎드려 있습니다.
엎드린 사람이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고 대번 느끼는 것은 선입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림을 가만 살펴보면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처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엎드린 사람은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쌉니다.
이성선 시인은 ‘별을 보며’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자격이 없어 얼굴을 땅에 대는 일, 그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일 것입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원하는 것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듯이 협상을 벌이거나 타협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열심 때문에 그것을 잊을까,
자기의 눈을 자기의 두 손으로 가리는 모습이 기도에 가깝습니다.
얼굴의 다른 부분은 다 가려져 있지만 한 곳은 다릅니다. 귀입니다.
귀는 가려져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온갖 소리에 귀를 막는 것이 기도이지만, 하늘 음성을 향해서는 귀를 여는 것이 기도입니다.
세미하게 다가오는 음성을 듣는 시간이 기도일 테니까요.
조금은 눈여겨보아야 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엎드린 사람의 발입니다. 노루의 짧은 꼬리처럼 엎드린 꽁무니에 발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발이 맨발입니다.
기도는 맨발로 엎드리는 것입니다.
신고 있던 신을 벗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입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신을 벗고 맨발이 된다면 그 자리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저곳이 무릎쯤 아닐까 싶은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무릎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단순히 신체의 위치 때문이 아닙니다.
그림 속 무릎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 꿇는 것이 아니어서 굳은살이 박이고 박여 마침내 낙타 무릎 되는 것이지요.
엎드린 모습이 기도하는 모습이라 여겨지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엎드린 사람의 모습은 마치 짐승처럼 여겨집니다.
잔뜩 웅크린 짐승이 떠오릅니다.
기도란 내가 짐승처럼 살았음을 자인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나의 비참함을 겸허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떠올렸기 때문일까요,
겹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엎드린 사람의 온몸에는 곰팡이가 피어난 듯싶습니다.
덕지덕지 누더기 모습입니다.
내가 썩었다는 것, 내가 누더기나 구더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아프게 인정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 마음은 엎드린 자 만이 가질 수 있을 터이고요.
기도하는 사람이라 여기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엎드려 있는 모습이 마치 산과 같습니다.
나무도 자라고, 골짜기도 있고, 바위들도 보입니다. 기도란 산이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신앙 여부를 떠나 마음의 고요와 중심을 되찾는 시간,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아름답습니다.

[글쓴이: 한희철목사/ 정릉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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