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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지기

작성자石박사|작성시간23.11.16|조회수83 목록 댓글 0

《유쾌하게 지기》

독일 친구들과 한국을 방문했던 막내아들이 친구들이 한 주 먼저 돌아간 뒤 탁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되면 탁구를 치기로 했던 터였습니다. 막내는 독일에서 시간이 될 때면 탁구를 칩니다. 회원들 중에서 자기가 제일 어려 봉사 삼아 한다며 지역에 있는 탁구클럽 회장 일도 맡고 있습니다.

막내가 탁구를 열심히 쳤던 데에는 운동이나 취미 외에도 한 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다녀가며 나와 탁구를 쳤는데 아들이 지고 말았습니다.
막내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아빠는 평소에 탁구도 전혀 치지 않는데 자기가 지다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니 막내로서는 이번에 나오며 은근히 칼을 갈고 나온 셈이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꼈던 것은, 나올 때 아예 자기 라켓을 챙겨 나왔기 때문입니다.

동네에 있는 탁구장을 찾아갔습니다.
실은 동네에 탁구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분들이 탁구 레슨을 받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는데, 그들의 실력이 상당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잠깐 몸을 풀고 시합을 했습니다.
11점 5세트 경기였는데 시합을 하기 전부터 내심 고민을 한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기면 아들의 기를 너무 꺾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게임을 져주기식으로 하면 그건 게임이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나는 첫 세트부터 일방적으로 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서브 자체를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평범해 보이는데도 공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습니다.
3세트를 내리 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시작된 두 번째 게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두 게임을 내리 지자 아들이 라켓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아빠가 탁구장에 있는 라켓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기꺼이 아들의 라켓을 받아들었던 것은 아빠를 이긴 것이 라켓 때문이 아님을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이미 승패를 겨루기에는 실력 차이가 크게 났습니다. 

역시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라켓을 바꿔 들고도 졌습니다.
총 12세트 중 나는 겨우 한 세트를 건졌을 뿐입니다. 게임이 일방적으로 끝난 것이 마음에 걸렸을까요, 막내가 나를 위로했습니다.
“그래도 아빠 대단하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말로야 “이럴 수가!” “아빠도 연습을 해야겠는걸.” 하며 아쉬움을 표했지만, 실은 하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아들한테 진 것이 무엇 아쉽겠습니까?
오히려 막내아들이 아빠를 넘어선 것이 흐뭇하고 기분 좋았습니다. 

어디 탁구뿐일까요, 지금의 내 나이는 지는데 익숙해질 나이입니다. 탁구를 아들에게 유쾌하게 졌듯이 아웅다웅하는 일에서 벗어나 하나 둘 흔쾌함으로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깊어가는 가을엔 그걸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글쓴이 : 한희철목사/ 정릉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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